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커미션 샘플

M님의 작업물

공포 4054

종결의 날이었고 동시에 해방의 날이었다. 갖은 이유로 억눌러놓았던 학생들이 참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은 이 광란의 흐름에서 일어날 시비나 등을 경계하며 학생들을 주시하고는 있었지만, 그 거대한 흐름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방임하는 쪽에 가까웠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어, 고삐 풀린 말과 같아진 대학생의 무리를 도대체 누가 말릴 수 있으랴?

따찌야나의 날이었다. 대학생들의 날이기도 했다.

온건하거나 바쁜 자들은 포옹을 나누며 제각기 가족이 기다리는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좀 많이 흥분한 이들은 아직 학교 인근에 남아서 얼음투성이 강이나 분수에다가 친애하는 친구를 던지려고 들었다. 지금이 졸업식 날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난폭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이날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많은 학생은 술을 찾았다. 그날 술을 만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근 주점들은 모두 학생들로 빼곡하게 찼다. 즉, 남아있는 자리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과 같은 이유에서 술을 빼놓을 수 없었던 니콜라이는 술집을 분주히 돌아다녔으나 이미 세 곳째 만원이었다.

“이런, 여기도 벌써 자리가 전부 찼나?”

니콜라이가 눈을 찡그린 채 돌아오자 바실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니콜라이는 투덜거리며 제 겉옷을 끌어당겼다. 밖에서 오래 돌아다니자니 슬슬 추위가 거슬렸다.

“우리만이 알던 단골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이리 붐비게 된 거지? 평소에는 찾지도 않더니, 이런 줏대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니콜라이의 주장과 시비가 과연 정당한지는 의문이었으나 미하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게를 주시하다가, 가게에 다시 비집고 들어가며 말했다.

“너희 잠깐만 거기서 기다려봐.”

“내가 보고 나왔어, 미셴카. 남는 자리 없어.”

방금 거절당하고 나온 니콜라이가 미하일의 뒷통수에 대고 외쳤지만 미하일은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하일은 자리를 마련해서 바실리와 니콜라이를 불러들였다. 바실리가 감탄하며 미하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지?”

“단골의 특권이지. 이곳 주인장분과 제법 안면이 있어서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정리해서 자리를 추가로 마련해주셨네.”

“니콜라도 제법 단골일 텐데. 이곳에 들러서 술을 더 자주 마시는 건 우리 둘 아니었나?”

“같은 단골이어도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리는 손님과 그들을 수습해가는 손님에게 쌓이는 마음은 달라. 후자에게는 일종의 유대가 생기지.”

미하일이 웃으며 말했고 니콜라이가 즉각 끼어들었다.

“미셴카? 지금 그거 날 겨냥해서 하는 말인가?”

“그렇게 들려?”

미하일은 태연하게 넘어가며 약을 올렸고 또 말다툼을 벌일 기세가 된 둘 사이에 바실리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일단 술부터 한 잔씩 하세.”

타이밍 좋게 점원이 그들에게 술을 내왔다. 그들은 아직 주문하지 않았지만 익숙하게 받아들었다. 바실리가 잔을 각자에게 돌렸고 각자 건배사를 외치며 들이켰다.

“건강을 위하여.”

“성적을 위하여.”

“앞날을 위하여.”

모두 첫 잔은 단번에 비웠다. 니콜라이는 곧장 술병을 들어 다시 채워 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모스크바 대학에서는 총장이 학생들에게 꿀술을 돌린다더군. ”

“부럽나?”

“총장은 별로 안 부럽고, 꿀술은 조금.”

“하여간 주정뱅이.”

그리 말하면서도 바실리도 니콜라이의 술병을 받아들어 제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술을 많이 하지 않는 미하일은 보통 이즈음에서 속도를 늦추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도 곧장 술병을 채가더니 잔을 채우고 쭉 들이켰다. 바실리가 눈썹을 세우며 물었다.

“미쉬카가 웬일이지? 오늘은 마실 기분이 나나?”

미하일은 한숨을 쉬고 어깨를 떨구며 말했다. 이곳 학생들의 들뜬 분위기와 대조적이었다.

“좀 심란해서 그래. 우리 셋이 이렇게 어울릴 일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자니 말이야.”

바실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졸업 하고 나면 곧장 연을 끊을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려고?”

