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 및 기타 샘플

크레페커미션 41. 경계선상의 윤창곡

1차 - 자캐동맹

* 커미션 페이지: https://crepe.cm/@haranging/14114

* 신청자분의 요청으로 캐릭터 이름을 이니셜화 했습니다. 신청 감사합니다!

 

1.

“살점이 최고인데, 이럴 땐 말야.”

소름 끼치는 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진저리나는 소리인지 선배는 알지도 못하면서 즐겁게 말을 이었다. 아니, 진저리 나는 말이라는 걸 알아서 좋아하는 건가. 어느 쪽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아아, 그 나름대로 피하려고 애써보았지만 결국은 이 순간이 와 버린 것이다. 그는 의연하게 이 사태를 받아들이려 노력해 보았다. 잘되지는 않았다. 노력해보았자 고작 얼굴 근육이 덜 구겨진 정도일까.

암막 커튼을 빼곡하게 둘러 빛을 모두 차단한 교실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공기를 품을 정도로 낡고 구석진 건물에 있었다.

이 일은 K의 가벼운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그거 알아? 오컬트부는 예전에 한 번 폐부 됐었잖아.”

“응. 그걸 S 선배랑 Y 선배가 다시 만든 거고.”

굳이 다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목을 타고 올라오는 의문을 애써 삼켰다. 딴지를 걸어보았자 오컬트부의 의미와 세상의 이치와 진실에 대해 일장 연설을 들을 뿐이었다. K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부된 게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래. 무슨 사고가 있었다는데?”

“그래요?”

“응응. 사고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그러더라고.”

그 말에 S가 흥미로운 얼굴로 깍지 낀 손 위에 얼굴을 올렸다.

“흥미롭네요. 사고로 폐부가 되었다면,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학폭이나 자살일 텐데.”

“학폭으로 가해자가 퇴학당해서 인원이 없어졌다던가?”

“그럴 수도 있어요. 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시시하고 가벼운 원인이지만.”

그게 시시하다고. 이 사람들은 역시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학폭도 퇴학도 절대로 가벼운 일이 아니건만, 늘 죽음이니 혼령이니 하는 이야기만 하다 보니 기준이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심각한 이야기만 다룬다고 해서 폭력의 중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건만.

“안 시시하고 무거운 원인은?”

“그야 자살이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 지는 빤히 보이는 일이었다. 눈을 질끈 감아보아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러볼래? 지금 여기 당사자가 있는 것 같아?”

“그런 낌새는 없어. 하지만 그게 꼭 자살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니까.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붙어있거나 할 가능성도 있지.”

“부장은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신기하네.”

“그러면 불러볼까? 마침 새로운 강령술에 대해서 배워온 게 있거든.”

“나쁘지 않은데.”

“어, 깜짝이야. J아 너 언제부터 있었어?”

“처음부터……?”

늘 비슷한 느낌의 대화, 비슷한 느낌의 흐름. 지금까지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걸 지겹도록 보아왔으니, 이다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예상이 갔다.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말리면 즐거워하며 더 거창한 짓을 저지르겠지. 그는 자신의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이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결국엔, 칠흑처럼 어둡고 습한 여기에서 살점이니 독초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지금 하는 건 세간에 잘 알려진 일반적인 강령술이 아니었다. 그런 깜찍한 걸 하는 이들이었다면 이렇게 죽상으로 앉아있지도 않았겠지. 뭐라더라, 일단 악마를 불러서 영혼을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형식이었다. 성공하면 소환진 중간에 있는 인형의 입에서 불린 영혼의 목소리가 나온다던가.

“현실적으로 구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마트에서 사 온 거구나…….”

“소고기면 인간 살 다음으로 괜찮은 거 아닐까요?”

“민찌 한 줌이긴 하지만.”

“한우는 비싸다고…….”

소환진을 그린 위에 촛불을 켜고 짐승의 피와 온갖 독초와 저주문이 적힌 종이들을 섞고 태우고 뿌리며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마트에서 소고기를 사는 것과 악마를 부리는 것, 두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으므로.

