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당보 생존 if] 귀환.
* 당보 생존 if, 당보청명
느리게 눈을 뜨면, 오래된 티가 물씬 풍기지만 익숙한 천장이 저를 반겼다. 원래 자신이 쓰던 방에 오랜 흔적이 남은 것을 보는 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였다. 100년이 좀 넘었다던가... 며칠 전, 자신이 깨어난 이후 들은 이야기였다. 그 시간과 제 기억의 괴리감이 컸다. 그도 그럴게 제 기억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고 눈을 감은 그 때에 멈춰있었다. 전장을 쏘다니며 수 많은 죽음을 이 두 눈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부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제 손을 간절히 붙드는 그의 손 안에서, 제 체온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마지막이 될 부탁을 내뱉었다. 당가를, 제 식솔들을……. 하지만, 살아 돌아온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였던 모양이었다.
매화검존은, 도사 형님은, 천마의 목을 베는데 일조하고 십만대산에서 영면했다.
그 문장을 곱씹을수록 짙게 이는 위화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형님이 돌아가셨다. 제 암존이라는 별호를 무색하게 만들었던 그 형님이 돌아가셨댄다.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던 까마득한 경지에 올라있었기에, 제 곁을 내어주는 것에도, 자신이 그의 곁을 지키는 것에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죽는다면, 형님보단 내가 먼저일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믿기가 힘들었다. 지독하게, 입안이 썼다.
***
크나큰 부상을 입은 저를, 100여년 간 당가에 숨긴 체로 돌보았다고 했다. 그 때의 그 암존이, 깨어나지 못한 체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충분한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당가 내에서도 극소수 외에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렇게 깨어나셔 다행이라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현명한 대처였기에 굳이 말을 얹진 않았다. 내가 잠든 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전해들었다. 화산이 불탔고, 이후 급격한 몰락을 맞이해 구파에서 밀려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화산이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살아나기 시작했고, 그런 화산과 당가가 친우의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까지. 짧게 허, 하고 숨을 내쉬었다. 형님, 보고 있소? 어째 인연이 이리 이어질 수 있는지, 참 신기할 따름이오. 속으로 되뇌인 혼잣말엔,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100년 간 잠들어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자신은 잠든 이후와 별 다름이 없는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 기억처럼, 제 몸 역시 그 때에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참 이상하지 않소, 형님. 내 몸도, 내 기억도, 그 때에 멈추어 있는데, 당가의 가주 자리에는 낯선 이가 앉아 있고, 또, …… 또, 형님이 더 이상 없다는 게. 주먹을 꾹 말아쥐며 숨을 길게 들이켰다.
더 쉬어야 한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듯 손까지 훼훼 내저으며 몇 주야 만에 처소를 나섰다. 이제 막 깨어나셔서 몸을 살펴야 한다는 둥의 잔소리는 유연하게 쳐낸 후였다. 에잉... 제 잔소리를 끔찍히 여기던 형님의 심정이 아주 티끌만큼 이해될 정도였다. 물론, 그 양반은 자신의 몸을 너무 돌보지 않았다. 과했지, 매우. 아직 제 존재를 알릴 때가 아니라는 가주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100여년 전의 제 얼굴을 알아볼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자신이 이리 바깥으로 나서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을터다.
그러던 중, 누군가 찾아온 건지 한 쪽이 퍽 소란스러웠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옮겨가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도복. 아, 그런가. 화산의 아해들이구나. 친우의 관계를 맺었다더니, 생각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다. 그 옷을 보고 있자니, 제 기억 한 구석에 묻어둔 것이 끄집어내짐과 동시에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흩날리던 그 매화향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였다. 저도 모르게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저곳으로 가보았자, 자신이 보고 싶은 얼굴은 없을터다. 알면서도, 그저 그러고 싶었다. 이렇게 미련할 때가. 점점 가까워졌다 싶을 즈음, 문득 제 쪽을 바라보는 한 쌍의 매화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흩날리는 매화 꽃잎처럼 그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챙강!
그 아이가 들고 있던 검이 바닥을 데굴 굴렀다.
***
"…… 청명아?"
