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커미션][노리사니] 스며들다

[오마카세 타입] 김제스님이 신청하신 글커미션

written by. @saniwa_jeyeon CM

 

 

 

0.

 

 

노리무네 이치몬지는 여자의 머리 위에서 흩날리는 꽃잎을 보았다.

시대를 막론하고 꽃잎이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든가, 짝사랑이 이루어진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있어왔다.

 

오랫동안 존재하며 많은 것을 보아온 그도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늙은이에게 이 정도 즐거움은 있어야지, 하고 손을 뻗었다.

 

 

 

 

 

 

1.

 

 

 

처음 몇 번은 애써 주의를 돌려보려고 했던 것도 같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자 차츰 시선도 사고도 절로 눈앞의 남자에게 빼앗기고 만다. 카호는 촘촘히 놓인 흑 돌과 백 돌을 바라보다가, 건조해진 눈가를 왼손을 들어 슥슥 두어 번 비볐다.

 

반쯤 열린 창문 너머에서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높은 습도와 낮은 기압 탓에 카호는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끼는데, 마주하고 있는 상사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양 느긋하게 웃기만 하였다. 카호가 돌을 놓지 않고 가만히 있자, 노리무네가 말을 건넸다.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잠깐 쉴까.”

 

그리고 카호가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더니 이어 말했다.

 

“맛있는 걸 준비했다네. 놀랄지도 몰라.”

 

카호는 쥐고 있던 돌을 다시 바둑통에 넣어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뭘로 준비할까요?”

“자네가 마시고 싶은 걸로.”

“다 준비하고 나서 불평하지 마시고 지금 말씀하세요.”

“자네가 맹물만 끓여와도 불평하지 않겠네.”

“그것도 나름 차는 차일 텐데요.”

“백비탕은 내 취향이 아니야.”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면 당황해서 삐걱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수차례 반복된, 이리 불러도 좋을지 모르지만,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는 노리무네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간식을 꺼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카호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며 이 기묘한 시간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를 떠올려본다. 배정받은 혼마루 정화한다고 데굴데굴 구르고 와서 좀 쉬고 있을 때, 당장 맡은 일이 없어 쉬고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른 상사인 마고로쿠가 카호에게 말했더랬다. 노리무네, 아니 부장이 찾으니까 방으로 가보라고.

 

혼마루 정화가 끝난 후의 호출이었기 때문에, 사후처리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카호는 혼비백산하여 부장실로 달려갔다. 어찌나 급하게 갔는지, 제 남사인 짓큐 미츠타다조차 두고 후다닥 뛰어갔는데, 도착해서 숨을 고르는 카호에게 노리무네가 한다는 말이, ‘대국이 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지 뭔가, 그래서 불렀네.’였다. 그 말을 듣고 카호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괴이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그 표정을 마주하고 이거 보라는 듯이 드물게 웃음보를 터뜨린 노리무네의 얼굴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보통 괴이한 게 아니었겠지. 그래도 상사라고 그 얼굴에 대고 험한 소리는 하지 못한 카호가 겨우 꺼낸 말은 ‘저 바둑 못 두는데요.’였다. 그 말을 들은 상사는 더 크게 웃었던 것 같다. 카호는 전혀 웃기지 않아서, 마주 웃지는 못했다. 그런 카호를 바둑판 앞에 앉힌 노리무네는 그럼 배우면 된다네, 라면서 그녀가 돌을 쥐는 것을 기다렸다. 제가 원하는 건 얻어내고야 마는 상사의 성정을 아는 카호는 어쩔 도리가 있겠나 싶어 흑 돌 하나를 쥐어 판 위에 아무렇게 올려놓았다.

 

그렇게 시작이 된 기이한 대국 시간. 이 대국도 벌써 아홉 번째다. 카호는 여전히 바둑을 둘 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카호가 바둑판 앞에 앉으면 즐거운 듯이 웃는 것이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놓는 돌을 바라보며, 사소한 잡담을 하고, 쉬면서 차와 간식을 나눠 먹으며, 때로는 입 밖으로 꺼내놓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말들을 카호의 안에서 끄집어낸다. 이쯤 되면 카호가 아무리 무던하고 둔감한 사람이라도 눈치채고 마는 것이다. 노리무네가 대국을 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다는 것도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굳이 카호를 콕 집어서 부르는 것은 그녀를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일이 너무 고되지는 않는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쉬기는 하면서 일을 하는 건지. 평소 대화에 의욕이 없고 말이 없는 카호지만, 노리무네에게 이끌려 홀린 듯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 사려 깊음과 다정한 일면까지 합쳐서, 카호는 제 상사가 알 수 없는 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니라 도검남사라서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카호에게 도검남사란 어려서부터 익숙한 존재였고, 정화부로 배속 되기 전에는 그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기에 단언할 수 있다. 정화부의 수장인 노리무네 이치몬지가 유독 알 수 없고 묘한 존재다. 도검남사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었더라도 그런 평을 했으리라.