모든 주문을 마치고, W를 억지로 자리에 앉힌 아이들은 의식을 시작했다. 어느 언어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머리카락 같은 것을 뿌리고, 피 같은 액체를 흘려보낸다. 사위가 뱅뱅 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며 무언가가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과 식은땀이 흐르는 감각과 오싹한 소름을 견디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소리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 ■■■ ■ ■■!”

정적이 흘렀다. 흐르고 또 흘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망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참으로 시시한 결말에 W를 제외한 모두는 풀이 죽은 채 암막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고 형광등을 켰다. 너무 시시한 나머지, 모두들 흥이 깨진 얼굴로 평소보다 일찍 부활동을 끝냈다. W 혼자만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 0번으로 가자, 마지막 목은 누구의 목?

 

2.

K 학생의 부고가 전해진 것은 사고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심각한 사안이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은 여러 불운이 차곡차곡 쌓인 탓이리라. 그는 원래 보통의 또래보다 귀가 시간이 늦었고, 가족이 많은지라 보호자가 그의 부재를 늦게 깨달았으며, 사고 현장이 학생의 행동반경 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견이 늦은 것 외에는 별 특징이 없는 단순한 뺑소니 사고였다. …그런 사실들은 그리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오컬트부에도 형사가 왔다. 경악한 아이들을 보며 형사들은 애써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질문은 주로 K의 마지막 행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날 부활동을 했는지, 마지막으로는 누구와 이야기했는지,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아무래도 사건 당일 K가 평소 행동반경을 벗어난 것이 형사들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형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난 게 강령술 당일이나 다음날이 아니라 사흘이나 지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별다른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다. 오컬트 영상을 보거나 토론을 하거나, 이전에 실험했던 것들을 다시 되짚어 보거나. 형사들의 귀에는 ‘유투브를 보고 잡담을 했습니다’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만 했다. 그리고 K는 늘 그렇듯 K였다. 일상적으로도, 오컬트적으로도.

형사들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고 나면 정적이 무겁게 좌중을 내리눌렀다. K가 죽었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부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언제나 K의 한 마디였기에 그가 없는 부실은 한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그는 떠났고 남은 건 불편한 침묵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자리한 의문은 어린 학생에게 너무 무거웠으니까. 모두가 같은 것을 생각했지만 모두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설마, 저번에 한 그것 때문일까?

하는, 그 하나의 의문.

모두가 머릿속에 같은 것을 띄우고는 곧바로 열심히 생각을 지워댔다. 설마, 아닐 거야. 그건 실패했잖아. 그보다 훨씬 위험하고 심각한 의식도 수없이 했는데도 지금까지 다들 멀쩡했잖아. 그냥 사고인 거야. 원래 잘 안 가던 장소라도 갈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원래 친구가 많으니 누군가와 약속을 했다던가. 어쨌든 그건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모두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팽팽한 긴장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배우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래서일까, 기어이 툭 떨어져 나온 한 마디는 어리숙하기 짝이 없었다.

“3일이 지났잖아. 그럼 그럴 리 없어.”

“…….”

“3이라는 주기는 살아있는 사람의 주기에 해당해. 죽은 자와는 연관이 없다고. 그거 때문이라면 당일이나 다음날, 혹은 내일 정도는 되어야 해. 의식을 치룬지 3일 만에 무언가 변고가 생기지는 않는다고. 왜냐하면 사흘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주기니까.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나 Y에게 일어났어야 해. 나머지 사람은 6이라는 악마의 숫자를 위한 단순한 머릿수 채우기였어. 그 외에는 의미가 없었다고.”

“…S야.”

“안전장치를 안 마련해 뒀을 것 같아? 액받이로 쓸 저주 인형만 몇 개였는데. 방위를 속이는 진법에 시야를 가리는 주술도 분명히 챙겨뒀고 또,”

“S!”

혼란스럽게 말을 잇던 S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굴려 저를 부른 사람을 찾고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래, 그건 J과 알고 지내면서 처음 듣는 큰 목소리였다.

“아무도 그렇다고 안 했어. 진정해.”

“으, 응.”

“맞아. 게다가 ‘볼 수 있는’ J와 내가 아무것도 못 봤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때는 심지어 영의 영역으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그렇지…….”

