오래된 기사의 노래(中)

기린닭

240228

전편:

후편:

*투구 없는 와론 주의. 모브 등장 주의. 

지우스는 아직도 그 때를 기억한다.

위력정찰을 혼자 무리하게 감행한 건 새까만 닭이라고.

“네가 굳이 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 파견 가능한 인력이라면 너구리도ㅡ”

“아니.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 돼. 다른 기사에게 맡길 수는 없어.”

거짓말. 사실 그렇게까지 수색이 위험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피해갈 구석이 있는 수였다. 기린이 제안하는 작전에서 닭이 딴지를 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어쩐지 다른 의도를 숨기는 느낌이 났다. 닭은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며 고집을 피웠다. 기린은 그답지 않게 구는 닭 대신에 다른 이름을 파견서에 써서 올렸다. 제길. 이런 방법으로 그를 꺾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다툼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했다고.

지우스는 다음날 새벽 수도의 정문 앞을 나서는 기사를 막아서야 했다.

“어디 가는 거야. 새까만 닭?”

투구 속의 시선이 지긋이 이 편을 향한다. 

“할 일을 하러.”

오랫동안 피비린내를 묻혀온 듯한 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와론. 무슨 일이 일어나는 편이 더욱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사고 한 켠에 섬뜩한 불안감이 일어난다. 홀로 수도에 남은 지우스는 그가 떠나기 며칠 전부터 했던 말과 행적을 파헤치고 있었다. 

“닭님이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수색대가ㅡ”

와론.

너는 왜 사냥을 그만 두었지?

밤과 함께 날아든 전령의 말이 며칠째 이어진 불안감에 적중을 알린다. 기린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단호히 대꾸한다.

“아니, 기사를 수색할 수는 없어.”

“어쩔거냐, 기린? 판단은 네게 맡기겠다.”

달잔은 수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의 어깨 위에 무거운 완갑을 찬 팔이 얹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개를 들어올리면 그보다 머리 하나 위에 위치한 새카만 투구가 보일 듯 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무슨 말을 했지? 놓친 단서는 어디에 있지? 론누가 있는 새까만 닭이 추락사라니.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지우스는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진 탓에 놀라 한순간 잠에서 깨었다.

아침 볕이 새어들어와 작은 여관방을 비추고 있었다. 마주한 것은 낯선 방의 풍경이었고 어제 저녁을 먹었던 주점의 위층으로 아래에서는 희미하게 장사를 준비하는 분주한 가게의 소음이 울리고 있다. 그는 전날 밤에 보았던 환영을 떠올렸다. 그게 정말 새까만 닭이라면, 왜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그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숙취를 털어내고 졸음을 떨쳐내며 그가 꿈을 꾸었을 확률과 실제로 닭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취한 그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가능성을 저울질한다. 그것도 투구를 쓰지 않은 모습으로. 양 편의 원인이 모두 술에게 있다는 건 명확했고 몸은 무거웠어도 어제의 과음을 생각하면 양호했다.

투구 밑에 닭이 남겼던ㅡ것으로 추청되는ㅡ 메모는 기린과 그가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글자다. 당시에 이미 화장처리를 한 유해의 손가락의 상흔을 대조해볼 수는 없었으나 그런 날림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Epa. 41. D. 풀이조차 필요 없는 암호다. 적어도 지우스에게는 그랬다. Epa로 시작하는 장소에서 12월 41일. 혹은 마흔 한 번째 일요일의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말할 것도 없이 후자다. 기사들은 가끔 장소명을 알파벳으로 표기했기에 수도 인근의 작전 포인트 중 하나인 D-4-1 이냐는 의견도 제기되었지만 그거야말로 새까만 닭이 가장 쓰지 않을 방식으로 그가 수도 주변에 얼씬대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덮고 잔 탓에 이불 위에 흐트러진 긴 망토는 재질에 비해서 펄럭였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기사들의 보급품들보다 기장이 길어 전투에서 실용성도 낮고 요즘 기사들은 잘 입지 않는 과하게 착용자를 가리는 의복이었다. 그가 알기론 여직것 그런 긴 망토를 선호하는 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새벽녘에 내린 이슬이 마르고 밝은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메세타는 저녁 황혼에 담그고 있을 때와는 그 풍광을 달리해 새로운 인상을 남긴다. 으레 왕국의 변방들이 그러하듯이 저녁이면 닫히는 허술한 나무로 된 출입구에서 경비와 안내를 겸하는 별볼일 없는 마을지기는 교대를 하러 갔는지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고, 상거래가 활발했던 마을 답게 전체적으로 낡은 시가지에는 여관이나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주택 건물들이 꽤 자주 눈에 들어온다. 필시 시장의 중심이었을 공터에서 마을 깊숙한 곳으로 향할수록 곡창임이 분명한 구조물의 잔재들이 남아있다. 지우스는 어제 에일에 곁들어진 육즙이 훌륭하던 시골 특유의 소시지의 맛을 되새긴다. 늘 들고 다니는 질기고 딱딱한 염장고기과는 달리 뜨거운 불에 지방이 잘 녹아 부드러웠다. 그가 묵었던 여관조차 백 오십 년 이상을 버텨 두 세기 이상을 존재해온 곳이었다. 지우스는 스스로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찾아오면 감사했다. 노상 생활에 익숙해진 몸이라고 해도 가끔은 수도에서 먹는 식사다운 식사를 요구했다.

성둑의 젖은 처마가 낙수를 떨어트리는 곳에 삼삼오오 무리들이 늘어섰고 푸른색의 연기가 매캐하게 돌고 있다. 코에 휘감기는 익숙한 용연향을 맡으면서 경계 어린 기색에 지우스는 이곳에서 연초를 피우는 것을 포기한다. 하나뿐인 나무 대문을 지나쳐 나오자 숲에 도달하기까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메세타의 숲 속에는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모든 공간으로 울창한 수목들이 뻗었다. 지도에서 표시된 길이 끊어지고도 지우스는 한참을 더 등산을 했다. 마치 팔을 벌리고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 간혹 지나가는 방문객들을 수상쩍게 맞이하듯이 자란 참나무들과 그사람의 투구만큼이나 빛이 들지 않는 교목 그늘 속을 지나고 나서야 더이상 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 지워진 옛길이 길게 자란 풀숲 사이에서 나타난다. 길로서 기능하지 않아 숲의 일부가 된 오솔길을 밟으면서 그는 여전히 느릿한 속도로 숲 반댓편까지 이동했다.  

신록의 빛이 짙어 음영에 숲 그림자가 더하며 모자와 카키색 망토에 얼룩을 만들어 낸다. 나무 아래는 울창하다 못해 컴컴할 정도가 되었다. 갈림길에 거대한 바위가 인위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이끼로 여기저기가 물든 바위는 그 자리에서 보낸 세월이 적잖다. 모자 아래의 땀을 말리는 동안 접선을 약속한 이가 길의 다른 쪽에서 그에게 다가왔다.

