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
※ 상해 및 살해, 다지류, 곤충 떼에 대한 묘사, 자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오늘은 물자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타 구역에서 생산한 많은 물건 중 캐피톨에 공급되기에는 가치가 떨어지거나 흠집이 난 것들. 그중 일부가 기차를 탔다. 이른 아침부터 십수 명의 인부들이 평화유지군의 지시에 따라 나무 상자와 포대를 내렸다. 곧 기차는 기적 소리도 없이 물 흐르듯 미끄러지며 다음 구역으로 향한다.
군인이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하고 어느 창고로 들어갈지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요제프는 그로부터 한 걸음을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눈으로 상자들을 훑었다. 그나마 상등품에 속하는 물자는 8구역의 시장이나 평화유지군 대장 등 고위 간부의 집으로 향한다. 요제프와 같은 중심가의 상인들은 그 외의 것을 노린다. 곡식과 기름, 모두가 아는 ‘그’ 방식으로 배급되는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 중에서도 선별에 탈락한 물건들.
따로 쌓인 상자 중 물건을 몇 개 고르고 군인의 주머니에 약간의 웃돈을 찔러 넣자 그가 손짓한다. 인부들 사이에 서 있던 덥수룩한 머리의 청년이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흉터가 드러난다.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요제프가 헛웃음을 쳤다.
“요 며칠 안 보인다 했더니. 캐피톨에 다녀온 모양이야?”
“늘 그렇죠.”
“인터뷰? 아니면 토크쇼? 호화스러운 파티일 수도 있겠군.”
“무엇이든 크게 다르지 않아요.”
케일럽이 짤막하게 대답한다. 그는 상점 가판대 옆에 앉아 마지막 상자의 뚜껑을 뜯어내는 중이었다. 안에 든 사과들은 푸른 기가 남아 있었고 간간이 반점이 보였지만 개중 적절히 붉은 것도 있었다. 평소보다 상태가 좋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파이프를 빨던 요제프가 가판대 아래에서 바구니를 꺼내 케일럽의 곁에 떨군다. 긴 여행을 마친 직후부터 인부들 사이에 끼어 태연하게 일을 돕던 우승자가 이제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사과를 옮겨 담는다. 자신이 없는 동안 구역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는지, 공장들의 이번 주의 납품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는지 따위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윽고 마지막 사과를 집는 순간 그는 목을 울려 망설이는 소리를 낸다. 요제프는 신중한 발화자를 기다리기로 한다. 바구니를 들어 올려 가격표를 걸고 자투리 천으로 된 빗물막이를 내린다. 그만큼의 간격을 둔 뒤 이어지는 질문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주제였다.
“레라이나는 어때 보였어요?”
“줄곧 조용했지. 만들던 걸 또 찢기라도 했나? 베틀 소리가 한 번을 안 들리더라고. 곧 요란하게,”
요란하게 울 일이 있어서 그렇겠지… 그렇게 이어져야 마땅할 말이 멈춘다. 케일럽이 요제프의 무릎을 툭 짚은 탓이다. 무심한 시선이 경고하듯 늙은 상인의 눈을 응시한다. 곧 보란 듯이 곁눈으로 도로 방향을 본다. 몇십 초가량이 지나자 흰 군복을 입은 군인 두 명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시장을 지나쳤다. 군홧발이 콘크리트를 딛는 소리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우울한 빛깔의 눈이 상대에게로 돌아온다. 요제프는 이런 점에서 케일럽 윈터를 좋아할 수 없었다. 헝거 게임 이후 그는 매일같이 생살을 드러낸 채 살아가는 동물 같기도 했고 그런 목숨을 잡는 사냥꾼을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상인은 늘어트렸던 팔을 들어 팔짱을 낀다.
