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가 지키는 섬 (1)
그의 시작이자 끝일 고향으로
출처 : unsplash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여름이 찾아왔다. 위도상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해 꽤 늦은 시기까지 서늘한 바람이 머무는 신오지방도 어느덧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벌레 포켓몬들이 사방을 날아다니고,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에 온갖 포켓몬들이 일광욕을 즐기거나 더위를 피해 그늘을 찾아 여행을 떠나느라 부산스러운 계절이기도 했다.
인간들 역시 피서 계획을 짜기 바빴다. 빡빡한 도시의 생활을 뒤로하고 한적한 시골로 도망치거나, 아예 다른 지방으로 날아가 이색적인 경험을 쌓거나, 또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혼자만의 아늑한 휴가를 즐기거나.
사람과 포켓몬의 수만큼 다양한 휴가 계획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잔모래마을에 위치한 아르겐의 연구소에서는 그러한 계획들을 마구 꺼내 들며 뜨거운 토론을 벌이는 대신 조금 다른 주제로 가벼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확정 멤버는 이렇게 정해진 거지?”
이드리스가 클립보드 위의 종이를 볼펜 끄트머리로 톡톡 치며 물었다. 종이 위에는 함께 여행을 떠날 사람들의 이름과 가져가야 할 물품, 선물로 드릴 물건 등이 정갈한 글씨로 쓰여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아있던 앨빈이 볼펜의 끝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중간에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브리는 알아서 온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페이만 잘 챙기면 되겠네.”
“우리? 페이 어머님이 믿고 계시는 사람은 너니까 네가 잘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건 당연하지만 같이 하면 더 좋잖아.”
“말이나 못 하면.”
어김없이 튀어나온 맥 빠지는 대답에 이드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인 앨빈은 그녀 앞에 놓여있던 클립보드를 잡아 올리고는 항목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선물은 굳이 안 챙겨도 된다니까. 항상 말하잖아. 그냥 놀러 가는 것뿐인데 뭐 하러 이런 걸 챙겨.”
“너는 너네 집이라서 편하겠지만 우리는 손님 된 입장으로써 당연히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한단다? 그게 예의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여러 명이 거의 일주일을 내려가서 신세 지게 됐는데 어떻게 선물 하나 안 챙겨가니?”
“아니, 그래도 미안하잖아. 우리끼리만 내려가기 심심해서 같이 가자고 말 꺼낸 건 난데.”
“하지만 가고 싶다고 한 건 우리잖아요? 케니스 군이 강요한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온실의 문을 열고 하얀 가운 밑단에 흙을 잔뜩 묻힌 아르겐이 원예 바구니를 물고 있는 앱솔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포켓몬들이 지낼 곳들을 정비하고 식물들을 살피느라 함께 고생해 준 파트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그는 목장갑을 벗고 하얀 면장갑으로 갈아 끼우며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와 테이블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저희 마음도 편해요.”
“으음…,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 없긴 한데요….”
앨빈이 곤란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러자 이드리스가 뾰족한 목소리로 툭, 쏘아붙였다.
“애초에 너네 부모님이 받으시는 건데 왜 네가 이래라저래라니? 그거 이리 줘! 주문해 놓게.”
이드리스가 앨빈의 손에서 클립보드를 확 낚아채고는 종종걸음으로 컴퓨터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 멋쩍게 웃은 앨빈이 자세를 고쳐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 체격이 체격인지라 튼튼한 금속제임에도 의자가 끼익, 하고 신음을 내며 살짝 뒤로 밀려났다.
“ 이 멤버로 본가 내려가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네요. 다들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휴가 맞출 새가 없었잖아요. 오션은 학교 때문에 이번에는 못 가게 되어서 아쉽지만.”
“케니스 군이랑 오션 군이 바빴던 거죠. 저희야 365일 중 대부분이 백수인 거나 다름없는걸요.”