“지령입니다.”

“세번째까지는 배치 부탁한다. 정찰력이 뛰어나 시야에 의존해 넓은 범위를 감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기척에 유의해줘. 나는 여기로 간다.”

지우스는 직원이 건넨 두루마리의 매듭을 끌러 그 자리에서 눈으로 주욱 훑다가 지도에서 점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에 깃든 확신은 한때 사령탑을 맡았던 이의 몸에 밴 태도다.

“이번에 세번째 마을로 갈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사정이 바뀌었어. 아무래도 바할라 근처까지는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네. 그리고 이것들…”

직원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배낭을 돌려 끝을 푼다. 별천지 측에서 보내온 보급품과 회로를 싼 꾸러미를 건네받고 내용을 적당히 확인한 지우스는 자신의 배낭에 그것을 구겨넣고 자필로 작성한 보고서를 전하면서 몇 가지 지시사항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더 나누었다.

“그럼 다음 접선은ㅡ”

수고하라는 인사를 나눈 직원은 왔던 길로 사라졌다. 아마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산 아래에 말을 묶어 두고 왔을 것이다. 굳이 까다로운 접선 장소를 고른 것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덜어진다.

 

Epa으로 시작되는 장소 중가능성이 있는 곳은 여섯 군데였다. 에팜. 에파라스. 에팬톤. 에파나. 에파이우. 이파스. 모두 새까만 닭과는 관련이 없는 지역이다. 인명일 경우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 외에도 대륙에 같은 철자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마을이나 기념물이 한두 개도 아니라는 문제가 있었고 한번 헛걸음할 때마다 일 년을 고스란히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어진 단서에 곧이 곧대로 따르는 성미도 아니기에 그는 별천지에 다른 추가적인 계책을 내놓았다. 바로 가짜 목격담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렇게 몇 해 전 새까만 닭 와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일곱 개의 나라에 골고루 퍼졌다.

소문의 목격지는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게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는 내내 심한 두통에 시달려 안색이 나쁜 달잔에게 익숙하게 일거리를 얹어주며 사무적인 말투로 보고를 올렸다.  

“새까만 닭을 사칭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가.”

“달잔님. 이미 알고 계셨군요.”

“자네가 자리를 비운 뒤에 특수기수가 걱정이 되는 군. 아직 수도에는 일손이 더 필요해.”

“이건 제가 아니면 못하는 일입니다.”

“…”

“기사시험에서 합격한 이들도 괜찮은 성적을 내고 있죠. 파이멜은 얼마 전에 새임무를 받았더군요.”

“그 아이들 ㅡ 아니지. 기사들이 널 스승으로 여기기라도 하나 보군.”

“전부가 그런 건 아니죠.”

“이보게 기린. 내가 자넬 책하는 걸로 보이나? 어지간한 애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특수 기수라는 건.”

 “달잔님.”

달잔의 예의 심각한 눈과 언제나 날 서있는 금색의 두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침침한 톤을 가진 그의 눈이 여전히 여러 해 전과 같이 수많은 말과 만일의 가정으로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토록 자신을 설득하는 기색을 지녔다는 걸 달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금안이 지니고 있는 망설임을 드러내 보일 때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지를 내보이길 마다하지 않을 때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기사들에게 너무 버거운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한낮의 태양이 오르자 절로 이마께에 땀이 배어나온다. 4주를 쉬지 않고 내리 이동하는 새 쥐가 갉아먹는 곡물처럼 체력이 조금씩 깎여가고 있었다. 지우스는 축축하게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소매로 한번 쓸었다. 허리를 숙여 돌의 냄새를 맡자 흙 섞인 내와 발에 방금 짓이겨진 신선한 목초 냄새가 올라오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울새나 뱁새가 우는 소리도 자연스러웠다. 외길에는 그 말고 다른 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만난 존재가 닭이든, 와론이든, 혹은 제 3의 그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든지 간에 추적이 한층 더 꼬여가고 있다. Epa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메세타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상한 경험을 했고 그의 경유지에 불과한 낡은 도시와 대륙 어딘가를 떠도는 특수한 여행객이 고른 경유지가 우연히 겹칠 이유를 찾아보고자 머리를 굴렸다. 암호 자체가 지명이 아니었다면 어떡하지? Mec-을 접두어로 갖는 지명은, 메카- 라는 접두에 연결가능한 수많은 지명을 떠올리다가 혀를 내두른다. 메세타로부터 이어진 지도에 침침하게 표시된 점선을 따라가면 그가 당초 목표로 한 이파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통한다. 그는 에파나로 통하는 긴 활엽림을 가로지를 생각이었다. 메세나를 경유하는 이라면, 그 편이 다음 목적지인 게 자연스러웠으므로. 위태롭게 숲 안으로 이어지는 외길에 그는 이따금씩 멈추고 회로를 들춰 방향을 확인한다. 어쩌면 소문은 잘못되지 않았을 지도 몰라. 진짜 새까만 닭이 나타난 거야. 다만 그는 네가 필요 없기 때문에 거기에 두고 간 거야. 이제 그다지 어리지도, 변변히 할 수 있는 것 없이 짐만 되었던 신입도 아닌 데도 가끔 검은 침이 흐르듯 응달에서 무력함이 그에게 속삭였다. 새까만 닭이 자발적으로 떠났다고 해도 나에 대한 부분까지 그의 의지는 아니야. 그런 건 직접 만나서 확인할 거야.

멀리 울창히 이어진 길의 출구가 밝은 양지의 끄트머리에 걸려있다. 지우스는 잠시 밀림을 벗어나 갑작스런 햇빛에 노출되기 전 모자를 한차례 눌러쓴다. 그는 자신이 빛 없는 심림의 지형을 벗어나는 것이 문득 망설여졌다. 그의 위치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숲 어딘가의 어두운 속삭임들을 묻어버린 채 태양 아래의 온기로 나서도 되는 것인가 하고. 걱정이 무색하게 숲을 벗어나와 구릉의 능선을 오르는 길로 한차례의 비구름이 소나기를 몰며 지나간다. 낮게 내려온 운해가 그와 함께 산을 오르다 희연해져 간다. 고맙게도 비가 오니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길게 차양이 드리운 모자는 물에 젖은 부분이 마르도록 불가에 널린다. 코 끝으로 느껴지는 공기가 신선하고 쎄한 기운을 품고 있어 지우스는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 야영할 준비를 했다. 눅눅한 짐도 온기가 닿은 가까운 곳에 내려놓았고 모닥불이 얼굴로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짙은 색으로 꽉 들어찬 하늘에 대기의 차가움이 압착한 채 구겨 있었다.