케일럽 윈터가 정확히 얼마간을 떠나서 있었는지는 몰라도 레리아나 샌드가 며칠간 얌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승자 마을에 망가진 가구나 찢어진 태피스트리가 쌓여 있지도 않았고, 흐느끼며 새벽을 배회하는 모습도 목격되지 않았으니까. 여자의 광증은 폭풍처럼 몰아치다가도 한순간에 잦아들었으니 지극한 일상이었다. 유독 반듯한 사과를 연신 매만지며 듣던 케일럽이 다시 으음, 목을 울리며 일어났다. 일도 마쳤겠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기색이었다. 문득 요제프가 가판대를 툭툭 두드려 그를 돌아보게 했다.
“케일럽. 이번 75회 말이다.”
세 번째 25주년 기념 헝거게임. 역대 우승자들 중 올해의 조공인을 선정한다는 파격적인 룰에 판엠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으나 안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무사히 19세를 맞이할 수 있게 된 소년들과 가장 어린 12세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어쩌면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요제프의 가족들 또한 그중 하나였다. 마치 이상한 말을 들은 개처럼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던 케일럽은 뒤늦게 상대가 하려는 말을 짐작한다.
“…..행운을 빈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안타까움, 미안함, 안도를 느꼈던 이의 망설임, 차마 확률의 호의를 기대하지 못할 특수한 규칙. 케일럽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요제프를 바라보던 그는 다시금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사과 바구니에 마지막으로 올려 두었던 과실을 집는다. 귀퉁이에 모난 곳이 있었으나 여전히 붉은 광택이 돌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케일럽이 금으로 된 단추 하나를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은 꽤나 어설펐고, 사과의 값어치에 비해 과한 금액이었다. 이 대화를 함구하는 대가라고 해도 여전히 무거웠다. 그를 만류하기도 전에 이마를 매만지며 난처한 표정을 짓던 청년은 간단한 고갯짓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요제프는 입소리를 쩝, 내며 상자 조각을 발로 밀어 치운다. 그냥 고맙다고 말하면 될 것을. 작은 중얼거림이 헛되게 허공을 돌았다.
[ …자! 그럼 다음 해로 가 볼까요. 오, 상당한 수의 마니아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물론 그들도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모든 예술가에게는 빛과 어둠이 있는 법! 느림과 복잡의 미학을 설파하는 게임 메이커, 로물루스. 그의 네 번째 헝거게임을 소개합니다. ]
삐걱이는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유려한 목소리가 들렸다. 케일럽은 익숙하게 문을 밀고 들어가 잠금쇠를 걸었다. 문이 닫히며 가볍게 흙먼지가 인다. 청소일을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케일럽은 거실로 들어간다. 추첨일을 앞두고 이전에 치러졌던 헝거게임의 하이라이트 신을 모아 방영하는 프로그램은 많았다. 하지만 케일럽은 사회자의 이어질 해설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지금 재생되는 것은 녹화된 방송이고, 이 집의 주인은 종종 이 짧은 시간에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곤 했다.
방송의 유일한 시청자는 보풀이 인 담요를 두른 채 소파에 웅크려 앉은 채였다. 진흙이 묻은 워커와 큼지막한 모자가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더티 블론드 아래로 보이는 낯에 케일럽은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히듯 서서, 차가운 얼굴의 레리아나 샌드를 바라본다. 게임 메이커 로물루스의 공작새 같은 얼굴을 연신 비추던 화면이 전환된다.
