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그리워하다
화산귀환 / 당보청명, 암존검존
-화산귀환 전력 90분 ‘봄(입춘)’
-유혈 묘사 있음
벤다. 베었다. 베어야 한다.
이곳은 지옥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마魔를 신으로 받드는 광신도들이 달려들어 도축을 하듯 사람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그 피와 살점으로 지옥도를 그려냈다. 그래,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저들은 그들의 신이 만들 세상을 위하여 그랬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을 제외하면 생명이란 짐승 아니,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했으리라. 천마가 지배할 마의 세상을 위하여 그저 부수어 치울 뿐이었다.
그렇게 시체가 산을 이뤘다.
그렇게 그들은 시체 산을 늘려갔다.
어떤 이는 마화魔花가 몸을 침식하여 고통 속에 결국 눈을 감지 못하였고 어떤 이는 사지를 잃었음에도 검을 쥔 채로 쓰러졌다.
그런 이들로 이루어진 태산太山이었다.
‘내가 늦었구나.’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지독한 피 냄새에 고개를 숙였다. 막혀오는 숨을 억지로 내뱉었다. 결코 현실을 바뀌지 않는다. 이내 제 입술만을 잘근 깨물었다.
언제 끝나는 것일까.
계속되는 전쟁에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 주변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아가, 내 아가…. 그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온기가 이미 사라져버린 시신을 끌어안고 불러도 즉금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이를 계속해서 찾는다. 계속 울어 목이 잠긴다.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나 그들은 꺼억, 꺼억 쉰 목으로 마른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울고 울었다.
마교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평범한 일상은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고통에 울부짖는 하루가 이들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청명의 사형이며 대 화산파의 제 십삼 대 장문인인 청문은 그들이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지옥이 그들의 일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을 했다.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청명은 그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화산의 검劍은 발을 움직인다. 전장으로 향할 뿐이었다. 어떠한 말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적의 목을 베어내는 것만이 죽은 이들을 위한 진혼이며, 그걸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남겨진 이들이니.
갈매빛 머리끈이 바람에 흔들린다. 매화의 색과 닮은 눈동자는 어둡게 내려앉았다. 드르르르.. 검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항상 검존은 전장의 가장 앞에 섰다. 그 뒤를 언제나 따르는 이는 암존 당보였다. 청명이 대 화산파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었다는 제 십삼 대 제자이며, 천하삼대검수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며 누구도 그의 위상을 의심치 않는다. 허나. 그게 혼자 짊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당보는 청명을 혼자 둘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청명은 너무나도 위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매화검존梅花劒尊 청명靑明.
그가 백번을 덤벼 한 번도 못한 도사 형님, 청명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청명의 사형제들이 그와 팔십 여년을 함께하며 논하고 논했던 문제도 문제라지만, 마교와의 전쟁이 시작된 후로 크게 두드러진 문제가 하나- 어느 누구에게도 제가 지친 것을 내색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이유는 사실 뻔했다. 청명의 등 뒤에는 그가 지키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위해서가 아닌가. 사형제들과 사질들, 양민들 그리고 마교를 무찌르기 위해 힘을 모은 정파의 이들까지도. 그들의 앞에 서는 청명은 약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일 수 없었다. 청명의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주춧돌이자, 기둥. 제가 무너진다면 모두가 무너진다는 걸 알았다.
누구보다 강한 그만이 있을 수 있는 자리인 동시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자리임이 틀림없다.
청명의 옆구리에서 붉은 물이 하이얀 도복에 화선지에 떨어진 먹처럼 번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못 본 체해도 청명의 아우 되는 당보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이 양반이 또 다친 걸 참고 있지! 참으로 의원 말을 개뼈다구로 아는 환자였다. 그럼 이 의원님께서 친히 환자를 잡으러 가야겠지. 발끈한 당보는 통증이 있던 없건 앞에 나서 검만 휘두르는 제 형님을 붙잡았다.
“도사 형님!”
검을 쥔 그의 손은 크고 거칠며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다. 평생 검을 들고 수련을 해온 검수에게 있어서 손의 상처는 그간 노력의 상징이었으니 청명도 평소에 퍽 자신의 손을 보며 또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당보도 그의 손이 좋았다. 큼직한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는 것도 좋고 남들보다 찬 제 손을 데워주는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그런데. 손을 붙잡은 순간 당보는 퍼뜩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손이 차다. 청명의 손은 당보가 놀랄 정도 차가웠고,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나 입술이 파리하여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바로 치료가 필요했다.