불가에 두어도 차가움이 손가락에 녹아 들어 싸늘한 기운이 손에 쥐어질 듯했다.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서러움이 입가에 희게 묻어나와 바람 중에 퍼졌다. 언제나 자연스레 이런 밤을 함께 지키던 존재 하나가 비었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상기했다. 손으로 와론의 부재를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밤이다. 사위가 깊은 밤의 어둠으로 물들어 다만 찌르르, 풀무치가 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작게 숨쉬었다. 연고 없는 지역의 추운 밤은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골풍으로 스쳐 지나갔다. 지우스가 생각해도 부조리한 여행이었다. 그에게 임무라고 불리는 이 일은. 어두운 가문비들은 높이 솟아 밤의 벽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무너져 내릴 듯 가깝다. 그와 함께한 모든 고락이 그저 남은 기억이 되어 가슴 속을 적셔 내리며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이 뼈 끝까지 서러웠다.

와론. 너는 왜 항상 아무도 택하지 않아?

나는 적어도 네가 나에게만큼은 무언가라도 남길 거라 생각했어.

부짓대가 타고 있는 나무 속을 저으며 외로운 타닥임이 숲의 침음에 삼켜진다. 어떤 기점으로 삶이 의미를 잃을 수 있다면 지우스에게는 그게 지금이었다. 정확함과 확실함을 그는 싫어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사라진 기사를 찾는 자신의 모습이, 적의 목숨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을 수 없는 그가 직접 와론의 죽음을 확실시하러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역시 너와 나는 적이었나, 와론?

먼저 저편으로 건너가 함께 있을 때도 닿을 수 없던 사람은 지우스의 곁을 떠난 뒤에도 지독하게 괴롭혀 온다. 기사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는 떠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도 있었던 건지. 사정 따위는 없었던 것인지.

사실 너는 기사가 되는 일 따위는 원하지 않지. 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

막대기를 탁탁 털어내고 모닥불에 남은 차디찬 계곡물을 들이부었다. 모자를 얼굴 위에 덮어 씌우고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었다. 부수어지고 있는 건 품 안의 오래된 투구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는 귀신이 되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리 란 걸 알고 있는데도, 지우스는 사상지평을 쓰지 못한다. 양 주머니에 파묻었던 손을 습관처럼 꺼내 보았다. 짝- 공기가 파찰하는 음이 정적을 깨고 명징하게 울렸다.

새벽 이슬이 모자 끝에 맺힌 낙수가 되어 콧대 위를 톡 두드린다. 사초로 만든 우장을 걷어내고 입구 맡에 걸어둔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산지기는 기사들의 신분패 대용으로 사용되는 코인을 그에게서 건네받았다. 마을과 외따로 떨어진 보급소에서 타지역과의 연락이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지우스는 벽에 붙은 달력의 일자를 헤아린다. 마흔 번째의 토요일이다. 국경에서 날아온 연락책은 별천지 직원보다 반가운 소식을 물어다 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를 재촉하듯 잡아끄는 한 목소리가 귀에 익다.

- 깨끗합니까?

“틀렸어. 지난 한 달 동안 두 개국 여섯 개 주를 걸러냈어... 다만 직접적인 교통로는 여기를 끼고있지는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네게도 전해야 할 소식이 있다. 예정했던 곳이 아니라…”

기린은 한참을 송화기의 점점이 연근같이 뚫린 구멍의 안쪽으로 설명을 늘어놓는다. 파이멜이 있는 우디온 부근은 비가 내리지 않는지 신호에 잡음이 적어 깨끗했다.

- 기린님. 저희 중에서 그쪽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자가 있는데요.

“누구지?”

- 기사는 아니고 견습인데… 자기도 이번 미요크 수색에 꼭 동참해야겠답니다. 그쪽이 자기 고향이라나 뭐라나.”

“언론의 사주가 아닌 건 분명하지?”

- 예, 예. 그건 분명합니다.”

걸렸군. 지우스는 수화기 뒤로 입매를 올린다.

“그럼 보내. 난 사흘 후에 피르줄 언덕에 있을 예정이다. 오 일 뒤에 정오까지 피르줄 P-85로 오라고 전해.”

P-85는 언덕 배기에 있는 거점들 중 하나였다.

- 네?? 정말요? 하지만 그냥 견습인데요?”

파이멜의 목소리는 꽤 당황한 듯 들린다. 뒷편에서 왁자지껄한 반응이 배경처럼 깔렸다. 그저 얘기나 꺼내보는 정도였던 것이다.

-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

연락을 끊은 지우스는 어둡고 흐린 바깥으로 나왔다. 보급소의 굴뚝처럼 뻗은 피뢰침에 간혹 푸른 정전기가 튀기며 마력이 오가는 것을 우의에 반쯤 가린 시선이 머무른다.

외딴 곳을 거니는 사람으로서는 동행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비록 숲을 혼자 헤매고 다니는 내내에는 주변에 신경을 기울이므로 드물고 귀한 약재를 얻을 수도, 인적을 꺼리는 소동물들도 마주칠 수 있었으나 나무에게 마저 대화를 걸고 싶은 지경에 이르기 전에 생긴 적절한 동행은 지우스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정작 기린으로서도 그는 동행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대화에 관한 기대는 아니었다. 새까만 닭과 관련한 설득을 하러 오는 달잔의 계략이 뻗친 동행이라면 사절이지만 파이멜을 통해 합류한 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기색은 없다.

예정대로 피르줄에서 동행을 맞이하고서 온 김에 국경 인근의 마을에 들러 간단하게 시찰하고 물자를 보급할 생각이었다. 지우스는 오래간만에 꺼내든 사무적인 말투에 입가가 살짝 굳는 것을 느끼며 견습에게 대략적인 계획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군기보다는 여유가 실린 목소리도, 몸에 달라붙을 듯 붙지 않고 펑퍼짐하게 떨어지는 치마가 길게 이어져 발목께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것도 이전의 사령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도를 펼쳐 하나뿐인 동행에게 갈 길을 짚어주는 건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지우스는 견습이 이해할 때까지 내용을 반복하고는 그가 가져온 정보들을 재차 나누어 들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길을 안내하고 있는 일은 우스웠다. 반복되는 등산 내내 그들은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고 또 숲길이 가팔라지면 말소리도 갈라진 채로 조용히 걸었다. 막 상경해 견습이 된 기사가 전하는 수도의 소식은 영 생경하지는 않으면서도 옛 친구의 근황을 듣는 듯해 괜시리 귀담아듣게 된다.  

파이멜의 임무는 새까만 닭에 대한 소문을 입수하는 것도 겸하는 중이었으나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그들과 근원을 알 수 없는 목격담이 합해져 마치 서로 맞부딪힌 유리알들이 사방으로 깨지듯이 본래의 빛깔을 일부만 지닌 허깨비 같은 내용이다. 그말대로라면 새까만 닭은 불사신이거나, 기사에 대한 원한을 지닌 해골이면서 대륙의 모든 왕국에 매일 밤 나타났다.