[ 훌륭한 예술가이자 창작자이지만 동시에 예능인인 로물루스가 드디어 대중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여기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로물루스는 저희가 영영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하나의 광경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보여주는 데에만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겁니다. 저희가 사랑하는 ‘캐리어 구역’ 이 그 이름을 얻어내지 못했을 시기를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누구에게 어떤 이점도 없이, 24명 모두가 위대한 캐피톨의 아레나에 처음 올라 공평한 공포에 몸부림치던 과거의 나날들….. ]
케일럽 윈터는 생각한다. 어떤 사건과 살인을 겪어 우승자의 자리에 올랐든 간에, 처음 목도한 아레나의 광경을 잊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케일럽 윈터는 기억한다. 거대한 나무와 끝없이 펼쳐진 숲, 동굴, 지하 터널들을. 여러 방송에서 그날의 장면을 언급하고, 방영하고, 찬양했다. 심지어는 게임이 재현된 장소에도 방문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생명력과 광기로 가득 찬 하늘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 여러분은 최고로 끔찍하고 인상적이었던 특수 머테이션을 무엇으로 꼽겠어요? 아마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시청하셨던 시민들께서는 어렵지 않게 우승 후보를 추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프로 조공인들 조차도 순간 뒷걸음질을 치게 했던 이 모습. 로물루스는 요르문간드라는 이름을 붙였다지만 그의 미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할 저희에게 어미뿌리mummy-root라는 애칭은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해의 프로 조공인들이 그들의 온전한 기량을 뽐내지 못한 것은 언제나 아쉽지만, 그 코뉴코피아의 주인은 명실상부 어미뿌리였지 않은가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던 1구역의 사파이어조차 공포에 떨다 첫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는 어떤 ‘드문’ 사건이 일어날까를 기다리며 늘 스크린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케일럽은 나무 밑동에 자리 잡은 거대한 거미가 다리를 타각이던 소리를 기억한다. 나무껍질을 느릿느릿하게 긁던 발톱 중 하나가 땅으로 떨어져 한 줌의 재처럼 으스러지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건 재가 아니었다. 거미가 낳은 수많은 종류의 곤충형 머테이션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빠스락거리며 날아올라 만들던 검은 구름을 기억한다. 코뉴코피아로 향하는 첫 60초가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조공인들이 본능적인 공포에 말을 잃었다. 그 중의 다수는 분명 전의를 상실했으리라. 케일럽 또한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우승자, 어린 들개, 어둠 속의 정찰자. 케일럽 윈터 역시 우승을 거머쥐기까지 여러 고충을 겪었습니다. 기실 그보다 유력한 우승 후보는 많았던 것을 여러분 모두가 기억하실 겁니다. 오히려 케일럽은 점수에 비해 온건한 행보마저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넷째 날을 기점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작은 귀신이 되었지요. 그 영광의 첫 토대가 된 날을 과소평가하는 진행자들도 많지만, 글쎄요. 저는 이 장면을 보지 않고서는 케일럽 윈터를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감상하시죠. ]
푸르스름한 화면에 두 조공인이 비친다. 그들은 빽빽한 나무와 수풀 사이를 뛰어간다. 나란히, 혹은 한 사람이 뒤처지고, 가끔은 손을 붙잡기도 하면서. 사방에서 벌레 우는 소리, 이파리들이 부딪히는 소리,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은 숲 특유의 고요한 소음이 울린다.
전환된 카메라 위를 작은 지네 한 마리가 가로질러 기어간다. 다시 드러난 화면 속 조공인들은 피로로 가득한 얼굴이다. 한 명은 머리카락을, 한 명은 손목을 가는 실크 리본으로 묶은 채였다. 햇빛이 비치는 평지에 짐을 내려놓은 어린 조공인이 주변을 살피다가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내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이 붙잡아 막는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만류하는 말을 속삭이지만, 주변의 소음과 사회자의 요란스러운 부연에 묻혀 시청자는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가방을 든 쪽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어깨를 밀치며 외친다.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처음부터 이런 계획이었잖아.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적절한 때라고! 가방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절묘하게 찍어낸 영상은 마치 끈끈했던 동맹이 전략의 흠집을 시작으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창이 날아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고, 날카롭게 외치던 조공인의 등을 꿰뚫는다. 비명이 숲을 뒤덮고 작은 벌레들이 날아올라 도망을 간다. 힘을 잃은 몸이 앞으로 무너진다. 동맹의 시체에 깔린 조공인이 공포의 몸부림을 치지만 멀리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참 뒤, 걸어오는 이를 보고 순간 안도의 얼굴을 한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은 상처가 없고 앳된 얼굴의 케일럽이다. 그는 시체의 어깨를 붙잡아 치우고, 땅을 구르는 조공인에게 빨리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민다. 눈물과 피로 얼룩진 얼굴의 조공인은 손을 내밀지 못한다. 대신 말을 더듬는다. 케일럽. 도망가야 해. 아리아가 죽, 죽었잖아.
