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떨어진 꽃

Sit down beside me -1


꽃이 떨어진다. 그런 이름으로 태어나서 인생이 이렇게까지 뒤틀려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딱 10년 전이다. 그때가 19살이었으니까. 한창 바쁜 시기다. 19살의 여름은. 덕분에 집에 눌러 붙어 앉아 있는 일은 잘 없었다. 성실한 편은 아니었지만 시키는 일은 다 해내는 편이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게 일상이었다. 대부분의 입시생들은 그럴 것이다. 아주 평범했다. 이름이 특이하다고 놀림 받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생이 꼬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커다란 사건은 없었다. 무난하고 평이하게 흘러가는 인생. 그것이 19살 8월 무렵까지의 류낙화의 삶이었다.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그 날의 일을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게 된다던데 그런 것도 없었다. 너무 평범해서 그런가. 점심과 저녁 급식에 뭐가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부분은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낙화가 기억하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집 문을 열기 전에 느껴지던 기이한 적막. 평소랑은 다른 유일한 점이었다. 워낙 무딘 성격이어서 피냄새를 맡았다거나 일을 예견한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큰 사건이 있으면 컵을 깨던데 오히려 그 날은 선생님들에게 혼나지도 않았고 체육시간의 축구에서 이기기도 했던 거 같다고 낙화는 떠올렸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완전히 잊은 것도 아니구나. 조금은 기억이 난다. 마치 어제를 기억하는 것처럼. 애매하고 흐릿하게.

낙화가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았을 때 집 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소리가 안 들린다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중학생이던 동생이 시끄럽게 게임을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머니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야 원체 조용한 사람이었다만은 그래도 그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전제품들이 웅웅거리는 소리도, 집이 내야 마땅 할 소음도 하나도 없었다. 빈집처럼 고요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래서 문을 열기를 주저했다면 그의 기억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문고리를 돌렸고 현관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을 때 낙화는 보고 말았다.

이상하지.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 있었다. 남동생은 방에 처박혀 잘 나오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주로 부엌에서 소일거리를 했는데, 아버지는 서재에서 잔업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데 온 가족들이 거실에 누워 있었다. 이상하다는 걸 그런 부분에서 느꼈으니 낙화가 얼마나 무디고 사고가 느린 사람인지는 알만 할 것이다.

거기서 더 들어가서는 안됐다. 다시 집 밖으로 나왔어야 했다. 눈을 뜨고 바닥에 눌어 붙어 있는 가족들을 유심히 들여다볼 생각을 해서는 안됐다. 하지만 낙화는 가족들이 뒤엉켜 누워 있는 사이로 들어갔다. 피웅덩이가 크게 고여 있었는데 그걸 피할 생각도 없이 철벅이며 밟고 가장 먼저 보이는 동생의 앞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동생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교복도 갈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교복 조끼가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 피가 흘러내려 굳어 있었다. 얼마나 지난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하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것 같으니 아마 6시 전후였으리라. 낙화는 부릅 뜬 동생의 눈을 손으로 덮어 감겨 주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감고 있을 때가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대답을 할 것 같았다. 동생은 성격이 모난 곳이 없고 둥글둥글해서 귀찮게 굴어도 잘 화내지 않았다. 사춘기 애답게 굴지 않는 게 웃겨서 자주 장난을 쳤던 게 생각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입을 벌리고 무어라 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얼굴이 굳어버린 아버지가 보였다. 그의 눈을 감겨주기 전에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혼비백산 하여 소리를 지르고 달려 가버리는 발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이 생각을 할 때까지 낙화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동생은 곧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고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호통을 칠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낙화가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은 난도질 당해서 피범벅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검붉은 피가 칠해진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어서 낙화는 그게 자신의 어머니가 맞는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들이닥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적막을 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 피웅덩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누군가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고 낙화는 순순히 그를 따라 갔다. 여름인데도 서늘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은박 담요를 덮어주었다. 원래 이런 건 물에 빠졌던 사람한테나 덮어주는 거 아닌가? 그걸 덮으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려서 그런 생각이나 했던 거 같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바쁘게 지나다니고 경찰들, 흰 비닐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늘어지는 테이프처럼 잔상이 남아 보였다.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제대로 대답한 기억이 없었다. 그게 그 날의 기억이 끝이다. 이후로는 암전된 것처럼 혼란스럽기만 해서 기억해내기를 그만두었다.

