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음식, 일상과 비일상, 앎과 모름, 그 모든 것들.

소우+칸나

2022.10.03. 포스타입 게시글 백업본입니다.

 칸나가 소우의 감시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칸나를 소우가 피하듯이 굴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반항 않고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칸나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에 맞추어 소우도 젓가락을 놓는다. 칸나도 밥을 먹는 속도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소우는 특히나 느린 사람이었다. 음식을 삼키는 데에도 오래 걸리고 다시 젓가락을 움직여 음식을 입 안에 담는 것도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칸나와 속도가 맞는 건 현저히 적게 먹는 양 때문이었다.

"소우 씨는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

"응? 뭐… 딱히."

그들은 어트랙션을 클리어해서 클리어칩을 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필수적으로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냥 하루를 숨만 쉬고 보내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 양에도 못 미칠 것 같은 소우의 식사량을 칸나가 의식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건지, 돌아오는 대답이 석연찮았다. 칸나는 이야기를 끊어내려는 소우의 대답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둘러 말하기보단 솔직한 진실을 담았다.

"너무 밥을 적게 드시니까 걱정이 되어서요…."

"……."

소우가 가만히 칸나를 바라 보았다. 그 시선 안에 담긴 감정이나 생각은 칸나가 읽어내리기엔 어려운 것 뿐이라, 칸나는 그저 소우를 마주보며 답을 기다렸다. 한 수 굽히는 쪽은 소우였다. 한숨을 뱉은 후 말을 읊는다.

"있지, 칸나. 넌 네 역할이 그저 감시자라는 걸 잊는 거야?"

"네, 네?"

"그냥 감시를 할 뿐인 사람에게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잖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소우 씨!"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거리를 두고 있고, 너만이 나랑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게 감시가 아니면 뭐겠어."

하루 채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눈치 챈 것인지. 최대한 변명하며 둘러보려고 하는 칸나를 소우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 보며 심드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모든 정황이 수상하기는 하였다. 소우의 입장에선 기억을 잃고 일어나자 레코가 멱살을 잡고, 사람들이 적대를 하며 옆에는 칸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겠는가. 심지어 소우의 머리는 비상한 편이니 알아차리지 못하는 쪽이 더 이상한 경우가 맞았다.

"그렇지만, 칸나는… 소우 씨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걸요."

"……."

대화라는 건 함께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대답을 할 생각이 없다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거기서 끊어지게 된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밥도 다 먹었고. 가자, 칸나."

"네……."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소우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화제를 바꾸곤 결국 소통을 끝맺었다. 휘둘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가벼이 휘둘려 버린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트랙션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칸나는 복잡한 것은 잘 알지 못했다. 칸나에게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었고, 거리를 두려는 상대를 마주 보는 법도 몰랐으며, 수수께끼같은 사람을 알아가는 일조차도 한 적 없었다. 그저 부모님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웃었고, 너무 힘든 어느 날에는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울며,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언니를 좋아할 뿐인 일상을 살며 지냈다. 칸나가 할 수 있는 건 일상을 담은 말을 전하는 거였다. 어트랙션을 한 후, 칸나는 소우의 방 소파에 앉아서 맞은편 소파에 앉아 고민하고 있는 소우를 바라 보았다.

"칸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요."

"……. 뭐?"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평소보다 반응이 늦은 소우를 칸나가 바라 보았다. 그리고 소우도 예상하고 있을 말을 꺼냈다.

"소우 씨는요?"

"이 이야긴 끝난 거 아니었어?"

"이야기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니까,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죠!"

"하?"

소우의 반응에 칸나가 주춤했다. 하지만 소우를 응시하는 눈빛까지 움츠리지는 않아, 시선을 피하는 건 소우쪽이었다. 고개를 돌려 칸나를 피하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됐어. 먹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먹는 걸 안 좋아하신다고요?!"

"너는 좋아하나봐…? 아, 말하지는 마. 궁금하진 않으니까."

