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디에] 이카루스의 밀랍
눈이 부시게 찬란한 태양을 존경했다. 이곳은 너무나 어둡고 추웠으니까 따스하게 온기를 건네주는 태양의 존재는 자극이 강했다. 하지만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서서히 저물어갈 때,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처음 본 태양이 사라져가는 것을 소년은 견딜 수가 없었다. 태양은 저물고 내일 다시 떠오른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양이 그대로 초신성이 되어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부서져가는 자신의 몸의 오감을 대체하기 위해서 생긴 육감.. 아니 초감각적인 지각은 눈앞의 인공태양이 다시 떠오를 ‘내일’ 은 없다고 자꾸만 외치고 있었다. 그래, 그는 만들어진 인공태양이니까 상공에 떠있는 태양과는 궤적이 달라. 정말.. 그가 죽을 지도 모른다. 디아볼릭 에스퍼는 잊고있던 불안을 다시금 자각한다. 자신에게 놓인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분풀이만을 일삼으며 자신에게 놓인 다른 모든 과제에 등을 돌려왔다. 이건, 그 외면에 대한 대가일까? 이런 몸이어도, 이렇게나 잘못을 저지른 존재여도, 이렇게나 망가져 있어도 ‘살아있다면 괜찮다’ 고 말해준 태양이 있었다. 하지만 태양과 이카루스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태양은 별먼지 속에서 온기를 내재한 채로 태양으로 거듭났지만, 이카루스에게 주어진 온기는 앙상한 심지를 보이는 밀랍초 한 개 뿐. 이카루스는 태양 옆에 빛날 별조차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온기와 반짝임을 잃을 수 없어 더욱 깊게 집착한다.
“..개죽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전선에 뛰어들겠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전선에 활로를 뚫지 않으면 이대로 모두가 죽을 거다. 그럴 바엔 한 명의 죽음으로 모두를 구하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이지.”
“하, 내가 벌레마냥 마족을 찍어누를 때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 다그치던 놈이 하는 말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지금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 나를 적진 중앙으로 워프시켜 줘, 애드.”
“맡겨놓은 것 마냥 이제 명령하는 건가, 내가 어지간히도 만만해 보이나 보지?”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일행을 구출하기 위해 인공태양은 자신의 몸을 폭발시키려 한다. 피와 살을 깎아가며 싸우는 그의 신체를 몇번이고 시간을 거스르는 힘으로 사선에서 건져올린 적은 있었지만 이번은 그 궤적이 달랐다. 먼 미래는 볼 수 없다지만 가까운 미래는 볼 수 있었다. 죽을 거야. 이 세상에 레이븐 크론웰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기 어렵게 부서지고 말 거야. 차라리 제가 나서겠다고 말할 정도로 디아볼릭 에스퍼는 정의롭지는 못했기에, 그를 일부러 도발하며 죽음에서 떼어놓기 위해 얕은 수를 부려본다. 이렇게 소모전을 반복해 그의 체력을 고갈시키면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전선에 서지 못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미래를 바꿔 보겠다. 중력장으로 그의 몸을 짓누른다. 이미 개조의 후유증으로 신체의 중량이 무겁고 묵직한 그는 공격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세를 바르게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공격이 치명적이겠지. 하지만, 디아볼릭 에스퍼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부분이 두 가지 있었다. 노바 임퍼레이터는 개조인간이기 전에 ‘용병단장’ 이었고, 그는 합리적인 선택이라 결정한 것에 어렵지 않게 몸을 던져넣는다는 것이었다. 가장 중량이 나가지만 탈착이 가능한 나소드핸드를 내버리고, 그는 한 손에 검을 잡고 디아볼릭 에스퍼를 매섭게 공격해왔다. 뺨을 스치는 묵직한 검의 감각에 이카루스는 깨달았다. 어떤 것이라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인공태양은 초신성이 되어 폭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시공간을 열어젖혔다. 등은 돌려버렸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또다시 그를 막아서게 될 것 같아서. 그래, 네 좋을대로 해. 툭 내뱉은 마지막 인사에 대답은 오지 않았다. 시간을 거스르는 힘을 그에게 몰래 새겨놓는다 하더라도 그건 일회성에 그칠 것이다. 곁에서 서포트하는 건? 제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무한히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붉은 머리끈이 바람에 흩날리며 닫힌 시공간의 틈 앞에 덩그러니 남았다. 이카루스의 밀랍이 바닥에 뚝, 뚝, 떨어져 내린다. 이카루스는 밀랍초가 다 녹아버리면 더는 제 곁에 온기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태양의 곁에 함께하며 그 자신이 밀랍으로 이뤄진 밀랍인형으로 변한 것은 끝까지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눈물 대신 밀랍이 흘러내린다. 노바 임퍼레이터는 디아볼릭 에스퍼라는 밀랍인형 안에 심지를 심고 불을 당겨놓고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붉은 머리끈을 쥐어들었다. 밀랍이 모두 녹아 흘러내리면 더이상 디아볼릭 에스퍼는 디아볼릭 에스퍼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저 가치없는 밀랍더미가 되겠지. 이카루스는 태양을 원망할 것이다. 태양이 망가뜨린 자신의 몸을 저주할 것이다. 태양에 다가가기 위해 날개를 만들어보지도 못한 자신의 처지를 힐난할 것이다. 그에게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살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그가 죽어버린다면, 나 또한 살아있을 이유는 없지. 녹아내린 밀랍은 온기를 잃고 딱딱하게 굳어간다. 시공간 너머에서는 그 어떠한 것보다 뜨거운 초신성이 폭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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