그게 연구자라는 직업의 좋은 점이기도 하고요. 하고 곱상한 얼굴에 곱게 미소를 그리며 아르겐이 덧붙였다. 이드리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가 네가 할 일을 대신해주니까 그런 거다.’,라는 뜻의 말을 큰 소리로 꽤나 장황하게 늘어놓았기에 금세 미간이 구겨졌지만 부드러운 미소만은 굳건했다.
“아이코, 귀야…. 음, 어쨌든 기대되네요. 케니스 군 말대로 몇 년 만에 내려가는 거니까요. 어머님, 아버님은 건강하시죠?”
“너무 건강해서 탈이시죠. 슬슬 건강 생각해야 할 나이인데 솔직히 저희 부모님은 한참 지나서도 그런 걱정 안 하실 것 같아요. 하긴, 그래서 저 같은 아들이 태어난 거겠죠.”
앨빈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아르겐이 입을 살포시 가리고 작게 웃었다. 앨빈 역시 마주 웃고는 고개를 젖히고서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몇 년 사이, 앨빈은 국제경찰에 입사하고, 아르겐은 연구소를 차리고, 이드리스는 아르겐의 조수 겸 체육관을 운영하게 되면서 한동안은 주말에 몇 시간 정도 모이는 것도 거의 할 수 없었다. 이 세 명이야 같은 지방,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으니 바쁜 일정 사이에 아주 잠깐이라도 만나서 교류를 이어갈 수 있었다만 오션은 아예 가라르 지방으로 떠나 대학에 입학했기에 더더욱 만나기 힘들어졌다.
앨빈은 가만 눈을 감으며 넷이서 함께 호연지방을 여행하던 때를 회상했다.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지만 서로 의지하고 지냈던 기억 역시 많았기에 새삼스레 그 시간이 그리워졌다. 그때는 모두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서 같은 곳을 거닐며 같은 것을 보고 경험했었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가 더욱더 깊이 추억의 파도 속으로 가라앉으려 할 때, 아르겐의 목소리가 앨빈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오션 군도 갈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쉽네요. 전에 한 번 같이 갔을 때도 엄청 좋아했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평생 살고 싶다면서. 파비코리도 오랜만에 케니스 군 가족과 만날 수 있었을 테니 분명 좋아했을 텐데.”
“학교가 문제야. 대학 교수들이나 박사들은 왜 학생이나 직원들 일정은 눈곱만큼도 생각 안 하나 몰라? 큰 일정을 잡을 거라면 적어도 한 달 전에는 공지하는 게 맞지 않나?”
이드리스가 다시 테이블에 앉으며 툭 내민 말에 아르겐이 윽, 하고 신음을 뱉었다. 여전히 이드리스에게는 아무도 못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앨빈이 쿡쿡 웃었다.
“아르겐 씨, 좀 잘하세요. 하나밖에 없는 조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어요?”
“네…, 제가 좀 더 신경 쓸게요. 죄송해요, 이드리스 씨.”
큼큼, 하고 아르겐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자 앨빈은 결국 크게 웃어젖혔고, 이드리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과 조용한 연구소의 분위기가 졸음을 일으키는지, 얼마 안 가서 이드리스가 작게 하품을 하고는 테이블에 엎어졌다. 포개어놓은 두 팔에 하얀 얼굴을 올려놓고서 길고 가는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살포시 닫았다.
“그럼…, 만나는 날은 8월 첫째 주 금요일 아침 9시인 걸로 하는 거지? 일정 펑크 내지 마. 피곤해지니까….”