케일럽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 조공인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어설프게 땅에 발을 딛고 선 몸이 움찔하나 싶더니 쿨럭, 피를 내뱉는다. 카메라가 당겨진다. 케일럽의 소매 아래 숨겨져 있던 단검이 조공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조공인이 혼란스럽게 말한다. 너, 네가 왜. 그리고 케일럽의 목을 양손으로 붙잡지만, 힘이 모자라다. 오히려 상체에 힘을 준 탓에 울컥거리는 핏덩이만 뱉으며 무릎을 꿇는다. 케일럽은 아직 숨이 붙은 그를 질질 끌어 조금 전의 장소로 돌아온다. 시체 옆에 그를 내던진다. 흐른 피 궤적을 따라 검은 파도가 느리게 스며든다. 피 냄새를 맡은 지네와 거미들이다. 케일럽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개중 이빨이 커다란 거미 하나를 골라 붙잡는다. 조공인이 헐떡이며 반대편으로 기어간다. 하지만 케일럽이 크게 한 걸음을 걷자 금세 따라잡힌다.
내가 왜, 라니. 윌리엄. 누구도 내가 너희에게 협력한다고 한 적 없어. 무미건조한 말에 윌리엄이 숨을 들이켠다. 그의 목 위에 떨궈진 이빨거미가 달라붙는다. 송곳니가 여린 살갗을 뚫고 피 맛을 본다. 끔찍한 비명이 울린다. 케일럽은 그저 그들의 가방을 확인하고 물자를 꺼내 챙길 뿐이다.
비어버린 가방을 검은 파도에 던진 케일럽은 주변을 둘러본다. 놀랍게도 그는 카메라와 눈이 마주친다. 정확히 그것을 알고 있는 얼굴이다. 케일럽은 잠시 고민하듯이 볼을 긁적이다가 창을 뽑아든다. 그리고 단출한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 잘 보세요. 이대로 둘 테니까. ]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 터지는 오열을 참기 위한, 폐부의 아픔을 겨우 삭이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케일럽은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곁을 돌아본다. 레리아나는 어느새 무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추첨일마다 새로운 조공인을 떠나보내는,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점차 그는 자신의 아이가 죽었을 때처럼 아프게 울면서 이를 갈았다.
“네가 어떻게. 네가...”
문간에 멈춰 서 있던 케일럽이 거실 안으로 들어선다. 레리아나는 자신을 징벌하고 싶을 때마다 이 녹화본을 돌려 보았다. 케일럽은 그녀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화면을 끄기 위해 손을 뻗자 무언가 날아와 부딪혔다. 둔탁한 고통과 함께 바닥에서 파열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붉게 핏발 선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곁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던진 것 같았다. 케일럽이 낮게 탄식하며 무릎을 굽힌다. 그렇게 깨진 컵의 파편 중 큰 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레리아나. 이건 아끼던 컵이잖아.”
“집어치워, 케일럽.”
이 상황을 모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말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케일럽은 말을 이어가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이 해를 반추하는 레리아나는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워서, 시답잖은 대화로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으르렁거리듯 쏘아붙인 레리아나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담요를 붙잡고 고통스럽게 운다. 케일럽은 이를 악물지 않도록 노력하며 깨진 찻잔의 잔해를 치웠다.
세월에 가려져 어느 정도 잊혀진 것이 있다면, 레리아나 샌드는 전형적인 타입의 우승자였다는 사실이다. 구역에 가족을 남기고 왔고, 그래서 살아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강인함이 있었고, 살인을 겪으며 부당함에 슬퍼할 줄 알았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 가장 문제였다. 우승 이후 그 어떤 순간에도 캐피톨과 타협하지 않았고 추첨일마다 누구보다 크게 울었다. 그의 가족들은 한둘씩 죽었다. 어린아이마저 일었을 때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화염이 되어 순식간에 타올라 사라지거나, 완전히 미쳐버리거나. 레리아나 샌드는 후자로 남기로 했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하여 뜨겁지 않을 리 없다. 어렸던 레리아나가 그랬고, 그 해의 아리아와 윌리엄이 그랬다.
