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you, princess!

웡낫

* 원전 :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 (2001)

* Jesse McCartney - Beautiful Soul (링크)

우리 교실에서 가장 못생긴―순전히 내 기준이다―최산이 이 나라의 공주라고 했다. 당연히 학교 전체가 뒤집어졌다. 듣기로는 일찍 승하한 세번째 왕세자의 정실이 산이 엄마라고 했다. 세자빈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평범한 꽃집 주인을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손위의 두 형이 벌이는 왕권 다툼에 말려들기 싫어 남편 사후 스스로 궁을 떠난 거라 했다. 그녀가 공주라고 밝혀진 것도 사흘 전 모자의 꽃집에 찾아온 여왕의 일행을 목격한 동네 사람들이 소문을 쫙 낸 것이었다. 듣자하니, 밑의 후계자들끼리 잔머리 굴리며 암투를 벌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최산에게 왕위 계승을 부탁하려 온 것이라 했는데, 내가 보기엔 여왕도 이젠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으니 골치 아픈 일을 열여덟 소녀에게 죄다 떠맡기고 자기는 평화롭게 노후를 즐길 의도인 것 같았다.

맨날 잔머리가 양 옆으로 툭툭 튀어나온 초라한 포니테일에 도수 높은 안경만 쓰고 다니더니, 어디서 스타일링을 받고 온 건지 매우 단정한 생머리를 한 것도 모자라 렌즈까지 끼고 왔다. 순식간에 얘기가 쫙 퍼지다보니 자길 보는 시선들이 달라졌다는 걸 최산도 온전히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먹은 점심이 소화되지 않을 때의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교실 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늘 그랬듯이 교실 창가 맨 뒷자리에 앉으려고 했건만, 같은 반 남학생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최산에게 제 자리를 양보했다. 우리 반은 담임이 자리를 바꾸는 걸 엄격히 금지했는데도 말이다. 내가 아니꼬왔던 건 그 놈들의 급격한 태세전환이 아니었다. 소위 나처럼 노는 패거리로 알려진 녀석들이 최산에게 추근대면서 새 초코우유나 크림빵을 내밀거나, 공주님이면 재산도 엄청 많이 상속받는 거 아니냐며 속 보이는 질문을 이것저것 하는 게 싫었다. 진짜, 지독하게 싫었다. 굳이 최산을 괴롭힐 거면 내가 괴롭히고 싶었다. 공주건 말건, 최산은 언제나 내게 있어 최고로 못생긴 여자애였으니까.

미운 털이 잔뜩 난 마음을 품은 채 나는 언제나 그랬듯 시도때도 없이 최산을 불렀다. 야, 최산! 야, 야, 야! 최산 공주! 내가 그녀를 부르는 데는 큰 이유가 있지 않았다. 대개는 최산에게 뭔가를 빌리기 위해서이거나, 봐도 봐도 진짜 못생겼다고 의미 없이 놀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최산을 내 가까이에 붙여두고 싶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하루라도 최산을 놀리지 않으면 제일 중요한 걸 안 한 기분이었고, 사실 그걸 넘어 최산이 내 눈에 안 보이면 무엇인가가 극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최산이 강아지마냥 쫄랑쫄랑 내게로 가는 게 못마땅했던 그녀의 베프는 참다 못해 내게 일갈했다. 야, 정우영. 너 뭔가 아직도 착각하는 모양인데 산이는 너 같은 게 감히 놀릴 수도 없는 위치의 사람이라고. 네가 알아서 허리 숙이고 잘 모셔도 모자랄 판에 네가 뭐가 된다고 공주님을 야, 야, 하고 함부로 부르냐? 나는 어쩌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대고는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자기 베프와 나 사이에 있던 최산은 고개를 가만히 푹 숙인 채 두 손을 배꼽 위에 곱게 모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최산은 가만히 있을 때면 늘 그런 자세를 취했다. 어쩌면 꽃집 주인이자 세자빈이었던 어머니의 교육 덕분에 그런지도 몰랐다.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듯한 예의 바른 자세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그 맘에 안 드는 왕가에 최산을 뺏길 것만 같아서.

주말에 무작정 그 꽃집으로 찾아갔다. 최산을 만나고 싶었다. 이것 또한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만나서 뭐라도 얘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왕궁으로 절대 가지 말라든지, 아무리 생각해도 넌 외모가 딸리니 공주 같은 거 때려치라든지, 뭐 그런 말들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영 쓸데없는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꽤 중요했다. 최산은 공주를 하면 안 되었다. 최산은 그냥 최산이어야만 했다. 설령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왕위를 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우리 교실 최고 못난이 최산으로 남아있길 원했다. 나에게는 그런 최산이 익숙했고, 그런 최산이 없으면 안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잘난 여왕께서 경호원을 대동한 채 꽃집 모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왕실에서 저런 옷을 마련해준 건지 최산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스로 어깨가 장식된 하얀 원피스에 때 하나 묻어있지 않은 하얀 구두. 꼭 결혼식을 하는 사람처럼 차려입은 채 검은 리무진을 향해 걸어가는 최산의 신분이 새삼 나와 다르다는 게 느껴지자 화가 울컥 솟아올랐다. 바닥에 깔려진 레드 카펫을 밟으며 리무진을 타러 간다는 건 왕궁으로 간다는 것인데, 다른 때도 아니고 딱 내가 꽃집에 찾아온 그 타이밍에 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말이 하나도 안 되었다. 최산은 아직 내 곁에 있어야 하는데 벌써 떠난다고? 진짜로?

