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뭐 재밌는 이야기 같은 거 없어?
종전 이후 잼컨 찾는 청명이.
※ 25년 1월 아이소에서 판매 예정에 있는 단편집의 단편을 일부 공개합니다.
※ 화산귀환 1210화까지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심심해.”
지붕 위에서 멍하니 밑을 바라보던 청명이 뒤로 발라당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눈을 감으니 근처에서는 검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물론 사람 죽어가는 소리도 중간중간 들리기도 하지만, 여기가 전장도 아니고 화산인데, 기껏해야 수련 강도를 높인 것밖에 더 되겠나.
이번 여름은 꽤나 길더니, 어느새 가만히 누워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됐다. 몇 년 전 이맘 즈음에는 계절을 느낄 틈도 없이 바삐 살았었는데. 새삼스레 온몸으로 느껴지는 평화 속에서 청명만이 적응하지 못하고 괜히 몸만 연신 뒤척였다.
‘이렇게 심심해도 되는 건가?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뭐 하고 지내는 거지?’
다시 삶을 살게 되었을 때부터는 망해버린 화산을 일으키느라 바빴고, 겨우 이름을 다시 알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중원 곳곳을 다니며 닥친 일들을 해내느라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얼결에 천우맹의 총사가 된 이후로는 말로 할 것도 없었고. 그간 머리를 굴리거나 이리저리 움직이기 바쁜 생활을 오래 이어왔더니, 술이나 마시고 한량처럼 놀기만 했었던 것이 그저 전생 같았다.
‘응? 아, 그거 전생 맞지?’
아무튼.
전쟁 이후 뒷수습까지 얼추 마무리되었을 즈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천우맹은 이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도움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사대전과 정마대전까지, 연이은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렸기에, 청명 또한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분명히 이 지긋지긋한 일만 해치우고 나면 술이나 마시며 게을리 살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전생의 자신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았으며, 그 꼴을 평생 본 장문사형은 왜 그런 자신을 살려놓았느냔 의문만이 겹겹이 쌓여갈 뿐이었다.
당연히 청명이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쌓인 일이 끝나자마자 냉큼 일과의 이별을 고하고는 푹신한 침상 위를 굴러다니며 이게 얼마만의 휴식이냐며 희희낙락했었더랬다. 며칠 간은 내리 잠만 자다가 이것저것 먹고 지붕 위에서 햇빛 좀 쐬며 술 마시기를 반복했고, 화산 내에서 달리 즐길 거리가 보이지 않으니 장문인의 허락하에 은하상단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기를 몇 달째.
청명은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주어지는 자유 속에서 그가 할 일은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먹고 잠을 자거나 검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할 만한 게 없었다. 까마득하게 먼 옛날, 고생했다며 휴식 시간을 줬더니 자기들끼리 알아서 수련해대던 사형제들의 심정을 이제야 뼈저리게 이해하고야 말았다. 일하지 말라고 하니 되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물론 그새 심심함을 못 견디고 장문인전이나 재경각, 무각에서 괜히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일들에 슬그머니 참견하기도 해봤지만, 이 무료함을 완전히 풀어낼 정도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청명이 누구인가, 이제는 길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걸어가는 데에 도가 튼 인간이 아닌가? 재밌는 일이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탓.
언제 드러누워 있었느냐는 듯 지붕 위에서 폴짝 뛰어 밑으로 내려온 청명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저긴 비무 중이고, 저쪽은 기초를 다지는 중이니 내버려 두고.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핀 청명이 마땅히 불러낼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을 파악하고서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 그렇다고 화산 어딘가 절벽이나 숲에 있을 놈들을 찾으러 가기는 귀찮은데……. 그러던 중, 막 기초 수련에 쓰인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한 청자배 두 사람이 청명의 시야에 들어왔다.
찾았다, 내 심심풀이 땅콩!
저 둘이 다른 수련이나 비무에 들어가기 전에 누구보다 빠르게 그가 낚아채야만 했다. 청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청화 사형! 곽평 사형!”
“응?”
“둘 다 이리 좀 와봐!”
“갑자기 왜?”
“아, 빨리!”
보통 문파에서 막내 사제가 사형들을 오라 가라 명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지만 이곳은 화산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막내 사제는 청명이었다. 두 사람은 정리하던 도구들을 대충 내려두고서 청명에게로 뛰어갔다.
제 앞에 멈춰선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청명이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티 없이 맑고 시원해 보이는 미소였으나 하필이면 그리 웃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이었기에, 순식간에 불안해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식은땀만 흘렸다.
‘청명이 놈은 또 뭐가 문제지?’