“아, 저편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견습이 전방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천리안이라도 있는 거야? 지우스는 언젠가 물었던 말을 떠올린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렇게 시력이 좋지 않았기에 ㅡ 야간시력은 어떤 동물적인 기사들에 비하면 야맹증에 가까웠다ㅡ 마을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지만 이쯤되면 사실 자신만 사상지평을 개화했을 뿐 다들 기사나 견습기사가 되는 과정에서 인간을 뛰어넘은 오감을 받은 건가 싶다.

살아있기는 한 거야? 와론. 불평하듯이 입 속에서 두어 번 중얼거려 보았지만 지우스가 의식하는 배후나 그의 옆을 지키는 검은 그림자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부터 도사렸다.

그의 지인들은 그걸 광기라고 불렀다. 동료를 잃은 기사나 전쟁, 혹은 불우한 사고로 가족이나 주변인을 잃어가길 반복하는 자들이 언제부터인가 띄게 되는 것이. 원래 방랑벽 따위는 성미에 맞지 않던 지우스는 대거의 집단을 지휘하는 임무가 적임이자 역할이었다. 이런 어린 견습들과 관련된 전반을 지도하는 일은 그의 특기였다. 많은 기사들에게 상극이라 하는 수도의 업무가 그에게 적성이었고 제국의 중앙이 품은 비수이자 방패가 되어 그를 통제하는 이들의 손길과 강하게 연결 되어있어야 했다. 와론이 아니었다면 담청색 기린 지우스라는 기사는 지금 같지 않더라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상지평은 더 여러 번 모이고 더 빨리 소모되고 어쩌면 그 모든 게 그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못했을 지도. 지우스는 동료를 믿었고 그들을 지나치게 아끼는 이였으므로 ‘차마’ 라는 말이 그를 명예롭게 굴지 못하도록 했다. 그의 완전한 동료가 되는 걸 끝까지 거부해왔기에 어느 검은 반장갑을 낀 흰 손은 동앗줄이 되어버렸다. 그의 짐 안에는 숲 속을 구르던 투구가 들어있다. 할 일을 하러 간다는 말 따위가 그저 이제는 자신의 차례임을 수긍하라고 종용하는데도, 이번에 지우스를 스스로의 선택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와론이었다.

반시간쯤 지나자 돌로 지은 그럴싸한 성곽이 모습을 보인다.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는 자세히 보니 벽의 보수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오가는 상인들로 어느 정도 활기를 띄는 도심으로 들어서 그들은 대로에서 벗어나 좁은 번화가나 시장 주변을 살피며 다녔다. 그제서야 개기 시작한 비와 같이 야외를 다니는 행인들의 얼굴이 밝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어딘가 개키지 않은 구름 같은 표정을 가진 이들도 있었고, 눈가에 푸르스름한 주름들을 보며 지우스는 가판대 뒤편에 앉은 이들에겐 그보다 더 궂은 표정을 발견하리란 걸 거의 확신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견습에게 무장상태를 점검하라 일렀고 둘은 자연스레 시장을 지나쳐 으슥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머잖아 두 사람이 기척을 죽인 채로 일행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곧 후미진 건물 모퉁이에서 두 사람을 다시 찾아냈다. 견습에게 급소를 얻어맞은 하나가 기절하고 지우스는 다른 이를 잡아 차가운 바닥과 뺨을 인사시킨다. 그들과 같이 모여 있던 세번째 새로운 망토는 두 기사가 현장을 덮치기 직전에 줄행랑을 쳤다.

“쫓아가.”

“네.”

지우스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한 사람씩 소지품을 뒤지고 망토의 안주머니를 뒤집어낸다. 망토를 쓴 이들을 덮칠 때 바닥으로 떨어진 가루 봉지 외에 나오는 건 특별한 물건이라곤 없다. 흔히 뒷골목에서 거래되곤 하는 약용재, 불법 수입품 몇 가지는 그가 상관하는 바는 아니었고 심문에는 도가 튼 지우스가 보기에 불만과 당황이 서린 채로 답하는 이들은 중요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아아아, 팔,… 팔!!”

지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유심히 보았다. 한 무릎을 굽혀 냄새를 맡아보던 중 곤충다리처럼 부자연스레 관절이 비틀려 꺾인 이가 고통스럽게 신음을 낸다. 견습의 팔에 붙들려 돌아온 수상쩍은 이는 지우스가 그들을 심문하는 내내 도망하지 못하도록 견습의 품에 꼭 붙잡혀 있었다.  

“이봐, 놓아줘. 그자는 아무것도 몰라.”

“거래책이에요. 이 사람.”

                                                                

견습은 딱딱한 근육으로 옥죈 팔을 놓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아마 놓아주었을 때 그가 다시 도주를 시도할 거라는 불안이 있었는지 가뜩이나 속박에 힘이 들어가 있어 쉽사리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우스는 굽혔던 한 무릎을 펴고 그에게 다가가, 팔꿈치 안쪽에 손을 끼워 넣고 노란 눈으로 견습을 주시한다. 무력으로 팔을 떼어내자 반사적으로 손아귀 힘이 풀림과 동시에 거래책인 남자가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진다. 지우스는 한차례 늦게 경고하며 손을 떼었다.

“놓으라니까.”

“워낙 재빠른 터라 도주하면 다시 잡기 어려울 거예요. 팔이 부러져 있지 않았다면 놓쳤을 거라구요.”

견습의 해명과 설득에는 숨기지 못하는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 유독 정의관이 강한 아이인가, 하지만 그것은 분노로 변질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일반인에 불과한 인질을 과잉진압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ㅡ 부러져? 잠깐. 어떤 생각이 혼란하게 돌아가던 그의 머리를 강타한다.

 견습은 얼얼한 어깨를 반댓손으로 감싸쥐는 동안 변명하듯 그가 온 쪽으로 고갯짓을 한다. 노란 홍채에 박힌 까만 동공이 수축하며 그 편을 보았다.

“그건 제가 부러트린 게 아니거든요. 발견했을 때부터…”

“…와론.”

“네?”

“여기서 보급을 하고 있어. 한시간 뒤에 입구에서 만나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ㅡ”

지우스는 몇 마디를 급하게 늘어놓고 그에게 은화가 든 꾸러미를 던졌다. 견습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싸인을 해보이고 지우스는 뒷말을 마치지 못한 채로 견습이 도주한 이와 함께 온 방향을 쫓아 달린다. 비좁은 뒷골목에서 더 세밀하게 난 양편의 골목을 스치며 질주하다가 얼핏 보인 골목의 장면 속으로 사람의 끄트머리가 지나간다. 급하게 방향을 틀어 골목 끝까지 전속력으로 도달했다. 모퉁이로 사라진 흰 망토와 터번이 기억에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잠깐 기다려!”

