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日夢
태양이 네 목숨을 씹어 삼켜서 더 따가워졌던 것같아.
(함께 들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동공이 갈 길을 잃을 정도로 밝은 대낮. 장소는 병원 옥상. 온통 하얀색인 그 실내와는 달리 구린 색감의 초록색이 바닥과 펜스를 덮은 투박한 장소. 향하는 문에 낡은 자물쇠를 채워둔 건 그러한 촌스런 풍경이 민망해서였을까 싶다. 그럼에도 넌 그곳이 학교 근처 공원의 잔디밭을 닮았다며 좋아했지. 여기에 토끼풀이 있다면 반지를 만들었을텐데. 후나랑, 아키나랑, 너랑, 나, 넷이 함께 맞추면 우정반지같고 좋잖아. 그 말이 덧없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너의 목소리가 이리도 생생한 이유는 뭘까.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내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다. 이성보다 본능이 손끝을 이끈다. 눈앞에 있는 인영을 담으려 셔터를 누른다. 병실 안의 답답한 향을 벗어나 여름의 쾌청한 냄새를 품고 불어오는 바람. 그것이 네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마치 먼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이 인상깊다. 하며 저 하늘의 태양만큼 반짝이는 눈동자는 또 어떠한가. 아름답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넌 여름과 동기화 된 무엇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 맑음과 녹음을 품을 수 있을까. 환하게 밝은 미소가 보인다. 지익, 카메라가 필름을 뱉어낸다. 어째서인지 곧바로 보이는 사진. 그곳에 넌 없었다. 촌스럽고 투박한 녹색의 바닥과 펜스, 맑고 푸른 하늘에 뜬 거친 질감의 구름, 8월 초중순의 공기, 그 모든 것을 담았는데도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손에 이물감이 든다. 고개를 내려 보면 바이올린이다. 내가 쓰는 바이올린은 총 두 가지였다. 콩쿨과 각종 대회에 나갈 때 쓰는 바이올린이 하나, 밴드 공연에만 쓰기로 하여 내 취향대로 스티커와 펜을 써 한가득 꾸민 바이올린이 하나. 내 손에 들린 건 전자였다. 피부에 닿는 감촉조차 낯설었다. 아, 정장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보일 풍경은 뻔하지. 고개를 들면 인영이 빼곡한 객석이 보인다. 그 가운데 눈에 들어온 부모님의 얼굴. 단호히 나에게 말하는 듯 했다. 우리 공연도 빼고 네 공연 보러온 거야. 완벽하게 해내. 떨리는 손으로 바이올린을 든다. 속이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다. 지금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오늘이 어떤 날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이걸 겪은 것이 벌써 수천번이니까. 결국 연주를 끝내지 못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팽개치곤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가면, 혹시라도, 지금이라도 가면, 늦지 않을 수 있을까. 일말의 희망, 나의 운을 믿어보기로 한다. 택시를 잡아탔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601호 병실, 낯익은 숫자다. 급히 문을 열었지만 보이는 건 참담한 광경. 네 숨은 이미 멎었고 나머지 둘이 날 바라본다. 경멸의 눈빛으로, 혐오스러운 눈으로. 그에 숨이 막혀온다. 누군가 내 기도에 태양을 조각 내어 때려넣은 것처럼.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다시 옥상으로 뛰어갔다. 무한 개의 계단,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거듭 뛰었다.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무턱대고 옆에 있던 쇠지렛대로 내리쳐 부숴버렸다. 문을 열면 기억에 선명히 남은 그 풍경이다. 눈이 초점을 잃을 만큼 화창한 햇살. 투박한 초록색의 옥상 바닥과 펜스. 물을 가득 머금은 붓으로 칠한 듯 맑은 하늘의 색. 그 바탕 위에 그려진 네 모습까지. 바람 탓에 파도치듯 흩날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저 하늘의 태양을 한 줌 삼켜 만들어진 듯 반짝이는 붉은 눈. 뺨에 붙은 반창고. 성격과 달리 우리 중 가장 정돈된 교복 차림을 고집했던 그 뒷모습이. 다가가려 했지만 다가갈 수 없다. 다만 네가 다가온다. 천천히, 숨통을 조여오는 것처럼. 그리고 네가, 밝게 웃었다. 태양처럼. 여름, 그것을 한 잔 가득히 마신 것처럼. 그 미소가 잔인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럼에도 입을 뗄 수 없는 건 이 꿈의 주인이 너여서일까. 난 네 꿈의 방랑자여서일까. 그래서 그런 것일까. 네 목소리가 내 귀를 울린다. 어떤 단조보다도 암울하게, 또 어떤 장조보다도 짙게.
세이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줘.
넌 바이올린을 집으면 밴드의 연주를.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느껴지면 내가 있던 그 병실을. 금붕어를 보면 여름 축제마다 내가 금붕어 잡기를 제일 못 했던 것을. 반창고를 보면 우리 넷 중에 가장 많은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던 나를. 텅 빈 교실을 보면 우리가 합주실을 마련하기 전, 임시로 안 쓰는 교실에서 연주했다가 선생님께 혼이 났던 사건을. 그리고 오늘같은 푸르고 쾌청한 여름 하늘을 보면, 나를, 널 이렇게 원망하는, 널 죽을 때까지 미워했던 나를 기억해야해. 너에게 속죄의 길은 없어. 보이는 것처럼 난 이미 허상이고 네 무의식의 잔해이며 평생의 트라우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한순간 빛났던 청춘으로 남길 순 없어. 아, 청춘…. 좋은 말이지. 어린 아이의 단순한 놀이 같았던 네 장래희망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 그래서 우리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찍고 다녔다고, 그렇게 열심히 앨범에 기록했다고. 나에게만 얘기해줬었잖아. 청춘 기록자라니, 터무니 없는 꿈이야. 안 그래, 세이카? 너에게 청춘은 여태 아물지 못한 흉터로 남았는데. 가여워라, 참……. 그치만 말야, 난 널 동정할 순 있어도 안아줄 수는 없다는 걸 알잖아. 왜 울고 그래.
지금 울어야 하는 건 날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네가 아니라, 널 밑도 끝도 없이 원망하는 나여야만 한다고.
네 무의식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넌 날 — 사랑했으니까.
눈을 뜨면 아침이다. 밤 사이 조금 울었던 것같다. 아니, 사실은 조금 많이. 매일 이런 꿈을 꾼다. 잔인하리만치 생생하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좀 더 울었다. 수면제도 별 소용이 없는 것같다. 여섯 알을 쳐 먹어도 이딴 악몽을 꾸니 기분이 거지같을 수밖에.
…
돌아갈 수 없는 건 진즉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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