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요리 소우는 시뮬레이션을 켰다.

소우신

2022.07.07. 포스타입 게시글 백업본입니다.

달칵. 끝맺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히요리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불만족스럽단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의자를 돌린다.

"이제야 대화할 마음이 들었나?"

알지. 여기에 멀쩡한 사람은 없다지만 가장 대하기 껄끄러운 자였다.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고 붕대로 가리는 자를 어찌 반갑게 마주할 수 있겠는가. 물론 히요리가 유감스러워하는 부분은 볼 수 없는 얼굴이 아닌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람은 순간순간 변하는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많은 것을 담는 생물이었으니까.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

알지가 줄곧 들고 있는 종이를 히요리에게 보여줬다. 지금 진행 중인 다수결 데스 게임의 승률 표. 히요리 또한 방금까지도 보고 있는 데이터였다.

"그게 뭐 어쨌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후보자들 간의 승률 편차가 심해서 말이야."

그건 딱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치도인 사라부터 츠키미 신까지. 중간에 변수가 일어나 등수가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1위와 꼴등은 불변했다. 히요리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경외를 느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생존만을 위해 강해질 수 있고, 이렇게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 나갈 수 있구나. 만약 이들이 정말, 본체로 데스게임에 오게 된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 생명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갈구하고 생을 끝맺을까. 명확하게 나뉜 강자와 약자였다.

"그래서 본편에선 밸런스를 조정하겠다고? 데스게임은 신성해야 하니까?"

"그래. 넌 이게 불만인 모양이지만."

"당연하지. 이 승률은 그 사람이 가진 본성을 나타내는 지표야."

밸런스를 조정한다는 건 그 사람의 본성을 억누른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적어도 히요리의 생각은 그랬다. 이만큼이나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를 억누르고, 이만큼이나 밑바닥을 기는 자를 끌어올린다는 건 그 사람을 망치는 것이다. 인간은 극한 상황을 마주할 때 그 인간이 지닌 제각각의 아름다움을 보인다. 불변의 순위. 그것은 히요리가 보았던 그 어떠한 인간의 모습보다 가치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밸런스 조정 방법은 아군을 넣는 거야."

"후보자들만 참여하는 게 아닌 데스 게임이라니, 정말 신성하겠네."

숨길 생각도 없이 불쾌함을 내비치는 히요리에도 알지는 웃음소리를 내는 게 전부였다. 이런 태도가 싫었다. 표정도 읽을 수 없고 행동조차 의연하다.

"츠키미 신의 경우는 아군을 누구로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뭐?"

불변의 0%. 삶을 갈구하는 의지와 욕구는 있으면서도 끝내 살지 못하고 모든 이야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 히요리가 관심을 보이는 걸 눈치챈 알지가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관계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생사가 갈린 상황에서도 오롯한 편으로 남아있거나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유대를 가진 자 또한 없어."

히요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지는 대답이 정해져 있음을 알며도 물었다.

"츠키미 신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이 어때. 네가 그의 아군으로 참여하는 거야."

불만족스러운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히요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벌써 나갈 채비를 시작한다.

"치사하게 나오네. 동의를 할 수밖에 없어."

"어른이니까 말이지."

츠키미 신의 삶에 끼어드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같은 교복을 입고 다가오는 처음 보는 사람에 놀라고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친근하게 구는 자를 내칠 수 있는 성격을 지니지 못했다. 히요리는 신에 대한 대부분을 알고 있는 채로 만남을 시작했다. 수백 번이고 돌려본 시뮬레이션 속 인물이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까지 이 정도의 관심을 주진 않았지만 불변하는 두 사람에 대해서는 달랐다. 츠키미 신이란 자는 첫 만남부터 요비스테를 해도 당황스러움과 떨떠름함을 느낄지언정 거절은 하지 못하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친한 척 굴며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까지 되는 것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내심 기뻐하는 마음도 느낀다는 걸 전부 알고 있었다.

"자, 신. 이거 좋아했지?"

"아, 고마워."

고등학교 매점에서 파는 싸구려 옥수수 캔이었다. 히요리가 신의 표정을 눈 안에 담았다. 히요리가 따서 준 옥수수 캔을 웃으며 받았다가 순간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을 짓는다. 이거다. 이거였다. 사람은 순간순간 변하는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많은 걸 담을 수 있는 생물이었다. 히요리는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히요리 군, 내가 이거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가……."

의아함이 담긴 표정으로 히요리를 돌아보다, 그 표정에 말끝을 흐리고 행동이 잠깐 굳었다. 히요리는 그 안에 담긴 공포를 읽어낸다. 시뮬레이션에서 몇 번이고 봤던 감정이다. 그러나 달랐다.

"아하, 하하."

역시 AI와 인간은 다른 점이 많구나! AI의 성격은 본체를 기반으로 업데이트된다. 지금 히요리가 마주 보고 있는 신은 히요리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신. 히요리가 몇 번이고 돌려본 시뮬레이션 속 존재가 아닌 자. 즉, 히요리는 업데이트될 신 AI에게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해도 뒤집을 수 없는 0.0%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신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갑작스럽게 웃음을 흘린 히요리 때문인지, 여름이기 때문인지 신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신이 직접 알려줬었잖아. 기억 못하는 거야?"

