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세상 고결한 꽃잎이여

화동(花童)

화산귀환 / 논커플링

서고 by 예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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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님(@gaemi_gigi)께 드린 ‘화산의 아기 도사님’ 발간(2023년 1월 아이소) 축전입니다.

-임의로 어려진 청명이 나이를 세네 살 정도로 잡았습니다. 따라서 회지 설정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4천자 미만의 짧은 글

-이 글은 불시에 비공개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화동…… 말씀이십니까?”

청명의 입에 당과를 하나 물려주던 백천은 방금 들은 화동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혼례에 꽃을 뿌리는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일 텐데. 아이라고 하면 지금의 청명에게 맞는 말이긴 했으나, 동시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지금 청명이는 화동을 하기에는 어려도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그렇다. 청명이 무엇이고 끈기와 인내력으로 어떤 무모한 일이든 간에 결국 해내고야 만 것은 성장한 후(과거)의 일이다. 아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무엇 하나에 집중을 어려워하니 화동의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불확실한 까닭에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은 백천의 그 말을 거절로 들었는지 조금 초조해진 얼굴로 설득에 나섰다.

“안 되겠는가? 화산검… 아니, 청명에게 아들 부부의 화동을 꼭 부탁하고 싶었네만.”

당군악에게는 당패, 당소소, 당잔을 포함해 수많은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번에 혼례를 치르게 되어 이리 화산에 찾아온 것이었다. 혼인은 인륜대사(人倫大事)라고 하였다. 친구로서는 자식의 축일을 소중한 친구가 와서 자리를 빛내주길, 부모로서는 자식이 귀한 이에게 축하받아 행복해지기를. 그리 바라는 마음은 지극히 당연했다.

“청명아,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 백천의 질문에 순진무구한 낯으로 입안 가득 당과를 오물오물 씹던 청명이 제 사숙을 올려다봤다. 당가주께서 부탁하시는구나. 짧게 덧붙이니 청명의 시선이 친구, 당군악을 향했다. 어른으로서 기억이 전혀 없기에 당군악에 대해서는 친구라는 자각보다 나를 아껴주는 좋은 아저씨라는 인상이 있을 뿐이었다. 그를 빤히 보던 청명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래, 화동.”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혹시라도 친구에게 거절당할까 노심초사하던 당군악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환한 기쁨이 번졌다.

“고맙네, 고맙네! 화… 아니, 청명!”

체면이고 뭐고 청명을 번쩍 들어 올려서 비행기라도 태우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른 당군악은 청명의 작은 손을 잡아 연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저리 기뻐하시니 좋지만, 백천은 화동이 혼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기 어려워도 염려가 되는지 사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청명아, 화동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수락한 게냐?”

“해봤어.”

“응? 해봤다고?”

그 말에 백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해봤… 을 수도 있지? 거지라고 화동을 하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슬그머니 생겨난 의문을 지워냈다. 설마 청명이 백 년 전 선조이며, 무려 백 칠십여 년 전 화산에서 화동을 해봤던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는 작아진 사질을 품에 안아 들고서 재경각으로 향했다.

 

 

 

 

사천의 자랑, 당문의 경사에 온 사천 사람들이 당가타 앞에 모여들었다. 붉은 장식과 함께 쌍희 희(囍) 자를 창문, 문, 벽에 걸고 혼례를 준비하랴 손님을 맞이하랴. 당가의 사람들은 분주하기 그지없다. 바쁜 그 와중에도 힐끔, 또 힐끔. 당가인의 시선이 자꾸 한 곳을 향했다. 당문의 상징인 짙은 녹색 사이로 붉은 매화 자수가 새겨진 무복을 입은 무인들― 사천당가의 친구인 대화산파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마치 산적과 같은 덩치와 헌앙한 외모로 사람들의 눈에 띄긴 띄었지만… 그 아래 작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 그보다 더 시선을 끌지 않았으리라. 청명은 화동을 하기 위해 화산의 무복 대신 예복을 입고 붉은 매화 가지로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사고들과 사매의 과한 의욕(내 사질 혹은 사형 예쁘게 꾸며야 해!)으로 인해 지나칠 정도로 여러 겹 겹쳐 입은 탓에 짧은 팔을 휘젓고 짧은 다리를 뒤뚱뒤뚱하며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 장면이 영원치 않고 지나감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는데 보면 볼수록 내 애가 아닌데도 절로 그 애의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흐뭇함을 느꼈다.