“일단, 오늘은 일찍 집에 가는 게 낫겠다. 부활동은……. K선배를 위한 시간을 좀 보내는 게 좋겠어. 장례식 다녀온 거 말고도.”

“그래.”

“알았어. 다 같이 하교하자.”

“그래.”

“응.”

5번으로 가자, 목을 따면서 가자.

 

3.

‘구식으로 진행했어야 했어. 괜히 들떠서는, 멍청하게.’

S는 입술을 짓씹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방 안은 구겨진 종이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부모님이 보신다면 기겁하시겠지만, 어차피 부모님 따위 제 방 앞으로도 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상처가 가득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S는 괴로운 얼굴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S는 알고 있었다. 오직 S만이 알고 있었다. 그 의식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물론 당시에는 무언가 아주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의식에 실패한 탓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그날 밤에도 아무 일 없었다. 악하고 삿된 것을 쫓아내는 의식에도 걸리는 건 없었고 잠도 잘 잤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책가방을 메던 도중 S는 새끼손가락이 조금 둔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방끈을 쥐는데 새끼손가락 하나만 조금 더 천천히 끈을 감싼 것이다. 새끼손가락만 천천히 접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서둘러 약식으로 해본 의식에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새로운 방식으로 강령 해본 게 실패한 게 마음에 걸려서 괜히 의식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S는 기분 탓으로 넘긴 다음 학교로 가 부활동을 하고는 잘 잤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팔이 둔해진 느낌이 들었다. 토요일이니 느긋하게 일어나 유튜브를 보다 관련 자료가 생각나 책장으로 손을 뻗는데 생각보다 팔이 덜 올라가는 것이다. 헛손질로 모서리에 손을 박아 아픈 손을 털면서 S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러지? 뭔가가 붙었나? 하지만 매일 정결 의식을 하니 웬만한 건 붙을 새도 없을 터였다. 혹시나 해서 근처에 뭔가 있는지 탐지해 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조금 불안했지만, 방에 있는 결계부에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 S는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에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는데도 우당탕 넘어졌다. 요즘 몸이 좀 쇠해진 걸지도 모른다. 먹는 건 변함없었지만 요즘 좀 깨작거리기는 했으니까. 다른 생각을 하다 발을 잘못 디딘 정도로도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넘어진다면 확실히 잘 자고 잘 먹을 필요가 있었다. S는 조금 더 잘 먹기로 결심했다. 점점 피어오르는 불안을 애써 무시하면서.

월요일이 되었고, K가 학교를 쉬었다. 학년이 다르기에 부활시간이 되어서야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K가 결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S는 뒷목이 오싹해졌다. 무언가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지만 어제도 그저께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제령도 결계도 파마도 모두 성공했고 그 과정도 전혀 문제없었다.

이 모든 게 과연 착각일까? 착각일 것이다. 완전히 실패한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찝찝한 나머지 뭐든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K가 결석한 것 외에는 아무 일 없지 않은가? S는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지금. S는 학교 따위 버려둔 채 모든 것을 해보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자신이 아는 것은 전부. 머리카락도 피도 살점도 모두 제 것을 썼다. 부모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야단인 것은 의자를 집어 던지는 것으로 조용히 시켰다. 하지만 무엇을 시도해도 잘 되지 않았다. 강령술에서 부리려 했던 악마는 나오지도 않았다. 대체 왜? 대체 왜? 대체 왜? 대체 왜? 대체, 왜.

그러다 문득, S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미친 생각이었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닌 생각이었지만, 이론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S는 방 밖으로 튕기듯 뛰어나갔다. 신발도 신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긴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때에 이번엔 S의 오른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S는 똑똑히 보았다.

그래, 생령이자 사령인 혼이 존재할 수 있는 거야.

S의 사망소식은 빠르게 알려졌다. 불운한 사고가 이어지자 경찰들은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여전히 학생들에게는 상냥했다. 경찰의 조사가 끝나고 난 부실은 조용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J이 겨우 입을 열었다.