 

양손에 머그컵을 들고 걸어가자 노리무네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빨리 와서 이것 좀 먹어보게.”

 

뭐 얼마나 맛있는 걸 준비했길래 호들갑을 떨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컵을 한쪽에 내려놓고는 노리무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만쥬다. 히요코 만쥬다. 흔하게 파는 히요코 만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옅은 갈색이 아니라 고운 노란색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노리무네의 머리카락 색처럼.

 

 

“자, 아 하게.”

“저도 손 있어요, 부장님.”

“허, 노란색이 제일 맛있단 말이네.”

 

이런 문제로 논쟁을 해봐야 결국 지는 것은 카호다. 일찌감치 포기한 카호는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노리무네는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먹이를 먹이는 양, 카호의 입에 노란색 히요코 만쥬를 넣어주었다. 입에 과자가 들어오자 카호는 그것을 반사적으로 우물우물 씹었다. 이내, 카호의 눈동자가 깜짝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정말 맛있었다. 그 반응에 노리무네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맛있지?”

“네, 와, 진짜 맛있다….”

“부장 회의에서 나왔던 건데, 내가 자네 먹여주고 싶어서 어디거냐고 꼬치꼬치 물어봤지.”

“회의를 가셨으면 회의를 해야죠 부장님…”

“아니, 별생각 없이 입에 넣었는데 진짜 맛있었다니까? 이거 먹으면 자네가 꼭 그 얼굴을 할 것 같아서 보고 싶었다고.”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다니, 이 늙은이 삐질지도 모르네. 하며 노리무네가 집어든 것은 연두빛의 만쥬다. 상자를 내려다보니 색색의 만쥬들이 들어있다. 분홍색, 하늘색, 하얀색…같은 색이 두 개씩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노란색이 제일 맛있다면서, 부장님 드시지 그랬어요.”

“제일 맛있는 거니까 자네 먹여주고 싶었지.”

“제일 맛있는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다른 녀석들은 회의 간식에 손을 안 대거든. 아깝게 말이네.”

 

그렇구나. 부장 회의에서 간식에 손을 대는 건 우리 부장뿐이구나.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 카호는 말없이 분홍색 만쥬를 새로 집어 들었다. 색만 다르지 맛은 비슷할 줄 알았는데 조금씩 달랐다. 분홍색 만쥬도 맛있었지만, 노리무네가 말 한대로 노란색이 좀 더 맛있었다. 이 정도로 맛있으니 동거인이자 제 남사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짓큐씨도 먹여주고 싶다.

 

“어느 가게 물건인가요?”

“안 알려주지.”

“그렇게 비싸요?”

“그건 아닌데, 자네 얼굴에 ‘와 맛있다, 우리 애들도 먹여주고 싶다.’고 쓰여있어서. 자네만 먹어, 자네만.”

“왜요, 맛있는 거니까 다들 먹어보면 좋은데…”

“싫네.”

 

솔직히 말하자면 카호는 이 시간의 노리무네가 조금 재미있었다. 평소처럼 능글맞고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벽이 하나쯤 허물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제 반응이나 말에 반응을 보이는 것도 조금을 ‘알 수 있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상사와 부하라는 위계는 엄연히 있었지만, 카호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 걸 빼면 크게 제멋대로인 존재도 아니었다. 목숨이 걸려있거나, 산더미처럼 쌓이거나 하는 일 사이에 탈진하듯이 쉬는 것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일상에 사탕 하나를 녹여먹는 듯한 편안한 자극이었다.

 

“부장님은 참 신기해요.”

“어떤 점이?”

“제가 일 다 하고 좀 쉬려고 할 때 귀신같이 저를 부르는 점이.”

“그야 자네한테 일 주는 게 나니까?”

 

귀신같다는 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며 노리무네는 우하하하 웃었다. 우리네가 귀신이 맞지 않나, 칼귀신하고. 별로 웃기진 않았지만 카호도 하하…하고 마지못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 혼마루는 어땠나?”

“이번에도 냅다 군용가방 하나 던져주면서 다녀오라고 하신 분이 물어볼 말씀은 아닐 텐데요.”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절대 못 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슬슬 적응해가는 제 모습이 슬퍼져요.”

“그런가.”

 

노리무네는 대충 대답하고 카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카호가 입안에 있던 과자를 꿀꺽 삼켰다. 시선을 피할까말까 슬그머니 고민하다가 피하기로 결정 할 때쯤 노리무네가 이어서 말했다.

 

“이번에도 순직위기에서 벗어난 걸 축하하네.”

“그러니까 그 말에도 익숙해 져가는 게 슬프다니까요.”

“이번엔 특히 그랬지.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있던 혼마루니까.”

“부장님, 실례되는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하게.”