거대한 계획이 시작되기 전 어린 말단이 조공인으로 뽑히는 등의 탈락은 드물지만, 종종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계획은 거창하지 않았고 많은 도움이 있지도 않았다. 두 조공인은 자신들이 만약 오래 살아남는다면 23명의 죽음이 절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들은 첫날 코뉴코피아에서 벌어진 일상적인 살육에서 살아남았다. 프로 조공인들의 방심과 공포 덕분이었다. 첫 대포 소리가 울리기 직전 어미뿌리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든 그들은 며칠 먹을 식량을 얻었고, 죽은 조공인들의 유니폼에서 구역 번호를 잘라 챙겼다. 들판에 꽃이 있다면 꺾었고, 깨끗한 천막을 잘라 죽은 조공인들의 이름을 썼다.
표면적으로는 두 구역의 멘토가 친밀한 사이라 멘토를 통해 결성된 동맹이라고 여겨졌지만 케일럽은 시작부터 알았다. 그들은 색색으로 짜인 실크를 갖고 있었다. 캐피톨의 화려함과는 달랐다. 그러나 8구역에서라면,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 사람이 하나 있었다. 별로 어려운 비밀도 아니었다. 아직 제정신일 시절의 어린 우승자 레리아나의 집에서는 늘 베틀 소리가 들렸다.
게임 메이커의 취향대로 길고 지루하게 흘러갈 게임이 급변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장례식 따위를 준비하는 조공인들에게 오랜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정교하게 준비된 아레나 필드 위에 돌연 등장한 거대 거미는 단순했다. 거대하다는 것 외에는 기존의 동물이 취할 형태에서 특별히 변형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조공인들을 잡아내기 위해 치는 거미집이 누군가의 태피스트리처럼 아름다웠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이 ‘극소수 과격분자’ 들의 조력자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 아리아와 윌리엄의 이유 모를 유대를 로맨스로 해석하며 응원하기 시작하는 분들도 있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모를까요? 아뇨! 그들은 오히려 퍽 ‘번거로운’ 이들이었죠. 누군가를 공격하지도, 죽이지도 않았고 고작 해봐야 하는 것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다칠 일 없는 함정을 파기, 물자를 훔치기, 거미와 지네를 보고 비명을 지르기……. 반면 우리의 우승자 케일럽 윈터는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독을 묻힌 덫, 살을 찢는 창, 잔혹한 마지막을 내리는, 으스스한 귀신 같은 모습! 밤이 있어야 낮이 있듯, 태양같이 화려한 우승자들이 있다면 때로는 달과 늑대처럼 우리의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우승자 또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리아와 윌리엄은 케일럽이 아니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짧고 덧없는 쇼에 조언을 건넨 자가 누구인지 캐피톨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캐피톨, 게임 메이커, 판엠을 굴러가게 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냥 하나도 짓밟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하물며 헝거게임 안에서라면 더더욱. 케일럽은 두려웠다. 세월 속에서 잊혀져 가는 불운한 우승자 하나 정도는 쉽사리 실종자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리아나 샌드를 멘토로 둔 8구역의 조공인이 어린 혁명군들을 앞서서 저지한다면, 그들과의 암묵적인 협력을 부정한다면. 작은 조각 하나 없이 바닥을 치운 케일럽은 레라이나를 바라본다.
“캐피톨이 다 알고 있었잖아. 그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둘 수 없었어. 레리아나. 너도 분명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빌어먹을. 케이브, 내가 죽음이 무섭겠어?”
케일럽은 답하지 않는다. 거실 안에는 침묵이 감돌고, 녹화된 음성만 유려하게 허공을 떠돌았다. 긴 한숨이 물기를 담고 흘렀다. 널 거기서 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키운 너라도……. 케일럽은 그 속삭임에도 답하지 않는다. 답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두 조공인의 목숨과 불꽃을 땅에 처박은 그를 레리아나 샌드는 죽이지 못했다. 방송은 계속된다.
