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짓큐사니] 여름비
[오마카세 타입] 김제스님이 신청하신 글커미션
written by. @saniwa_jeyeon CM
0.
사람이 사는 일이니, 언젠가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날이 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막연한 상상 속의 나는 쏟아지는 빗속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외로웠고, 겨우 이 순간이 오게 되었구나, 하고 속이 시원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영영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고.
스스로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모지리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본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순간, 이대로 좋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
나에게는 짓큐씨가 있고, 짓큐씨에게는 내가 있는 지금을.
1.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카호가 직감하는 그런 것이다.
아아, 무더위와 장마가 곧 찾아오겠구나.
작년에는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기력 없는 여름을 보냈던 카호였기에, 이번에는 미리 단단히 준비를 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기사를 불러서 거실에 있는 에어컨 청소를 했다. 방문한 에어컨 청소 기사가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는 자판기보다 큰 남자의 모습에 흠칫 놀라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일이라 카호는 여상하게 이쪽이라며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그를 안내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름용 이불도 새로 장만했다. 여름이 오는 게 어쩔 수 없다면, 이번에는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며 조용히 투지로 타오르는 카호의 모습을 보며 짓큐는 카호씨가 오늘은 활기차네, 하면서 웃었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오면 좋았을 텐데, 카호가 대비를 해 둔 게 기특하다는 양,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구물구물하고 습도가 높았다. 이미 며칠 전부터 장마가 예정된 터라, 퇴근하기 전에 비가 쏟아지지 않기를 바라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압이 낮아서 그런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셔오는 듯했다.
그런 카호를 구원한 것은 그녀의 상사-정화부 부장 노리무네의 조기 퇴근령이었다. 쏟아지기 전에 얼른들 집으로 가라며 손을 내젓는 그의 노오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한층 더 곱슬거렸는데, 그 때문에 비가 내릴 때를 가늠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어쨌든 웬일이냐 싶어 평소보다 힘차게 인사를 한 카호는 짓큐를 챙겨 퇴근길에 올랐다. 하늘이 울어대는 게 금방이라도 거센 비가 쏟아질 것 같아서 서로의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카호씨를 들고 뛸까?"
라며 짓큐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의견을 피력했지만, 카호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좀 더 빨리 걸어볼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무사히 비가 쏟아지기 전에 그들의 집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부터 생각했는데 말이죠."
"응, 카호씨."
"오늘부터 에어컨을 트는 게 좋겠어요. 아니, 틀어야겠어요."
"그러자. 몇 도 정도가 좋겠어?"
짓큐 뿐만이 아니라 하늘도 카호의 말을 들은 듯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마가 시작되고 마는구나. 카호는 조금 허탈해진 마음으로 실외기가 있는 쪽의 창문을 열기 위해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24도일까요."
짓큐가 리모컨을 조작해서 에어콘을 켰다. 띵띠리링-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콘이 웅웅 거리며 찬바람을 내뿜기 시작했다. 실외기 쪽의 창문만 살짝 열면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기가 질렸던 카호는, 거실로 돌아와 에어컨의 찬바람을 맞으며 조금 감격했다. 미리미리 대비한 보람이 있었다. 카호가 즐거워하니 짓큐도 즐거워했다.
에어컨을 틀었다고 해도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린 몸이 단숨에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서, 두 사람 다 오늘 하루 정도는 일탈을 하기로 했다. 우버이츠로 배달을 시킬 수 있는 날씨도 아니라서,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내 저녁을 때웠다. 내일은 카레라도 만들어 먹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날은 진즉에 어두워졌고, 배도 채웠겠다. 두 사람은 잘 준비를 했다.
"카호씨가 거실에서 잘 거면, 내가 카호씨 방에서 잘까?"
"뭐 하러요. 내 방 습기 차서 더워요."
"그래도 카호씨가 불편하지 않겠어?"