신나게 열리던 입을 닫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봐도 안 돼. 나중에 계속 빌미로 쓰면서 물어볼 거 아니야. 힐끗 칸나를 보았던 소우가 그리 말하고선 자리를 뜨려는 듯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구요? 여기가 소우 씨의 방인데."

"네가 안 나가니까 내가 나가려고."

"안 돼요! 소우 씨를 감시하는 게 칸나의 역할이라고요!"

"이젠 숨길 생각도 없구나…."

"진작 들켰다고 말해주셔놓고서!"

자신에 대한 걸 알려주기 꺼려하듯 보이면서도 이런 일반적인 대화는 피하지 않는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같은 게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선을 뛰어넘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야 했다. 아무튼, 난 갈 거야. 시간이 늦었는데도요? 그럼 네가 네 방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칸나는 소우 씨를, 아아 됐어. 나갈 거야. 소우 씨! 소우의 방은 떠들썩했다. 대화는 두 사람의 의사가 전부 있어야 이어지는 것이지만, 사람이 함께 있는 이상 어떤 대화든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소우가 문을 열고 칸나가 소우를 붙잡았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처럼 당연하게 칸나가 이겼을 터였다.

"…같이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요……."

마주한 풍경은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 일. 부서진 미시마 선생님의 인공지능은 빛 하나 발하지 않고 검은 화면만을 보였다. 하루 종일 소우와 붙어 있던 덕에 당연하다는 듯이 의심을 받는 소우를 변호하고 난 후, 다시 방에 돌아온 둘은 대화 없이 침묵했다.

"…역시 모니터가 부서지는 건 죽음을 뜻하는 걸까."

방을 나서기 전과 대비될 정도의 침묵 끝에 흔치 않게 소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칸나는 고개를 들어 소우를 바라보았다. 깊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중함보다는 죄책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칸나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소우의 모든 알리바이를 증언하는 사람이 칸나인 이상 소우는 모니터를 부수지 않았고, 모니터에 관련하여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칸나는 질문에 답했다.

"그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곳은 모니터에서만이라 했으니… 죽음이랑 다를 게 없겠죠."

소우가 고개를 숙였다. 턱을 괴고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올렸다.

"그래……."

그 상태로 멈춰서 얼굴을 가렸다. 칸나가 알 수 있는 건 목소리의 끝이 떨렸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겠지."

그리고 목소리는 다시금 평정을 되찾는다. 소우가 손을 내렸다. 그곳엔 평소와 똑같은 표정의 소우가 있었다.

"이제 슬슬 자야하지 않아? 네가 침대에서 자. 난 소파에서 어떻게든 할게."

"네? 하지만 여기 방 주인은 소우 씨인데…"

"염치를 알면 네 방으로 돌아가던가."

"……너, 너무해요!"

결국 칸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소파 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소우가 목도리를 푼 적을 본 적이 없는데, 잠을 잘 때도 목도리를 두르고 잘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나 내일 밤에 확인해봐야겠다. 칸나가 뒤척였다. 피곤한 게 분명한 하루임에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부서진 모니터를 보았기 때문일까, 소우의 거짓말 같은 변화때문일까.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떤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곧바로 평소의 모습이 되었지만, 그걸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이건 소우를 알아가는 데 중요한 것 일지도 모른다. 나쁜 사람이 아닐 테니까. 분명 사실은 좋은 사람일 테니까.

일어나서 칸나가 본 건 나갈 준비를 다 마친 소우의 모습이었다. 목도리를 매만지고 있는 소우에 칸나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나가시려고요?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소우가 놀라 칸나를 돌아보았다. 소우가 말을 고르는 듯 입을 여닫는 사이, 칸나는 빨리 일어나 제 방에서 챙겨 온 세면도구와 옷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보는 사람에게도 다급함이 느껴지는 속도였다. 몇 분만에 씻고 옷을 갈아 입은 칸나가 의기양양하게 화장실에서 나왔다.

"안 힘들어?"

