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어느 주도
기린닭
추석 맞이 한잔 하는 기린닭 입니다.
ncp 지만 지우스 워딩 주의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관찰 속에서 찾아낸 이지는 무엇이었을까. 부엌에 딸린 작은 창고 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흰 도자기병은 꼭 그러한 순간 중 하나였다.
지우스가 기억하기로 그것은 순수한 호의의 흔적은 아니었다. 건네주었던 성주의 손이 떨리던 것을 그는 당시의 인사치레 같은 말과 조촐한 만찬의 분위기 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마음 먹고서도 고심하는 까닭은 제 주위 몇몇은 이런 술이라도 사족을 못쓸 것 같다는 이유였다. 선물할 요량까진 없더라도 함께 마시면 명주까지는 못되는 이 병 속의 술도 비울 수 있을 듯 하였다. 비우고 나면 마음 또한 후련해질 지도 모른다는게 그의 내심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람의 대부분이 수도 바깥으로 나가있는 터라, 당장에 이 병을 치워버릴 만한 방안은 되지 못하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 같다, 마시는 것이기에 마실 생각을 한 것이지만 지우스 역시 그다지 주도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음식 따위에 쓰기도 내키지 않고…
“오, 왠 도자기?”
고심에 빠져있던 기린에게 다가온 녀석은 같은 집에 얹혀 사는 기사였다. 집의 다른 구역을 청소하느라 솔을 들고 있기도 하고 팔꿈치 등에 먼지가 가득 묻은 걸 보니 지우스가 입은 푸른 실내복도 그 꼴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술을 입에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애당초 논외로 생각하던 이였다.
“술이야. 버릴까 하는데.”
“그걸 왜 버리나? 마셔~.”
“술은 좀 하나 새까만 닭?”
뜻밖의 겸상할 상대를 찾아낸 기린의 얼굴이 미미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니? 나는 안 마시는데?”
미개봉의 술병만큼이나 모호한 그의 표정에 기린은 마찬가지의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쳤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이르게 끝난 대청소라던가, 장을 보러 간김에 사온 대강 구색을 갖춘 안줏거리라던가 그런 것들로 인해서 지우스는 동료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기사 녀석과 식탁에 둘러앉았다. 투박한 선을 가진 병과 비슷한 질감의 흰 자기 잔을 새까만 닭이 하나씩 그들 앞에 나누었다. 술을 따르고 잔을 부딪혔다. 마개가 뽑힐 때 다물렸던 입구에서 오래된 누룩향이 올라왔다.
첫잔의 맛은 그날의 고민을 무르고 싶을 만큼 썼다. 코가 찡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그는 겨우 넘어오려는 기침을 삼키고서 입가를 정돈했다.
“…독한데.”
“독하다. 몇 도냐 이거?”
“그런 건 안 쓰여 있는데.”
“…하긴. 원래 술은 맛으로 먹는 거 아니랬어.”
“그럼 뭘로 마셔?”
“분위기.”
“그런 게 어딨어…”
“그럼 인생의 쓴맛으로.”
다시 우뚝한 콧등을 숙인 닭은 기민한 후각으로 향을 맡았다. 몇 모금을 홀짝이며 잔을 비운 기린이 의자에 접어올린 다리 하나에 이마를 의지하는 새 새까만 닭이 다시 잔 두 개를 채웠다.
증류주는 그다지 밝은 사연이 얽힌 건 아니었기에 착잡하게 속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반주 상대의 기분까지 해칠 마음은 없었으므로 지우스는 그가 입에 올리는 가벼운 대화에 조금은 어울렸다. 이야기할 상대라도 있으니 술맛이 돋아 다시 잔을 채웠다가 번갈아 비운다. 사실 그는 잡담을 즐기곤 했다. 건너에 앉은 기사도 과묵한 성격은 아니라 같이 살고 부터는 시시콜콜한 회포가 오가는 일이 적잖았다. 술잔으로 노랗게 물든 제 눈이 잠시 반사된다. 하지만 모든 걸 웃음이나 이야기 속에 풀어 해쳐버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비밀을 품어도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상대.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그런 이들의 곁에 머무를 뿐이었다.
