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시간, 젊은 구애

윤섷

낭만이라는 것은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의 번지르르한 아름다움처럼 헛되었다. 일찌감치 그런 게 꿈일 뿐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낭만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던 박성화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건 연인이 준 상처였다.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못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연인이라 생각한 사람은 어느 샌가 또 다른 사람과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찔한 술래잡기같은 연애의 끝은 파멸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박성화는 차마 남에게 못된 짓을 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라곤 울음을 꾹꾹 참아내면서 연인의 움푹 들어간 한쪽 뺨을 때리는 것 뿐이었다.

이후의 날씨들은 번뇌에 가득찬 사람의 머릿속처럼 변덕스럽기만 했다. 봄의 날씨가 다가오면 쾌청한 하늘 아래의 아름다운 벚꽃들의 향연을 생각하겠지만, 현실의 봄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그런 낭만적인 상상을 배신하겠다는 듯 추적추적 비를 내리거나 하늘의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만을 보여주었다. 막 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벚꽃들은 빗줄기를 맞아 우수수 떨어져내렸고, 봄의 기운이 흐를 것 같은 3월의 아침에는 아직 얇은 가디건이 필요했다.

이러한 날씨 속에서, 박성화는 자주 외출을 했다. 줄곧 방 안에 있으면서 혼잡한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는 건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벚꽃이 피는 계절에 가장 아름답다는 명소에 홀로 가 보기도 했다. 어느 곳을 가든 상관 없었다. 누군가와 얘기하거나 길 위를 뚜벅뚜벅 걷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박성화는 종종 밖으로 나갔다. 가끔은 누군가와 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만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원나잇은 하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하는 올바르면서도 건전한 방식을 통해 그는 지난 날의 과오 같은 연애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연인의 얼굴과 연인의 행적은 흐려지다가도 선명해지는 걸 반복했다. 더욱 그를 화나게 만든 건, 은밀한 연애를 들키고도 그의 표정에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걸 예감한 나머지 덤덤해진 사람처럼 그 어떤 종류의 감정조차 없었던 얼굴. 왜 찔리는 게 없느냐는 박성화의 질문에 연인은 말했다. 차라리 다행이니까. 네가 알게 되어서 내가 그 사람에게 갈 수 있다는 게. 이별의 순간에도 자신만을 생각하는 대답 앞에서 박성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사람과의 연애에서 왜 내가 낭만을 찾으려고 했을까, 같은 때늦은 후회나 자책감만이 먹구름처럼 그의 등 뒤를 덮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료한 비의 시간이 또 한 번 찾아왔다. 이리저리 변하는 날씨는 비가 내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 피어난 벚꽃 모두를 후두두 떨어뜨릴 것 같은 빗줄기를 쏟아내었다. 봄비가 이렇게 올 수도 있는 건가, 하고 박성화는 원룸 창문 너머를 보며 멍하니 생각하다가도, 이런 날에 잠깐 나가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밀키트를 파는 가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밀키트를 잔뜩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몹시 기운이 나지 않는 하루였으므로 그런 날에는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먹고 싶었다.

밀키트를 파는 가게는 원룸 건물이 밀집한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까지 나가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박성화는 미리 현관에 잘 말려놓은 수건을 깔아놓고는 긴팔 후드티와 펑퍼짐한 트레이닝 바지, 검은 슬리퍼 차림을 한 채 우산을 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발을 적시는 빗방울의 차가운 감각이 썩 나쁘지 않은 가운데, 걸음걸음을 옮기며 박성화는 비에 둘러싸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젖은 건물들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전선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흐린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하면서도 삭막해 보였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헐렁한 바짓단이 푹 젖어 있었다. 어서오세요, 라고 말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씨는 사근사근했지만 표정에는 엷은 미소조차도 드러나지 않았다. 꼼꼼한 성격답게 우산을 단정히 말아 끈으로 고정한 뒤에야 그것을 우산꽂이 안에 넣은 박성화는 좋아하는 것이면 눈에 보이는대로 집었다. 가격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았다. 겨울방학동안 모았던 알바비가 꽤 되었으니까. 볼로네제 스파게티, 키조개 치즈구이, 비프 스테이크, 부대찌개, 우삼겹 된장찌개 등을 바구니에 담던 박성화의 등 뒤에서 유리문이 열렸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박성화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한 장신의 남자가, 박성화와 비슷한 후줄근한 차림을 한 채 빗물이 뚝뚝 흐르는 우산을 아무렇게나 우산꽂이에 넣고 있었다. 남자를 본 주인 아주머니가 여전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윤호야, 나 대신 여기 계산 좀 해줄래? 엄마 잠시 화장실만 좀 갔다올게. 허여멀건하면서도 다소 냉랭한 인상을 지닌 남자가 네에, 라고 성의없이 대답하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아들이 엄마한테 하는 양이었다.