나는 냅다 잠깐만요! 라고 외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왠 시커먼 남자애가 왕가의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려고 하자 경호원들이 건장한 두 팔로 나를 막았다. 이거 놔요! 나를 잡는 경호원들의 손길을 뿌리치려 거세게 몸부림을 치자 대비마마가 얼른 내쫓으라며 손짓을 했다. 그 때 최산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 잠깐만요. 모두가 당황스러워하는 가운데 오로지 최산만이 침착하게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나는 눈가를 꽉꽉 메우던 뜨거운 눈물을 막지도 못한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씨발, 버스타고 왔지! 어떻게 왔겠냐! 너 진짜 궁에 가는 거야? 그런 거야? 왕위 잇는 거냐고! 최산은 나와 여왕을 번갈아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학교는 나가니까 우리 계속 보게 될 거야. 그러니까…….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르겠지만, 경호원들의 손과 팔에서 힘이 빠진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있는 힘껏 경호원들을 밀쳐내었다. 듬직한 남성 두 사람을 밀쳐내는 엄청난 힘 때문에 여왕과 최산, 그리고 최산의 어머니까지 눈을 매우 크게 떴다. 최산이 내 뒤에서 팔을 내저으며 꽃집 안으로 무작정 들어가는 날 막으려고 했다. 영아,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몇 개의 조명만이 비추는 어둑한 꽃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눈에 보이는대로 꽃을 집었다. 그 중에는 빨간색 장미꽃도 있었고 흰 안개꽃과 단아한 백합꽃도 있었다. 다들 존나 미쳤어. 미쳤다고! 어디에 사로잡힌 것처럼 나는 꽃들을 마구잡이로 뽑아내고는, 그 '미친' 일행들이 멍청히 서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멍하니 날 보며 서 있는 최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꽃다발을 내밀었다. 꽃을 뽑다가 가시에 베이기라도 한 건지 검지 손가락에 피가 송골송골 맺힌 게 시야에 스쳐지나갔다. 나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안 하려고 했거든? 내가 맨날 못생겼다고 놀렸으니까, 이런 말 하기 진짜 싫었단 말이야. 근데, 근데…너 오늘 왜 이렇게 예쁜 건데……. 아니, 왜 항상! 그렇게 예쁜 건데……. 진짜 사람 잠도 못 자게…그렇게 예뻐가지고…맨날 네 생각이나 하고…….

푸하하, 하고 최산의 웃음이 터진 건 그 때였다. 박장대소하는 그녀의 웃음에 금방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최산의 어머니도 여왕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안 내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 씨바, 나 뭔가 오해했나?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배를 잡고 있는 최산 대신 설명을 해준 건 겨우 웃음을 참아내던 산의 어머니였다. 아니, 왕위를 잇는 건 얘가 성인이 된 뒤에 다시 의논할 일이고…오늘은 궁에 가긴 가는데 그냥 궁의 사람들에게 산이를 소개해주는 그런 자리라고 생각하면 돼. 산이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왕위를 잇지 않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약속까지 받아둔 상태니까…그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걱정하지 말고. 후후, 하고 웃으면서 나를 바라본 어머니와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 씨, 그럼 진작, 진작 그렇다고 얘기를 해주시던가요! 그러자 웃고 있던 최산이 크게 소리쳤다. 네가 내 말을 안 들었잖아! 말하기도 전에 그렇게 가 버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최산이 소리를 지르는 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건지 여왕의 옆에 있던 상궁이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마마, 목소리가 너무 크시옵니다. 그러나 상궁의 말을 듣는 척 마는 척, 최산은 내가 내민 꽃을 받아들기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따듯한 봄 햇살 아래의 최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정해야만 했다. 그저 넌 너무 예쁘다는 한 마디를 못해 그간 실없이 못생겼다는 소리만 주구장창 해왔다는 것을. 아무리 봐도 공주 최산은 예뻤다. 진짜로 예뻤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그 예쁜 모습이 선명하게 눈과 머리에 들어올 정도로 예뻤다. 주르륵 흘러나오는 투명한 콧물을 킁, 하고 삼키던 찰나에 최산이 물었다. 근데 내가 예쁘다는 거, 그거 사랑한다는 뜻이지?

무례하게 레드 카펫에 대고 있던 한쪽 무릎을 펴며 나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흐뭇하게 웃는 어머니와 웃는 낯임에도 나를 살짝 불편하게 바라보는 여왕이 보였다. 뭐가 되었든, 이왕 저질러진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몇 마디밖에 없었다. 맞아. 나 너 사랑해. 아니, 공주님, 사랑합니다. 여왕이 있다는 걸 자각한 나는 급히 호칭을 고치고는 부끄러움에 최산의 시선을 휙 피했다. 그러자 꽃다발을 그대로 안은 최산이 내 어깨를 잡았고, 다시 그녀를 향해 돌아본 찰나 볼에 따끈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아주 은은한 꽃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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