“……도사 형님. 치료는 하고 갑시다. 일전에 꿰맨 상처도 다시 봐야겠소.”
“됐다. 이런 건 침 바르면 낫는대도.”
“형님 침이 무슨 금창약이라도 된답니까? 바르면 낫게. 의원이 말하면 좀 들으쇼. 꿰맨 상처가 터진 것도 모르고 싸웠습니까?”
예전에 무리했다가 터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두 번이면 다행이지, 전장에 나갈 때마다 이 모양이고 이 꼴이다.
당보가 평소에 청명에게 돌팔이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기도 참 많이 맞았다. 허나 그의 의원을 차렸으면 떼돈을 벌었을 거라던 호언장담이 단순히 말뿐이 아니었다. 당보는 정말 의술에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암존 당보는 대 사천당가의 태상장로가 아니던가. 사천당가 비전인 약 제조술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못살 지고의 가치가 있는 보물이다. 거기에 능숙하게 부술까지 가능하다? 중원 어디를 뒤져봐도 이런 경지에 이른 실력을 가진 이가 몇이 되겠는가?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보의 실력을 보았다면 여기저기서 앞 다투어 큰돈을 바치며 제 의원으로 모셔가려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당보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갈 생각도 없고.’
청명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당보는 오로지 제 형님만을 위해 그 실력을 쓰고 있었다.
“돌팔이가 잔소리는.”
“누가 돌팔입니까. 이 말코 도사가.”
“이 새끼가? 요즘 안 맞았다 이거지?”
“악! 치료 중에 때리십니까! 악! 으아악!”
잔소리를 늘여놔야 하긴 하지만 결국 청명은 자신을 당보에게 맡겼다. 이래야 치료를 겨우겨우 받는 사람을 두고 어딜 가겠나. 옆에 꼭 붙어있어야지.
‘내가 옆에 있지 않는다면 형님은 몸을 돌보지 않고 또 전장으로 달려 가버리겠죠.’
적지 않은 세월을 친우로 지내었으니 이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평화롭기만 하여 따분하기도 했지만 싫지는 않았던 옛날 함께 술잔을 채우며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가. 죽이 잘 맞으니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더랬다. 즐거웠는데. 그 기억이 이제는 아득하다. 전쟁이 일어나고는 항상 붙어있어도 그때만큼이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당보는 문득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을 툭 꺼냈다.
“곧 봄이지요.”
중원에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봄은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라고 하지 않나. 동시에 매화꽃이 피는 계절이니 당보는 봄이 참 좋았다. 참 따스하지 않던가.
“예전에 도사 형님이 중원 제일의 절경을 보여주겠다며 절 데려갔던 곳이 화산이었던 거 기억하십니까?”
“뭐. 왜. 불만이라도 있는 게냐?”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눈을 샐쭉하게 뜨는 것과 동시에 주먹부터 쥐는 게 눈에 보인다. 평소 말보다도 주먹이 더욱 빠른 청명이 아니던가. 당보의 얼굴에 자동반사적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그때 도사 형님이 평생 산에 틀어박혀 사신 분이라 사천 제일의 절경을 보지 못해 중원 제일이라는 말을 올리신 거라고 생각했었…… 아! 형님. 주먹 내리십쇼. ‘생각한다’가 아니라…… ‘했었다’는 겁니다!”
“그래?”
“…….”
압도적인 폭력성 아래서 생존을 위해 본능이 자꾸만 입을 다물게 만든다. 이래서는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얻어맞을 것 같았다. 당보는 식은땀을 비질 흘리며 웃는 낯으로 청명의 폭력성이 올라오려는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스윽 원위치로 내리고는 이어 말했다.
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평소와 같다면 가까운 객잔에 들어가 평소와 다름없이 함께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었을까. 그때 청명은 중원 제일의 절경을 네게 보여주겠다며, 당보를 어떤 곳으로 데려갔다. 절경은 좋지. 두 사람이 아무 데서나 술을 꼴꼴꼴 들이키며 즐길 수 있는 꾼이라지만, 절경을 보며 마시는 술의 각별함을 안다. 그런 장소로 바꾼다면 반색함이 마땅한 일이라. 당보는 제 형님이 시키는 대로 두 사람이 마실 분주汾酒를 소중히 품에 들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여기. 참 익숙한 길이지 않나. 착각이겠거니, 착각이겠지 싶었던 순간마다 자꾸만 익숙한 길이며 알고 있는 건물이 지나가고 이건 결코 착각이 아니라고 못을 박듯 익숙한 산문이 눈에 들어왔다. 모를 수 없는 곳이다.
