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하디셈] 방과 후 특별 디톡스
찐득하게 발을 붙잡는, 습기를 잔뜩 머금은 여름의 열기가 고조될 즈음,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종례를 마치고 방학을 만끽하는 학생들과 달리 레이지 하츠는 잔업을 정리해야 했다. 선생이 되겠다 선택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 몇 있는데 지금이 그 몇 안되는 순간 중 하나인 것 같군. 교무실에는 에어컨이 서늘하게 등줄기의 땀을 식혀주겠지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앳된 선생님 또한 방학을 손꼽아 기다려왔을 텐데, 집으로 가는 길이 요원한 상황에 한숨이 푹 튀어나왔다. 교무실 창문 너머로 하나 둘 교문을 벗어나는 학생들을 바라보다 보니 한숨은 다시 웃음으로 바뀐다. 아이들의 행복한 방학 일과를 상상해 보니 퍽 웃음이 나왔던 것 같다. 찰나의 후회보다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에 다시 전념하자. 선생님은 다시 업무에 열중하기로 다짐한다.
오후 4시 50분, 애매한 시간에 퇴근하게 된 레이지 하츠는 새로 장만한 자가용(맥시멈 다이브, 2000cc 터보엔진)에 시동을 걸고 학교를 빠져나온다. 부르릉, 울리는 터보엔진의 강렬한 고동이 덩달아 자신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드라이브도 즐길 목적으로 산 자차를 조금 즐기다 귀가해서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일정을 짜고 핸들을 붙잡은 다음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경쾌한 댄스 음악이 쿵, 쿵, 스피커를 울리며 엔진 구동음과 함께 자신을 고조시켰다. 해안도로로 핸들을 꺾으려던 순간,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미네르바입니다. 아, 혹시 집이었나요?”
“아니, 저도 이제 막 퇴근하던 참입니다.”
“그렇군요. 다른 게 아니고, 2학년 담당 선생님들끼리 함께 모여서 식사하자고 말씀이 나와서 전화드렸습니다.”
“다행히 멀리 나오지 않았으니,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위치가 어디죠?”
“방금 전송드렸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제 막 이동하고 있으니 안전운전해서 오십시요.”
“음, 알겠습니다.”
공영주차장엔 다행이 주차공간이 남아있었다. 뽀루반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때마침 마주한 데이브레이커와 동행해서 식당으로 이동한다. 라조기, 어향육사, 마파두부... 사천요리의 향연에 눈을 꿈뻑이자 이미 자리를 잡은 슈발리에가 챙겨온 연유를 꺼내보이며 꽃빵에 발라드시고 싶으면 드시라며 회전식 식탁 한군데에 연유를 자리한다. 미리 메뉴에 맞춰서 준비한 걸 보면 모임을 주선한 건 이 쪽인가..? 마파두부를 개인용 그릇에 덜어담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이 고량주였다. 그러고보니, 모인 모든 이들이 다 술이 센 사람들이다. 평소라면 분위기에 이끌려 한 잔 정도는 잔을 받았겠지만 오늘은 왠지 술이 내키지 않았다.
“선생님도 한 잔 할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차를 가져왔으니..”
“대리운전도 있는데..뭐,별 수 없죠! 자자, 그럼 자리를 바꿔앉죠! 술 마시는 쪽이랑 안 마시는 쪽 반반씩 나눠앉읍시다!”
모든 술자리가 그렇듯 화기애애한 분위기 안에서 이것저것 이야기가 오간다. 학생들의 성적 관리 이야기, 비행청소년의 선도 이야기.. 결국 다들 직업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거냐며 엠파이어 소드가 웃어 보이자 다들 한바탕 웃음이 터져버린다. 선생이 된 이상,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모두들 자신의 제자들이 어떤 점에서 좋다며 학생 자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에 레이지 하츠는 자신의 학급을 떠올려본다. 특별히 모난 제자는 없었다. 그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까? 한명 한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다 문득, 디셈블러를 떠올렸다. 교복 자켓을 입지 않고 후드를 입고 있는, 성적은 우수하나 수업에 협조적이란 느낌은 들지 않던 오묘한 학생. 들리는 말로는 아이돌 연습생을 지망한다는 말도 있지만 학급 내 다른 학우들과 쉽게 어울리는 편이 아니어서 어디까지가 소문인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어려웠던 타입. 분위기에 취했던 걸까? 조금 걱정되는 학생이 있다며 레이지 하츠는 디셈블러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다들 학생을 좋아하는 선생님들이게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레이지 하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각자 말을 붙이기 시작한다.