젠장, 그는 거칠게 빠져나가는 호흡을 입 안에서 물었다. 폐가 호흡으로 죄 긁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유속으로 기도를 빠져나간다. 담청색 기린으로서도 최대의 속도였다. 그는 소매를 걷어 두 손을 마주댄다. 이대로라면 놓칠 것이다. 유령처럼 사라질 듯 흐믈대는 인영은 육안으로 좇는 것도 어려운 속도다.

“새까만,..!”

지우스는 벅차오르는 숨으로 잇새를 악 다물었다가 터트리듯 소리친다.

“와론!”

마침내 깊숙한 시가지로 들어선 도주자가 멈춰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지우스는 간신히 그가 있는 골목의 초입에서 발을 멈춘다. 상대는 그와 달리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경고의 의미가 느껴져 그이상 다가가는 것은 좋지 않으리란 판단이었다.

“…새까만 닭?”

조심스러운 말이 좁은 골목의 벽을 타고 전해진다.

“닭. 너지?”

“새까만 닭? 아닐 걸? 담청색 기린, 고명한 기사 나으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와론. 그건 내가 물을 말이다. 지나치게 오랜만이군.”

“묻잖아. 왜 수도에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기에 있느냐고.”

“너야말로 왜…”

골목길 끝에 몰린 인영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망토를 걸치고 터번을 쓴 채로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넓은 간격으로 선 거친 망토를 쓴 지우스가 골목을 다른 쪽을 차지해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천 아래로 튀어나온 이목구비의 조형은 낯설었지만 첫마디를 듣는 순간 지우스는 그가 새까만 닭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 보다는 오히려 발 밑이 굳는 기분이다. 연고 없는 지역에서 우연히 만난 옛동료라고 해서 안부를 물을 기분은 들지 않았다. 무엇이 새까만 닭을 여기까지 도망하게 하였을까. 지우스가 생각한 말은 길었으나 입 밖으로 나온 건 그보다 짧다.

“왜 도망쳤어?”

“도망쳐?”

“나를 어떻게 찾아냈어?”

상대는 심기가 긁혔는지 거칠고 건조하게 되물어온다. 조금은 낯선 생목소리는 대화의 의지는 없어보였으나 의외로 천 아래에서 다음말이 흘러나온다.

“네가 다녀간 마을마다 기사들이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 중에 내가 있던 마을도 포함되었거든. 뭐더라, 키가 180이 넘는 장신의 검은 망토를 쓴 창병? 그런 걸로 날 찾을 생각이었나? 어쨌든 그 비효율적인 수사 덕에 이쪽도 거처를 몇 개나 버렸는지 몰라. 그게 열 받아서 이제 산으로 들어가야 하나 싶었던 참이다.”

“그건 유감인데.”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넌 선을 넘으려 하고 있어. 조심하라고 주의도 줬잖아. 대체 배운 걸 어디다 써먹는 거야? 사실은 추적해달라고 빌고 있는 거였나?”

몇 마디인가 그날 주점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의 입이 선명하게 모양을 그리던 말이 그제서야 되새겨진다. 취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는 확실히 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약속한 날은 오늘이 아니었잖아.”

“약속? 무슨 약속.

난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바위에 메시지 남겼잖아.”

그는 다시 사라질 듯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 닭을 추궁하듯이 말했다.

터번의 끝을 건드리던 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다.

“아아, 그거. 그래, 한 명쯤은 풀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라고 남긴 건 아니었지만. 정 나를 만나려는 이가 있다면 골려줄까 했던 것 같군. 그 이유가 네게는 없을 텐데.”

틀린 데가 없는 말이다.

“글쎄. 만약 그 이유가 있다면?”

“이봐,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나도 널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와론.”

노란 눈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다. 참다못해 건조한 어조에 약간의 짜증이 섞인다.

“이름을 부르라는 허락은 아니었어.”

“여긴 대화를 나누기 좋은 장소는 아니야.”

지우스는 그가 지키는 뒷편으로 훤히 뚫린 시가를 턱짓해 가리킨다. 대로와 몇 블록 이상 떨어진 골목에 몇몇 소음이 메아리를 쳤지만 싸늘한 긴장이 감돌았다. 검은 부츠가 바닥을 툭툭 밟으며 천천히 골목을 지나 그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꼬리나 잡히고 다니고, 담청색 기린, 너 말이야,”

아직 멀었어, 애송아. 와론의 차가운 손이 다가와 그의 뺨을 툭 친다. 지우스는 저도 모르게 좁혀진 거리에 바싹 경계를 세운다. 정신 차리라는 듯이 잠든 사람을 깨워내는 모양이었지만 지우스는 그 얼얼한 악몽 물 밖으로 나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무의식적인 견습시절의 버릇대로 말아 쥔 손을 턱에 대고 무언가를 숙고하던 지우스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다. 손 끝에 들린 파이프가 홀로 까딱이며 푸른김을 피워낸다.

"기린님. 왜 꼭 저장식을 드세요? 숲에 널리고 깔린 게 음식인데."

"…시간이 없으니까. 말했잖아. 우린 적어도 사흘 뒤까지는 에파나에 도착해야 해."

견습은 식용으로도 쓸 수 없는 애기 버섯과 곰팡이가 덮힌 통나무에 앉은 녹색의 옆머리가 길게 얼굴을 덮은 여행자를 설득한다. 태초의 자연에도 편안하게 어우러질 것 같은 무딘 차림이었으나 미간의 음영 속으로도 흐릿하게 분간될 정도로 주름이 잡혀있다.

“사냥하고 해체까지 해봤자 얼마나 걸린다구요. 일일히 보급을 하는 건 번거롭지 않으세요? 제가 금방 잡아올게요.”

견습이 자기 무기를 쥐고 숲으로 사라진 후에야 그는 다시 파이프를 입에 가져다 머금는다. 두꺼운 소매에 반쯤 묻힌 채 온기를 내뿜는 파이프가 속에서부터 답답함을 길어낸다. 기마나 고요한 척후가 특기인 기사도, 적의 일점으로 파고드는 기동력을 가진 기사도 아닌 지우스는 물론 새까만 닭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떤 도발이든 닭이 그를 잡기 위해 접근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로 그게 먹힐 줄이야. 태도에 어려있던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이들의 경계심은 그가 겪어온 와론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역시 새까만 닭의 앞에서 그렇게 긴장을 느껴본 건 오래간만이었다.

일행 중에 요리를 하는 이가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지우스는 그의 기억 속의 일반적으로 기사생활을 하던 때를 뒤적거렸고, 임무 중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이나 있던가 하면 적당한 가열만 거친 것을 음식으로 여기고 식사로 취하는 일이 이미 지극히 자연스럽다. 장담하던 대로 금세 저녁거리를 사냥해온 견습의 손에서 손질이 끝난 고기가 몇 덩이로 나뉜다. 끓는 물에 들어간 비교적 큰 목살과 사태, 다릿살은 핏기를 빼는 대신 삶았고 나머지에서 이인분을 떼어 작게 잘랐다.  