“안 되겠다. 조금 벗겨주는 게 낫겠구나.”

뒤뚱거리는 청명이 귀여운 동시에 조금 안쓰러워진 백천이 넌지시 당소소에게 일렀다. 사숙의 말에 당소소는 열심히 꾸민 만큼 얼굴에 아쉬움이 그득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벗겨달라며 얼른 두 팔을 들어 올리는 어린 사형에 마지못해 두꺼운 예복을 벗겨주며 말했다.

“사형, 오늘 제 동생이 혼례를 올려요.”

“응. 오늘 모두와 함께 소소의 동생을 축하해.”

“사형의 역할은 아주 중요해요. 여기, 두 사람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빌면서 이 꽃을 두 사람이 지날 길에 뿌리면 돼요. 잘하실 수 있죠?”

그러며 화산에서 준비한 매화 꽃잎이 가득 든 꽃바구니를 건네주는데 청명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이건’ 아니라며 도리질을 치는 것이다.

“청명 사형?”

어느덧 준비가 끝났는지 사위가 조용해졌다. 피리와 고금, 비파 연주 소리가 들리며 가마꾼이 당가타의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짊어진 가마를 내리며 그 안에서 붉은색 두사(頭紗)를 쓴 미모의 신부가 숙인 고개를 살며시 올렸다. 오늘은 당가의 녹색 장포가 아닌 붉은색 혼례복을 배필과 맞춰 입은 신랑이 신부의 손을 맞잡고 서며, 혼례의 시작을 알렸다. 청명은 그 두 사람의 앞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사, 사형! 꽃……!”

음악 소리에 흥이 오른 듯 장단을 타며, 자그마한 손이 꽃 대신 목검을 들고서 그들의 앞에 등장했다. 당가타의 모든 이들이 꼬마 검수에 주목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지금 당가타에 있는 대다수가 청명이 화산검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저 어린아이로 보는 것 같았다.

“어머, 화동인가봐요. 귀여워라.”

“그런데 꽃바구니는 어디에 두고?”

하객들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하늘을 가르던 아이의 목검 그 끝에서 피어나는 무언가를 보았으니―.

“아니….”

살랑.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환상, 이것은 분명히 환상. 그럼에도 꽃내음이 코끝에 느껴지는 듯한 착각은 이 풍경에 빠져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개화, 또 개화. 춤추는 작은 아이의 목검 끝에 꽃이 소담스레 피어나 바람결을 따라 화려하게 흩날린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매화가 길을 만들어내니, 그건 새신랑과 새신부가 지날 꽃길이었다.

매화접무(梅花蝶舞).

매화가 나비처럼 춤을 추니 그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앳된 아이가 추는, ‘검무’라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그저 사랑스럽다고만 표하기에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며 하객들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토해졌다.

지금의 화산은 누구도 모를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어려진 청명의 기억에는 채 몇 개월 되지 않은 일이었다. 백자 배 사고가 저의 반려를 만났다며 사질인 청명에게 화동이 되어주길 부탁해온 날 말이다. 화산이 아무리 개화의 검을 쓴다고는 하나, 화산에서 화동도 꽃을 뿌리는 대신 매화를 피워내야 했던 건 정말로 아니었다. 청명이 시작이었다. 신랑·신부의 앞에 꽃을 뿌리면 된다는 말을 화산의 매화를 피우면 된다는 말로 오해한 어린 청명이 사고의 혼례에 매화를 피워냈던 것을 시작으로 어린아이가 할아버지라 불리는 나이가 되는 칠 십여 년간 화산의 특별한 문화로 자리 잡혔다.

정마대전 이후로 전해줄 후인이 없어져 잊히고 말았으나 잊혔던 화산의 화동은,

어린 청명이 화산에 돌아옴으로써 다시 돌아왔다.

화산신룡에서 화산검협으로 불리게 된 청명에 비해 어린 청명의 저 매화는 강하지도 않고 그에 비하여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겠다. 하나 화산이 진정으로 재현하려는 건 매화가 아닌 ‘개화’이다. 피어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피어나는 매화 속에 어린 매화는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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