“오컬트, 안 믿는 거지? 적어도 이번 일과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W가 쏘아붙였다.

“안 믿으니까 당신들이랑 같은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비명 같은 한마디를 지른 다음 W는 부실을 나가버렸다. 후배가 하기에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언행이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W의 말은 사람을 믿으려는 그의 발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4번으로 가자. 곱게 여문 모가지를 똑, 똑 따며 가자.

 

4.

없어, 없다고. 젠장, 분명히 있었는데!

그 많던 자료가 전부 없어졌다. 무려 아카사 고등학교의 오컬트부에서! 이 학교의 오컬트부가 평범한 동아리일 리가 없잖아? 분명히, 책장과 벽 사이의 스위치를 누르면 비밀 서고가 나타나야 했는데. 서고는 있는데 자료가 없다. 정확하게는 찾으려는 자료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거 반역 아니야? 미친 거 아니냐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섞인 서류로 서고가 엉망이지만 그게 중요해 지금? 어떤 놈이 저지른 짓이야, 이거.

그딴 일을 왜 했냐고? 그딴 일이니까 그냥 한 거지. 당연하지 않나? 강령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영혼을 강령하다니 그런 건 시시하게 실패하고 끝날 테니까! 그 정도로 실험체가 꼬여있을 거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자기들도 놀라서 실험 대상 전체를 다시 뒤지고 있는 주제에 왜 남 탓을 하고 있느냐고. 오히려 칭찬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실험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려준 거잖아.

여기에도 자료가 없다면 원인을 아는 방법은 더 이상 없는데. 미치겠네. 그렇다고 권한도 없는 연구원 자료실에 들어갈 수도 없고, 집에 있던 자료는 내가 구원받은 날에 모두 잿더미로 타올랐다. 젠장, 망할 부모 같으니.

새로운 방법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처음부터 말렸어야 하는데. 중간에 악마를 끼우니 어쩌니 하는 짓은 때려치우는 게 옳았는데!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진다. 나 지금 겁먹었나? 겁먹었지, 그럼. 하, 젠장. 누가 죽어도 나만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구원받은 날에 그렇게 말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횡단보도를 건널 수도 없고 함부로 달릴 수도 없고 건물 아래로도 다닐 수 없고 혼자 다닐 수도 없잖아!

구원받은 건 대체 어디로 가고! 흘려보냈을 존재감이라는 게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아니, 이건 내 존재감이 아냐. 무언가 다른 것의 존재감이 내게 씐 거다. 덕분에 학교에서도 아주 죽을 맛이었다. 전 같으면 내가 수업 중간에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요즘 존재감이 있는 걸 보니 살아있긴 한가 보다? 미쳤어? 그 존재감이 날 죽이고 있는 거라고.

그것의 감시역을 맡게 되면서 나는 교단에서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구원을 받았다. 모두의 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분명 제 자리에 존재하는 데도 없다고 인식되고 있다. 모든 인간의 인지에서 살짝 빗겨나가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정물이나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게 된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부러 누군가를 부르거나 요란을 떨지만 않으면 은행 금고를 터는 것도 가능할 정도이니 누구에게나 줄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실험체를 감시하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은 데다 온갖 죽은 것들과 엮이기 쉬우니 보호는 꼭 필요했기에 나는 구원받았다. 부모님은 제 자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매우 기뻐했다. 그야, 적어도 나만 조심하면 누구에게 살해당할 일도,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 형편이 안 좋아지면 도둑질이라도 하면 될 일이니 나는 최소한 천수를 누리며 그럭저럭 살다 갈 운명이 된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교단에 선택받은 것 자체가 기쁜 일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소용이 없다고! 온갖 수호부를 온몸에 바를 것처럼 두르고 다녀도 재수 없으면 악령에게 걸린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고 재단에 물으면 알아보는 중이라는 대답뿐이다. 오컬트부에서 사고가 났을 때부터 주목했을 거면서 아직도 그럴듯한 결론 하나 내지 못한 건가?

약속했잖아. 나만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장담했잖아!

