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세상 고결한 꽃잎이여

어떤 후회의 안식처

화산귀환 / 백천청명

서고 by 예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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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님의 연성(https://twitter.com/gaemi_gigi/status/1584221606200893441?s=20&t=JkXLeQEk7NkHqsLt0zxShA )을 보고 쓴 글

-4천자 정도로 짧습니다.

-10월 25일: 글 제목 추가, 비문 수정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청명이 무의식적으로 외는 모르는 이의 이름과 화산의 가족들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표정으로 청명의 과거의 인연을 향한 그리움이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을 뿐, 모두가 잠든 시각이 되면 청명이 지붕 위로 올라서 휘황찬란하게 뜬 달을 바라보며 앉아 누군가에게 계속 이야기함을 화산에서 모르는 이가 있던가. 그럼에도 화산의 어느 누구도 청명에게 물음을 표하지 않았다. 화산에서는 청명뿐만이 아니라 화산에서 받아들인 제자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그러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 화산의 제자는 그저 화산의 제자라고, 청명은 그저 청명일 뿐이라고 여겼다.

지학(志學: 15세)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종남파의 미래를 이끌 것이라 추앙받던 이대 제자 진금룡을 쓰러트린, 보통 삼대 제자라고 할 수 없는 드높은 무위하며, 출처가 불분명한 기기묘묘한 지식 그리고 선조를 몰살하고 문파를 불태웠다고는 하나 마치 피해당사자와 같은, 마교를 향한 끝도 모를 증오심과 집념까지. 그동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삼켜왔던 물음은 구르고 굴러 하나의 커다란 의문이 되었다.

-언젠가 말할 준비가 된다면 그때에는 말해주겠지.

사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다름없었다.

 

 

평소 백천은 대사형으로서 사제, 사질에게 모범이 되고자 백매관의 일과가 시작되기 반 시진 전인 묘시 초(오전 6시)에는 일어나 자발적 수련을 해왔었다. 과거형이라는 건 지금은 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생활에 변화가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몇 년, 청명이 청자 배 막내로 화산에 입문한 후로는 화산 청자 배는 물론이요, 백자 배까지 강제로 자시 초(오전 5시) 이후에 일어난 적이 없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지옥 같은 수련 뒤의 꿀 같은 짧은 수면도, 이르거나 밤늦은 수련도 화산에서는 당연하기 그지없어졌다. 대사형이 솔선수범하지 않아도 화산의 모든 이가 이미 알아서 다 하고 있었다. 이것을 검문이며 문파로서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무섭도록 몸으로 깨달으며, 백천은 축시(丑時)지만 이왕 일찍 일어나게 된 거, 새벽 수련하고자 연무장으로 적응의 동물로써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도 한 시진이나 이른 시간이니 밤하늘은 새카맣고 화산의 제자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이라지만 어쩐지 밤새의 지저귐조차 들리지 않아 화산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런데 이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날짐승이나 들짐승의 울음소리는 아니다. 분명한 사람의 목소리.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는 남들이라면 듣지도 못할 정도로 작았으나, 이제 웬만한 사파 마두 정도야 가볍게 때려잡을 경지에 오른 백천은 오감이 예민해져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놓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었다.

‘이건 누구의 목소리지?’

 

설마 도둑일리는 없고. 이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확인을 하지 않고서는 연무장으로 갈 수 없었다. 신경이 쓰여 수련이 되겠는가. 백천은 별 일이 아니길 바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저 방향이라면 옥천원이 있을 것이다.

백여 년 전에 화산이 마교 잔당의 보복으로 불타고, 없던 빚을 지게 되어 없는 살림살이 박박 긁어 연무장의 청강석이며 식기까지 죄다 팔아서 넘기고 문파의 일원들은 풀떼기를 먹으며 가난하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사실 그리 먼 일은 아니다. 그때 사문의 어른들은 제자와 옥천원만은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문파의 시조인 학대통 조사를 비롯하여 지금의 화산을 만들어 낸 선조의 위패를 모셔둔 곳이 바로 옥천원이다. 그 가까이에 서자 코끝에 향냄새가 스친다. 살짝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빛이 보였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다가섰다. 들여다본 그 안에는 향불을 올린 흔적과 함께 청명이 있었다.

누군가의 위패를 품에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장문 사형.”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무엇이 그리도 죄스러울까. 백천은 청명과 이제 십여 년 가까이 한 문파의 일원이자 가족으로 지내오며 나름대로 저의 사질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한데, 그의 사질이 그가 전혀 모르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이건, 백천이 모르는 청명의 과거 때문일 것이라고.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이 고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신에게 매달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화산파는 도문이라 원시천존(元始天尊, 도교의 최고신이며 道의 신격화)을 받들었지만, 청명은 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저의 생각이라기보다도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하듯 하지 않았던가. 청명이 지금 매달리는 것은 누구일까. 원시천존? 아니면 저 위패의…….

