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생환 (完)

생환 - 6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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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기절하듯이 잠에 빠진 청명을 본 지 몇 시진이 지났을까. 그리 오래 잘 거면 푹 쉬기나 할 것이지, 청명은 잠에서조차 바쁜 사람처럼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어느 순간에는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주먹을 꽉 쥐고 신음을 흘리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는 숨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평온히 잤다. 당보는 우습게도 청명이 평온히 자는 모습이 더 두려웠다. 차라리 그가 요란스레 자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한 당보의 눈꺼풀이 떨렸다.

‘나도 나이를 헛먹었어.’

못난 자신을 탓하며 자조에 빠지던 찰나, 등 뒤로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보가 천천히 뒤를 돌자, 화산의 삼대제자이자 대사형인 이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래, 너는…”

“삼대제자 윤종이라 합니다. 제 사제가 이곳에 있다고 하여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옆에 자리하여 함께 사제를 돌봐도 괜찮겠습니까.”

지극히 공손하고 고요한 태도였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가 문득 생각이 나 들른 사람처럼 구는 모습에 당보가 입꼬리를 올렸다. 일찍이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음을 알아챘던 당보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윤종 안에 깃든 초조함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화산은 어찌 이리 능청스러운 이가 많이도 태어나는지.’

땅이 좋은가. 언제나처럼 흐릿한 그리움에 잠기며 당보가 물었다.

“장문인께서 보내셨느냐.”

당보가 청명을 업고 화산으로 돌아왔을 때, 현종이 둘을 가장 먼저 맞이하였다. 새하얗게 질려 성치도 않은 몸을 움직여 급하게 다가오던 현종의 눈에 순간적으로 서리던 의심에 당보는 괘씸함보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타당한 불신이지 않은가. 당보는 헛웃음을 삼켰다.

‘현종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무슨 죄를 지을 뻔했던 건지.’

현종이 직접 청명을 돌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화산에 횡액이 닥친 상황에서 장문인인 그가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었다. 당보가 청명을 돌보겠다고 하자 현종은 우선 수긍하였다. 그래도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을 테다.

그러나 당보의 추측과 달리, 윤종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 의지로 온 것입니다.”

장문인의 입장을 배려한 거짓인지, 아니면 저 거짓말 하나 못할 것 같이 현기 넘치는 표정을 지닌 자답게도 진실인지 알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당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 사람이라면 누가 옆에 있든 상관도 없었거니와 애초에 청명은 화산 사람이니 외부인인 당보가 그 옆을 지키는 걸 막는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윤종은 그저 당보의 위치를 존중해 형식적인 허락이나마 받고자 했을 뿐이다.

“그래, 이리 와 앉게. 고생이 많군.”

“사천당가에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그래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화산의 대제자로서 감사드립니다.”

몇 번 속 빈 대화들이 오가는 내내, 윤종의 시선은 청명에게 가 있었다. 이따금 예의를 지키느라 당보를 바라보긴 했으나, 그때마저도 그 고개 방향만은 청명을 향하고 있었다. 태도는 조용한데 말 없는 걱정이 요란한 게 청명이 현재의 화산에서 보내온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갈수록 당보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어디로…”

조용히 자던 청명이 곧 앓는 소리와 함께 잠꼬대를 흘렸다. 이제 곧 비 오듯 땀을 흘릴 모습이 뻔해서 당보가 익숙히 마른 천과 젖은 천 두 개를 준비하자, 옆에 다가와 그 준비를 돕던 윤종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청명 사제가 처음 화산에 왔을 때, 매일 악몽을 꾸는지 잠꼬대가 잦았습니다.”

“…….”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으나, 막을 생각은 들지 않아 당보는 계속해서 손만 바지런히 움직이며 귀를 기울였다. 윤종이 말을 이었다.

“화산에 막 입문한 이들에게 종종 있는 일이긴 합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 특히나 입문 전 불행히 살아온 아이들은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그러한 제자들은 입문 전에 쌓아두었던 곪은 감정들이 해소될 때까지 험한 잠버릇을 보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의 평화에 동화되었다. 윤종도 사숙이 양보하여 건네주는 반찬 하나에 놀라지 않을 무렵, 꿈에서 굶주리는 일이 줄어들었던 것처럼.