복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었다. 왜 내 가족이었을까. 그런 생각은 들었다. 그러다 그 날 집에 들이닥쳤던 강도 무리 중 하나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즈음에서는 이미 성인이었다. 낙화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다. 복수를 하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데 그냥 그런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머리 속 한 구석에서는 모든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다.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런 추진력이 있는 줄은 자신도 몰랐으니 낙화에게 있어서 그 일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잡혀 들어가지 않았던 강도 무리를 혼자서 다 죽였다. 그 중 가장 우두머리라는 작자는 징역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다. 그 강도들 중에서 누가 어머니를 죽였고 누가 동생을 찔렀으며 누가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에게 죽음의 죄가 달려 있었으므로 낙화는 그들을 모두 처형해야 했다. 가족들을 위해서. 그것이 자신만 살아 남은 존재의 의의라고 생각했다. 죄인을 벌한다. 그들을 죽임으로써 낙화 역시 죄인이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남은 강도의 우두머리를 잡아야 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고 나서는 당연히도 평범한 직장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범죄 조직에 발 담그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그 강도들과 자신이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화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이제 낙화 역시 그 죽임 당한 이의 가족에게, 또는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처형 당할 운명인 것이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번 비틀린 것을 바로 잡기란 쉽지 않다. 목이 떨어진 꽃을 다시 줄기에 이어 붙이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꺾여버린 운명을 원래의 흐름대로 돌릴 수 없었다. 적어도 낙화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누군가 곁에서 그를 도와줬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람도 없었다. 낙화는 스물 아홉이 될 때까지 혼자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일도 없었다. 값싼 연민이나 동정을 받기엔 자신의 죄 역시 무거웠으므로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워진 친구들이나 동료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은 간혹 있었다. 그들은 낙화의 곁은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그런 동료들도 쉽게 목이 날아갔다. 그럴 때마다 낙화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일이 없어서 주변 사람들이 꽃의 목이 떨어지는 것처럼 목숨을 잃어가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강도단의 우두머리. 그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온 신입이 그 우두머리와 함께 징역을 살았다고 했다. 그 사람이 진짜 가족들을 죽인 녀석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듣자하니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마지막으로 죽인 것이 10년 전의 여름 서울시 소재의 A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정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녀석이 그 당시 자신이 행했던 일에 실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낙화는 어리둥절 했다. 실패라니. 내 가족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놓고 무엇에 실패했단 말인가. 머리 뒤쪽에서부터 서늘한 분노가 차올랐다. 낙화는 그것을 억누르고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신입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더니 낙화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저보다 먼저 출소했는데 아무래도 자기 조직에 돌아간 모양이에요. 그 조직에서는 꽤나 이름 난 간부급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조직에서도 그대로 받아준 모양이고요."

신입은 낙화가 그와 관련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낙화는 신입의 등을 두드려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쩐지 낯선 느낌이었다. 시야가 트이는 것처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느낀 분노였다. 그 작자가 했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실패. 그렇게 말했다고. 낙화는 좁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전기레인지를 켰다. 얼마 전에 가스를 사용하는 것에서 바꾼 것이다. 낙화에겐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레인지를 켜고 그 앞에서 5분에서 10분 정도 가만히 서 있는다. 그 동안은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이 들어오는 레인지를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가스를 사용하던 때는 파란색으로 일렁이는 불빛을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붉은색으로 달아오르는 레인지의 상판을 보고 있는다. 거기에 손을 대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이다. 10분이 채 되기 전에 레인지를 끈다. 그러면 거기에 머물러 있던 어떤 사념이 사그라들며 사라진다. 낙화는 그것의 정체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값으로 치자면 아주 싼 가격의 죽음이었다. 스스로 죽을 생각이 없음에도 그는 그렇게 볼품없는 형태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지켜보고, 그러다 다시 그것을 끄고 밀어낸다. 누군가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본다면 정신병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주 우울해서 스스로를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낙화는 우울하지 않다. 상태로 따지자면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다. 4명의 강도들을 모두 죽였을 때보다 더 생기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우두머리라는 작자의 말에 화가 치밀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전기 레인지의 붉은 불빛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슬픔보다는 분노가 훨씬 더 생명력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아주 길고 가늘게 때로는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기는 하지만 대체로 연약하게 이어졌지만 분노는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몸 안 쪽에 자세를 웅크린 어린아이처럼 자리 잡았다. 낙화는 그 분노가 거기에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안을 내어주었다. 언제까지 거기에 있게 될지 모를 분노와 함께 손을 잡기로 했다.