혹시 내가 못 본 건가? 실험이 성공했다고 그냥 구석에 처박아 둔 것일 수도 있었다. 다시 조사하자.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 진정하고, 처음부터.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면, 비밀 서고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저절로 문이 닫혔다. 허겁지겁 달려가서 스위치를 눌러보아도 눌리지 않는다. 아냐, 아냐, 방금 전까지 부실 주변엔 산 것도 죽은 것도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설마.

그게 분리된 건가?

이런, 씨발.

7번으로 가자. 너무 익어 흐물거리기 전에, 목을 따며 가자.

 

5.

누구 때문인지 알았다. 그야, 그는 신사의 맏이로 태어나 신을 모실 자로 자랐으므로. 영의 영역에 대해 그보다 더 익숙한 사람은 없으리라. 이를 고려하면 ‘이제야’ 알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첫날부터 알았다. 다만 건드려도 되는 성질인지 건드리면 안 되는 성질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대로 둔 것뿐이었다. Y의 경험상 건드려도 될지 안 될지 모를 때에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격렬한 것을 감지했다면 즉각 행동에 들어갔을 것이지만 이상한 현상은 격렬하기보다는 은근하고 잔잔한 느낌이 강했다. 이런 건 대부분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날뛰지 않으며 그 조건이라는 건 상당히 위험하거나 더러운 언행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원들이 조건을 충족할 리도 없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었고 굳이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해결하면 그것은 없는 일이 되니 말이다.

죽음이 그들을 덮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후회하는가? 알 수 없었다. 누구 짓인지 안 지금도 해결책은 생각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되짚어 보자면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마치 엽기범죄를 보는 기분이었다. 보고 나서 생각하면 실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대체 어떻게 저런 범죄를 생각해 내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Y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원인을 알자마자 즉시 집안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건 Y 자신의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집안에서도 Y의 말에 경악할 뿐 마땅한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은밀히 자료를 모아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대답을 듣기는 했지만 Y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집안 내력이 몇백 년인데 실마리조차 쉽게 찾지 못한단 말인가?

Y는 양손으로 가볍게 제 뺨을 쳤다. 정신 차려야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산 사람은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남은 부원은 살려야 한다. 이상한 기운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있었던 자신의 죄를 더 이상 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일단 복숭아나무로 만든 종이에 제 피를 섞은 경면주사로 수호부를 잔뜩 만들었다. 타겟은 사령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이 몇 배로 들었다. 귀신도 신도 싫어할 물건이기에 오직 자신의 기력만을 사용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쓸 때마다 힘이 빠져나가면서 몸의 어딘가를 송곳으로 깊이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원래라면 고통이 느껴지는 작업은 아니었지만, Y는 고통에 아랑곳 않고 작업을 이어 나갔다. 고통이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아마도 그것은 제게도 붙어있을 테니까. 저를 밀어내는 기운이 만들어지는 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다른 누구에게도 주지 못할 물건이었다. 대량살인이라도 저지른 사람의 핏줄이 아닌 바에야 누구에게나 수호령은 한둘쯤 붙어있기 마련이었는데 이건 신도 쫓아낼 물건이었으니. 하지만 남은 부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고, 또 다른 부원에게는…….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방조죄를 넘어 살인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이것은 살인죄인가? 알 수 없었다. 이건 역리를 바로잡는 일인 걸까,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일일까. 하지만 Y는 믿었다. 한갓 날붙이에서도 혼은 생기며, 위대한 신도 인간의 기원 없이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 지금까지 함께한 그들의 일상으로 ‘U’은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역리를 바로잡아 순리로 이끄는 일일 것이라고.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자신은 어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Y는 수호부를 반 나누어 한 뭉치는 제 주머니에, 다른 뭉치는 편지와 함께 방수되는 택배 봉투에 넣어 품 깊숙이 넣었다. 집을 나서면 이제는 자신도 신에게 보호를 바랄 수 없는 상태. 부디 운이 좋기를 빌며 Y는 길거리로 나섰다.

목적지는 당사자의 집이 아니었다. 과연 집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지금 상태로 당사자에게 간다면 가까워질수록 수호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주술이 날아올 것이었다. 수호부의 힘이 다하기 전에 당사자와 만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 영의 영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 그러나 평소에 악령을 주렁주렁 달고 다녀 익숙할, 그리고 믿음의 부재라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방어를 항상 두르고 있는 사람.