 

카호가 살짝 머뭇거리며 물었다.

 

“‘노리무네 이치몬지’라는 도검남사들은 다 비슷한 성격일까요.“

 

노리무네가 피식 웃었다.

 

“글쎄.”

“정말 이상하게요.”

“듣고있네.”

“지금까지 임무로 파견 나간 혼마루가 여럿이었지만, 전 거기서 ‘노리무네 이치몬지’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카호는 컵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뗐다. 따뜻한 카모마일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가슴에 온기가 퍼졌다.

 

 

“개체차라는 게 있으니 모두가 비슷한 성정이라고는 못하겠지만, 모두 재앙이 되기 전에 스스로 부러지지 않았겠나.”

“어떻게 아셨나요?”

“자네가 그렇게 질문을 했으니까.”

“왜 그런 걸까요?”

 

노리무네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사랑은 일그러진 것이니까.”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카호는 그 말을 몸으로는 이해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명한 심신자 가문에서 태어나서, 정화부에 배속되기 전에는 오랫동안 감찰부에서 일했던 터라 노리무네 이치몬지라는 도검남사는 여럿 보았다. 대체적으로 그 성정은 ‘알 수 없다’는 느낌으로 비슷했기 때문에, 유독 묘하고 알 수 없는 제 부장이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같은 선택을 할지, 카호는 문득 궁금해졌다.

 

“부장님도 그러실까요?”

“왜, 벌써 죽을 자리를 봐주고 싶어졌나?”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노리무네는 카호가 드물게 꺼낸 질문이 신선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그러지 않을 걸세.”

 

푸른 눈동자가 카호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카호는 자연스럽게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째서요, 라는 질문이 절로 이어졌다.

 

“자네라는 정화심신자가 있다는 걸 아니까.”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카호는 헤, 하고 입을 작게 벌렸다.

 

“불평하면서도 자네는 열심히 정화해주지 않겠나. 이런 부하를 가지고 있다니, 이 또한 내가 타고난 복이지. 암.”

“그 말을 듣고, 조금,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우하하하, 하지만 자네도 나라는 상사를 잃기는 싫으니 열심히 할걸? 이래 보여도 드물게 괜찮은 상사이지 않나.”

“저 말고도 다른 베테랑한테 맡기는 게 믿음직하지 않으시지 않겠어요?”

“자네인 게 좋네.”

“아, 네……”

 

카호는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비가 그칠 줄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퇴근할 때도 내리려나. 우산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짓큐씨 현현을 풀어서 겉옷에 꽁꽁 싸매고 집까지 뛰어가야 하려나.

 

카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걸 눈치챈 노리무네가 말했다.

 

“다 먹었으면 마저 할까.”

“다른 생각할 틈을 안 주시네요.”

“자네 퇴근할 때쯤엔 그칠 거야.”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정말.”

“자네 얼굴에 다 쓰여있대도.”

 

툭, 툭. 멈췄던 대국이 다시 이어진다. 정갈하게 놓여지는 백 돌과, 제멋대로 놓여지는 흑 돌이 바둑판 위를 수 놓는다.

 

“비가 그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네.”

“태풍이 와도 퇴근은 할 거예요.”

 

여전히 카호는 바둑을 두는 법을 모른다. 노리무네도 하나하나 붙들고 가르쳐주는 일은 없다. 그래서 돌이 바둑판을 가득 채워도-아마도 노리무네가 이겼을 테지만- 카호는 대국의 승패를 알지 못한다. 이겼는지, 졌는지. 오늘도 그렇다. 이겼는지 졌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대국이 끝났으니, 카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일을 마저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서 퇴근할 것이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말하게.”

“대국 승패는 난 건가요?”

 

바둑판과 간식을 나눠 먹은 쟁반을 정리하고 방을 나서려는 카호가 마지막으로 묻자, 노리무네는 늘 그렇듯 우하하하 웃으면서, 의미 모를 대답을 했다.

 

“대국은 늘 자네가 이기던데.”

 

규칙도 모르는 제가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여느 때처럼 상사가 저를 놀린다고 생각하며, 카호는 가볼게요, 하고 방을 나섰다.

 

“내가 늘 자네를 이기게 해줄 테니까.”

 

문이 닫히고 나서야, 노리무네는 덧붙였다.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자, 그는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처럼 내리고 있었다.

 

 

 

 

 

 

 

 

 

 

 

 

.0

 

 

 

손을 쥐었다 펴자, 분명 잡았으리라 생각한 꽃잎은 온데간데 없었다.

 

노리무네는 꽃잎이 어디로 가버렸을까 고민하다가, 그것이 제 안에 스며들었음을 깨달았다.

 

이야기는 이것을 잡은 셈 쳐줄까? 그렇다면 그조차도 모르는 소원은 이루어질까.

 

그조차도 모르는 사랑은, 이루어질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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