“학생이 성적이 전부가 아니긴 하니까요. 진로를 잡아주고 응원하고 싶은데 보여주지 않으면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 같아요. 한 번 정도는 상담을 해보는건?”
“저는 오히려 간섭하지 않고 관망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스스로 이 길이 맞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길을 정해놨을 가능성이 높은 학생입니다.”
“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갈리는 의견에 어떤 것이 최선의 방법일지 고민하며 일행들과 헤어졌다. 매콤한 마파두부를 먹은 탓인가 속이 아픈데 가볍게 우유를 하나 마시고 돌아갈까. 편의점을 찾아 조금 발걸음을 옮기자 매장 앞에서 전단지를 배부하며 홍보하는 직원들이 몇몇 눈에 띄였다. 헤지호그 탈을 쓴 사람을 보며 이렇게 더운 여름 고생이 많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레이지 하츠는 제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앞치마 차림의 디셈블러가 메이드 카페 전단지를 배부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놀라서 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자, 제자도 이내 자기를 알아채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전단지로 얼굴을 감췄다. 레이지 하츠는 자신의 제자에게 발걸음을 향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거야..?”
“아, 아르바이트로 무얼 하든 상관없잖아요! 카페 손님으로 와 주실 거 아니면 이만 가세요!”
톡 쏘아붙이는 말투. 자기가 아는 그 제자가 맞았다. 하긴, 메이드 카페가 그렇게 불법적인 장소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연령대이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일을 하는 학생에게 자신이 관여할 권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까 회식 자리에서 때마침 그에 대해 고민했던 탓일까? 조금 더 이 아이와 대화하고 싶었다.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더 당황한 제자가 그를 불러들이려 뒤쫒아왔다. 일사천리로 카페 오너에게 정중하게 아르바이트 중인 학생을 데려가도 괜찮을지 여쭤보고는 그를 조수석에 태웠다.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냐 따질 틈도 없이 레이지 하츠가 디셈블러에게 딸기 프라페를 건넸다. 창문을 열고, 해안도로로 터보엔진이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시원한 프라페, 뉘엿뉘엿 저무는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 눅눅하지 않고 상쾌한 한여름 저녁의 바닷바람. 컵 홀더에는 자기가 먹던 프라페 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한 잔, 놓여있었다. 아마 이건 선생님의 것이겠지. 드라이브에 살짝 마음이 풀려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다짜고짜 아르바이트 중인 걸 빼내 와서 아무 말도 없이 드라이브만 하고, 대체 뭐냐구요!”
“아, 미안하다.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었어. 빨리 이동하지 않으면 차를 세워둘 곳이 없거든.”
레이지 하츠가 미소지으며 차를 세운 곳은 확실히, 해변의 상점가에서는 조금 거리가 떨어진 한적한 자리였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이곳의 주차장을 이용하고 다시 상점가로 돌아갔지만 레이지 하츠는 오히려 이 한산함이 좋았다. 생각을 침착하게 정리하는 용도로 자주 찾던 해안가의 모래사장에 소박한 돗자리를 깔아주며 레이지 하츠는 디셈블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평소라면 그럼 됐네요, 이만 집에 보내주세요. 하고 다시 선생님의 차에 탔을 텐데, 무언가에 홀린 듯 디셈블러는 자신의 진심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 성적만으로 충분히 의사, 판사, 검사.. 흔히 말하는 ‘사’ 자 고위직업을 노리고도 남을 텐데 왜 아르바이트를 하고 외모를 가꾸는지..”