그러나 청명은 그 잠버릇이 유달리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비슷한 입문 시기를 거쳤던 윤종인 지라 더욱 예민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청명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여러 달이 지나도 그 증세가 나아지지를 않아, 결국 무슨 꿈을 꾸길래 그리 힘들어하냐고 물었습니다.”

윤종이 물었을 때 청명은 눈을 크게 떴다. 윤종이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 놀란 것 같진 않았다. 놀란 양을 하던 청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어깨를 으쓱였다.

-기억은 안 나는데… 그렇게 시끄러워?

그가 감춰온 속내를 들으려던 윤종은 그럴 줄 모르고 오직 멋쩍어만 하는 청명을 보며 깨달았다. 청명은 제 힘듦을 몰랐다. 다만 해결할 만한 문제가 있으면 그를 고칠 줄만 알았다.

이번에도 그러하였다. 곧 청명은 지나칠 정도로 수련에 빠져들었다. 다 같이 하는 수련 외에도 추가로 개인 훈련을 하고 돌아오면 완전히 곯아떨어져 숙면하는 탓에 불안한 잠꼬대가 사라졌다. 제 잠이 불편한지도 몰랐던 게, 윤종의 말에 과한 해결책을 찾아놓곤 이제 됐다고 여겼다.

그때부터 윤종은 차마 청명 앞에서 허투루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법만을 아는 사제입니다.”

짧게 이야기를 갈무리한 윤종이 당보를 직시했다.

힘이 들어간 어깨, 꽉 쥔 채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 미약한 반발심이 담긴 눈. 당보는 그제야 윤종이 어째서 제게 이러한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삼대제자라 모를 줄 알았거늘, 당보가 청명을 죽이려 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듯 보였다.

“뒷사정을 아는군.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게냐?”

“당일에 보았습니다. 엿보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소란이 커 저절로 발걸음이 향했던 탓에…”

청명이 입문했던 날이자 당보가 청명을 죽이려 했던 날을 뜻하였다. 당시엔 감정이 격해져 오직 앞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던 탓에 윤종의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때에는 청명을 향한 반감을 세상에 숨길 생각조차 없긴 했다.

“그런데도 사제로 받아들였느냐?”

그렇다면 윤종은 마교니 뭐니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었을 텐데도, 청명을 평범한 아이로 대하고 그를 걱정해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간이 지나 마교의 악명이 다소 잦아들긴 했다마는, 화산과 당가만은 잊지 않고 그들의 위험성을 꾸준히 제자들에게 피력해왔다. 그 화산의 어린 대제자가 마교와 엮여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 또래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했다니.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오히려 꿈같은 얘기 아닌가.

윤종이 아랫배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과거는 더 나아지기 위한 발판에 불과합니다.”

화산에 오기 전, 윤종도 착하다고 일컬을 수 없는 아이였다. 빵 하나를 필사적으로 쥐며 그 부스러기 하나 다른 이들에게 뺏기지 않으려 아집을 부린 적 있다. 누군가의 전낭을 보며 힘만 있다면 그를 강제적으로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 염원한 적 있다.

하나. 윤종은 달라졌다.

“과거만으로 현재와 미래를 판단하려고 든다면 세상에 어찌 변화가 찾아오고, 어찌 선이 퍼지겠습니까?”

길거리 더러운 아이라는 틀 하나로 윤종을 재단하지 않았던 손길이 있었다. 그렇기에 윤종은 바뀌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성장할 수 있음을 윤종이 증명해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청명은 화산의 제자입니다.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윤종의 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과거 일이 어떻게 밝혀지든 간에 청명을 해치지 말라는 단언이었다. 경고이자 부탁이었을 테다. 그러나 당보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과거의 청명으로 현재의 청명을 뒤흔들지 말라.

‘형님….’

그렇다면 당보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당보는 청명에게서 과거를 본다. 그러나 현재의 화산은 청명에게서 미래를 본다. 무엇이 청명을 위한 일인가?