검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새어나온 얼떨떨한 목소리가 청명을 불렀으나, 정작 불린 상대는 그 상태 그대로 박제된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목소리도 멈춰 주변엔 정적마저 감돌았다. 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는 것도 기이했으나, 무려 '그' 청명이 검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지경이었다. 얼마나 검을 애지중지 하던지, 자신들조차 손대지 못하게 했던 검이 아닌가. 굳은 그의 시선은 한 군데에 박힌 체 움직일 줄 몰랐다. 절로 그 시선을 따라가보면, 청명처럼 바닥에 붙어 움직일 줄 모르는 사내가 보였다. 녹색 장포, 대충 틀어올린 머리카락과 크게 띄인 눈동자. 당가에서도 처음 보는 인물이였다. 오검의 시선이 다시 청명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청명의 표정은 꼭 '그 때'와 같았다. 그 때처럼 울음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진 않았으나 단단해보이던 그 표정이 무너지고, 그 속의 온갖 처절한 슬픔을 드러내고 있던 그 표정과 똑같았다. 덜덜 떨리던 턱이 천천히 움직여, 간신히 목소리를 울렸다.
"…… 당보야."
***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당보는, 제 이름이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동시에 믿을 수 없게도, 벼락처럼 찾아온 확신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 도사 형님."
한숨처럼 그의 호칭을 불리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저 눈빛을, 아름다운 매화를 몰고 다니며, 기어이 저마저 홀리게 만들어버린 그 모습을 내가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자신이 걸음을 딛기도 전, 땅을 박찬 그가 먼저 제게 달려들었다. 두 팔을 벌려 한참이나 작아진 몸을 냅다 끌어안았다. 언제나 든든하던 어깨가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소, 도사 형님. 제 속삭임에, 제 품으로 더욱 파고드는 그를 힘줘 끌어안았다. 나도. 작게 들려온 대답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
한참 운 덕에 따끔거리는 눈가를 쓸어내는 손길이 퍽 다정하다. 힐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믿기질 않아서 제 눈가를 쓸어내는 그의 손을 꾹, 쥐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그 무엇도 쉽사리 뱉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런 제 심정을 이해한다는 양 빙그레 웃음 지은 당보가 입을 떼었다.
"아까 화산 아해들의 표정을 형님이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요."
…… 이해하긴 개뿔. 울음기가 가라앉고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하니, 슬슬 골이 아플 지경이였다. 그를 냅다 품에 끌어안고 흐느끼기 시작한 건 제 잘못이였으나, 제 우는 소리에 놀라 달려오려던 이들을 피해 저를 냅다 들고 납치하듯 도망친 건 이놈 잘못이 맞았다. 기함하며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들이 아른거린다. 저와 이녀석을 쫓아오려드는 것 같았으나, 제 앞의 이가 누구인가. (제 성에는 안 찰지 몰라도) 일단은 암존이라 불리던 놈이였다. 자신이 열심히 키웠다고는 하지만, 옛날의 경지를 그대로 갖고 있는 녀석을 따라잡을 수 있을리가. 그래놓고 재밌었다 낄낄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 참 이녀석도 변한게 없구나 싶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님."
먼저 침묵을 깬 건 그 쪽이였다. 모처럼의 진중한 목소리라 성의없는 대답을 뱉어내는 대신, 그에게 힐끔, 시선을 두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진중한 눈빛이 저를 마주본다.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였는데, 너무 늦은 듯 하지만 받아주시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일은 한 적은 없다만."
"솔직하지 못하시긴…… 부탁을 전부 들어주신 걸 내 모를 줄 아시오."
킥킥 웃음을 터트린 그에 짧게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려버렸다. 그런 제 어깨에 묵직한 머리 하나가 툭, 기대왔다. 굳이 그것을 밀어내지 않은 체로, 애꿎은 바닥만 발 끝으로 툭툭 찼다.
"이제 앞으로가 더 중요해. 알잖아."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반짝 고개를 들고는 다시금 저와 시선을 마주쳐 온다.
"형님과 내가 있는데, 걱정할 것이 무어 있겠소."
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결국 웃음을 흘린다. 그래, 그렇지. 전장에서 역시 저와 손발에 잘 맞던 녀석이 아니던가. 은근슬쩍 제 손을 잡아오는 손길을 굳이 피하지 않은 체로, 마주 그의 손을 꾹, 쥐었다. 차갑지 않고, 사람다운 체온을 담은 그 손이 좋아서, 한참을 꽉 쥐고 서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제야, 다시금 자각한다. 정말로 그가 제 곁으로 돌아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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