‘입 열지 마십쇼, 사형. 까딱 말 잘못 하면 우리 둘 다 죽습니다.’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결국 얌전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정확히는 열리지 않길 바랐던 청명의 입이 열렸다.
“자, 이제 서로 죽여.”
아하, 말을 잘못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는 거였구나.
곽평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래도 나름 셋 중 배분이 제일 높은 청화가 용기 내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둘이서 내가 보는 앞에서 비무 하라고.”
청명의 앞에 선 이들은 전쟁에서도 맹활약했었던 그 대화산파의 검수들이 아닌가. 비무야 물론이고 여태까지 수도 없이 많은 생사결을 치렀다. 사형제끼리 검을 겨누고, 사숙들과의 단체전에 물과 절벽에서의 전투는 기본이요, 온갖 더러운 수를 다 쓰는 사파 놈들과 광기에 물들었던 마교까지 상대했단 말이다. 아차, 하면 목이 달아난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에게 고작해야 생사결에 가까운 비무란 특별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 비무를 청명이 주관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는 사형은 내가 친히! 바위 무게를 추가해서! 다음에는 이길 수 있게 아주 튼튼하게 단련시켜줄 테니까!”
드디어 이 무료함을 풀어줄 제물(?)을 찾았는데, 그 청명이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검 꺼내!”
……안타깝게도 말이다.
입을 쩌억 벌리고 늘어지게 하품한 청명이 제 배 위에 몸을 말고 누워있는 백아의 머리를 검지로 벅벅 긁었다.
“사형, 뭐 재밌는 이야기 같은 거 없어?”
“……네가 내려와 주면 생길 것도 같은, 아아악!”
흥, 청명이 코웃음 치며 어림도 없다는 듯 천근추를 운용해 무게를 늘렸다. 그가 누워있는 바위 아래서 우렁차고 시원한 욕설과 비명이 연신 들려왔으나 어쩐지 그걸 들으니 느껴지는 익숙함에 되레 마음이 편해질 지경이었다. 방금 두 눈으로 본 비무를 떠올린 청명이 버럭 소리쳤다.
“어디서 엄살이야! 보는 명자배 앞에서 꼼수를 부려. 비무에서 진 놈이!”
“지금 여기 보는 명자배 없잖아…….”
“쓰읍!”
비무가 청화의 패배로 끝나자, 청명의 갈굼이 이어질 것을 직감한 청, 백자배가 서둘러 구경하던 명자배 아이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나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자배에게 청화는 사숙일 텐데, 체면은 챙겨주어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청명이 유명하고 천하 제일인이라고는 하지만 배분 상 막내에 가까운 이에게 굴려지는 꼴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질들을 물리고 돌아와 벌칙(?) 받는 청화를 구경하던 청자배 중 한 명이 어째 구박받던 사제가 안쓰러웠는지 그를 변호하듯 말했다.
“우리 진짜 뭐 없다, 청명아…….”
“아니, 사형들이 나이가 몇 갠데 재밌는 얘기가 없다는 게 말이 돼? 하다못해 주워들었던 것도 괜찮다니까?”
청명만 해도 타지에서 술 마실 때 덤벼들었던 놈들 이야기를 해도 몇 주야는 꼬박 갈 것이다. 사문의 어른들 몰래 사고 쳤었던 이야기나 당보 놈과 여기저기 쏘다녔던 이야기를 하면 몇 주야도 부족할 지경이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녀석들에게 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청명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듣고 깔깔대고 싶었다.
“……청명아.”
“왜!”
“우리가 어디서 이야기를 주워들을 틈이 있었을까…?”
“응?”
청명이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우중충해진 채 산만 한 덩치를 구기듯 웅크린 청자배들이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한 거라고는 화산에 틀어박혀서 너에게 두들겨 맞으며 수련한 것밖에 없는데…….”
“……어?”
어째, 이게 또 내 잘못이네?
“청명아.”
오늘은 또 누구로 어떻게 재미를 볼지 고민하던 청명의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어딘가 비장한 표정의 백천이 제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장문인께는 내가 말씀드려둘 테니 혼자 서안에라도 다녀올 테냐?”
백천의 뜬금없는 제안에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서안? 물론 지금이야 화산의 속가인 화영문으로 서안 내의 영향력을 가져왔고, 화산과 천우맹에 우호적인 문파가 많다지만 청명에게 서안은 여전히 화산의 땅이라기보다는 몰래 술 마시러 가기 좋은 곳이나 은하상단에 비싼 술 얻어 마시러 가는 곳이란 생각에 가까웠다. 워낙 오랜 시간을 그리 지내왔기 때문일까.
“네 사형들 그만 괴롭히고 나가서 놀다 오란 소리다.”