“이정도면 며칠은 생고기로도 버티겠어요. 소금통을 짊어지고 다니면 그 이후에도 먹을 정도는 될 거예요.”

그는 손보다 조금 더 길이가 남는 나이프로 과하게 먹기 좋다 싶을 정도로 고기를 자른 뒤 쇠통에 다가 비계와 함께 볶았다. 아무래도 무기로 사용하기엔 적절치 않은 칼은 전장에서의 쓰임새가 없다는 걸 금방 유추할 수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견습이라니, 그는 나무 위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분주하게 일을 하는 청년을 구경한다.

“…너 정말 파이멜을 많이 닮았구나.”

“네?”

“팔은? 부러진 건 아니지?”

“거뜬합니다. 이정도는.”

그는 과장되게 팔을 굽히며 웃어 보이다가 이내 인대에서 뚝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눈썹을 크게 들어올린다.

보초를 서는 내 지우스는 그의 옆에서 타닥 거리는 불꽃을 보았다. 한참을 어두운 숙영지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며 그가 뜯어온 몇가지 약초와 함께 ㅡ그중 일부는 견습의 팔을 찜질하는 용이었다ㅡ 소금물 속에서 고아지는 고기를 바라보다가 불씨 위로 물을 부어버린다. 파이프의 끝부분만 점처럼 깜빡 거리는 동안 밤의 추위 탓에 망토를 어깨 위로 한차례 끌어올린다. 노란 안광이 뱀의 커다란 눈처럼 감기다가도 뜨이기를 반복하며 자리를 지킨다.

둘은 잠시 이동을 멈추고 돌마루가 가득한 계곡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상류의 폭포로부터 맑은 물이 가득 떠밀려와 물빛 아래로 고기의 비늘이 반짝인다. 지우스는 바위 사이를 딛고 유속이 빠른 물 아래로 물병을 담가 목을 축였다.

“어제는 왜 갑자기 사라졌던 겁니까?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늘 아래에 앉은 견습이 그에게 물어온다. 그는 묘하게 건방진 기색의 견습이라 그를 꼭 닮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그와는 상관없는 기린의 개인적인 사정이지만 그에게도 조금은 생각할 거리, 즉 판단할 만한 정보를 던져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래, 우릴 따라오는 자가 있나?”      

“잘 모르겠는데요.”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나보군. 그래도 곧 이곳으로 올 테지. 네가 있으니까 안 나타날 수도 있고.”

“역시 소문대로 네요. 특수 기수를 지휘하셨다고 했죠. 교육자의 짬바가 우러난달까요. 뭔가를 배울 거란 기대로 온 건 아니었거든요.”

“…”

“그 말대로면 전 여기서 빠지는 편이 낫겠군요.”

"실은 미요크를 지나는 중에 생각이 좀 바뀌었어. 넌 여기 출신이라고 했나?

“예.”

“무엇 때문에 자원했지?”

“그다지 현실성 있는 이유는 아니에요. 원래 저희 마을엔…”

그는 잠자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차가운 계곡물이 저들끼리 식혀가며 계곡을 지나가는 소리만이 울린다.

“네가 있는 편이 도움이 될지 몰라.”

견습들 특유의 과한 긴장과 투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향은 낯설지 않다. 그래서 견습들이 가장 맡기 어려워하는 임무는 척후였다. 반면 탐색은 그나마 아이템이나 개인의 재능에 따라 잘 해낼 수 있는 부분으로, 지우스는 본인의 판단과 그의 감을 믿었다.

주변을 맴돈 건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견습 정도면 녀석도 나타날 테지. 사실 닭의 눈은 육안에만 한정되지 않아 까다로운 상대이긴 하다. 그들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입가를 닦았다.

“…밤을 기다리지.”

...

“이전에는 단체생활을 했거든요. 군인이요. 그러다가 견습으로 들어가고 나니 끼니의 개념이 영 달라서…”

그는 소금에 적절히 절여져 장조림이 된 고기를 낮에 발견하는 대로 채취해 같이 절인 구근과 함께 그릇에 담아 내놓는다. 지우스는 내심 이 견습이 자원한 게 아니라 파이멜이 먼저 나서 자신에게 붙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려본다. 피지컬로도 평균 이상인 게 분명한 그는 지우스와 겨루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실력이다. 새삼 제한된 능력과 체력, 방법으로 살아오는 것에 익숙한 그는 아직 아무 제약도 견디지 않는 어린 견습의 처지를 떠올린다. 그렇다고 미래가 불확실한 시절 그는 그렇게 괜찮은 시간을 보냈던가? 알 수 없었다.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이 길을 선택해온 사람들은 수없이 봐왔으며 그건 외부의 것들로부터 삶이 파괴당한 이들도 벗어날 수 없었던 사고의 흐름이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대다수처럼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해결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는 모든 행동이 감시하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 효과는 없을 테지만 흔적은 최대한 지우고.”

지우스로서는 알아도 흉내할 수 없는 맛이 입 안에서 감돈다. 베이스ㅡ라는 단어도 지우스는 몰랐지만ㅡ에 무얼 조합한 건지 복잡한 향내가 비강을 타고 올라온다. 유독 향긋하고도 매운 향은 그도 아는 식재료임에 틀림없으나 종류까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그 유명한 새까만 닭 찾기의 실체인가요? 하지만 에파나는 몇 년 전에 이미 들리신 걸로 아는데요."

지우스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차차, 자신이 여기저기 관심이 많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사과한다. 

“아니. 끝까지 말해봐. 그 얘기를 어떻게 알게 됐나?”

파이멜을 통해서가 아니란 건 그도 알았다. 기사들에게 새까만 닭에 대한 건은 함구령이 내려있었으므로.

“이런 얘기 아닌가요? 그러니까 새까만 닭이 단독 임무 도중에 불명예스럽게 사망하면서 다잉메세지를 남겼죠. Epa로 시작하는 짧은 글이요. 얼마 후 그의 동료였던 담청색 기린이 그 암호를 풀었고…”

이후의 이야기는 지우스가 익히 아는 바 대로다. 별천지에서는 몇 년간 그 암호의 장소들을 암암리에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민간인들을 통해 알 정도로 퍼졌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지우스가 그간의 소문의 동향들을 거슬러 짚을 때였다. 과거의 일을 떠올려서인지 단단한 관자놀이에 스파크가 이는 느낌이었다.

“저희가 굳이 에파나까지 가지 않아도 될 더 빠른 방법을 찾았어요.”

“말해봐.”

곡조를 타듯 지우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담청색 기린,”

마치 긁어내리는 듯이 지우스는 견습의 늘어지는 어깨깃을 손으로 잡고 끌어내린다. 어지러움과 함께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절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줄테니까.”

뭐?

녀석의 목적은 나였..던..게 아닌가?