"그…랬어? 음, 미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넘어간다. 히요리가 알고 있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히요리가 계속 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신의 시선은 갈피를 잃더니 결국 옥수수 캔을 먹으며 애써 회피했다.

히요리는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 속 신이 대역을 뽑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이 뽑은 이상 이건 확실한 사망이었다. 메인게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에서부터 완전히 글러 먹었다. 살고 싶으면서 모두를 속일 수 있을 만큼 악독하지도 않다. 신의 목걸이에서 나온 약물로 인해 천천히 얼어 죽어갔다. 겨울날에 신이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신은 추위를 많이 타지."

"으응. 차라리 여름이 나아."

"체육제때 죽으려고 했으면서."

"그, 그건 특수한 상황이었고."

최소한 한 경기는 무조건 뛰어야 한다는 말에 신이 겨우 선택한 종목은 이인삼각이었다. 그마저도 금방 지친 탓에 체육제는 물론 준비 기간에서도 파트너인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내내 사과했다. 어떻게 히요리 군은 한 경기도 안 뛰는 거야? 묻는 신에게 웃으며 궁금해? 물어보니 잠깐의 침묵 후에 아니, 됐어…. 하며 이야기가 끝났던 것까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신도 그때를 생각하는 듯 말을 꺼냈다.

"그래도 그땐 아쉬웠어. 히요리 군은 나와는 달리 운동도 잘할 것 같아서, 나가는 경기 한 번은 보고 싶었거든."

"뭐, 누구든지 신보다는 잘하겠지만."

"그렇긴 하겠지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도 히요리는 생각했다. 잘하는 것, 잘하는 것이라. 그러고 보면 데스 게임은 기계에 의존하는 면이 있었다. AI부터 보안 같은 것까지. 만약 신이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진다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이 신이 가진 본성이다.

이번 시뮬레이션에서 신은 사라에게 살해당했다. 히요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전에도 있던 일이지만, 신의 아군으로서 데스 게임에 참여하기로 약속된 이후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AI가 아닌 진짜 신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인가? 그 옆에 서서, 극한의 상황에서도 의존할 수 있는 친구에게 살해당하는 절망적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도 살아남을 수 없는 0.0%의 확실한 종지부를 내가, 이 손으로. 히요리는 그날 잠을 설쳤다.

신이 히요리의 집으로 온 첫날, 이미 되어있는 컴퓨터의 자리 배치를 보고 입을 떡 벌었다.

"왜, 왜 마주 보고 있는 거야?!"

"그야 그편이 가르쳐주기에도 신이 묻기에도 편하잖아. 동의한 거 아니었어?"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지…!"

친구와의 동거. 그것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있는 표정이 황당함으로 얼룩졌다. 신은 특히 감정이 표정에 잘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신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궁금한걸."

"그야 밥 먹던 도중에 말하면 누구라도,"

"그럼 신은 이미 다 해 놓은 배치를 풀기를 원하는 거야? 내가 시간을 들여가며 힘들게 겨우 해놓은 인테리어를?"

"아니, 그건…"

"그런 거라면 어떤 배치를 원해? 물론 내 시간과 노력은 헛된 것이 되겠지만 신이 바란다면 못할 것도 없는데. 지금은 구석쯤엔 이미 선반이 놓여 있어서 책상이 있을 곳은 중앙밖에 없지만, 신이 원한다면 선반도 다 뜯어낼 수 있어!"

"아, 그,"

"응? 신 어떻게 할까아. 응?"

"돼, 됐어! 됐다고! 이대로 하자!"

히요리가 말을 이어 나갈수록 신의 표정이 질려갔다. 공포라기보단 압도에 가깝다. 강자에게 보이는 약자의 본능이다. 히요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신의 무의식 아래에 깔린 가장 원초적인 본능. 다양한 반응 전부 좋았지만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밑바닥을 보일 때가 가장 즐거웠다. 히요리가 마주 보는 컴퓨터를 변명으로 신을 쳐다봤다.

시뮬레이션으로 보았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신의 두뇌는 비상한 편에 속했다. 히요리가 알려주는 족족 알아들으며 실습에도 문제가 없는 모습에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잘 따올 줄은 몰랐는데. 히요리가 아는 신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이였으니. 한창 진도를 나가 대략적인 평균의 범주를 넘어선 단계의 조작법을 알려줄 시기였다.

"오늘은 좀 바빠서 내일 해줄게."

"에, 알았어. 나가려고?"

"응. 금방 돌아올게!"

AI의 성격 업데이트 날이었다. 히요리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드디어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영향을 받은 신. 나에게 영향을 받고도 불변할 0.0%의 모습을. 신이 가진 본성이 보이는 장면을. 신이 다녀와, 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늘의 너는 어떻게 죽을까. 히요리가 손을 마주 흔들어주곤 집을 나섰다.

히요리 소우는 시뮬레이션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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