[ 여섯 째 날을 기점으로 이 해의 조공인은 자그마치 다섯이 남아 있었습니다만, 어미뿌리에게는 계획이 있었지요. 그에게서 태어나는 곤충들이 하나둘 지독한 독을 품은 것입니다. 환각도 환청도 유발하지 않지만, 그 고통이나 마비 증세는 아주 끔찍했다고 하죠. 심지어 로물루스는 후원 물품에서 완벽한 해독제를 제외하는 파격적인 행보까지 보였습니다. 스폰서와 멘토들은 두 가지 약 중에서 우리 조공인들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선물하지 않을지 선택해야 했죠. 고통을 잊고 죽은 듯 잠들 수 있는 수면제, 혹은 고통은 보존하되 마비되는 사지를 움직일 수만은 있게 하는 불완전한 해독제. ]
레리아나는 첫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 케일럽에게 아무런 후원 물품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일곱 째 날 새벽, 독에 당한 케일럽에게 불완전한 해독제가 도착했다.
[ 케일럽과 똑같은 약을 받았던 한 조공인이 허공에 외치길, ‘차라리 죽여 달라’ 고 했던가요? 하하. 그러나 케일럽 윈터, 이를 깨무느라 이빨이 깨지고 혀끝이 잘려도, 발작처럼 몸을 뒤집고 땅을 기어도 눈을 번들거리며 일어나 창을 짚었죠! 그야말로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얼굴의 반이 찢기고 갈비뼈가 도려져 나갔는데도 그는 살아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케일럽 윈터의 우승 소감은 이랬죠. 조공인이라는 기쁨을 안고도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무서웠다고. 그의 팬들이 간곡히 남겨 달라 요청했던 흉터를 갖고도 그는 기쁜 소년처럼 웃더랍니다! ]
우승자 투어가 시작되는 순간 화면이 어두워진다. 레리아나가 녹화한 분량은 늘 여기까지였다. 그는 케일럽의 우승이 중요해서 이 회차를 돌려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리아와 윌리엄의 죽음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 이것 하나 외에는 없었을 따름이었다. 고요한 사위에도 짐승처럼 울던 레리아나는 한참 뒤에서야 조용해졌다. 케일럽이 엉망이 된 거실을 다 치우고, 먼지를 털어내고, 벽난로에 땔감을 몇 개 더 던져 넣은 다음, 우는 여인의 손을 열어 열쇠 하나를 쥐여 주고 난 다음이었다.
“네가 말했던 상자는 다른 구역으로 가는 기차 짐칸에 실어 뒀어. 천으로 덮어 뒀으니 다들 금방 알 거야. 안은 열어보지 않았어.”
레리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무릎 꿇은 케일럽을 내려다본다. 불신하는 눈이었다. 주저하던 케일럽이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정말이야. 그렇게 의미 없는 결백을 주장한다.
대개의 경우 케일럽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느니 스스로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택할 레리아나지만 여의찮을 때가 있었다. 새로운 25주년 기념 규칙이 발표된 지금 같은 시기가 그랬다. 게임의 우승자이자 혁명군의 일원, 레라이나 샌드는 더는 케일럽을 믿지 않는다. 충성스러운 케일럽은 오늘도 상자를 건넨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레리아나가 갈라진 목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자원할 걸 알아. 난 아마 높은 확률로 호명될 테니까. 그러나 이번엔 정말로 널 돕지 않을 거야. 살리지 않을 거라고.”
“……레리아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기억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어린 케일럽 윈터는 사람을 살게 하는 모든 것을 레리아나 샌드로부터 배웠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고, 슬픔으로 산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캐피톨이 운운하는 평화도 아니고 그들이 지급하는 물자도 아니다. 누군가가 죽음으로 내몰릴 때 그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입 밖으로 외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의를 찾아 헤매는 길에서 네가 귀환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잖아……. 차마 되물을 수 없는 이기성을 삼키며 케일럽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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