"기왕 튼 에어컨인데 최대한 누리는 편이 더 나아요. 어차피 냉방비는 똑같이 나가는 거, 둘 다 쾌적하게 자는 게 이득이지."
카호의 말을 들은 짓큐가 하하, 하고 웃었다. 동거인은 때때로 참 뜬금없이 웃는다. 이번에는 왜 웃냐는 듯이 카호가 쳐다보자, 짓큐가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카호씨는, 이럴 때는 자기주장이 참 강하구나 싶어서..."
"틀린 말을 하진 않았어요."
"맞아, 카호씨 말이 다 맞아. 잘 준비하자. 새로 산 이불 꺼내오면 될까?"
"저도 짓큐씨가 사소하게 잘 웃는다고 생각해요."
"다 카호씨 덕이야."
새로 산 이불을 깔아놓고, 충동을 이기지 못한 카호가 그 위로 다이빙했다. 새로 산 이불답게 보들보들하고 서늘한 감촉이 기분이 좋았다. 카호가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짓큐가 거실 한쪽에 자리한 무드등 전원을 켜고, 곧이어 거실 불을 껐다. 카호의 귀에 바스락하고 짓큐가 이불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에어컨을 켜놓은 공기가 쾌적하고, 새 이불 덕에 눕자마자 잠이 올 줄 알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잠은 오지 않는 법이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카호는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무드등을 켜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에 힘입어 실내가 한층 더 어둑하게 느껴졌다.
"카호씨, 잠이 안 와?"
카호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짓큐가 물어왔다.
"네, 좀...비가 와서 그런가."
"그럴지도 몰라. 카호씨, 비가 오면 잘 못 자니까."
비가 오는 걸 싫어하는 걸까? 하고 물음에 카호가 오히려 되물었다.
"짓큐씨는 비 오는 걸 싫어하나요?"
"마냥 좋지는 않은 것 같아. 본체에 녹이 스는 기분. 도검남사라면 다들 그렇지 않을까?"
"그런가요…하긴, 보통 비가 오면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카호는 비가 오는 날이면 묘하게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던 감찰부 시절의 상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카호씨는 어때?"
"비 내리는 걸 보는 건 좋아해요."
"그렇다면, 나도 비 내리는 걸 보는 건 좋아하게 될 것 같네."
여전히 무자각으로 거리감 없는 말을 하는구나. 참 변하질 않는다.
함께 오래 있다 보면, 남들이 듣기에는 좀 기이한 대화방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단어 하나, 지칭 대명사 하나로 남들이 들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소리를 들을 법한 말들을, 짓큐와 카호는 서로 이해했다.
지금만 해도 저 말은, 카호와 함께 비가 내리는 걸 보는 건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들리기도 하고, 본인도 그런 의미로 한 말이다.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한 지 1년. 두 사람은 많은 순간을 함께 보냈고, 그렇게 공유하는 것이 조금씩 늘어났다. 서로밖에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을 거쳐 같은 경험을 함께 쌓아가는, 유일하고 무이한 관계.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카호의 짓큐, 짓큐의 카호.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일이 있어도, 괴롭고 지쳐 쓰러지고 싶은 날이 찾아오게 되더라도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그런 세상과 유리된 듯, 두 사람만이 전부가 되어 안심하고 쉴 수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짓큐는 카호를 위한 짓큐였다. 카호는 짓큐를 위한 카호였다.
그래도 둘은 다른 존재니까 함께 있다 보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도검남사와 사람이라는 점이 카호를 안심하게 했다. 그렇게 변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다. 분명 짓큐도 그럴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카호는,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할,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짓큐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요."
뜬금없는 카호의 말을, 짓큐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몸을 뒤척이며 돌아눕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현되고 나서 겪은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저한테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제야 했어요."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남과 내가 있을 때 어디까지 양보하고, 어디까지 주장해야 하는지. 어떻게 조절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만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걸 함께 산 지 1년이 다 되어서야 생각하다니 누가 모지리라고 불러도 반박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함께 살고있는 상대는 카호씨인 걸. 지금의 나는, 카호씨한테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짓큐씨도 가끔은 저를 염두에 두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결정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나요?"