아직 안 나가셨죠? 다행이다! 그런 말을 뱉으려고 했던 칸나가 입을 연 채로 멈췄다. 무슨 뜻인가요? 그것조차도 묻지 못하고 소우를 바라보았다. 소우는 칸나를 응시하며 조곤히 말을 이어갔다.

"말이 좋아 감시지. 너는 그냥 나를 떠맡은 거잖아. 계속 대화를 하려고 하고, 무리해서까지 같이 가려고 하고. 너만 부담감을 가지면서."

의기양양했던 표정이 젖어들어가고 열려 있던 입이 닫힌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이 감시가 계속 될 수록 힘들어지는 사람도 칸나고 지치는 사람도 칸나다. 소우가 언제 돌발행동을 할까 전전긍긍하고 홀로 어디론가 가지 못하게 소우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힘들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짐을 질 필요는 없어."

소우의 말에 담긴 건 애정과 동정 사이에 어설프게 낀 이도저도 아닌 감정이었다. 그랬기에 칸나는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힘든 건 사실이었다. 지치는 것도, 부담감이 느껴지는 것도, 불안한 것까지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을 들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칸나가 하겠다고 한 거니까요."

"뭐?"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소우를 마주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드디어 맞닿는다.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칸나가 먼저 잘못했으니까요."

소우의 얼굴이 굳었다. 칸나는 합리를 따졌다. 카이와 소우 중 누가 더 살아야 할지 비교를 해보고 판단을 내렸었다. 그 선택은 모두를 배신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건 칸나가 선택한 결과였다.

"먼저 배신한 건 칸나니까 이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좋아요."

변명이며 자기 만족임을 스스로도 알았다. 이건 언니를 죽게 내버려뒀을 뿐 아니라 모두를 배신한 자신을 향한 합리화다. 소우가 목도리를 잡았다. 고개를 내린다.

"네가 그렇다면 됐어."

이번에도 시선을 먼저 피한 사람은 소우였다. 그러나 이전까지와 느낌이 달랐다. 전에는 껄끄러움이었다면 이번에는 안도에 가까웠다. 무엇에 안도를 한 건지 칸나는 결코 모를 일이었다.

"허튼 데 시간을 썼네. 나가자."

"……네."

그들은 이번에도 식사를 함께했다. 어제보다 더 조용하고 짧은 식사였다. 어제 밤에 비해 가라앉은 분위기이긴 했으나 침체까지는 아니었다. 칸나는 계속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내게 되었으니 오히려 후련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칸나가 소우를 흘깃 보았다. 소우의 기분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칸나가 면전에 대고 '기억을 잃은 당신을 그들을 위한 속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 없음에도 그러했다. 칸나는 괜히 마음이 복잡했다. 소우를 저렇게만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소우는 분명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감시하겠다며 나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칸나는 소우를 신뢰하는 편으로…

"아, 사라 씨! 메달 교환 없이 셋이서 대화하는 거 어떠세요?"

사라와 셋이서 나눈 대화 이후 소우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칸나가 보았을 때 소우의 표정 안에 담긴 것은 안심이나 불쾌감같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한 소우를 존중하기 위해 칸나도 간간이 살펴만 볼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대화 없이 조용히 있다 입을 연 것은 어트랙션을 할 때의 조언이었다. 저 괴물은 첫 카드에선 기를 모으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 소우의 말에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칸나가 카드를 조합하고 소우가 가끔씩 조언을 하며, 어트랙션이란 상황에 맞지 않는 잔잔한 분위기와 함께 승리했다.

"감사해요, 소우 씨. 소우 씨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아니, 뭐."

생각 정리는 끝난 걸까. 칸나는 소우가 왜 그렇게까지 사라에게 적의를 갖는 지도, 하는 질문의 의도들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소우에게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생각이 끝나신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아 긴가민가하는 칸나에게 소우가 먼저 말했다.

"국물류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야. 먹기 편하니까."