“안 내. 페이는 내가 데려올 테니까 걱정 말고. 그리고 잘 거면 위에서 자! 허리 굽는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미동도 없었다. 앨빈의 잔소리에 귀가 따갑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기만 했지. 그녀의 모습에 앨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자 아르겐은 어쩌겠냐는 듯이 그저 곱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드리스에게 무어라 더 말을 꺼내봤자 아까와 비슷한 반응 내지 더한 짜증이 돌아올 것을 잘 알았기에 두 사람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 없이 가만 앉아있기도 그렇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벌써 헤어지기에도 아쉬웠기에 아르겐이 먼저 새로운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어지간한 정도의 대화 소리가 밤잠을 설친 그녀의 수면에 방해가 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전히 페이 군이랑은 잘 지내나 보네요. 연락도 자주 하겠지만 그만큼 둘이 만나기도 하죠? 레이퓌르 부인께서 케니스 군을 신뢰해 주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이번에 케니스 군 고향에 같이 가는 걸 허락해 주신 걸 보면 말이에요.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따르는 아이는 처음 봤어요. 케니스 군이 정말 좋은가 봐요.”
그 말에 앨빈이 머쓱해하더니 콧등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러게요…. 제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니 얼떨떨할 따름이라니까요. 그냥, 길 잃어버린 아이를 도와줬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이야.”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더라도 누군가에겐 길이길이 마음에 새길 추억이 되기도 하죠. 특히나 그맘때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말이에요. 케니스 군에게도 그런 대상이 있잖아요? 형님이라던가.”
아르겐의 짐작에 앨빈은 말 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그것이 순수한 기쁨이 아닌 씁쓸한 공감으로 물들어있음을, 아르겐은 알지 못했다.
그때, 위층에서 타박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 앨빈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의 팔목과 다리, 파란색의 어깨와 하반신, 끝이 살짝 접힌 꼬리, 옅은 밀색의 상체. 그리고 뾰족한 두 귀와 길쭉한 주둥이, 눈매가 진하고 날카로운 눈, 작은 입이 절묘하게 자리 잡은 얼굴이 차례로 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루카리오 씨. 내려오셨어요?”
아르겐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루카리오가 눈매를 살짝 휘고서 대답했다.
“예, 놀다가 피곤했는지 다들 몬스터볼에 들어가거나 잠에 들어서 내려왔습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안 그래도 방금 마무리된 참이에요.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내 올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주신다면 감사하죠.”
루카리오가 대답함과 동시에 아르겐이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1층 한쪽에 마련된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뒤 루카리오가 행여라도 이드리스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올 때까지 앨빈은 멍한 시선을 자신의 형에게 쭉 고정한 채로 멈춰 있었다.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히 자리에 앉은 루카리오가 이내 진홍색 눈동자를 굴려 앨빈을 향하고는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야?”
그 말에 앨빈이 실소를 흘렸다. 파동으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포켓몬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새삼스럽게 우스웠다. 본인도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태연자약한 표정을 하고서 말문을 트는 얼굴을 마주한 앨빈은 곧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질문에 답했다.
“아니? 그냥.”
그리고는 테이블에 올려둔 상처투성이 손의 검지로 그 표면을 톡톡 치면서 말을 잇는 것이었다.
“집에 내려갈 때 나도 뭐 좀 사갈까 싶어서.”
앨빈이 시선을 돌리자 루카리오는 비어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창가의 햇빛이 스며 하얗게 빛나는 부분과 빛이 닿지 않아 상대적으로 어두운 흰색이 공존하는 둥근 나무판자가 진홍색으로 물든 루카리오의 마음의 창에 닿기 무섭게 눈꺼풀이 닫혔다.
“좋은 생각이네. 가끔은 철든 시늉도 좀 해야지.”
곧 앨빈이 웃음 섞인 숨을 뱉었고, 대화는 멎었다. 이어진 침묵은 아르겐이 홍차와 다과를 내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배 뜨는 날은 이래야지.”
한쪽 어깨에 걸친 작은 배낭을 고쳐 멘 앨빈이 손날을 눈 위에 붙이고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랗고 맑은 하늘, 그 아래 펼쳐진 더욱 푸른 바다. 무엇보다 솔솔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물가시티의 선착장은 예상보다 붐볐다. 이맘때라면 리조트에리어와 연결된 파이트에리어로 향하는 배편이 있는 선단시티에 사람이 몰릴 줄 알았건만, 그럴 것을 알기에 오히려 다른 곳으로 피서를 떠날 계획을 짠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발전소와 공업단지가 주를 이룬 물가시티도 이 정도이니 신호지방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운하시티는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앨빈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정반대 편에 위치한 도시의 근황을 궁금해하고 있을 때, 작은 발소리와 함께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저씨…. 밖에 쭉 계시는데 안 추우세요?”