당보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환 - 6

하루가 꼬박 지난 뒤에야 청명이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윤종을 마주한 청명이 물었다.

“사숙조는…”

“사숙조는 괜찮으시다.”

그렇구나. 청명이 바로 안도를 흘렸다. 아직도 만인방을 향한 분노가 가시지 않으나, 그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으니 들끓던 고집만은 가라앉았다. 곧 청명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누구를 찾고 있는지 가늠한 윤종이 대답했다.

“암존 어르신께서는 아직 화산에 계신다. 이상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셨으니 내가 전하러 가마.”

“아니야. 내가 갈게.”

청명이 한 번에 몸을 일으켰다. 훤히 드러난 상체가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어깨까지 심한 상처를 입은 게 보이는데도 몸 움직임이 가볍고 자연스러워서, 옷을 입었더라면 어디가 다쳤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윤종이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청명아. 네가 사과해야 할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겠지. 장문인께서 많이 걱정하셨다.”

윤종의 꾸짖음에 청명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윤종은 올곧은 시선은 청명을 따라갔다.

“다른 문제는 다 차치하고서라도, 네가 그리 떠났음을 알았다면 사숙조께서는 어떤 심정으로 치료받으셨겠냐. 아니, 치료를 받기라도 하셨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분명 이 괘씸한 사제놈은 제게 사과할 이유는 찾지 못했을 테다. 그를 걱정하느라 윤종 또한 속이 꽤 불편했건만, 그 마음 알아줄 놈이면 윤종이 이러한 말을 할 일조차 벌이지 않았겠지. 그래도 어쨌든 제 잘못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는 모양이니, 윤종도 가벼이 말을 마무리하였다.

“너도 화산이라는 사실, 그리고 너만 화산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 알면 됐다.”

“그래.”

짧게, 그러나 진지하게 대답한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도복을 대충 위에 걸치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완전히 나서기 전, 윤종을 향해 고개 하나 돌리지 않은 채 무어라 급히 말하고선 밖으로 나섰다.

“고마워, 사형.”

급하나 뚜렷한 목소리를 들은 윤종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뻔히 멀리서도 들을 이를 위하여 대답하였다.

“그래.”

* * *

청명이 찾던 이는 낙안봉에 서 있었다. 당가 사람이 제 집처럼 화산을 누비는 모양새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어스름한 밤에 늘 고집하는 듯한 녹색 장포까지 입으니, 바위에 거목이 그려내는 거친 그림자 닮아 뜻밖에도 제법 어울렸다. 그 옆으로 다가가 선 청명이 물었다.

“뭘 보고 있,”

는 거냐고, 물으려던 청명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휘청거리는 몸체를 보고 말을 잃었다. 정말로 놀란 듯 그대로 삐끗한 이가 저 너머로 떨어지려는 모습에 청명이 당황하여 바로 손을 뻗어 상대를 잡았다. 참 불경하게도, 잡은 곳이 하필 멱살이었지만.

“아니, 왜 이런 걸로 그렇게 놀라! 당신 암존이잖아!”

“도사 형님이니까! 그러니 이리 다가올 때까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지!”

낭떠러지를 향해 상체가 한껏 기운 채로 당보가 억울하다는 듯 외치자, 제법 진지하게 다가간 보람도 없이 분위기가 가벼웠다. 어이가 없어 청명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를 마주하고 있던 당보도 입가가 꿈틀거렸다.

“좀 당겨주쇼, 떨어질라.”

“그러죠, 뭐.”

그대로 당보를 주욱 잡아당기자, 아슬하게 바위에 닿아있던 발이 안정적으로 그 위에 착지했다. 당보가 후,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며 청명이 잡아 구겨진 옷을 손으로 당기며 폈다.

“하여간, 사람 좀 그만 놀라게 하쇼.”

“언제 그리 놀라게 했다고.”

“사람이 변하는 게 없어, 변하는 게…”

“아, 그래서 그거 말인데요.”

원하던 주제가 나와 청명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누구죠?”