연신 제 잘못을 비는 사질의 그 모습에 놀라 백천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소리에 청명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미, 미안하구나, 청명아. 옥천원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들러봤다.”

 

기척은 어찌 숨기고 넘어갔으나, 백천을 비롯한 모든 화산의 제자들의 스승인 청명의 감각이 그 작은 숨소리를 놓쳤을 리 없었다. 백천은 보면 안 될 것을 훔쳐본 것 같은 죄악감으로 양심이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느꼈다. 재빨리 자진신고를 끝내고 아무것도 못 본 척 돌아나가자.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몸이 실행에 옮겼으나 그 찰나에 그를 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디가, 사숙?”

“나는 그, 수련하러 가야겠구나…….”

“여기 옥천원이잖아. 가더라도 선조께 인사드리고 가.”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선조께서 모셔진 곳에 들어와 인사도 없이 돌아간다니, 어른을 눈앞에 두고 인사 없이 제 갈 길을 간다고 지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청명의 모습에 놀라 그만 잊었던 범절을 상기한 백천은 속으로 자신을 크게 질책했다. 애써 사질의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매무새를 단정히 점검, 또 점검하고 향불 앞에 섰다. 그러자 계속 뒤돌아서서 백천에게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청명이 비어있던 자리에 위패를 하나 조심스레 채워 넣는 것이다.

 

“청문 ……진인께도 인사 올려.”

“……알겠다.”

 

검수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필시 섬지(纖指, 미인의 손가락)라고 불렸을 손이 새 향을 세 개 꽂고 이어 선조께 두 번 절을 올린다. 선조의 뜻을 이어받았고 이어가려는 화산에서는 제자들이 모두 옥천원을 자주 찾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은 건 백천 그가 화산에 입문한 십수 년의 세월에 처음이었다. 익숙한 장소였지만 새벽 밤의 공기와 단 두 사람이 있는 이 공간이란, 지금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백천이 봤던 그 장면 탓도 조금은 있겠지만, 정말. 정말 그건 일부러 보려고 한 것이 아니기에, 백천은 그저 사질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아 모른 척 넘어갈 셈이었다.

 

“사숙 수련하러 갈 거라고 했지? 나도 이제 수련하러 가야겠어. 자꾸 생각이 많아지는 건 몸이 편해서니 이럴 때는 수련을 해야….”

 

지옥 같은 침묵 속 극도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고 먼저 말을 건 것은 청명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청명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정말 평소와 다름이 없었느냐고 하자면 그것은 아니다. 그 뺨에는 흐른 물줄기가 채 마르지 않았다.

닦지 못한 눈물이 보인 것이다.

 

“청명아.”

 

불가항력이다. 백천은 자신도 모르게 청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저도 모르게 말이다. 하지만 영루(零淚)를 보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핑계로 들리겠지만, 그 자국이 가슴이 아팠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화산파의 누군들 지금 청명의 이 모습을 봤다면 걱정하며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명은 갑작스레 저에게 다가오는 손에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다가, 백천의 표정을 보고 우뚝 멈췄다. 천방지축 화산을 뛰어다니던 아이 시절부터 팔십 할배가 될 때까지도 항상 가족인 청명을 걱정하고 위했던 화산의 옛사람들과 같은 얼굴이다.

강한 척을 하고 싶은 청명이라도 순간에 약해지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얼굴이었다. 결국 언제고 가족을 이기지 못하던 어린 사조는 어린 사숙에게서 도망가지 못했다. 새벽 밤바람 탓일까, 백천의 손은 조금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이 닿자 청명은 조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련으로 인해 이제 섬섬옥수와 거리가 멀어진 백천의 손은 예전보다도 확연하게 거칠고 투박하며 단단해졌다. 청명을 만나기 전의 백천은 예전의 제 손을 보며 만족했었다. 충분히 노력했다고, 그러니 종남을 꺾어 자신이 화산의 희망이 될 수 있다며 제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도 모르고 자만심에 빠져있었다. 청명을 만난 지금의 백천은 자신의 손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더욱더 강해지기를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

만족을 모르고 더더욱 노력하고 위를 향해 뻗는 이 손을 청명은 좋아했다.

 

“나 괜찮아, 사숙.”

 

살며시 사질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손에 순간 따뜻한 온기가 얹어졌다. 부드러운 볼이 거친 손바닥을 스친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백천은 이상하게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동시에 가슴이 아려와 조심스레 청명의 뺨을 쓸었다. 눈물은 이제 닦였으나 아직 그의 마음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아있고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것이다.

 

“....청명아.”

“정말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무인은 강인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치면 붉은 피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들도 마음이 아프면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람. 백천의 사질, 청명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기대어주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대신해 백천은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었다. 이제는 후기지수라 부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랐다. 수많은 이들을 구했고 모든 이가 그에게 의지한다. 그러면 청명은?

백천은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더욱 강해져 사질을 지키고 그의 안식처가 된다. 그러면 언젠가,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 지 내게 알려주겠느냐.’

 

-내가 너의 아픔과 후회를 함께 짊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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