처음으로 미하일의 음주 속도에 밀린 니콜라이가 잔을 비워서 따라잡고는 바실리를 보고 말했다.

“오히려 네가 그렇지, 바셴카.”

“내가?”

바실리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니콜라이가 끼어들었다.

“네 마음이 영 다른 곳에 가 있는 건 여기 바보 미셴카도 알고 있어.”

“니콜라, 너 방금 날 두고 바보라고 했나?”

니콜라이는 미하일의 중얼거림을 완벽하게 외면했다. 아까 미하일의 약올림에 대한 복수였다. 바실리는 술을 한 모금 머금었으나 이상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바실리는 그 순간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마리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 스미로바. 바실리의 정신이 계속 그 여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바실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니콜라이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마리아를 마주했을 때 니콜라이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때 지었을 얼빠진 표정을 니콜라이가 보았을 테니까. 하지만 미하일까지 알게 될 정도로 자신이 노골적으로 굴었을까? 바실리는 자연스러워보이도록 입가에 술잔을 가져가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술이 마른 입술을 파고들었다. 미하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속에 음악가의 영혼이 아직 살아있어, 바셴카.”

아,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군. 안도에 힘이 풀린 바실리는 잔을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며 잔이 통통 굴러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미하일과 니콜라이를 제외하고는. 니콜라이는 잔을 주워 직원에게 바꿔 달라고 요청했고 미하일은 눈을 깜박이더니 물었다.

“벌써 취했어?”

“……아니.”

“그럼 내가 방금 제대로 네 속내를 짚은 건가? 네가 그렇게나 놀랄 정도로?”

바실리는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바실리의 귓가에 사 분의 삼박자의 왈츠 곡조가 맴돌았다. 동 당당 동 당당. 피아노 독주로 시작한 그것은 단걸음에 오케스트라의 대열에 합류했다. 순간 바실리는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학생들의 환호성, 잔을 쾅 내려놓는 소리, 추가로 주문을 외치는 사람들과 주방에 커다란 목청으로 전달하는 점원의 외침이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음악만이 울려 퍼졌다. 동 당당 동 당당. 그리고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무도회, 장갑을 낀 손, 가벼운 스텝, 한 바퀴 돌며 부풀어오르는 치맛자락, 레이스가 그리는 부드러운 원. 그 가운데의 얼굴은…….

음악은 실로 바실리의 영혼이었다. 영혼의 지목은 무슨 수를 써도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건, 그런가 봐.”

정말 간신히 대답을 내뱉었고 그와 동시에 환상과 음악이 끊어졌으며, 바실리는 돌아왔다. 술 냄새와 불쾌한 소음이 자리하고, 점원에게 새로 잔을 받아든 니콜라이와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미하일이 있는 곳으로.

“역시, 네가 틈날 때마다 빈 음악 교실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는 걸 다 보았다고. 네 마음은 거기에 가 있다고. 솔직히 말해봐, 바셴카. 남은 인생동안 법률 조항이랑 씨름하면서 살 수 있겠어?”

그러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실리는 속으로 자문했다. 니콜라이가 말했다.

“미셴카, 너무 부추기지는 마. 그 길이 마치 라스푸티차를 걸어서 건너는 고난인양 말하네.”

“니콜라,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솔직히 이 중에서 제일 먼저 튀어 나갈 것 같아 보이는 건 너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순순히 관료가 못 될걸?”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지?”

“지금 그걸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건가? 네 행적을 돌이켜 봐.”

대화의 주제가 바실리에서 니콜라이에게 넘어갔다. 바실리는 여유를 다시 갈무리 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울적하게 말했다.

“어쨌든 너희가 각자 갈 길을 갈 것 같아서. 이런 시절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진다.”

미하일은 그답지 않게 술을 연거푸 들이켜는 것이 제법 심란한 모양이었다. 그는 흔치 않게 취해서는 모두에게 술을 꽉 채워서 돌렸다.

“다시 건배하자. 우리의 우정을 위해서.”

세 명의 잔이 부딪쳤고 누군가의 씁쓸함과 상념과 고민을 담은 잔은 비어갔다. 미하일은 서글픔을 지우려고, 니콜라이는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서, 바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끝없이 들이켰다. 미하일이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둘도 끝까지 마시고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삼인방은 지독한 숙취와 함께 깨어났고, 아무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자신들을 서늘하고 텅 빈 술집에서 발견했다. 우애로운 겨울방학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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