엘레이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두 손에 알 케이스를 꼭 쥔 페이가 앨빈의 곁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아침의 서늘한 공기는 일반인에겐 그저 시원했을지라도 원래 몸이 약한 페이에게는 해가 될 수 있기에 안쪽에서 잠깐 있으라는 앨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메리프 털로 짜인 부드럽고 도톰한 카디건으로 몸을 싸맨 모습에 잔소리는 미뤄두기로 한 앨빈이었다.
“난 괜찮아. 근데 왜 나왔어? 밖에서 애들 기다리고 싶어서 나온 거야?”
“음, 네. 그리고 안에서 엘레이드랑 같이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아저씨랑 있는 게 더 좋아서요.”
케이스를 제 품에 꼭 껴안으며 페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엘레이드가 듣고 행여라도 기분이 상할까 걱정되어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갔다. 맘만 같아선 소리 내어 웃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페이의 노력을 무시하는 꼴이 될 터이니, 웃음을 꾹꾹 눌러 참고서 앨빈이 손을 내밀었다. 조그맣고 창백한 손이 상처투성이 손가락을 붙잡았다. 제 손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작고 하얀 손을 꼭 감싸 쥔 앨빈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착장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아저씨께 혼나지는 않을까?’, 같은 고민을 하면서 한참 발을 동동 굴리고, 엘레이드에게 몇 번이나 비슷한 질문을 건넸을 페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기왕 나왔으니까 바다 구경이나 하면서 기다릴까?”
앨빈의 질문에 페이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앨빈이 페이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오더니 한 팔로 덥석 안아올리고는 그대로 방파제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라서 케이스를 더욱 와락 끌어안으며 작게 단말마를 내지르는 페이에게 걱정 말라는 듯 제 허벅지에 작은 몸을 앉힌 뒤 그 얇은 허리를 탄탄하고 억센 손으로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순간 공중으로 붕 솟아오른 감각 때문에 눈을 꾹 감고 몸을 꽉 웅크렸던 페이는 더 이상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후에야 고개를 들고 눈을 뜰 수 있었다.
“우와아…!”
쏴아아, 하는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와 함께 새벽안개가 바다 위를 덮으며 유영했다. 막 나온 것이 분명한 하얀 해가 점차 떠오르면서 퍼지는 노란빛에 닿을 때마다 안개의 베일 자락에 하나 둘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사이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왕눈해나 독파리, 총어, 형광어 같은 물타입 포켓몬들이 시원한 바다를 가르며 하얀 자욱을 남겼다. 마치 푸른 캔버스에 하얀 물감으로 일정한 패턴을 그려내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바다 오는 건 처음이지? 어때? 멋있지 않아?”
“네에…. 정말 그래요. 엄청 예쁘고 멋있어요.”
앨빈은 바다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페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물 빠진 쪽빛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여 꼭 눈앞의 해무와 닮았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아저씨 고향 바다도 이렇게 생겼나요?”
“응? 뭐, 그렇지? 바다는 다 이어져 있으니까.”
한껏 들뜬 아이의 질문에 앨빈이 생각의 흐름을 거치지 않고 툭, 답을 내뱉고는 곧 난처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답을 원한 게 아닐 텐데’, 따위의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거둘 수 없는 법. 뻔한 대답에 페이가 실망했을까 싶어 차마 시선을 내릴 수 없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살짝 곱실거리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래. 바다는 다 이어져 있지. 입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뇐 앨빈은 저 멀리 해무가 걷히기 시작한 수평선을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몸을 좀 더 웅크려 페이가 춥지 않게 품에 꼭 안고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그러네.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바다이긴 하지.”
