諱緣
인연을 꺼려야만 하였다.
01
어릴 적의 기억, 가장 낯익은 장소는 아버지와 단둘뿐인 집이었다. 부는 바람에 삐걱이는 문, 받침대를 밟고 올라가 빨랫감을 널던 뒷마당. 요리, 빨래, 청소…. 모두 홀로, 혹은 옆집 아주머니들께 배운 것들이었다.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세계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고 계신다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매일 새벽 어머니의 사진을 붙잡고 우시는 걸 잊을 수 없었다. 하시던 말씀마저 귓가에 생생하다. 화령아, 화령아…. 너 없음 연이는 어떡하려 그러니. 령아…….
02
마을은 규모가 작으나 그 안에 같은 종족이 다함께 모여사는 곳이었다. 빼곡한 집들 사이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난 유독 그 웃음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까마득하게 어릴 적을 지나서 조금 크게 되었을 때마저도. 노력을 안 해보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 속해있을 때의 이질감이 가시지 않아, 다음부턴 억지로 끼어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 것도 한 몫을 한 듯 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안일을 끝내두면, 점심밥을 차린 이후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런 시간에는 월도를 들어 훈련을 감행하거나, 자주 숲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안 하자니 괜스레 죄책감이 들어, 나물이라도 조금 캐어가려고 소쿠리를 등에 이고. 옥색 천을 묶어둔 나무, 그곳에 기대어 앉으면 지평선 아래 푸르른 바다가 보였다. 마을이 바닷가 근처인 걸 알게 된 순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던가…. 사시사철 바라보아도 질릴 줄을 몰랐다. 그리고 10살 즈음,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03
낯선 아이였다. 같은 청띠제비나비가 아닌 걸 보아선 다른 마을의 아이인 것 같았다. 등에 딱 붙는 가방을 맨 것, 검은 머리에 하얗고 노란 문양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는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내가 바라보는 쾌청한 바다, 산속을 거닐면 종종 보이는 풀꽃 몇 송이, 포근한 향기. 그것들을 그 아이는 좋아했다. 그뿐인가, 싸움과 분쟁을 혐오하는 것마저. 빛이 은은하게 스며들어오는 검은 눈마저 꼭 쌍둥이처럼. 생과 연을 나눈 것처럼. 아이는 자신을 명이라고 불러달라 하였다.
04
열다섯 즈음, 명이와 알고 지낸지도 자그마치 5년이었다. 그 날 아침은 각별했다. 등에 이물감이 들어 윗옷을 벗어 거울을 보니, 허리 부근에 돋아난 날개가 보였다. 이마에 있던 작은 뿔은 사라지고 더듬이가 돋아있었다. 평소 입던 옷에 날개 구멍을 뚫어 입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어색하다기보단 신기함이 더 컸다. 정말 어른에 가까워졌다는 몽글몽글한 감정. 그대로 머리칼을 흔드는 봄바람을 맞으며 명이가 있을 곳으로 뛰어갔다. 나에게 기쁜 소식이라면 내 친구와도 그 기쁨을 공유하고 싶으니까, 그건 당연한 거니까. 다만, 어째서인지. 명이의 눈은 당황을 담고 있었다.
명이가 말했다. 내게 있어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이야. 지켜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이가 등에 맸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으며, 가방과 등이 맞닿는 부분은 구멍이 나있었다. 명이의 등에 여덟 개의 다리가 보였다. 검고 견고하며 굳센 다리들이 뻐근한 몸을 풀듯 까딱였다. 그걸 잠시 바라보다 내뱉었다. 멋진 다리네. 긴장했던 명이는 그제야 웃어보였다. 하지만 명아, 정말이야. 네 다리는 내가 처음 본 거미의 다리였고, 그 어느 다리보다 멋졌어. 난 너만큼 상냥한 거미는 본 적이 없는 걸…….
05
사고는 그 해 겨울이었다. 눈이 수북하게 내려앉은 이후여서일까, 날은 퍽 춥기 그지 없었다.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천을 묶은 나무 아래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 6년 가까이 바라봐 온 겨울 바다는, 언제나. 한결같이 깊고 푸른 잿빛이었다. 그 위에서 잔잔히 일렁이는 하얀색 파도…. 마치 백지 위에 실수로 떨어트린 먹 한 방울처럼.