“내가 언제 사형들을 괴롭혔다고 그래? 다 사형, 사숙들의 수련을 도와준 것뿐인데.”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하니 청명의 뒤쪽에서 청자배들이 입을 떡 벌린 채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안 그러냐, 사형들?”
청명이 뒤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 천진한 미소를 마주한 청자배들이 되레 허옇게 질린 낯으로 언제 고개를 저었냐는 듯 파들파들 떨리는 미소로 화답했다. 조용히 눈물을 쏟을 만큼 서럽고 억울했던 것은, 청명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청명이 패배한 이에게 내렸던 벌칙은 대부분 수련이나 검법과도 깊이 관련되어있고, 개개인에게 딱 맞는 정도의 벌칙을 그 청명이 가까이서 지켜보며 수행하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산제일검이자 천하제일검이라 할 수 있는 자의 가르침은 만금을 준대도 받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 잘 알지만, 어째서 눈물이 쏟아지는지 알 수 없었다.
봤냐는 듯 청명이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할 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백천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명자배들 상대로 청자배 중에서 누가 제일 잘 가르치느냐며 물어서 투표했던 건?”
“그래야 못 가르치는 사형 놈이 누굴 보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배우지!”
“아이들 보는 앞에서 갑자기 가르치던 녀석에게 날아들어서 검 휘둘렀던 건 뭔데?”
“아니, 그럼 기습하는 놈이 기습할 거라고 외치고 기습하겠어? 전쟁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여태 가르친 게 있는데 그걸 못 받아치면 어떡해? 검 내려놔야지.”
죄다 나름대로 그리 한 이유가 있었다는 청명의 반박이 이어졌다.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백천이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자, 청명이 뻔뻔하게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하여간 나는 이렇게 강호의 후배들을 잘 키워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데 사숙은 날 저 차갑고 냉정하고 무자비하고 컨텐츠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밖으로 내놓을 생각밖에 안 하고.”
“청명아, 컨텐츠가 뭐냐?”
“조용히 해.”
급기야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는 시늉까지 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스운 꼴을 보고도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백천이 입을 뗐다.
“청명아. 그러면 수련 마치고 한잔 걸치려던 청자배 녀석들의 술을 명자배 아이들 보는 앞에서 가져간 건 왜 그런 거냐?”
“어?”
“네 말대로 이제까지 네가 벌여온 일은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 그럼 술을 가져간 이유도 있을 거 아니냐.”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아무리 그래도 화산은 도문인데 명자배 애들이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술맛을 알게 되면 어쩌겠어. 내가 다 애들을 생각해서 그런 거 아냐! 어디 청정 도량에서 술을 마셔, 확 그냥!”
“네가 제일 많이 마시거든…….”
그리 대꾸하면서도 백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고개를 으쓱이며 슬쩍 넘어가려던 찰나, 납득한 줄로만 알았던 백천이 물었다.
“그러면 그 술은 어디 뒀느냐?”
“……응?”
“네 말대로 아이들이 술맛을 보지 않게 하려고 네가 대신 술을 치워준 거라고 치자. 그렇다면 아이들이 가고 난 뒤에 돌려줬어야지. 그런데 내 귀에는 네가 술을 가져갔다는 것만 들리고 돌려줬다는 소식은 안 들렸거든.”
그 술은 청명이 아주 잘 보관해두다가 얼마 전 보름달이 뜬 날 밝은 밤하늘을 벗 삼아 아주 잘 마셨다. 이미 마시고 없는 술을 이제 와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놓으려면 청명이 쟁여두었던 제 술을 넘기는 수밖에 없는데, 하늘이 두 쪽 난대도 그것만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당초 청명이 뜯어간 술을 돌려줬으면 그게 청명인가? 청명의 껍데기를 쓴 무언가지.
“어, 음…….”
진짜 더 변명할 만한 게 없는데. 청명이 두 눈을 이리저리 빠르게 굴려대며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틈을 타, 백천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몰아붙였다.
“그리고 애초에 말이다. 명자배 아이들이 백자배나 청자배 녀석들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벌써 서로 죽이는 시간이냐면서 헐레벌떡 뛰어가서 구경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 줄 아느냐?”
“어…….”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청명이 싸움을 붙여놓기만 하면 구경하러 뛰어오는 녀석들이 늘어났던 것도 같다. 설마 그렇게 불리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저질러 놓은 짓이 있으니 차마 뭐라 더 투덜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기는 싫었던 청명이 눈을 데굴데굴 굴려대다가 슬그머니 주제를 돌렸다.
“어……, 그런데 상단주님이 부르신 것도 아니고, 화영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서안이야? 종남 애들 만날지도 모르는데.”
