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무언의 실토

묵음의 실토

* 화산귀환 2차 창작 조각글입니다.

* 독백 형식의 NCP 단편글입니다.

* 임소병이 청명의 정체를 깨달은 후 사색합니다.


대개 비밀은 밝혀진 후에야 그간의 비정상성을 인지하기 마련이라.

아무래도 청명 도장이 매화검존인 모양이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늘어놓아도 이만큼 편의 좋게 마련된 가정이 없다. 특정한 가능성 만이 모든 모순의 근거가 된다면 그 가정이 바로 진실이어야지.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매화검존이 중원에 다시 강림하셨다! 백여 년 전부터 정파에 내리 이어진 이기주의 정신이 드디어 만천하에 까발려질 절호의 기회다!

뭐어.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풀리면 나야 바랄 것도 없지. 오히려 고소해 죽겠다고 전국 산채에 명을 내려 매화검존 환생 소식을 퍼트리면 재미나 좀 보겠다. 문제는 지금이 중원 전체를 장기판으로 삼은 전쟁 중이라는 사실 정도?

화산검협 청명이 쌓아 올린 업적은 가히 칭송할 만 하다. 기재가 따로 없다. 그 자체로 이미 무신이다.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을 구하려거든 구름 위 신선 중 하나를 끌어와 앉혀야 한다.

이제 여기서 주체를 매화검존 청명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감투는 태평성대에나 대접받지. 난세엔 좋게 쳐줘야 희생양의 낙인일 뿐이다. 왜 모두를 구하지 못하느냐,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느냐. 현재의 책망은 나아가 곧 과거의 행보까지 들쑤시는 쇠꼬챙이의 형상을 띤다. 왜 모두를 구하지 못하였느냐,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였느냐. 위로 한 문장만 더 추가하면 딱이군. 왜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

별로 색다를 것도 없나. 어차피 영웅이란 본디 가장 맨 앞에서 칼을 맞는 자를 아름답게 포장한 허울이지. 저 인간을 봐라. 이미 알아서 사지를 걷는 양반에게 내가 과거의 죄업까지 얹어주라고.


도장. 그거 압니까? 새로이 탄생한 영웅은 난세의 빛으로 숭상받지만 이미 한 번 타버린 영웅은 퇴장할 시기를 잃은 이방인일 뿐이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네. 댁은 마치 생존이랑 속죄를 동의어로 쓰는 천치처럼 군단 말이올시다. 목숨이 속죄가 끝나면 사라져도 되는 소모품인 줄로 아는가?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니까.

댁이 그만치 기를 쓰고 송장 취급 안 해도 이미 인생은 고된 지겁의 연쇄야. 댁 정체만 해도 봐. 한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 지금 와선 치부가 될 뿐이라니. 죽음까지 포함해 숭상 받는 영웅은 이래서 무덤을 기어 나오면 안 돼요. 새로이 위대한 업적을 쌓고 죽어야지만 후대가 다시 대접 해줄까 말까잖아.

그러니까 뭐 하러 다시 살아났습니까. 얼마나 좋은 꼴 보겠다고 미련하게스리.


이 정보는 교섭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버림패다. 청명 도장과 척을 질 일이 아니라면야. 생각해 보자. 내가 사실을 안다 밝히면 그쪽은 어떻게 처신할라나? 

그래봤자 인생 다 산 늙은이처럼 궁시렁거리는 꼰대 짓도 버리지 않을거고. 전쟁과 난세에 기묘할 정도로 밝은 지식을 함구하지도 않을 인간이. 내가 아는 체를 하면 잠깐 기껍기야 하겠지.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를 더 편히 여길 수도 있어. 아니면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를 더 경계할 수도 있고.

전장이란 고작 한 치 더 나간 검에 목숨을 빼앗기는 장소요. 아는 척 좀 한답시고 괜히 마음 쓰일 일 만들 필요가 어디 있나. 고작 작은 호기심 따위가 승리보다 우선될 일은 예외라도 존재치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저 필요 불가결한 이치이다.

하여 비밀은 묻어두기로 하자.

알겠습니까? 굳이 입방정을 떨어 그쪽이 존재의 모순을 고민하고 감추려 드는 만약의 경우는 만들지도 않겠다는 말이라고. 하니 쓸데없이 꽁꽁 숨기지 마십시오. 문고리 걸어 잠그되 침범에 부산스레 굴지 마십시오. 도장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곁에 둔 이들에게 매화검존의 자취를 남기면 됩니다.

적어도 당신을 가장 먼저 눈치채는 새 시대의 사람이 나는 아니어야지. 논리적으로 천기를 파헤친 계산속보다 당신 자체를 끔찍이 아끼는 화산의 사람이어야 맞지. 알다시피 내가 산적 출신이라 명예롭게 죽은 정파 영웅에게 느낄 부채감이 있을리 만무하다만, 어쨌건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없었을 목숨이니…. 어울려드리지요. 목숨값은 목숨값으로 반납하리다. 죽을힘을 다해 댁이 살길을 마련하겠다고요. 마지막엔 사지 멀쩡히 화산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차피 지금까지의 목표와 다를 것도 없다 아닙니까?


모든 여정의 끝에서 댁이 화산의 인간들과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상봉을 마치면. 떳떳하게 이 속죄가 오롯한 매화검존의 몫이었음을, 생존은 화산검협의 몫임을 깨닫게 된다면.

느지막이 술이나 한잔 얻어 마시러 오리다.

난 애저녁에 알고 있었다며 약 올리거든 그때 실컷 억울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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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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