앨빈이 일생의 시작을 보냈고, 아마 끝도 보내게 될 바다. 가족들의 터전이자 고향. 온갖 종류의 추억과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던 그곳. 앨빈에게 있어서, 그곳은 가장 깊고 활기가 넘치고 가장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페이가 뒤를 돌아 자신을 올려다보려 하자 앨빈은 머리만 살짝 들어 올려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뿌연 잿빛이 가신 푸르고 커다란 눈동자가 탁하고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앨빈의 눈꼬리가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페이한테 보여줄 수 있게 돼서 기쁘네. 가서 재밌게 놀다 오자. 페이 또래 애들도 많으니까 친구도 잔뜩 사귀고. 아저씨가 도와줄게.”
그러자 페이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때마침 바다의 해무도 완전히 사라져 파란 수평선이 태양빛에 하얗게 반짝였다. 마치, 지금 앨빈의 품에 안긴 페이의 눈동자 같았다.
“네!”
밝고 힘찬 목소리가 파도에 섞여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밝아진 모습에 기특하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해서 앨빈 역시 환하게 웃어주며 페이의 동그란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어주었다. 아이와 어른의 각기 다른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주변에 퍼져나갔다.
그때였다. 뒤에서 조용히 뒷짐을 진 채 둘을 쭉 지켜보고 있던 엘레이드의 시선이 움직였다. 포켓몬의 이변을 빠르게 눈치챈 앨빈이 엘레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엘레이드?”
“엘레, 레이드-”
엘레이드는 시선을 고정하고서 팔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앨빈이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려 하자, 날카롭고 야무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바닷바람이 얼마나 찬데 애랑 밖에 나와있어? 제정신이니?”
보라색 캐리어를 옆에 세운 이드리스가 앨빈을 보고 대뜸 잔소리를 쏘아붙였다. 그녀와 함께 도착한 아르겐과, 길안내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루카리오도 앨빈과 페이가 앉아있는 방파제로 다가왔다.
“내가 알아서 잘 챙기고 있었어.”
그녀를 안심시킬 겸,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말릴 겸 앨빈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오히려 도끼눈을 뜨고서 앨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알아서 잘 챙기긴! 그렇게 안고 있는다고 바람이 안 통해? 어머, 얼굴 차가운 거 봐. 페이야, 얼른 들어가자, 응?”
그녀가 아예 옆자리에 쪼그려 앉아 페이의 볼을 곱고 긴 손가락으로 감싸며 호들갑을 떨자 페이는 어쩔 줄 모르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자신이 괜찮다고 말해야 앨빈이 곤란하지 않을 테고, 또 실제로 괜찮았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어른한테 말대답을 해도 될까 고민하느라 타이밍을 놓쳤겠지만, 지금의 페이는 조금 달랐다. 겨우겨우 쥐어 짜내듯 힘겨웠지만 그래도 입을 벌려 이드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괘, 괜찮아요…! 아저씨가 따뜻해서 별로 안 추웠고, 어…, 이렇게 옷도 입었고…, 그리고…, 아저씨가 나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제가 나와있었던 거라서…!”
그 모습에 이드리스를 제외한 모두의 입술에 잔잔히 미소가 번졌다. 엘레이드는 소리 없이 활짝 웃으며 루카리오의 팔을 팔꿈치로 톡톡 치고는 귀엽다는 듯 페이를 연신 가리켰다. 반면에 이드리스는 당황한 기색으로 페이와 맞춘 눈을 깜빡였다.
“… 그래? 그랬다면야 별 수 없지만….”
“아무튼, 이드리스 씨 걱정은 알아줘야 해. 좋은 거지만 가끔 과해서 독이라니까. 누가 독타입 체육관 관장님 아니랄까 봐.”
이드리스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에 앨빈이 대화에 끼어들고는 팔을 움직여 제 품 밖으로 조금 몸을 뺀 페이를 바로 감싸 안았다. 다른 팔로는 팔꿈치를 페이의 엉덩이 아래에 넣어서 든든히 받혀 안정적으로 옆으로 안아 든 자세가 되자 천천히 일어났다. 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같았던 시야가 높아지자 이드리스도 그를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앨빈의 붉은 눈동자가 아직 동그랗게 뜨여진 채인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휘어졌다.