지우스는 안구 뒤쪽의 공간ㅡ두개골 안쪽ㅡ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타고 올라오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당초부터 목적은 지우스가 아니었던가? 무언가 뺨에 부딪히는 감각에도 통증은 들지 않는다. 스릉, 무기를 들어올리는 소리만이 뚜렷하게 들린다. 무언가 눈꺼풀을 덮은 것처럼 시야가 막혀가고 있다.

숲의 암흑으로부터 분열한 덩어리가 곧 형태를 갖추며 본래의 인간의 형상을 드러낸다. 흰 새의 날개 같이 펼쳐졌던 망토가 유유히 지우스와 전투태세로 선 견습 사이를 가린다. 와론은 공격의 의지를 품고 찔러오는 기다란 창을 피해 몸을 틀었다. 망토 안쪽으로 순식간에 쓰러져있던 사람의 형체가 마술처럼 사라진다. 그는 뒷편에 평화로이 끓어가는 냄비와 널린 짐들에 곁눈질을 했다. 견습이 두번째 연격을 위해 덤벼 들자 와론이 그리로 피하며 불꽃 위로 끓는 육수를 내던지듯 엎는다. 주방 도구와 짐들이 엉망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삽시에 사방을 거뭇한 어둠이 채운다. 시력이 돌아왔을 때 즈음엔 이미 흰 망토도 초라한 차림의 방랑기사도 사라진 뒤다.

그의 정신이 든 건 이름 모를 여관방 안에서였다. 눈 앞에 은색 합금으로 된 새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주전자가 보인다. 손잡이를 잡은 손은 마디가 도드라지고 끝이 거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건네어지는 컵을 잡고 안에 든 액체를 마시려 몸을 일으켰다. 연거푸 연초를 피워대 머리가 띵할 때보다 갑절은 더한 두통이 찾아온다.

“그 자식은 네 식사에 약을 탔어. 눈치채지 못했나?”

“나랑 같이 있던 일행은? 설마 해친 건 아니지?”

그는 굳은 목소리로 재촉하듯 물었다.

“새까만 닭,”

“걔는 죽었다고.”

와론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지우스의 어깨 위의 긴장이 조금 떨어졌다. 오래 잠겨있던 목이 타는 듯해 지우스는 컵 안의 액체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기사였나? 동료?”

“아니 견습이다.”

“푸핫, 아직도 견습한테 보호받던 걸 보니 그놈의 기어스는 잘 지키고 있나보네? 오래 못 갈 줄 알았는데. 약속은 툭하면 어겨대는 게 네 특기잖아. 기린.”

“며칠이 지났어?”

망토의 길고 넓은 소매 끝으로 보호대를 찬 손이 나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인다. 움직임은 거기에서 멎지 않고 지우스의 앞까지 다가온다. 쥐고 있던 컵이 그의 손을 떠나 조르륵하고 빈 속을 채우는 소리를 낸다.

약의 향은 익숙치 않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강하게 밴 연초 냄새 때문에 잘 몰랐다. 위장이 깨어나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닫자 지우스는 극심한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약효는 며칠 사이에 많이 가라앉았다. 아직 시야가 완전히 각성하지 않은 까닭은 약보다는 졸음으로 인해서다.

왜지. 생각했던 것 보다 용량이 모자란데.

이틀 안에 움직일 수 있으리 란 건 예상 밖이다.

“에파나를 들려야 해. 정보를 교환할 마을이 거기 밖에 없다. 녀석도 에파나에 있을 거야.”

“왜 사서 위험에 뛰어들려 하는 거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 카톤? 연락망은 어디 갔어.”

“카톤에는 추적기능이 들어있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아.”

지우스의 상태는 도무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와론은 내키지 않는 투로 툴툴 대며 별말 없이 계획을 수락한다. 지우스의 위험이 수반되는 계획이면 당연히 거절이 돌아오던 전과 달리 과거의 그의 동료도 예전처럼 안전에 민감하게 굴지 않게 되었나. 그의 수긍이 간단한 건 환영할 일이다. 와론의 신분증명이나 다름없는 검은 창을 비롯해 짐들은 한켠에 놓여있었고 문을 열고 객실을 나가려던 그는 지우스에게 아래층으로 내려오라 이른다.

“식사를 하러 갈 건데, 걸을 수 있나? 아니면 가져다주고.”

지우스는 대충 컵을 놓아두고 그를 따라 나섰다.

 

“별..별천지를 나와?”

층계참의 계단을 따라 앞서 내려가던 와론이 잠시 삐끗한다. 그의 목소리가 한번을 더듬고 나왔다. 이건 나도 예상 못했는데. 심연에서부터 우러나는 한숨을 흘리고서는 와론은 그를 멈춰세웠다. 여관이라, 그가 고른 선택 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웠으나 정세를 시찰하고 정보를 모으기에 그만한 장소도 없다.

“야. 너 지금 기린은 맞는 거지?”

“뭐라고 부르던 네 자유야.”

지우스는 천천히 뜨거운 식사를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그간 돌아다니면서 본 동부 국가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음식이 끊임없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와론이 자신의 몫으로 나온 요리마저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랬군. 하지만 견습이 동부 출신이란 건 거짓말은 아니야. 사투리를 썼거든.”

“그랬나?”

와론이 갸웃대자 터번의 끄트머리가 잘게 진동한다. 지우스는 터번을 아래로 조용히 식사를 끝낸 그 모습을 구경한다. 그는 많은 양을 먹지 않았고 ㅡ지우스처럼 그날 끼니를 굶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ㅡ 가끔 맥주로 보이는 음료를 홀짝였다. 오만했나. 만나기만 하면 그를 설득할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상 그를 물끄러미 주시하는 투명하고 위협적인 눈을 마주하자 그간의 확신이 무너진다. 정면으로 부딪히길 피하는 쪽의 마음도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감춰진 터번 아래로 잔이 들어가고 액체가 목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그는 와론이 자기 앞에 내려놓은 잔의 손잡이를 빼앗아갔다.

“이봐 기린, 마시지 마.”

자뭇 심각한 목소리에도 지우스는 심드렁하게 목깃 위로 다가온 손을 쳐낸다. 와론의 악력은 여전해 그토록 세게 쳐내도 끄떡도 하지 않았을 터다. 기사가 임무 중에 술이라니, 안될 말이었지만, 잔을 도로 가져간 와론은 이미 비어버린 통나무 잔 속을 보았다. 몇몇 규율들은 어기는 게 암묵이라는 걸 지우스도 시간과 함께 배운 바였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도 새로운 잔을 주문하지 않았다.

“약도 덜 깼잖아. 마시지 말라니깐.”

“터번은 컨셉인가?”

“하?”

“전에 만난 주점에선 왜 네가 아니라고 한 거야.”

“너랑 주점을 들린 건 지금이 몇 년 만인데. 귀신이라도 본 거 아냐?”