“…짐작 가는 게 없소?”

“있긴 한데, 함부로 내뱉기엔 민감한 문제라서.”

틀렸다면 기사멸조에 가까운 발언일 테니 함부로 입에 담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화산이 지켜온 전통에 대해서는 늘 엄격한 그를 모르지도 않는 터라 당보가 대신해서 깔끔히 말해주었다.

“검존 맞지. 매화검존 청명.”

“그것참.”

청명도 어느 정도 예상하던 정체였지만, 막상 진실이라 들으니 참 난감했다. 정체 없이 드는 감정에 위화감은 느껴도 거부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 제가 실은 다른 인물이었다고 한들 반감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 매화검존이라니.

‘족보 개판이네.’

청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제가 누구인지는 알았으니 속은 시원했다.

“확실하긴 한 거죠? 사술 때문에 제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거라든지.”

“…내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았소. 기억나는 거 말해보쇼.”

“이번에는 이길 거요, 아, 이 미친 말코야, 악, 항복, 항복했는데 왜 때립니까. 이 정도?”

“아니, 기억해도 왜 그런걸!”

당보가 과장되게 머리를 싸매며 주저앉자, 청명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것도 있긴 한데.”

“됐소, 또 뭔 소리를,”

“정신이 붙어있는 한 찰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던가.”

그만하라고 외치며 부산스레 굴던 당보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소란이 가라앉고, 곧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진짜… 정말로.’

고개를 든 당보의 눈에 청명이 들어왔다. 당보가 기억하던 것보다 작고, 마르고, 무위도 떨어지고, 내력이 부족한 이지만…

“가짜라면… 마교 놈들이라고 해서 자기들이 보지도 않은 기억을 억지로 만들어 넣을 수는 없을 거요.”

아직 평화로웠던 시절. 울분을 삼키느라 뒤틀려버린 채 딱딱히 굳은 검존의 얼굴이 되기 이전, 청명이 곧잘 짓던 표정을 그대로 간직한 어린 청년이 당보의 말을, 다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끝끝내 하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듯, 다시 돌아온 혼이 당보 앞에 서 있었다.

일그러진 당보의 얼굴을 내려다본 청명이 한숨을 내쉬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빌어먹을 말코야, 몸 좀 그만 험하게 쓰쇼.

-고칠 수 있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사람을 몹시 아끼고 믿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러한 애정 어린 신뢰가 처음부터 가슴에 박혀있어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데도 그를 미워하지도, 경계하지도 못했다.

청명이 혼잣말을 던지듯 읊조렸다.

“내가 기억하는 당신의 말과 행동이 너무 많아.”

“…….”

“나 자신보다도 당신을 더 알 지경으로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당보가 재촉했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턱을 괸 채로 잠시 침묵한 청명이 곧 입을 열었다.

“과거의 내가 될 순 없어요.”

당보의 손이 움찔 떨렸다. 당보가 떨리는 손끝을 간신히 말아 쥐며 경쾌한 어조를 가장했다.

“본래 인간은 생 내내 변하지 않소. 물론 이건 아예 생 자체가 바뀐 수준이지만, 그래도 많은 게 달라졌다고 한들 내가 다르게 볼 일은,”

“그 검존 청명이 되어줄 순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

청명을 바라보던 당보가 시선을 떼어냈다. 그제야 청명이 당보를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밤공기 안에 잠긴 낯선 남자를 응시했다.

“다른 사람이에요.”

어림짐작했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아 불안했던 이야기가 끝끝내 흘렀다. 당보는 반사적으로 반발하려 입을 열었으나, 튀어나오는 말이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당보의 입이 다물렸다.

“당신이 아는 나는 내가 모르는 나잖아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원하는 대로 흉내 내면서 살아갈 순 없잖아요.”

나지막한 어조는 위로를 담았으나 내용은 명정한 만큼 잔혹하였다. 당보는 울컥함을 간신히 억누른 채 목을 긁듯 말하였다. 쇳소리가 흉하고 간절했다.

“깨달았으면서도, 그대로 남겠다고…?”

