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 나를 배신하지 마.

소우+칸나 대역 승 if

2022.06.29. 포스타입 게시글 백업본입니다.

눈을 뜬다. 움직이지 않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일어난다.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와 주방을 살핀다. 컵라면 하나 없다는 걸 눈치채지만 않았어도 평소와 같은 하루가 됐을 터였다. 나가야 하나. 반사적으로 든 생각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시간개념 없이 살아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단순히 생활패턴이 어그러졌다는 게 아니다. 환기하기는 커녕 암막 커튼에 가려진 지 오래라 밖을 확인할 수도 없는 창문, 불 하나 켜지 않은 암전을 담은 집에서 한참을 살았다. 핸드폰은 베터리가 나간 채로 충전하지 않았고, 시계는 째깍대는 소리가 거슬려서 예전에 충동적으로 처분했다. 결국 지금 시간을 알 수 있는 수단은 커튼을 걷는 것밖에 없었다. 비일상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전등이 빛을 깜빡이다 곧 점멸한다. 이것조차 다 닳은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이미 오래전에 과거가 된 다수결 게임에서 우승한 자의 모습이다.

그는 과거에 잡혀 사는 사람이었지만, 우습게도 그 과거가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모든 기억이 흐릿한 것에 비해 그가 우승을 한 순간 일부분만큼은 또렷하게 남았다. 역할의 이름이 뭐였는지조차 잊었다. 다만 그는 투표를 받았고, 아이와 함께 살아나갔다. 그 대가로 죽어가는 모두를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 숙이며 우는 아이를 대신하듯 그는 모든 죽음을 눈에 담았다. 그는 울지 못했다. 지독하게 건조한 눈으로 모든 걸 기억하려 애썼다. 우스운 노력이었다. 그들의 모습은커녕 아이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그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나가면 다신 만나지 말자.

아이가 깜짝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무어라 애원을 한 것도 같았다. 그의 우승과 아이와 함께 나간다는 선택은 오로지 그의 독단이었다. 그 과거 게임에서 아이에게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냥 나를 원망하며 살아.

어떻게 매달리는 아이를 뿌리쳤는지. 그 이후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저 우승한 이후 기억이 있는 시간부터 그는 줄곧 혼자였다. 왜 아무도 오지 않으며, 어떻게 이리 완벽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지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조용한 집에 울려 퍼지는 시계 째깍대는 소리에 귀를 막으면 환청이 들려 아예 시계를 치워버리고, 배가 고파 밥을 먹으면 음식이 역류하여 변기를 붙잡는 생을 살았다. 커튼의 측면을 잡아서 들쳤다. 운 좋게도 밤이었다. 겉옷을 입고서 목도리를 두른다. 어느 날은 아예 굶어 죽을 각오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삶을 물고 늘어졌다. 이런 식으로라도 살고 싶었다. 죽음이 바로 앞에 있는 감각을 아는 듯이. 현관을 열었다. 늘 가던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이 기이하게 조용했다. 치안이 안 좋은 곳이라 한적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골목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다크서클이 내려온 몰골이 초췌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그에게 달려왔다.

"소우 씨."

그가 눈을 슴벅였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행색치고는 담담한 어조였다.

"몇 달 전에 여기서 목격되었단 걸 알게 됐을 때부터 매일 기다렸어요."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나간다. 아이의 눈가가 천천히 붉어진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또 가버리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그의 옷깃 끝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그러나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소심한 의견 표출이었다.

"이제 칸나한테는 소우 씨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버티는 생존 욕구가 모든 걸 막았다.

그랬다. 애초 히요리 소우는 울며 애원하는 칸나를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신 보지 말자고 말했지만, 자신밖에 없다며 우는 칸나를 내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칸나와 같이 지냈다. 칸나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혔다. 모두를 죽인 소우를 원망하기는커녕 의존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위태롭게 지내던 날에 소우가 칸나에게 뜬금없이 말했다.

내가 0.0%인 건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게 아니었어.

칸나가 놀라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소우를 보았다. 우승 이후 둘 사이에 그 게임에서 있었던 일이 대화에 오른 일은 없었다.

그저 나는 그들의 죽음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며칠 뒤 소우는 도망쳤다. 완벽히 홀로 남아 천천히 기억을 닫았다. 과거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잊어서도 과거에 잠길 거라곤 예상하지도 못한 채로 도피하려 했다. 그의 표정이 사색으로 질렸다. 희게 질려 전보다 더 마른 그의 외양은 망가진 사람의 표본이었다. 눈가는 붉어졌으나 채 울지 않은 칸나의 손을 뿌리친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달렸다. 혼자가 되어야만 했다. 기억을 떠올려서는 안 됐다. 그것만이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몇 달만의 외출인 탓에 소우의 다리가 휘청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칸나가 그를 강하게 붙잡았다.

"제발……."

그는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칸나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저를 혼자 두지 말아 주세요……."

그가 달리는 걸 멈췄다. 기억이 있든 없든 결국 그는 우는 칸나를 면전에 두고 떠나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살기 위해서 그 어떤 방법을 강구하더라도 상대가 칸나라면 속절없이 무너져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렇네, 미안…."

그는 닫아버린 자신의 과거에 단단히 얽매였다. 칸나가 그의 곁을 떠나 배신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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