하인태라는 이름이었다. 낙화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작게 발음 해보았다. 별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더 크게 분노가 일지도 않았고 더 작아지지도 않았다. 딱 그 만큼의 분노였다. 하인태라는 세 글자에 모두 들어갈 만큼의 감정. 어쩌면 거기에 욱여 넣다가 터질지도 모를 만큼의 분노. 우습지만 낙화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죽인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더 이상 불이 켜진 레인지 앞에서 하릴없이 목숨을 저울질 해보는 짓을 그만두게 될 것 같았다. 하인태가 몸 담은 조직은 낙화가 있는 조직과 큰 접점이 없었다. 덕분에 하인태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누군가 의심하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인태는 출소 후 경호원을 붙였다고 했다. 몸을 사리는 듯했다. 누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냐고 묻기에는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거대한 조직부터 일개 평범한 시민까지 그의 손을 거쳐 죽어난 목숨이 많았다. 조직이 그의 뒤를 쫓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하인태가 평범한 민간인이었던 남자에게까지 쫓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도 궁금해서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보통 이 정도로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을 영화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던데 낙화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만 나왔다. 사랑이라니. 이게 사랑이라면 참 지독한 운명이다.

하인태가 혼자 있는 경우는 없었다. 조직 일을 마치고 나면 그의 뒤를 밟곤 했는데 그때마다 경호원이 붙어 있었다. 경호원을 죽이고 하인태를 죽이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그 사이에 도망갈 것이 뻔했다. 낙화는 쓸데없는 죽음이나 피해는 줄이고 싶었다. 알량한 자존심 같은 건가 싶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로는 효율적인 것이었다. 낙화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하인태를 죽일 것이다. 거창 할 것은 없다. 그런 치장을 붙여주기에 하인태라는 인간이 그에겐 너무나 졸렬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 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간소한 죽음을 주고 싶었다. 그가 그의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일을 2주간 쉬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준비와 계획이 필요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낙화는 해야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는 2주간 하인태를 미행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낙화는 그의 곁의 경호원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을 알았다. 가끔은 그 경호원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경호원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낙화를 그저 예의주시할 뿐 직접적으로 터치하는 일은 없었다.

하인태를 따라 주차장에 차를 끌고 들어갔다. 하인태의 차가 주차된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시동을 끈 후 차 안에서 하인태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경호원이 먼저 내리고 그가 문을 열어주자 하인태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차 밖으로 나왔다. 낙화는 손에 든 총을 움켜쥐고 그의 머리에 조준했다. 그는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경호원이었다. 그는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하인태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제법 되었으니까. 낙화가 그를 미행하는 2주간 셋 정도 공격이 있었다. 모두 미수에 그쳤고 그 중 하나는 하인태에게 잡혀서 멱이 따였다. 경호원은 하인태가 그의 목을 긋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그가 움직이는 것은 하인태가 직접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때 뿐이었다.

경호원은 하인태에게 무어라 말하는가 싶더니 품 속에서 총을 꺼내 낙화가 있는 곳을 향해 겨누었다. 낙화는 하인태의 머리에 조준되어 있던 총을 내렸다. 어차피 쏠 마음도 없었다. 하인태는 그가 낙화의 가족에게 행했던 방식 그대로 당해야 했다. 총을 쓴다면 아마 경호원을 제압하는 용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낙화는 차에서 내렸다. 경호원의 팔에 긴장이 서린 채 낙화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총구가 따라왔다. 낙화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천천히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멈추십시오."

경호원이 낮게 경고의 말을 던졌다. 낙화는 그가 원하는 대로 멈춰섰다.

"그 자식을 나한테 넘겨."

낙화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았다. 너무나 무심해서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만 같은 무감한 목소리였다.

"너... 너 뭐야!"