"있기는 해."
"봐요, 있잖아요."
"분리수거는 내가 전담하고 싶다거나, 장보고 올 때 짐은 내가 다 들고 싶은 것 정도려나."
"그건 안돼요. 같이 나눠서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짓큐의 소소한 바램을 듣고 있으니 기가 막혀서 카호는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호가 웃자 짓큐도 빙긋 마주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참 좋다고 생각해."
"저도요.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이 참 좋아요. 정말, 불만 없나요?"
"아까 말한 것 정도야."
"지금이 아니면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카호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더 생각해볼 수밖에 없나? 하고 중얼거린 짓큐가 말을 이었다.
"그냥, 나는 카호씨하고 앞으로도 계속,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 짓큐가 카호 밖에 모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면서도. 카호도 그 말이 좋았다. 그냥, 좋았다. 심신자와 도검남사니까 단순히 주종관계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동거하는 룸메이트라고도 부를 수도 있겠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관념 속의 가족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존재.
카호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감정표현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카호를 익숙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의 사소한 즐거움이나 우울함을 알아봐준다. 카호의 눈에도 짓큐의 소란스러움이나 시무룩한 감정들이 드문드문 들어오곤 한다. 그것이 기뻐서, 이전에 혼자 살 때는 좀 외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면 짓큐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카호가 울고 싶을 때,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짓큐 뿐이리라. 어쩌면 짓큐가 아니라, 카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타인과 이렇게 가까이 오랫동안 지내는 건, 짓큐가 처음이었으니까.
"저도 가능하면 짓큐씨랑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것 같아요."
카호의 대답을 들은 짓큐가 기뻐, 하고 중얼거렸다. 같은 마음이라서 기쁘다는 뜻이다.
"짓큐씨, 저는요.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어요."
어렸을 때는 언니랑 비교당하기도 하고, 피로 이어진 가족들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자랐다. 그래도 가문에서 뛰쳐나와서, 집안과 절연하고, 위태롭고 휘청이면서도 조금씩 서 있을 발판을 만들어나가고, '나'를 쌓아가고.
"물론, 감찰부에 있다가 느닷없이 강제 발령받아서 정화 심신자로 구르는 건 좀 힘들긴 한데요, 그래도 그 덕에 짓큐씨도 만났으니까."
함께 웃고 웃어줄 가족 같은 룸메이트가 있고, 제멋대로라도 잘 보살펴주는 상사가 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제 일처럼 나서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그래서 카호는 지금의 자신이 참 좋았다. 카호가 지금의 자신을 좋다고 말하게 된 것에는 짓큐의 지분도 커서, 짓큐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말 하면 화내려나, 카호씨."
"화 안 낼 테니까 말해요."
"난 카호씨가 정화부로 발령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덕분에 나는 카호씨를 만난 거니까."
"음, 화를 낼까요, 말까요?"
"카호씨한테 미움받기는 싫으니까 화내지 말아줘, 대신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카호씨는 내가 지키겠다고."
그리고 이 순간,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말하고, 제각기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마음이 비슷한 결을 가진 것을 보며 웃고, 그렇게 서로를 엮여가는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아도 믿어요. 알고 있어요."
늘 고마운 마음이 들고, 함께 있지 않아도 생각이 나고.
"고마워, 카호씨."
결국 우리는 만났기에, 서로가 있으니까, 어떠한 일이 닥쳐오더라도 끝내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좋다.
"이제 슬슬 자요, 짓큐씨. 아...내일 쉬면 좋을 텐데."
"그러게. 아침에는 비가 좀 그치면 좋겠다."
"글렀어요. 일주일 내내 퍼붓는다고 뉴스에서......"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아마도 모르는 세상이 더 많겠지만, 카호는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곁에 자리한 제 검의 기척을 느끼며, 그렇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카호는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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