그 뜬금 없는 말을 이해하는 데엔 몇 초가 걸렸다. 이내 칸나의 표정에 들어차는 건 활기였다.

"된장국이나 어묵 국물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거죠?!"

"어, 음. 기왕이면 건더기도 없는 쪽이 편하고."

"…그건 국물을 좋아한다는 거랑은 좀 다르지 않나요?"

"말했잖아. 국물류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잖아요! 칸나한테 아이스크림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인데!"

"애초에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그러네……."

아침 이후로 계속 미묘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환기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칸나가 알고 있는 일상을 닮은 장면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비일상을 닮은 사람과 함께 일상을 그렸다. 소우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차례를 걸친 대화가 소우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칸나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칸나에게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특히 소우가 얽히면 의문이 배로 더해졌다. 그러나 비일상 속에서 가장 일상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소우였다. 칸나가 웃는다. 일상을 닮은 대화는 사람을 누그러뜨리기에 완벽했다. 역시, 사실은 좋은 사람이야.

어트랙션이 아니어도 둘은 함께 조사를 속행했다. 그들의 조사는 모니터룸과 황폐한 복도를 위주로 돌아갔다. 무언가를 숨긴다면 이런 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우의 판단 하에 이루어진 조사였다. 조사를 할 때 소우가 힘들다고 주저앉는 횟수가 많아 칸나가 억지로 끌고 가려는 상황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황폐한 복도 쪽에서 수상한 장소를 발견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나한테는 들어갈 용기도 없고… 무엇보다 힘들어서 이제 쉬고 싶은데. 소득은 있었으니 쉬고 나서 확인하는 거 어때."

"좋아요! 칸나도 무서워서… 각오를 하고 들어가고 싶어요."

조사가 확실히 힘들었던 건지, 소우는 몸이 안 좋다며 잠이 들었다. 본래 그것을 지켜보는 역할도 칸나의 역할이었지만 아리스가 대신 봐주겠다며 선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흔치 않은 자유 시간을 얻었다. 먼저 배신한 건 칸나니까 괜찮다고, 그리 말했지만 확실히 소우의 말대로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발견한 장소에 어떤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칸나가 차분히 마음을 다지고 있을 때, 사라가 보였다. 칸나는 화색했다. 사라와 함께라면 그 장소에 들어갈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상황이 이어져서 하게 된 메달 교환 후, 소우는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마주하게 된 소우는 메인 게임 전, 칸나에게 계획을 말하던 모습과 흡사했다. 칸나는 불안감이 들었다. 소우와 함께하다 어느새 사라졌던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칸나, 우리 거래를 하자."

웃는 소우는 자신이 선호한다 말하는 음식을 말할 때와는 모습이 달랐다.

"내가 조사하다 이런 걸 얻었거든…."

소우가 핸드폰을 보여줬다. 칸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언니의 스마트폰이었다. 칸나의 안색이 식었다.

"이 안에, 네 언니가 죽기 전에 너를 위해 적은 문자가 있어."

칸나는 한 번 희망을 품었다. 언니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죠와 사라, 미시마 앞에서 희망을 다졌다. 그리고 그건 곧 물거품이 되었다. 칸나는 언니를 살릴 수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했다. 언니 살인자라 불리며 희망의 문을 닫았다. 일어선 칸나는 모두를 배신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움직였다. 그 안에 자신에 대한 건 없었다. 칸나는 망설였다. 언니가 적은 문자를 알고 싶었다. 동시에 칸나를 원망할까 무서웠다. 만약 언니가 칸나를 원망했다면, 그걸 칸나가 직접 마주하게 된다면. 칸나는 일어설 수 있을까? 제대로 된 각오를 지닐 수 있을까? 칸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침을 삼켰다. 그래도 칸나는 알고 싶었다. 칸나의 눈을 본 소우가 말을 이어갔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해. 네가 가진 메달로 큐타로 씨가 가진 노트북을 사면 되는 거야. 그러면 네게 스마트폰을 줄게. 괜찮은 거래지?"