물론 지금이야 종남이 화산에 진 마음의 빚이 없진 않으니 예전처럼 그에게 냅다 시비를 걸거나 달려들지는 못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청명 또한 먼 옛날과 같은 마음으로만 종남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만나더라도 걔네가 뭐 어쩌겠냐, 네가 천우맹의 총사인데. 걔들도 이제 너한테 뭐라 못 할걸?”
“사숙이 몰라서 그러지, 걔네는 예부터 좀 집요한 면이 있었단 말이야. 내가 걔네 두들겨놔서 다시 사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별 상관없지 않나? 그래봐야 종남인데.”
“…….”
“응?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쟤를 정말 차기 장문으로 올려도 될까? 지금이라도 장문인과 태상 장문인을 찾아가 다시 생각해봐달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만약 진가 두 놈이 각 문파 장문의 자리에 오르는 날이 오면 각종 전쟁을 치르며 그나마 회복됐던 화산과 종남의 관계가 다시 개박살날 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분명히 개박살날 것이다. 서안에 갈 때는 가더라도 저 양반을 장문 자리에 앉히는 일만큼은 막아서고 가야 하지 않을까?
“뭐 언제는 어디 나가서 안 보일 때 속 뒤집어놓지 말고 화산에나 있으라며?”
“……지금은 네가 화산에 있는 게 제일 속 뒤집힌다.”
허옇게 질린 듯한 낯으로 백천이 손을 들어 제 가슴께를 꾹꾹 눌러댔다. 청명은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의도했건 아니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니니 어차피 사고를 칠 거라면 시야에 닿는 곳에서 치라는 의미로 했던 말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사고를 친다면 금방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때는 녀석이 제 일을 마치면 금방 사라질 것처럼 굴지 않았나.’
그래서 그때는 일부러 그리 말했었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라도 목표를 이루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감출 것만 같던 청명이 어느 순간부터 점차 땅에 발을 딛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본디 사람이 새로운 목표나 해본 적 없는 일을 시작하려면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것이 모든 일의 첫걸음 아니겠는가. 그들이 보기에 청명은 전쟁 없는 삶을 살아가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 완전히 종전을 맞이한 지금, 청명이 화산에서 벌이는 온갖 소란들에도 백천이나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에게 하지 말라며 말리거나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을 윗 배분에 말을 옮기는 일이 없었던 것 또한 이런 이유로 암묵적으로 넘어가던 것에 가까웠다.
“뭐야? 아직 덜 뒤집힌 것 같은데? 더 뒤집어줘?”
“……청명아.”
“아, 또 왜!!”
우리 사질 새끼, 목청도 좋지.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갓 입문한 명자배 아이들 입에서 ‘서로 죽여라’란 말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장문인뿐만 아니라 태상 장문인께서도 노심초사하신다더라.”
…더 이상 조용히 넘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였다. 꽤 오래전부터 드문드문 나왔던 이야기였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청명을 홀로 밖에 내놓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박에 백천은 도리어 무언가 해답을 찾은 듯했다.
청명은 화산을 경애한다.
이 사실을 모를 화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아마 화산뿐만 아니라 천우맹의 모든 사람이 다 알 테지. 하지만 그게 청명이 화산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청명도 그렇고 다른 이들 모두 청명이 화산 내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어떤 것은 익숙한 환경에서만 찾기보다는 오히려 낯선 환경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백천이나 당소소가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 화산에 오고 난 뒤에야 좁았던 세상이 부서지고 많은 것을 겪으며 성장할 수 있었듯이.
청명이 계속 버티니 백천으로선 결국 비장의 패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청명은 예로부터 현, 운자배에게 약했고, 권력에는 더더욱 약했다. 워낙 온몸으로 요란스레 규칙이란 규칙은 다 부수고 다니다 보니 잊을 때가 많지만, 청명은 어린 나이에 안 어울리게 꼰대스럽다고 여겨질 정도로 문파의 위신과 자라나는 아이들은 제법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천의 입에서 장문인과 태상 장문인,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걱정이 튀어나오니 청명의 뻗대던 자세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화산은 검문이고, 또 무학을 익히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라지만 그 전에 도문이 아닌가. 아이들의 정서에 영 좋지 않은 모습만 보이니, 태상 장문인과 장문인의 입장으로는 문파와 어린 제자들 걱정이 태산 같을 법도 했다.
무어라 대꾸를 해보려던 청명이 연신 입술을 옴짝달싹하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가 놓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뜯듯이 벅벅 긁었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가 느껴지는 한숨을 길게 뱉은 청명이 버럭 소리쳤다.
“아, 아오, 알았어! 다녀오면 될 거 아냐, 다녀오면! 서안 갈 거니까 사숙이 알아서 장문인께 말씀드려놔!”
……청명의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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