“그리고 넌 나를 너무 못 미더워하는데, 내가 너보다 애 더 잘 보거든. 섬에서 애들 돌보다 사범까지 된 사람 실력을 얕보지 말라고.”
“그건 그래요. 이드리스 씨가 상냥하기는 하지만 애보기 실력에서는 케니스 군한테 명함도 못 내밀죠.”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띤 아르겐이 앨빈의 말을 거들었다. 루카리오와 엘레이드도 그렇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귀 끝이 확 붉어진 이드리스가 이를 꾹 물고는 긴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폈다 하더니 끝에 가서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 사실이라서 할 말이 없네….”
뭉개져버린 그녀의 목소리에 결국 참지 못한 앨빈과 아르겐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페이는 깜짝 놀라서 이래도 괜찮냐는 듯,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루카리오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이내 ‘괜찮은 거구나….’, 하고 안심하며 제 품에 안은 알 케이스를 더 꼭 안고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때마침 뿌우우우-, 하는 배의 우렁찬 경적이 항구를 가득 채우자 일행은 웃는 걸 멈추고 소리가 나는 선착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길게 늘어지며 작아지던 경적이 완전히 끊기자 바통을 이어받듯 일행이 탈 배의 출항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서둘러 탑승해 달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이제 출발하려나 보네요. 어서 들어갈까요? 이 이야기는 배에서 마저 하죠.”
아르겐이 하얀색 캐리어의 손잡이를 바로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드리스의 도움을 받아 앨빈이 하이퍼볼에 루카리오와 엘레이드를 돌려놓고서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배에 오르기 전, 이드리스가 여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는 귀 한쪽을 손으로 감싸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 하자던 얘기 말인데. 안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르겐.”
“아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맑은 미소가 묻어나는 대답에 “짜증 나.”, 하고 이드리스의 퉁퉁 불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즐겁게 웃으면서 배에 오르길 서두를 뿐이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난 지 어언 3시간이 넘게 지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서 창 밖으로 보이는 햇살이 바다에 반사되어 보석이 흩뿌려진 것처럼 반짝였다. 그 풍경을 가만 보던 앨빈이 들추고 있던 커튼을 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선실은 고요했다. 일행의 목적지이자 이 배의 종착지까지 가는 다른 승객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일행도 긴 항해에 지쳐 잠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페이는 앨빈의 허벅지를 베고 모로 누워서 노란 카디건을 두른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손으로 토닥이는 앨빈의 입가에 한순간 부드럽게 미소가 지어졌다가 사라졌다. 곧 창가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는 멍하니 선실 저편의 녹회색 벽을 응시했다. 주변이 조용해지니 미뤄두었던 고민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배가 파도를 가르는 소리와 엔진이 울리는 소리,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 곤히 잠든 이들의 숨소리를 한 귀에서 다른 귀로 흘려보내며 한동안 고민의 실타래를 굴리고 있자니, 펑! 하는 파열음과 함께 눈부신 푸른빛이 앨빈의 앞자리에 뭉쳐 형태를 드러냈다. 루카리오였다.
“형?”
앨빈이 손바닥에서 손을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빛이 가시며 완전히 몸체가 드러난 루카리오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앨빈과는 대조되는 차분한 눈빛을 보내었다.
“갑자기 왜 나왔어? 볼 안에 오래 있어서 답답했어?”
“아니, 네가 답답해서 나왔어.”
“내가?”
“그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며 묻는 듯한 앨빈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는 루카리오였다. 저 머리 안에 굴러가는 실타래의 소음이 꽤나 시끄럽다는 걸 본인도 알 텐데 태연하게 모르쇠를 일관하는 저 동생을 어찌해야 할까 답답하기만 했다. 꽤 예전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그만큼 루카리오에게도 꽤 묵은 고민이었기에 가슴 한편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약간 책망하는 듯한 눈빛을 한 번 쏘아주고서 형은 동생에게 말을 건넸다.