하인태가 소리쳤다. 사람이 없어서 적막하고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몇 대 있는 차량의 블랙박스에 이 모습이 모두 담기겠지만 낙화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하인태가 죽으면 모든 일은 원래의 흐름대로 돌아갈테니까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낙화는 문득 이 적막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문고리를 돌리던 순간. 순간적으로 끼쳐오던 역한 피냄새와 눈을 뜬 채 죽어 바닥에 늘어져 있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가족들. 죽은 것들은 기척이 없고 때로는 다른 것들의 기척마저도 빼앗아간다. 죽어가는 것들은 모두 숨을 뱉는 대로 기척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없다. 그 적막함이 참 익숙했다. 낙화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때도 그랬다. 부정할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죽음이 눈 앞에서 어른거려서 도저히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하인태도 그럴까? 지금 그의 눈 앞에 죽음이 물처럼 가득 차서 앞이 흐려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저 자식을 찌르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뻔한 이야기지만 들어준다면 들려줄 용의는 있어."

낙화의 말에 경호원이 하인태의 앞을 막아 섰다. 낙화는 경호원과 하인태를 번갈아 보았다.

"어디서 온 녀석이냐!"

"난 어디서 보낸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뭔데?"

"네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의 가족. 그 중의 하나."

낙화는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낙화는 경호원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비키라는 듯이 총을 흔들었다. 경호원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눈을 하고 낙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보였다. 아니면 혼자만의 생각에라도 빠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낙화는 그들에게서 3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후 다시 멈춰섰다. 경호원은 당장이라도 덤벼들어 낙화를 제압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계하고 있었고 하인태는 품 속에 숨기고 있는 무기를 손으로 쥐고 있는지 자켓의 안 주머니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쏠 건가?"

경호원은 대답 대신 총을 쥔 손을 다시 바로 잡았다. 낙화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사설 경호원이더라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테지만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몰랐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아무런 생각도 안 들겠지."

낙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하인태가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내가 왜 당신을 죽이러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겠지. 죽어가는 순간에서야 왜 죽어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나 들까? 네가 죽인 사람들은 아마 궁금했을 거야. 자기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

"그딴 소리나 하려고 온 거냐?"

"나는 그 동안 궁금한 게 참 많았어. 왜 내 가족이었을까. 왜 아무것도 훔쳐가지도 않은 주제에 그 작은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집에 들어왔을까. 좀 더 부자인 사람들을 노렸다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쫓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 게 없잖아. 왜? 무슨 이유였어?"

"이유가 어딨어! 명령 받고 일하는 입장이었다고 나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기억은 나나보네. 이름은 알아?"

"아, 알리가 없잖아..! 넌 뭐하는 거야? 저 자식을 당장 족치지 않고!"

하인태는 경호원의 등을 밀었다. 경호원은 그를 흘끔 눈으로만 뒤돌아보았다. 낙화는 경호원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경호원은 총을 쏘지 않았다. 낙화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총구가 이마에 닿는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경호원을 노려봤다.

"이름을 알려주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당신이 마지막으로 듣는 이름이 내 가족이라는게 참 좆같아서 알려주고 싶지가 않네."

낙화는 손으로 이마에 겨누어진 총을 옆으로 치웠다. 총은 순순히 밀려났다.

"복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경호원이 조용하게 내뱉었다.

"의미 있는 살인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때 하인태가 낙화를 향해 덤벼 들었다. 낙화는 반사적으로 그의 아랫배에 칼을 깊숙히 찔러 넣었다. 무거운 몸뚱이가 낙화의 위로 쓰러지는 바람에 낙화는 뒤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칼자루를 쥔 손에 단단하게 힘을 주고 비틀었다. 장기가 찢기고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하인태의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내 이름이나 듣고 가. 나는 류낙화야. 네가 죽인 사람들의 가족이야."

하인태의 몸뚱이가 살려 달라는 듯이 바르작거리다가 이내 힘없이 늘어졌다. 낙화는 그 무게를 지고 있다가 시신을 밀쳐내고 일어나 앉았다. 하얀 셔츠에 더러운 피가 묻어나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개운하지는 않네. 생각보다."

낙화는 피 묻은 손을 대충 옷에 벅벅 닦고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경호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겨누었던 총을 내린 상태였고 전의가 없는 것인지 그저 낙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 세상에 의미 있는 복수는 없어. 이렇게 시시한 걸 보니."

낙화는 그대로 일어나서 경호원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전기 레인지에 불을 켜고 죽음을 관망하는 짓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미 없이 죽임 당하는 날까지 그는 그렇게 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낙화는 차에 올라 탔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서 벗어났지만 구름 낀 하늘에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고 조용했다. 아무도 낙화에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낙화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묻고 싶은 말을 물을 수도 없었다. 시시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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