빨리 가야 했지만 그렇다고 뛸 수는 없었다. 사고가 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조심해야 했다. 초조함에 손을 두드리면서도 Y는 뛰지 않고 꾸준히 걸었다. 빨라지는 다리를 의지로 애써 묶어두면서.

Y의 뒤로 조금씩 그늘이 졌다. 저녁즈음이기는 했으나 아직 해가 걸려있었는데도 그늘은 상상외의 속도로 Y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Y는 그늘이 지는 것을 느낀 그 순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적은 강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인세의 규칙은 강력한 법, 그의 대책에 혼령은 끼어들 수 없을 것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Y는 괴한의 날이 제 등으로 파고드는 순간, 모든 정신력을 쥐어짜 작게 속삭였다.

‘U’에게서 꺼져라, 너희 삿된 것들아.

Y의 소식은 다음 날 아침 언론에 실렸다. 한 학교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며 요란하게 그의 죽음을 떠들어댔다. 희생자가 모두 미성년자였기에 학교도 희생자의 정보도 전혀 나가지 않았다. 다만 밤이 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칼을 휘두르는 미친 살인마가 있다는 것은 그대로 보도되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정부에서는 임시휴교 및 온라인 강의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

3번으로 가자, 또각, 또각, 목을 따며 가자.

 

6.

요즘 듣는 말이라고는 괜찮냐는 말뿐이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냐, 힘이 없는 것 같은데 괜찮냐, 학교를 쉬지 않아도 괜찮냐……. 억지로 괜찮다고 하기도 질려서 입을 다물면 사람들은 재촉하지 않고 어깨를 두드리거나 한숨을 쉬거나 했다. 그는 모든 반응을 흘려버렸다. 그래도 되는 처지였고,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이었고, 사실을 말하자면 이럴 때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다. 경험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그는 깨달았다. 즐겁게 웃고 떠들지만 않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제 행동에 붙인 다음 가여워했다. 새삼스럽게 웃고 떠들고 싶은 기분이 들 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그냥 평소대로 행동했다. 평소에 워낙 침울해 보였기에 딱히 비난을 받거나 뒷말이 돌지는 않았다.

사람이 죽어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슬프지 않았지만 생각하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달랐다. 뭐랄까,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평소에도 현실감이라는 단어와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수업 마치고 부실에 가면 부원들이 저를 맞아줄 것 같은데 왜 부실로 갈 수 없는 거지? 일단 가면 다 같이 만나서 평소처럼 떠들고 실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지금은 구관으로 갈 수조차 없어졌다. 학교 뒷산에는 입구마다 입산 금지 표지판이 붙었고 구관의 별관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다. 형사들은 폴리스라인을 치기 전부터 그들을 주목했다고 한다. 한 학교의 같은 부원이 연속으로 죽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사건이 이어지자 결국 남은 1학년 둘에게는 경찰 경호가 붙었다. 그에게 있어 경호란 감시와 비슷한 말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누나가 용인한 일이어서 쉽게 수긍했다. 누나는 심지어 학교도 그만 다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집요하게 캐묻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을 제어하지는 않았다. 경찰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의심은 하고 있지 않아도 경호목적으로 주목하고 있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간다. 그 사실이 이상해 W를 데리고 뒷산으로 가고 있노라면 경호 임무를 맡은 경찰이 점잖게 저를 막아섰다. 이상했다. 경찰이 왜 자신을 막는 거지? 오컬트 부에 가는 것뿐인데. 그냥 W와 함께 선배들을 보러 가고 싶을 뿐인데. 그렇게 설명하면 W는 무어라 고함치는 것을 멈추고는 작게 울먹였고 경찰은 난처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 것이다. 아, 맞다. 모두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어쩐지 경찰은 더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역시 반복된 일로 어딘가 고장이 난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죽어도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자꾸 이러는 거지.