아주머니가 아들의 우산을 든 채 후다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도, 이내 박성화는 카운터 위에 물건이 잔뜩 쌓인 바구니를 올려놓았다. 비 냄새가 나는 장신의 남자가 바구니에서 하나하나 물건을 꺼내 바코드를 찍으며 계산을 해주면서 말했다. 많이 사셨네요. 아까 전만해도 자신의 어머니한테 심드렁하게 대답했던 사람답지 않게 남자가 박성화에게 건네는 말투는 상당히 밝았고, 훈훈하게 잘생긴 얼굴에는 선명한 미소까지 떠 있었다. 그냥 먹고 싶은 게 많아서요. 박성화의 대답에 남자가 물었다. 이거 한 번에 다 드실 건가요? 박성화가 말했다. 먹고 싶은 만큼 먹으면, 아마 다 먹을지도 몰라요. 분명 집어온 밀키트의 수가 많고, 그걸 한 번에 다 먹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도 남자는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저랑 비슷하시네요. 저도 먹고 싶을 땐 진짜 엄청 많이 먹거든요. 엄마가 식비 때문에 번 돈 다 날아간다고 난리도 아니예요. 말끝에 배시시 웃음을 덧붙이며 남자는 봉지 안에다가 밀키트를 차곡차곡 넣었다. 밀키트 대신 남자의 웃는 얼굴을 멍하니 보던 박성화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쪽, 되게 잘생겼어요.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꽃이나 선물 같은 걸 보듯 남자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박성화의 얼굴을 보다가도 이내 다시 눈을 반쯤 접으며 웃어 보였다. 내가 보기엔 그 쪽이 더 잘생긴 것 같은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이런 말을 초면에 하는 게 실례란 걸 알지만, 그 쪽 정말 예뻐요. 누구한테 사랑받는 사람처럼요.

사랑받는다니. 오히려 난 버려진 물건 같은 존재인데. 박성화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러우면서도 생기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환히 웃고 있던 남자가 박성화의 기분을 알아차린 듯 살짝 표정을 굳히는 게 보였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밀키트가 든 비닐 봉지를 내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 말, 좋아하니까. 조금 소심하다고 생각될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박성화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오 만원은 거뜬히 넘어가는 액수가 긁힌 뒤 남자는 박성화에게 카드를 돌려주었고, 그 순간 박성화의 손 끝과 남자의 손 끝이 잠깐 스쳤다. 아, 하고 놀란 것은 남자였다. 손이 예쁘시네요. 중얼거리듯 말한 것이었지만 음성은 선명하게 박성화의 마음에 와닿았다. 박성화는 그제야 조금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므로. 고마워요.

돌아서는 박성화의 얼굴에는 약간의 붉음이 떠올라 있었다. 예쁘다니. 너무나 오랜만에 남에게 듣는 칭찬이었다. 분명 이런 말을 들으면 전 애인이 생각도 날 법하거만 오히려 남자의 얼굴만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박성화는 다시 한 번 뒤돌아 카운터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또 한 번 빙긋 웃어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이 꼭 다음에 또 만나자는 뜻 같아서, 박성화는 다음에 또 올게요, 라고 대답했다.

우산꽂이에 꽂혀 있던 비닐 장우산을 꺼낸 뒤 박성화는 유리문 밖을 흘끔 쳐다보았다. 밀키트를 산 건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음에도 빗줄기가 조금 얇아져 있었다. 이대로 가면 덜 젖겠다, 라는 생각을 할 참에 뒤에서 남자가 박성화를 불렀다. 저기요!

네?

저, 이거 가져가실래요?

남자가 들어보인 건 작은 핫도그 봉지였다. 오늘 많이 사셔서 보너스로 드리는 거예요. 가져가실래요? 보너스로 핫도그까지 준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박성화는 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후다닥 카운터에서 뛰어나와 박성화의 손에 핫도그를 쥐어주었다. 덕분에 남자의 커다랗고 혈관이 두드러진 손 안에 박성화의 손이 잡혔다. 아.

가서 맛있게 드세요. 남자의 말과 함께 손등을 덥히던 온기가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타이밍이 무섭게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구, 많이도 사셨네. 들어올 때만 해도 말투와 얼굴의 부조화를 자아내던 아주머니는 처음으로 어색하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박성화의 손에 든 비닐봉투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많이 살게요. 그렇게 말하며 박성화는 유리문의 손잡이를 밀었다.

장우산에 맺히는 빗방울의 크기는 크지 않았다. 얇다 못해 거의 진눈깨비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닐봉투 손잡이와 핫도그를 한 손에 같이 잡고 있던 박성화는 핫도그를 비닐 봉투 안에 넣기 위해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핫도그 뒷면에 붙여져 있는 푸른 포스트잇 하나를.

접혀진 포스트잇을 펼치자 남자의 연락처와 이름이 나타났다. 010-XXXX-XXXX. 정윤호. 박성화는 정윤호, 라는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강아지처럼 환히 웃는 얼굴과 아까의 짧은 스킨십이 떠오르면서 이름은 사탕 같은 단맛을 입 안에 남겼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박성화는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잔상처럼 남아있던 상처가,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정윤호라는 남자의 얼굴에 파묻힌 나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이 볼까봐 박성화는 옷소매로 입을 가렸다. 자꾸만 이유 모를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정윤호를 생각할 수록 마음은 더운 공기를 먹은 풍선처럼 들뜨고 있었다. 집에 가면 이것부터 먼저 먹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박성화의 잇새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빗물이 그의 발목을 스쳐지나가면서 물방울을 남겼지만 그것은 금방 불어오는 바람에 말라버렸다. 한창 젊은 사람의 나이처럼 새롭고 싱싱한 구애 앞에서는 무엇도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것처럼.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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