화산의 산문이다.
지금 당보는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 흐린 눈을 떴다.
‘이 말코 도사가 화산에서 술을?’
우리도 잊고 있고 당보도 종종 잊고 있지만, 청명은 도사다. 도를 닦는 도인이므로 술은 금지되어 있었다. 큰 행사를 제외하면 술을 입에 대는 도사는 없었고, 겁도 없이 도문인 화산파가 위치한 화산 내에서 본인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는 인간 또한 없었다. 그리고 청명은 선조들과는 참으로 많이 다른 도사였다.
분주를 들고 가는 것은 정말 술을 마시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다름없는데, 향하는 방향은 화산이니 장문인인 청문이 알면 제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다.
“도사 형님. 청문 진인께서 아시는 날엔 크게 경을 치실 것 같으니 그 화가 저에게 미치기 전에 이만 가보겠ㅅ ……으악!”
“같이 온 이상 우린 공범자다, 이 새끼야.”
“제발 이런 건 단독범행으로 해주십쇼! 화음현에 객잔도 많은데 왜 하필 화산입니까?”
“내가 중원 제일의 경치를 보여주겠다고 했잖냐. 여기에 그 경치가 있다.”
“그래도 말이죠…….”
“우리 애들 말고는 당보 네게 처음 알려주는 거다.”
그 말이 뭐라고. 화산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준 적이 없다는 말에 그래도, 라고 나오려던 말이 목구멍 아래로 다시 들어갔다. 그 말은 당보에게 특별하게 들렸다. 이미 화산 사람들은 안다는 것인데 뭐가 특별하냐고? 아니, 특별하다. 정말 특별했다. 청명에게 있어 화산은 가족이며 삶의 전부였다. 당보는 그들에게만 알려주고 알고 있는 비밀을 자신에게 알려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화산만큼이나 청명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아서.
“그래요, 갑시다. 가고 청문 진인에게 들키는 순간 형님 등짝에 추혼비를 박고 튈 거니까 그리 아십쇼.”
“이 새끼가 꼭 한마디를 더하지.”
바람에 가지의 푸른 나뭇잎이 흔들린다. 싱그러운 풀 내음에 어쩐지 조금의 불안감마저 사그라들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장소, 화산은 청명이 아주 갓난아이일 적부터 팔십 세가 된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다. 중원 오악五岳 중 하나라고 하는 화산이니 여기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헤맬 만도 한데 청명은 길을 훤히 다 알고 있는 듯 익숙하게 경공으로 앞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이 멈춰 섰다. 붉은 꽃이 보였다. 이곳에 수천 송이의 매화가 봉오리를 터트린 거목이 우뚝 서 있었다.
‘……허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수령이 몇백 년이나 되었는지는 그 크기만 봐도 알았다. 마치 수호신처럼 화산을 가장 오래도록 지켜보고 지켜왔을 매화나무다. 어떨 때는 어린 제자들의 놀이터가 되며 어떨 때는 시원한 그늘이 되기도 하고 쉼터가 되기도 하는 장소가 되어주기도 했겠지. 그리고 언젠가의 어린 청명이 뛰어놀았던 장소였을 것이다.
이곳에 한차례 거센 바람이 불자 당보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붉은 매화 꽃잎들이 흩날린다. 만천화우滿天花雨란 이런 것이 아닐까. 붉은색이 시선을 빼앗는다. 짙은 매화향이 세상에 퍼졌다. 이곳은 별세계別世界가 아닐까. 다른 세상이라는 착각까지 들 광경이 당보의 눈에 박혔다. 그는 코끝을 간지럽히며 떨어지는 꽃잎을 붙잡았다. 만져지는 꽃잎을 보고서야 현실임을 알았다.
“어떠냐, 당보야. 아름답지 않으냐? 여기야말로 중원 제일의 절경이라 할 수 있지.”
그 꽃비 아래서 그리 말하며 천진하게 웃던 청명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칠십이 넘는 인생에 술 말고 뭣에 취해본 적이 없던 천하의 암존暗尊 당보였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술이 아니라 다른 것에 취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전쟁이 끝나고 봄이 오면 다시 그 매화나무에 갑시다.”
다시 그곳에 간다면 형님의 미소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화산의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 아래, 그곳에서 아이같이 웃던 청명의 모습을 그리었다.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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