칸나가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칸나라도 그정도는 알 수 있다. 칸나가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그 모습을 보던 소우가 선수 치듯 입을 열였다.

"이미 칸나는 모두를 배신하고 나를 도왔잖아?"

칸나는 알았다. 소우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러나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돌아온 거면 언제부터 돌아온 거지? 지금 막? 아니면 오늘 아침 자신에게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을 때부터? 그도 아니면 처음부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칸나는 소우의 손에 있는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니의 메시지를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불안해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칸나는 모두에게 속죄하기 위해 소우를 감시하겠다고 자처했다. 그런데 여기서 칸나가 소우와 거래를 한다면 그건 더이상 속죄가 아니었다.

"이번엔 너의 욕심을 위해 모두를 배신하는 거야. 보고 싶잖아, 메시지."

칸나의 손이 떨렸다. 입을 연다.

"네…."

손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제 칸나가 배신하지 않은 사람은 소우밖에 남지 않았다.

"노트북을… 가지고 올게요. 거래해요."

"그래, 칸나. 나를 배신하지마."

이 순간, 칸나에겐 소우밖에 남지 않았다.

노트북을 되찾은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칸나는 스마트폰을 쥐었고 소우는 노트북을 열었다. 기껏 노트북을 되찾았건만, 달라진 패스워드에 소우가 탄식을 했다. 이정도 예비책은 당연한 처사겠지만, 소우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배터리가 있으면 뭐하는가. 노트북의 잠금조차 풀 수 없으면 무쓸모였다. 소우는 결국 노트북을 닫고 소파에 기댔다. 칸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였다.

"칸나는… 항상 언니랑 같이 집에 돌아갔어요."

칸나의 시선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고정된 채였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가끔 언니랑 같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어요."

소우는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시간도 즐거웠고, 같이 집에 돌아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좋았어요."

어쩌면 저는 언니와 함께 했던 그 시간 자체가 좋았던 걸지도 몰라요. 아이스크림은 언니와의 추억이 가장 많이 담긴 음식이니까. 조곤히 잇는 칸나의 말은 작게 떨렸지만, 불안감이나 슬픔보다는 감정에 북받치는 것에 가까웠다. 칸나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침묵을 고수하던 소우가 말했다.

"무슨 맛을 가장 좋아했는데?"

칸나가 고개를 들었다. 스마트폰이 아닌 소우를 바라봤다. 눈가엔 여전히 눈물이 맺힌 채다.

"바닐라도, 초코도 좋아했어요. 민트초코도 좋아했고…"

"……그 치약 맛 나는 거?"

"……너무해요, 소우 씨!"

움직인 얼굴 근육 탓에 눈물이 흘렀다. 감정이 북받쳐 나온 눈물은 어울리는 장면에서 쏟아졌다. 스마트폰의 불빛이 꺼졌다. 소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전등을 껐다. 편하게 자. 칸나는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자기 전의 기분은 환기할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일어났을 땐 역시나 소우는 나갈 채비를 다 하고 있었다. 나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노트북과 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칸나는 어제보다 여유롭게 씻을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칸나는 자신이 일어났을 때와 달라진 것 없는 소우를 보았다. 노트북 패스워드를 푸는데 상당한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모자를 벗었다가 머리를 헝클인다. 그리곤 다시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모자를 썼다.

"오늘은 안 나가실 생각인가요?"

"응. 그동안 열심히 조사하고 어트랙션 하고… 구매도 해서 칩도 다 모았고. 오늘은 노트북 비밀번호를 푸는 데 시간을 쓰려고. 마지막 날이니까."

칸나는 소우의 손을 보았다. 노트북 키보드를 바라본다. 소우에게 다가가 노트북 키보드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키보드를 천천히 눌렀다. 소우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지만 말리진 않았다. 수차례 실패하다가, 노트북 로그인에 성공했다. 소우가 화색을 지었다. 칸나가 자랑스럽게 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하는 음식 알려주세요!"