“너, 아까 페이한테 했던 말 고민하고 있었잖아. 친구 많이 사귀자는 둥, 재미있게 놀자는 둥 했던 말. 페이는 대부분 병원에서 지냈고 몸도 약하니까 혹시라도 바닷바람이 독이 되진 않을까, 너무 기대하고 있는 걸 미리 덜어주지 않아 도착하고 나서 실망하는 게 아닐까, 거기 있는 애들이랑 안 맞아서 오히려 소외받고 상처받지는 않을까. 이런 머리 아프고 생각해 봐야 해결 안 되는 고민 말이야.”
“아하하, 이런. 들켰네.”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동생의 모습에 루카리오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네가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나한테도 전달돼서 내 머리도 같이 아파지거든? 설마 네 형이 루카리오라는 걸 잊어버린 건 아닐 테고. 이제 모르는 척 능청 떠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앨빈.”
“그래야겠네. 더 혼나기 싫으니까 말이야.”
말과는 달리 앨빈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여전했기에, 슬쩍 눈을 흘기며 한 마디를 더 쏘아붙이려던 루카리오였다. 그러나 커튼 너머의 해가 구름에 가려져 배 안의 빛이 줄어듬과 동시에 앨빈의 얼굴에도 서서히 그림자가 지자 입을 다물었다. 다시 턱을 괴고서 입가를 가리고, 아까보다 어두워진 커튼을 응시하는 앨빈의 눈이 점차 탁해졌다. 꼭 하얀 물에 검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서서히, 서서히, 맑게 타오르던 붉은색이 어둠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가끔 생각이 많아질 때면 앨빈은 이런 표정을 하곤 했다. 루카리오는 그것이 동생의 상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다.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상냥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졌기에 더더욱 사소한 것에 상처를 받고 시름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에게 기꺼이 아이를 맡겨 준 부인의 신뢰를 저버리진 않을까, 처음 해보는 일과 처음 가보는 장소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푼 아이를 실망시키고 더 가서는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따위의 걱정을 하면서 남들이 있을 때는 언제나 기운차고 능청스럽게 굴어대는 동생이 형은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남들이 모두 다 잠들고 나서야 그 기색을 조용히 드러내는 모습을 마주한 지금 그 안쓰러움은 더더욱 도드라졌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잘 돌보면 되는 거잖아. 너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도와주실 거라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나도 있고, 엘레이드도 있고, 부모님도 계셔.”
“응, 알아.”
“너무 너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마. 그러다 너 병이라도 들까 봐 걱정 돼, 앨빈.”
“응.”
애정 어린 걱정에 따라오는 것은 공허한 대답이었다.
고작 이따위 위로밖엔 건넬 수 없다는 사실이 안쓰러움과 함께 루카리오의 마음을 옥죄었다. 앨빈의 마음에 그늘이 질 때마다 루카리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항상 좌절했다. 마음을 읽기만 하면 뭐 하나, 위로를 건네면 뭐 하나, 실질적으로 해결해 줄 능력이 없는데. 항상 마음을 꽁꽁 옭아매고 있는 가시덤불이 오늘도 한 뼘 자라난 것을, 루카리오는 가슴의 뜨끔한 감각을 통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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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전문적인 다람쥐
비밀댓글이에요
조용한 나무늘보
정말 살아있는 친구들 같아요. 지리감이나 현장감이 정말 잘 드러나서, '아, 역시 포켓몬 세계에서 사는 친구들은 이러겠지' 싶었습니다. 전개도 어디 고이지 않고 쭉쭉 나가고, 그런 와중에 언젠가 어디서 드러내실 돌부리가 툭, 툭 걸리니까 하편도 얼른 읽고 싶어졌어요. 건필하세요! 저는 이 친구들의 이야기, 쭉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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