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에게

태섭이가 치수에게 쓰는 편지

자급자족 by 경화
6
0
0

주장에게,

 

안녕하세요. 주장. 태섭입니다.

우선 졸업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펜을 들고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좀 어색하네요. 오래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있는데, 육성으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대로는 영영 말씀드리지 못할 듯싶어 편지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꼭 끝까지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싶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백호나 태웅이가 아닌 제가 주장의 속을 가장 썩게 만든 후배인 것 같아서요. (물론 주장의 속을 새까맣게 태운 것은 저보다는 대만 선배이겠죠.)

처음 농구부에 들어왔을 때, 주장이 제게 유독 더 엄하게 행동하신 것을 압니다. 그때는 주장이 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만 생각했어요. 각자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것인데 주장은 외골수라 그런 점을 이해 못 하는 것 같다며 속으로 얼마나 답답해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달재가 저에게 와서 주장이 제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그저 저 듣기 좋으라는 소리라고만 여겼습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제가 좀 방황하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카나가와로 이사 오기 전에 이런저런 일이 좀 많이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런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제가 어렸습니다. 첫 인터하이 지역 예선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그날의 라커룸에서 그 3학년 선배가 저와 주장을 향해 비아냥대던 일을 기억하시죠? 그때, 그 선배를 향해 선배가 조용히 전한 그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태섭이는 패스를 잘합니다.”

 

사실 처음이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와 저를 그렇게 지지해 주는 사람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 개인적인 여러 일로 인해서 다들 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만 여겼거든요. 그래서 농구도 계속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고 들어오고 나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선배가 그렇게 제 편을 들어주셨을 때, 선배를 곡해하고 충고를 그저 잔소리로만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전국으로 가는 꿈을 제대로 꿔보자고 마음먹은 것은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요.)

 

대만 선배와의 일은 누구보다도 선배와 준호 선배에게 가장 죄송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전히 제가 좀 참았으면 되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의 경솔한 판단으로 인해 우리가 지켜온 농구부가 영영 사라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 뒤 전부 포기한 사람처럼 오토바이를 몰고 스스로를 내던진 행동까지 생각하면, 제가 선배의 믿음에 얼마나 큰 배신을 저지른 것인지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기에 다들 마음 쓰지 말라 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배.

 

재활을 끝내고 농구부로 돌아오기 전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을 만회할 방법이 무엇인지를요. 부족한 머리로 내린 결론은 북산을 전국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유일한 속죄의 길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의미도 없었으니까요.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경기 때마다 엄청난 기량의 선수들을 보며 심장이 터져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실수하면? 내가 정신 차리지 못하면? 주장도 3학년도 아닌 제가 느끼는 부담이 이만큼일진대 선배는 어떠할까? 선배는 이 중압감을 혼자서 견뎌오셨던 것일까? 그저 우리 팀을 묵묵히 받치고 있는 선배가 새삼스레 대단하다 느꼈습니다. 주장의 자리는 그러한 것이었겠지요. 특히나 되지도 않는 꿈이라며 대다수가 선배와 함께해 주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에는 지금보다도 더 힘들고 고된 날들이었을 겁니다.

 

산왕과의 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외친 구호의 선창을 제게 넘겨주신 그때, 처음으로 선배에게 인정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낯간지럽게 말하자면 아버지께 인정받은 것 같았어요. 물론 선배가 제 아버지뻘처럼 보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배는 제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랄까요. 저의 성장을 누구보다 바라셨고 그러다 길을 잘못 들으려 하면 충고하여 바로 잡아주시려 했고 줄곧 저를 믿어 주셨으니까요. 제가 그저 생각이 짧아 선배의 깊은 뜻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을 뿐이었죠. 이 어리석은 후배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으셨어요.

 

백호와 태웅이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녀석들도 학년이 올라가서 후배가 생기면 지금보다는 조금 의젓해질 것이라 여겨요. 후배들이 생기니 저도 행동거지에 조심스러운 면이 생겼듯이 그 녀석들도 그렇게 되겠죠. 다만, 이제 저를 뒤에서 든든히 지켜 줄 선배들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마음에 중압감을 더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이겨내야만 해야겠지요. 너무 힘들면 대학으로 찾아가 하소연해도 그저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

 

다시 한번, 졸업 축하드려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19XX년 3월 XX일

 

후배 송태섭

추신

대학에 가서도 농구 계속해 주세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