멍한 정신을 깨운 것은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채는 느낌. 뒤를 돌아보면 명이다. 답지 않게 흐트러진 숨을 급히 고르고 있다. 뛰어온 걸까, 생각하면서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무슨 일이냐 물어보았다. 명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뜸 한 마디 말만을 내뱉었다. 연아, 오늘은, 마을에 가지마.
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명이의 말을 무시하거나 얕잡아 볼 생각은 일절 없으나, 대뜸 입에서 터져나온 그 한마디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명이는 우리 집에 편찮으신 아버지가 계신 걸 알았고, 따뜻한 곳에 옮겨 기르는 꽃들에게서 꿀을 따야하는 걸 알았다. 마을의 어린 아이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야 하는 걸 알고 있었으며, 일주일 전에 옆집 아주머니가 부탁하신 바느질을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나 오늘 일찍 돌아가야해, 명아. 겨울이라 해가 짧아. 명이의 눈은 초조함을 담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명이를 두고 인사한 채 돌아가려던 찰나, 명이가 날 붙잡았다. 그러곤 얼굴에 무언가를 씌워주었다. 내 얼굴 하관을 가리는, 반투명한 천을 쓴 면사포였다. 생일에 주려고 했는데. 명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전했다.
06
마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역시 명이의 말은 가벼운 농이었으려나, 싶었다. 그러다가도 그 초조한 눈이 문득 떠올라 괜시리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간신히 잠에 들었다.
비명 소리가 울린 건 오전 1시였다. 마을 변두리에 사는 집에서 비명이 들렸고, 각 집에서 차근차근 불이 켜지며 비명소리도 커져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 때 즈음. 옆옆집에 홀로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소리지르시는 것이 들렸다. 호랑거미!! 호랑거미들이야!! 그 한마디에 마을은 훨씬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랑거미는 근방에 사는 거미들 중에서도 악질에 속했으니까. 소문으로는 바로 죽이긴 커녕, 거미줄로 묶어놓고 한참을 고문하다 죽인댔다. 바느질을 부탁하셨던 옆집 아주머니는 무릎을 꿇고 목숨만은 살려달라 울며 비셨다. 아랫집 꼬마는 저녁에 배운 호신술을 써보려다 단칼에 목이 베여 죽었다. 난 급히 아버지를 부축하며 산으로 달렸다. 거미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됐다. 혼란에 휩싸인 마을에서 퍽 멀어졌을까. 푹, 좋지 못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지셨다. 복부에 날붙이가 꽂힌 채 피를 토하시며, 몇 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뒤를 올려다봤다. 거미들이 보였다.
07
난 고작 열다섯, 심지어 완력도 좋지 못하여 같은 나비들 사이에서도 약한 축에 들었다. 그런 나 홀로 성인 거미 서너명을 한 번에 상대하는 일이 가능할 리가. 그대로 죽겠구나, 싶어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때 네 눈앞을 가로막은 건 너였어, 명아.
그 여덟 개의 거미 다리에 내 동족의 피를 한가득 묻혀놓고서도, 나 하나 지켜보겠다고 내 앞을 막아섰잖아.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명아, 넌 내 마을 사람들을 죽였어. 그렇게 해서라도 내 목숨을 지키고 싶었던 거니. 그래서 나에게 마을에 가지 말라 하였고 생일선물을 미리 준 거였니. 그래놓고는 나한테 어서 도망가라고 했잖아. 너도 나도 울고 있었는데, 결국 도망친 건 나뿐이었잖아. 명아, 이건 비겁한 거야. 넌 나한테 모든 죄책감을 떠넘긴거야. 나빴어. 진짜 나빴어, 너.
?
다리가 찢기는 소리. 네 울부짖는 비명, 그걸 죽이려는 네 노력. 네 동족이 널 비웃는 소리. 다리를 접질렀다. 울음소리. 피 향기. 비명에 연속된 비명. 불바다가 된 풍경. 바다 내음. 피비린내. 어딘가로 가야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까. 내 날개는 바닷물에 닿으면 젖어녹아 펼쳐지지도 못할 텐데. 명아, 넌 어째서 나에게 네 명을 넘겨준 거니. 왜 그래야만 했던 거니. 우리 다음 생, 혹은 이번 생에 네가 윤회하여 돌아오면 또다시 어떠한 연으로 재회하게 될까.
난 네 덕분에 인연을 맺는 것도, 끊어내는 것도 무서워졌는데 어쩌지, 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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