“이 기억, 그리고 감정들을 없어야 할 것 취급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과거의 기억을 이어주길 기대하진 말란 이야기예요.”

당보는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마주했다. 그는 지금… 그가 제게 무엇을 포기하라고 종용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뼈저린 고통에 숨쉬기 힘들 때마다. 감정이 이는 모든 순간, 그 매 순간에 당보가 가장 먼저 찾던 사람이 있었다.

피나는 수련을 통해 새로이 비도술을 익혀 찾아가면 안 그런 척 잔뜩 신이 나 저를 상대하고, 마침내 가문에서 제 존재를 인정하여 다시 불러들였을 때 얼른 가라고 등을 밀어주고, 당가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면 뭘 또 혼자 생각하고 있냐며 툴툴대면서도 술잔을 건네 서툰 위로를 건네던 사람.

누구도 온갖 이유로 당보 옆에 서지 않았을 때, 당보 옆을 지키던 그 유일한 사람을…

‘포기하라고.’

과거 일들은 다시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절 지녔던 희비는 오로지 그 순간의 것.

저와 같은 시간을 살아 동등했기에 타박과 농지거리를 건넬 수 있었던 그 한 사람은 이제 없다. 그 시간은 사라졌다. 그건 지금, 이 순간, 설사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 되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청명은 그가 지금 제게 무엇을 포기하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나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깨달음을 괴로이 새기는 당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옆에 자리한 이의 어깨가 떨리는 걸 본 청명이 가만히 제 손을 당보의 등 위에 두었다. 작은 온기에 당보가 슬픔을 토해냈다.

“기다렸다며.”

“아.”

그게 꿈이 아니었구나. 하긴, 꿈을 기억해본 적은 없었다. 기억에 남았으니 꿈이 아닌 짧은 현실이었구나. 깨달은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죠.”

“그런데도… 지금 당신은. 청명은. 슬프지도 않아?”

“슬프죠.”

청명이 희미한 웃음으로 답하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를 지배하고 있던 이유 모를 감정들이 오늘도 제 생각을 잡고 뒤흔들었다. 지금도 상처받은 상대에 오히려 제가 상처받아 가슴이 죄였다.

그럼에도.

“근데 어찌 그런 말을 해….”

“당신을 착각 속에 살게 둘 순 없으니까.”

불완전한 진짜를 억지로 기워 내보이는 건 제게도, 상대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그건 나도 모르는 내 일을 인질 삼아 당신을 부리는 일이 되고 말 테니까. 그렇기에 제 가슴을 죄는 모든 감정을 이기고서라도, 청명이 서로를 위해 일찍이 짚어둬야만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더는 이 기억들에 휘둘릴 순 없어요. 나는 이 통증을 이겨내고 나아가야 하니까.”

청명이 들고 온 검을 꽉 쥐며 앞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 세상이 가득하다. 드넓은 세상 속에 온갖 뜻들이 섞여 흐른다. 열망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 협의로 검을 든 이들을 좋아한다는 건 늘 목숨이 위험한 이들에게 마음을 써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늘 변한다. 격동하는 세파 속에서 더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뿌리를 단단히 하되 가지는 더욱 뻗어 나아가야만 했다.

“이젠, 절대 무엇도 잃지 않을 거예요.”

당보는 제 얼굴 가린 손가락 사이로 청명의 눈에 서린 결의를 보았다. 과거 그때처럼 단단하여 가히 한결같다고 착각할 만한 눈인데, 닥친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 젓는다. 가슴을 파고드는 뼈저린 외로움에 당보가 청명을 따라 세상을 보았다.

‘나도, 당신이 지키던 사람인데.’

그러나 이제는 그리 보이지 않겠지. 청명이 이전에 비해 약해져 돌아왔으니 지키고야 말겠다고 생각했을 때 진작 알아야 했는데. 이제 자신은 청명에게 다신 지켜질 수 없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다짐해버렸다. 이제야 깨달아서, 이제야 아팠다.