“반 안에서 도는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으니 반신반의하고 있었어.”
“..중립적인 사고관은 좋네요.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말하고 싸우고 나왔거든요. 혼자 자취하고 있어요.”
“뭐..?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건 너무 위험한 거...”
“치안은 충분히 신경쓰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계획한 거라 용돈으로 전세 들어 살고 있고, 아르바이트 비용은 다른 목적으로 모으고 있는 거에요.”
용돈으로 전세비용을 모을 정도라면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다짐한 건지, 레이지 하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게까지 해서 불투명한 미래로 발걸음을 하겠다고 하는 제자를 말리는 것이 옳을까, 응원하는 것이 옳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레이지 하츠는 제자의 다음 말을 듣고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성형비용이요. 솔직히 이 얼굴로는 사랑받기 어려울 걸 알아요. 그러니까..”
“자, 잠깐만..!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
“참 나, 그렇게 느린 사고로 선생님은 어떻게 된 거에요?”
“으, 으음.. 면목없군.. 나는 네가 지금도 충분히 외모로서는 뒤쳐질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돌의 세계는 평가가 다른 건가..”
레이지 하츠가 무심하게 던진 ‘너는 충분히 아름답다’ 는 뉘앙스의 말에 디셈블러의 뺨이 저녁노을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어디에서도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집을 박차고 떠날 때도 그랬다. 너 따위가 나가서 얼마나 잘 하겠냐고. 어디에도 존중받지 못했다. 비록 외모만이라도 좋았다. 자신을 존중해 주는 말이 작지만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수업을 받으면서 선생님이 이런 성격인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터놓는 것도 어렵지 않게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깜빡이던 디셈블러는 더 깊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었다.
“..사실 이 길이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어 두려워요. 여기서 실패하면 그 뒤는 어떡해야 할지 두렵기도 하고.”
“..실패해도 다시 딛고 일어날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는 한 번의 성공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지.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는 일이 더 많다.”
“..아직 도전 중인데 초치는 거에요?”
“그, 괜찮다면 자취가 아니라, 선생님의 집에 오는 건 어떻겠니? ”
“네?”
“혼자 살기엔 집이 좀 넓은 편인지라.. 너만 괜찮다면 보증금은 빼서 네 재산으로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네가 걱정하는 실패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정 네가 네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 비용으로 성형을 해도 나는 네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고..”
“잠깐,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빠르잖아요!!”
방금 전 디셈블러의 고백에 레이지 하츠가 했던 반응을 자신이 똑같이 하고 있는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터보엔진에 휩쓸려 온 바닷가에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파도에 둥둥 떠내려 보낸 모양이다. 슬슬 차가워지는 바닷바람에 레이지 하츠는 반팔져지에 앞치마 차림인 디셈블러의 어깨에 차량용 무릎담요를 걸쳐준다. 평소라면 더운 여름에 이런 건 필요없으니 에어컨을 더 세게 틀어달라고 투정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온기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전세금 대신 나도 너에게 부탁할 게 있다.“
“맨입은 안된다는 거네요, 뭐길래 선생님이 학생에게 뻔뻔하게 요구하는 거에요?”
“아이돌은 체력인 건 알겠지? 매일 나와 같이 하루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자. 그리고.. 내가 꾸미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말이지. 괜찮다면 옷이라던가..집의 인테리어 같은 것도 같이 봐 줄 수 있을까 하는데.”
“…참 나, 알겠어요. 뭔 거창한 소리를 하는 가 했더니..”
아직 아무 짐도 없는 허전한 레이지 하츠의 자택 빈방에 이불을 깔며 디셈블러는 전세계약 해지와 이삿짐을 짤 계획을 머릿속에 품다 이내 곤히 잠에 빠졌다. 면도도 서툴게 하는 바보 선생님에게 진정한 외모가 뭔지 알려줄 생각을 한켠에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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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나무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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