지금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은 쌩뚱맞은 말이었다. 노력의 보상을 바라고 한 말 같았다. 이 노트북의 내용이 필요한 사람은 칸나가 아니라 소우였고, 풀어낸 사람은 칸나였으니까. 거래 명목이라면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소우는 말문이 막힌듯 했다. 목도리를 매만지다 한숨을 쉰다.

"노트북 내용 먼저 확인해도 돼?"

"좋아하는 음식이요!"

항상 그랬듯 자세를 굽히는 사람은 소우였다. 칸나가 해낸 일이 대단한 일이긴 했으니까. 키보드의 지문을 봤을 뿐 아니라 그 키보드의 조합을 보고 어떤 패스워드가 맞는 건지 찍었어야 했다. 수백을 넘는 경우의 수를 뚫고 노트북을 열었다.

"…옥수수 스프를 좋아해. 이제 노트북 확인해도 돼?"

칸나는 활짝 웃었다. 이틀 전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드디어 들었다.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소우는 낯간지러운지 헛기침을 하고서 노트북에 집중했다. 

칸나는 어려운 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칸나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칸나는 달렸다. 소우의 앞에서 카드 교환은 할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간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왜 소우가 사라를 그렇게 적대하는 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칸나는 소우를 알았다. 툴툴거리면서도 애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다.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도 정이 많은 사람이다. 국물을 선호하고 옥수수 스프를 좋아한다. 사라에 대한 것도 알았다. 언니를 닮은 사람이다. 말투가 멋지고, 칸나가 몇 번이나 배신해도 품어주려 한 사람이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언니의 이름을 빌려 자신에게 애정을 전해준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도 잃을 수 없었다. 칸나에게 희망을 품어주려 한 사람들이다.

칸나는 죽을 결심을 했다. 전화박스에 들어갔다.

메인 게임이 끝나고 각자 다짐을 다진 후, 칸나는 잔해의 방에 가 소우의 시신을 보았다. 사라는 머뭇거리긴 하였으나 칸나에게 소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선명한 핏자국, 엎어져 숨이 멎은 소우. 이 공간 안에 담긴 처절함을 눈에 담았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칸나는 다짐했다. 그 다짐을 죽음 앞에서 곱씹는다. 더 이상, 앞으로는. 이런 말은 과거를 담을 수 없는 단어였다. 칸나는 결국 울었다. 소우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했다. 쿠기에가 죽었을 때의 좌절과는 달랐다. 칸나의 눈물이 소우의 핏자국과 섞였다. 애정을 끌어안고 한참을 슬퍼했다. 살게요. 칸나는 이곳에서 살아 나갈게요. 그런 말을 드문드문 내뱉었다. 칸나는 살아갈 결심을 했다. 속죄를 위해 함께하기를 택했던 소우에게 생애를 받고서 칸나는 한참을 울었다.

소우 씨는 잘 때도 목도리를 하고 주무시나요? 결국은 묻지 못한 말이 목께를 간지럽혔다. 칸나에게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앞으로도 칸나는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서러웠다. 그러나 칸나는 서러움에 북받쳐 고개를 베개에 묻기보단 애정의 흔적을 쥐는 자였다. 스마트폰을 켰다.

알게 모르게 애정을 주었던 그는 마지막에 모든 애정을 칸나에게 쏟아부어주었다. 칸나가 살아가기를, 나아가기를 바란 사람이었다. 그러니 칸나가 해야할 일도 당연했다.

"칸나는 지지 않아요…."

주인 없는 방에서 다짐을 말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문장이었으나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코코아를 홀짝이던 칸나가 음료수 자판기를 보았다. 옥수수 스프. 소우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 음식. 자판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칸나를 보고 사라가 물었다.

"왜 그래, 칸나? 코코아 하나 더 뽑아줄까?"

사라의 물음에 칸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아뇨."

그러니 칸나는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소우의 하얀 환영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칸나는 이 미소 아래에서 다정을 품고 강하게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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