갈수록 대화가 옅어지고 술잔끼리 부딫히는 소리만 울렸다. 닭은 건배한 잔을 입에 걸쳤다가 곧 털어냈다. 잔을 채우다가 시선이 겹치면 술잔에 반쯤 가린 얼굴이 반투명하다. 지우스는 턱을 괴는 모양으로 붉어진 얼굴을 옷소매로 살짝 가렸다. 의자에 몸을 의탁한 기사는 예상대로 잘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맛으로 먹는 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서로의 달빛 같은 눈을 안주 삼아 술 마신다는 옛시조처럼 가볍게 지우스에게로 맞부딫혀 왔다. 특유의 지독한 맛도 그런대로 괜찮게 느껴져 병의 무게가 끊임없이 가벼워져 갔다. 마음 속에 눌러 붙은 말 같은 게 나올 만한 기분이 든 것은 아니었다. 술을 받은 사연이 아니었다면 이만큼이나 마시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러기에 온전히 자기 몫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의 잔에 담긴 쓴 술의 맛 같은 것이. 밝은 색 머리칼 속에서 발견한 건 비슷한 이지였던 것처럼.
해가 기울다 못해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지우스는 취해 있었다. 닭은 병을 술잔께로 견주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술을 두고 부족한 마지막 잔을 비웠다. 몇 시간의 대작 끝에 몸을 일으켜 식탁 위에 거의 엎어지다시피한 이를 흔들어 깨웠다.
“기린. 방에 가서 자.”
지우스는 몰랐으나 만취의 감각은 그의 몸에도 구석구석 돌고 있었다. 기사는 취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멀미를 하기도 하며 인간적인 면이 두어 군데 그에게도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티가 나지 않는 편이었고, 그의 취기를 알아차리기에 담청색 기린은 그보다 일찍 취해있었을 뿐이다. 두 세번 이명이 불리운 뒤에야 녹색 머리칼 사이에서 덜 여문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열감으로 붉어진 얼굴이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왜, 하고 무심결에 말을 내려던 새까만 닭이 입을 다물었다.
“너랑 같이 자면 좋겠어.”
“…뭐?”
“네가 외로운게 싫으니까.”
“난 안 외로워.”
그렇게 말하던 새까만 닭은 저도 모르게 등을 건드리던 손을 멈칫거린다. 이녀석은 언제부터, 멋대로 이런 생각을…
그러나 다시 그의 눈을 봤을 때 눈빛에는 총명함이라곤 없이 광택 없는 금속처럼 빛이 퍼져있을 뿐이다. 절반이 텅 비어버린 금안을 보고서야 그가 얼마나 인사불성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취한 거였군.
닭은 별반 무겁지 않은 체중을 어깨에 싣고 기린의 방문을 열었다. 가누지 못하는 몸을 침대에 던지자 그는 두 번 술주정 않고 이내 잠에 들었다. 거실에는 인적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까만 닭은 컵과 병을 들어 그날 내내 그들이 청소한 설거지대로 가져다둔다. 흰 도자기 아래에는 도수가 적혀 있었으나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물건이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보니 밤 베란다의 저녘으로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비를 깰 겸 술을 좀 맞았다. 비가 지나치게 시원한 걸 느끼고서야 제가 좀 취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안 외로워. 기린. 그건 정말이었다. 와론은 손 안에 익숙한 원석을 말아쥐다가 집안으로 들어와 제방대신 거실 소파에 누웠다. 켜지 않은 불은 끌 필요도 없었다.
속병은 무심하지도 무탈하지도 않게 그를 덮치고 갔다. 증류주라 할지라도 그만큼 먹으면 속이 남아나질 않았다. 지우스는 제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거실에는 어제 반나절 동안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아무 변화도 없었으며, 거울 속의 양치를 하는 자신도 본래의 몰골 그대로였다. 화근이 되었던 술병은 치워두었던 것인지 적어도 당장은 보이지 않았다.
“….”
그러나 소파 위에 누워 자던 동거인의 이마를 짚은 지우스는 곧장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옷도 옷이거니와 머리카락이 덜마른 물기를 품고 들러붙어 있었다. 그것은 세수를 마치고 나와 제 상의로 떨어지는 신선한 물방울과는 다른 종류였다.
“샤워하고 잤어?”
한박자 늦은 반응이 되돌아온다.
“비 맞은 걸세….”
“비를 왜 맞아.”
“시원하길래….”
저는 어깨까지 이불을 말아 덮고 잔 지우스는 나지막히 한탄을 가했다. 이것도 쉽지 않구나, 반쯤은 보상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이곳에 평범한 일상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이 밝도록 열린 베란다의 문에서 바람이 들었는지 닭의 목소리가 낭랑함을 잃고 맹맹했다. 거실 한켠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잠들었던 기사는 여즉 덜 깨어서는 서늘한 제 손에 이마를 식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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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론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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