사실은, 마지막으로 했던 실험에서 그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는데 굳이 묘사하자면 마치 자기 세포가 갑자기 자아를 가지고 깨어나 제게서 빠져나가 버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차라리 명확하게 혼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면 부원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이상한 기분이어서 그는 굳이 입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느낌도 잠깐일 뿐 몸에도 혼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생각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고장 난 게 아닐까. 하교하는 내내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경찰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무 익숙해져 있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분명히 몸에도 혼에도 문제는 없었다.

안대를 쓰고 있을 때는.

그는 몸을 덜덜 떨며 화장실로 갔다. 보고 싶었고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어쩐지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마지못해 안대를 조금씩 들어 올렸다. 천천히 안대를 벗으면 가려져 있던 눈이 드러났다. 누나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눈은, 변함없이 그 색을, …….

색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재빨리 안대를 다시 끼고는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내지 못한 비명소리가 끅끅 목 안에서만 울려댔다. 하필이면 오늘은 집안에 누나도 없었다. 뭔가가 이상한데, 정말로 이상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집 안 거실에서 혼자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아아, 그동안 부원들과 해 온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 뭔가 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하면. 그런데 뭘 해야 하지?

그렇게 초조하게 거실만 돌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나인가? 맞을까 두려운 것보다 안심이 되는 마음이 훨씬 컸다. 경찰이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한 것을 잊고 그는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누나를 외치며.

하지만 누나가 아니었다. 누나가 아니라, W였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W는 제 손에 들려있던 걸 내팽개치듯 그에게 넘겨주었다. 무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물건을 잡은 그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W를 바라보았다.

“경찰 조사가 끝나서 이제야 넘겨주는 거래.”

“이게, 뭐야?”

“Y 선배의 유품. 봉투 겉에는 나한테 보내달라고 적혀있었는데 안에 편지를 보니까 몇 장만 내가 가지고 나머지는 너 주라고 적혀있었어. 아무리 봐도 단서가 될 만한 건 없어서 주는 거랬어.”

“어……. 그렇구나.”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화난 표정으로 무언가 더 쏘아붙이려던 W는 말을 삼키고 몸을 돌렸다.

“W야 안에 잠깐 들어와서, 어, 그러니까…….”

“답지 않은 짓 하지 마. 됐어, 난 할 일을 했으니까 간다.”

무어라 잡을 새도 없이 W는 등을 돌리고 뛰어갔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데, W는 자신을 보면 퍽 괴로운 얼굴을 했다. 죽은 건 다른 사람들인데 왜 자신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그는 일단 받은 물건을 들고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건…… 이상했다. 봉투 안의 물건을 꺼내자마자 구토감과 두통이 동시에 일었다. 아, 이건, 설마.

다음날, 아카사 고등학교에 부고가 들려왔다.

1번으로 가자. 딴 목을 가지런히 엮으며 가자.

 

7.

나 너무 무서워. 무서워 죽을 것 같아. 누가 좀 어떻게든 해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 좀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난 정말 죽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J 선배도 죽어버렸어. 학교 안에서 죽어버렸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어. 부실에 비밀공간이 있다는 것부터가 미친 소리잖아. 학교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지하 2층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거랑 똑같은 이야기잖아. 그런데 그런 게 있었어. 있었다고.

그 안에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탄 자료들과 함께 선배가 죽어있었대. 며칠을 안에서 굶다가 결국 좁은 공간에서 화재가 일어나 질식사했대. 일부러 불을 질러서 자살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돌고 있는데 그게 사실이야? 누가 죽인 게 아니고? 자살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다른 선배들도 다 죽어버렸지만 자살은 아니었잖아. 사고사거나 타살일 거라고 경찰에서 그랬단 말야 근데 선배가 자살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크게 소리치면 누군가는 들을 텐데 아무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선배가 사라진 날에도 우리는 부실에 한 번 들렀으니까 아냐 벽 뒤에 선배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가버린 건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그런데 선배는 그런 공간을 어떻게 알아낸 거야 왜 들어간 거고 들어가는 방법은 알았으면서 나오는 방법은 왜 몰랐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뭘 믿어야 해 이야기할 사람은 U 밖에 안 남았는데

그런데 U 이 자식은 왜 학교에 안 오는 거야?