손끝으로 발갛게 얼얼함이 올라온다. 지우스는 그 뻔뻔함에 코웃음을 친다.

“귀신? 그럼 지금도 그래야지.”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

“그 메모를 발견한 뒤로부터 뭐든지 다 의심하고 있었어.”

“목걸이는 같이 묻지 않았나.”

와론은 쉰 목소리로 작게 말하며 옆을 곁눈질했다. 앉은 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목걸이를 빼고 묻었을 리가 없는데, 흰 손가락으로 긴 바테이블을 두드리며 골몰하던 그가 결국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 미친놈.”

새까만 닭은 절벽 밑에서 몸이 죄부러진 채 발견되었다. 지우스는 엉망이 된 사체에서 몸 밖으로 흘러 넘치고 흙바닥에 쓸린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살덩이와 빗장뼈사이를 헤집어서 몸에 박혀 있던 녹색 원석을 찾아냈다. 마치 불 살라진 재 속에 유일하게 타지 않은 흔적처럼 남아있는 광석은 끝내 자녹한 광택으로 은은하게 그를 찔러온다. 유품이었구나. 지우스는 그동안 어림짐작으로 묻어둔 물건에 담긴 사연은 지저분한 손바닥에 담아 가슴팍에 꽉 끌어당기는 침음 속에서 뚜렷해지고 있었다.

지우스는 와론의 목덜미를 보았다. 흔치 않은 종류의 원석인데, 상시 구비하고 다니기라도 했는지 두 목걸이는 한 쌍처럼 같았다.

새까만 닭 와론은 죽었다.

원래 기사라는 존재는 하나를 지칭하는 호칭이었지만 ㅡ 돌들 사이에 남다른 반짝임을 가진 것을 광석 혹은 보석이라 부르듯이ㅡ 점차 기사는 개념이 되어갔다. 그리고 기사란 대륙의 법칙에 따라 황제에게 순종했지만 개개인의 충성은 너무나 약한 제약이었다.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으니 기사들은 존재하기 위해 기어스를 맹세했다. 이 대륙을 위성처럼 뱅글뱅글 도는 시스템이 되었음에도, 탈피하는 뱀처럼 둥근 투구를 벗어나 희게 변해버린 뒤에도 그를 중력에 묶어두고자 한다면 더 강력한 것이 필요하다. 지우스는 천에 가려진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는지 의문이 들던 찰나 와론은 자기 몫의 맥주 한 잔을 더 받아 홀짝이며 눈을 흘긴다.

“이봐, 사람 뚫어지겠어.”

지우스는 와론이 떫은 입매를 하고 그를 봐도 그러거나 말거나 반백색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혼란스러움이 잠잠해지고 나자 크림 같이 얇게 흐르는 머리와 북부 출신들 같은 흰 피부가 이전보다 많이 드러나 있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감상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진짜 와론이라고?”

“자네 정말 취했군.”

“왜 가리고 다닌 거야?”

얼굴. 지우스는 턱짓으로 그를 가리킨다.

“보고도 모르겠나? 내가 워낙 잘생겨야 말이지.”

“…그런 생각은 안했는데.”

“이봐, 진짜 실례라고. 기린! 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해?”

정확히 본 건 광대의 윗부분 뿐이지. 지우스는 입을 대고 거친 라거를 호릅 들이키는 헐거운 터번의 속을 생각했다. 와론은 성을 내며 식탁을 치며 발끈했으나 여관에 딸린 주점의 내부는 시끄럽고 미온해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에 속한다. 지우스만이 반쯤 넋을 놓고 그들과는 평생 어울리지 않을 부드러운 동화를 구경하고 있었다.

“얼씨구, 혼자서 잘만 마셔대더니.”

흰 옷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는 손은 마치 미색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양 뚫어져라 제 손을 보는 이에게로 이어진다. 지우스는 베테랑이 된 지금도 빈 말로도 체격이 크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주인 잃은 개의 행세를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안심하게, 그 난리를 피우고도 아무 해명도 듣지 않고 갈 생각은 없으니 말이네.”

와론은 취한 사이 그가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버릴 것 같다는 듯 구는 것이 질린다는 듯이, 은전을 테이블 위로 던져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몸을 뒤로 젖힌다. 상대는 이미 대화를 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상태였다.

“그래서 넌 결국 왜 그렇게까지 나를 찾아다녔는데? 사적인 감정이냐? 궁금증? 네가 완전무결하게 알지 못하는 새까만 닭 와론이란 참을 수 없어서?”

그거라면 상당히 오만하군, 와론은 포기했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이고는 자신의 뒷통수를 받친다. 혼잣말이나 다름 없는 주정뱅이와의 대화다. 

“아니라면 설마 나를 동료라고 여겨서. 아니 기린… 아니지. 기린, 넌 그럴 인물이 아냐. 내가 실언을 했군. 역시 나만한 기사가 없던가? 수도에 관심을 끈지 오래 돼서 몰랐는데 무슨 일이 터진 건가.”

“굳이 말하자면 계약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뻗은 줄 알았던 지우스에게서 맹하니 꼬부라진 소리가 흘러나오자 흠칫한다.

“계약?”

할 말을 잃은 듯한 와론은 대꾸조차 잊고 잠시 그를 빤히 보았다. 설마 사상지평 계약을 운운하는 건가. 이미 와론에게 다소 어색해진 그것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아직 네게 약속한 걸 들어주지 않았잖아.”

“…지금은 몇 년치를 모았지?”

“3년. 중간에 한 번 썼어.”

지우스는 힘 빠진 손가락 세 개를 간신히 펴보인다.

“허… 그 이후로 아예 안 쓴 것도 아니고.”

“정말 필요한 한 번 이외엔 쓸 일도 없었고.”

그는 어지러운지 테이블의 각진 모서리에 이마를 박으며 와론의 말을 보충한다. 머리가 핑 돌며 일어나면 다시 어디론가 가버리는 건가. 닭,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오감은 지나치게 둥실하게 떠올라 주변은 흐릿하고 실제 같지 않았으나 꿈이 아니라는 건 인지했다. 지우스의 상상력은 무의식 속에서도 그다지 호화롭지도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제대로 말하자면 기사들마저도 그를 미쳤다고 여겼으나 그의 이성은 한번도 그 주인이 미치는 걸 허용한 적이 없다. 시간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더라도 약 보다는 고통을 택해왔다. 지우스는 옆에서 불만스러운듯 퉁명히 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와론을 보았다. 새카만 어둠 한 장 속에 늘 쌓여 있던 밋밋한 색의 기사는 끝내 그를 수도에서 뛰쳐나가게 했고 다시 그를 만나러 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잔인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명의 기사와 함께하는 현실을 의심했으리라. 그러므로 아마 지우스가 그를 찾아냈다는 건 자신조차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실이리라.


글 연성 전체의 모티브가 된 곡(아래는 커버버전). 영원한 고자극 멜리오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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