당보의 머리 위에 달빛과 함께 옛 기억이 드리워졌다. 더는 싫다고, 어차피 다시 찾아오지도 않을 거라면 생각나지나 말라고 역정 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집요히 따라붙은 기억은 기어코 떠오르고야 말았다.

당보가 오랜 가출을 끝내고, 당가의 부름을 받아 직위와 자리를 인정받을 때의 이야기였다.

“당가놈이 당가로 가는데 나한테 보고는 왜 해? 미쳤냐? 내가 너희 가문 사람이야?”

“이 도사는 같이 지낸 정도 없나! 눈물까지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꿨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빨리 가기나 해.”

“그래, 간다 가! 이 인간아! 나 간다!”

당가로 간다고 하여 이제 다시 못 볼 것도 아니건만, 어쩐지 이 화산에 그를 혼자 두고 떨어지는 일이 영 내키지 않았다. 화산이 그의 보금자리임을, 화산에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화산에 그가 바라는 것들이 많음을 아는 데도 괜스레 혼자 두기 힘든 건… 그가 화산에서 제법 외로운 검수임을 알아서였다.

그 외로움은 당보가 당가에서 숱하게 느꼈던 감정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당보는 인정받지 못해 외로웠고, 청명은 인정받아 외로웠다. 이제 당보는 인정받기 위한 첫발을 뗐다. 가야 할 방향도, 목표도 명확했다. 그러나 청명의 외로움은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와야겠다. 그리 결심하며 발을 막 뗐을 때, 마중 나온 청명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빨리 돌아올 생각은 말고, 가서 제대로 봐.”

“네?”

“당가를 더 낫게 만들 거라면서. 그러면 거기에 집중해야지. 어디서 한눈팔려고, 확.”

청명이 당보의 뒤통수를 때리려고 하자, 당보가 히죽대면서 바로 검집을 피했다.

“한두 번 피합니,”

“누가 거기 때린대?”

그대로 발끝으로 콱하고 차인 정강이에 당보가 악, 비명 내지르며 한쪽 무릎을 굽혀 안아 손바닥으로 제 정강이 위를 연신 문질렀다. 치사하게 검수가 검도 안 쓰고…. 당보가 툴툴대자 청명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선순위가 뭔지 파악해.”

청명의 말은 길지 않았으나 명정했다. 짙은 눈 안 가득 담긴 진심에 당보의 머리가 맑아졌다. 온갖 잡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청명의 현기에 당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인사했다.

“그리 말 안 해도 그럴 겁니다!”

“…….”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아 다시는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때 얻은 이해는 잊히지 않고 이어져 온다.

청명과 당보는 서로 상처를 돌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이 아니었다. 서로가 품은 뜻을 이해하고, 그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청명은 화산의 제자입니다.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당당히 말하던 그 삼대제자처럼 모두가 청명을 신경 써 대하고 있다면야, 이제 그도 더는 외롭지 않겠지. 과거에 가졌던 시선에 기대어 강제로 그를 외로운 사람으로 바라보아 이전처럼 대할 수는 없다. 억지로 과거의 틀에 현재의 그를 꿰맞춰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드디어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신 당보가 손을 내렸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청명을 마주했다.

“…그리하죠.”

청명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보가 어떤 심정으로 겨우내 동의했을지 모를 이의 망설임 없는 대꾸에 당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당신에게 모르는 기억대로 살아가라고 강요할 수 없듯이, 나 또한 있는 기억을 없는 것처럼 잊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잖습니까. 그러니 둘만 있을 때는. …예전처럼, 대해도 괜찮겠습니까?”

조건을 덧붙이는 당보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잔뜩 서려 딱딱했다. 잠시 생각하던 청명은 곧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가벼운 대답이었으나, 눈빛만은 검존의 것을 닮아 선명했다. 당보의 말을 가벼이 여긴 적 없었고, 그렇다고 제 뜻을 굽히지도 않았다. 다른 얼굴을 가졌는데도 이다지도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실로 혼의 존재를 믿게 된 당보가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것조차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겠소.”

당보가 흘린 말에 청명이 무슨 뜻이냐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당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선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청명.”

청명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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