왜 안 와?

제발, 잘못했어. 내가 괴로워서 그랬어. 너를 보면 죽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괴로워서 피했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죽지 마. 죽은 게 아니라고 해줘. 죽은 거 아니지? 그냥 가끔 학교 지각하던 거랑 똑같은 거지?

그런데 왜 안 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누가 부르는 것 같은데 엿이나 먹으라지. 지금 내가 학교에 있게 생겼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U까지 죽었으면 다음은, 다음은 결국 나라고. 나까지 오는 거라고.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오컬트부라니 이상한 부이긴 해도 전국에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은 다 잘살고 있는데, 왜 우리만? 어째서 우리만 이런 기괴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누군가에게 원한 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도저히 뛸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발이 멈추었다.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미쳐버리면 더 이상 두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고인지 타살인지도 알 수 없는 죽음을 한 학교의 특정 부원만 맞는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는데,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잖아. 저주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 말고는 이런 일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 설마, 오컬트부 사람들이 말하던 게 진짜였어?

그 생각이 들자마자 눈앞이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귀에서는 계속해서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이 간지러우면서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주위에서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제 입에서 갑자기 썩은 우유 맛이 났다.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천천히, W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불신의 보호가 깨어졌으니, 목을 따며 6번으로 가자.

 

8.

거창한 나팔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란 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면 제 방이었고, 아침이었다.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휴대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했다. 기계가 말해주는 날짜를 확인하고서야 그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꿈이었던가.

오늘만은 알람이 밉지 않았다. 평소에 기상 알람으로 쓰는 나팔소리는 싫어진 지 오래였건만, 미친 악몽에서 깨워준 오늘만은 나팔소리를 좋아하기로 했다. 꿈자리 한 번 참으로 사나웠다. 모두가 하나씩 죽어가는 꿈이라니. 강령술을 해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건가?

아무래도 좋았다. 꿈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상한 기분이 꿈에서 깨고 나서까지 이어질 정도로 생생하면 이른 기상도 반가워지는 모양이었다. 학교로 가서 모두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면 꽤나 즐거워할 것이다.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건 수업 시간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는 일단 아침을 먹고 평소처럼 학교로 갔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자, 이제 아래를 드래그해주겠어?

2번부터 시작하자. 새로운 순서로, 목을 따면서 읽는 거야.

0.

여닫이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U은 돌아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시간대를 떠올렸다. 의식을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수호부의 양은 언제나 똑같았고 따라서 의식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는 다른 모양이었다. 자신은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었고, 이상하지 않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을까. 올바른 세계에 살면서도 이쪽을 자꾸 넘보다 보니 사람들이 점점 이상해진 걸까. 그들도 보통 사람처럼 폭력의 무서움으로 덜덜 떠는 채로 살았다면 좋았으련만. 학폭이 시시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슬픈가? 슬프지 않은가? 머릿속에서 혼란이 왔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위가 잘하는 짓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일은 벌어졌고 수호부를 쓸 준비가 될 시점이 되면 모두가 죽은 뒤였다. 순서는 바뀌어도 결과는 같았다. 그렇다면 이 짓을 그만두는 게 좋은 게 아닐까? 어차피 다시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믿음은 상당히 깨어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았다. 누나도, 그들도, 아무도. 그렇다면, 만약 부원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그렇기 때문에 ‘U’은 몇 번이고 이 의식을 반복했다. 이렇게 쓰라고 Y가 수호부를 준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U은 부적의 방향을 비틀었다. ‘U’이 있을 거라 믿어준 선배를 위해서, 이상한 세계의 자신을 받아준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없으면 안 되게 된 자신을 위해서.

수호부를 둥글게 깔고 사이에 제물을 둔 다음 중간에 선다. 그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그저 제대로 부르는 방법만 알면 된다. U은 가만히 눈을 감고, 인간의 성대로는 말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한다. 그러면 수호부가 타오르면서 흰빛이 새어 나오고, 그 빛이 온 세상을 메꿀 만큼 번지고 나면 이제 다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1번으로 가자. 원래 순서대로 다시 한번 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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