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환 - 5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주의 ¡
-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따스하고 평온했다.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일단 마셔라.”
청명은 고개를 숙여 찻잔 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자라 늘 매화를 가까이해온 청명이었으나, 차 종류에 한해서는 그게 설사 매화를 재우거나 말린 것이라고 하여도 좀처럼 조예가 생기지를 않았다. 그런 청명이 값싼 술을 마시듯 잔을 들어 차를 단번에 털어 마시는데도, 청문은 그를 자연스레 여겨 가만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청명이 담은 매화는 근원이자 역동이었다. 추위 속에 짓밟히고 꺾여도 기어코 자라나 피어나서 향을 퍼뜨리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리하여 끝내는 화우 속에 가둔다. 화산에 일이 생기면 가장 빠르게 나가 가장 늦게 돌아오는 매화검수에게 느긋한 평정심으로 관찰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게 청문이 익힌 바였다.
“이 자식아, 그거 귀한 차다.”
그를 알면서도 괜스레 한 번 타박하게 되는 건 아쉬운 탓이었다. 이 검수가 치열히 살아간다는 건 휴식을 모른다는 뜻과 같았다. 뒤를 돌아보며 쉬어도 된다고 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네가 제자리걸음 좀 걸어 화산의 명예가 떨어지거나 누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그리 제 사제에게 말해줄 수 있었더라면…. 장문인으로서 짊어지는 게 없었더라면 그리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생각이 흐를 때면 매화 향도 즐길 줄 알라며 핀잔하게 된다.
“에이, 제가 어떻게 마실지 뻔히 아시면서.”
물론 청명은 그러한 청문이 지닌 염려의 깊이를 알 리 없었다. 능청스레 말한 청명이 다기를 들어 제 잔 위에 새로 한 잔 콸콸 부었다. 그래도 어릴 적엔 이걸 뭔 맛으로 먹냐고 하던 어린아이가 차로 갈증을 풀 정도까진 왔으니 제법 기특하다. 웃으며 청명을 바라보던 청문이 입을 열었다.
“청명아, 너는 만약 화산에 있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을 것 같으냐?”
뜻밖의 질문에 청명의 손이 멈칫했다.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눈을 크게 뜬 청명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화산 망, 아니, ……돈 떨어졌어요? 아니, 누가 사고라도 쳤어요? 대체 뭔 사고길래 이래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의 무례함을 알고 가까스로 멈춘 청명이 돌려 묻자, 청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청명은 그 웃음에도 속지 않겠다는 듯 인상을 쓰며 청문을 똑바로 응시할 따름이었다.
“무슨 일 터졌으면 바로바로 말해줘야지, 왜 사형제 간에 이렇게 뭉개고 돌려서 물어요? 빨리 말해봐요, 제가 다 해결해올 테니까.”
“아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냥 갑자기 궁금증이 도져 묻는다.”
“참나…… 진짜 아무 일 없었어요?”
청문이 무슨 일 없다고 몇 번을 반복하여 대답해도 청명은 한참을 의심하였다.
“아, 그렇다니까!”
“…뭐, 장문사형이 하는 말이니까 믿을게요.”
믿는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오래 물었다만은…. 청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찝찝한 눈초리를 한 청명이 겨우 납득한 기색을 내비치며 차를 한 번 더 털어 마시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런 걸 다 물어요.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디에서 뭘 한다고.”
짧게 대답한 청명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청문이 이 정도 대답에 만족한 기색이 아닌지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바삐 생각을 이어나갔다. 사형이 노망이라도 들었나, 이 인간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불러서 별걸 다 묻네, 아니, 정말로 별일 없는 거 맞아? 청진이라도 족쳐봐야 하나.
청명이 불만스레 입을 비죽였다.
대체 청명이 화산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비록 제 의지 없었던 어린 시절에 들어와 자라며 검을 쥐게 되긴 했다만, 그 이후에 했던 모든 결정은 다 청명의 의지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놈의 화산이 도문이라 갑갑한 규범들이 몇 개 있긴 해도, 어차피 청명은 그 안에서 제 원하는 걸 다 하고 사는 데 도사이니 이만큼 편하고 익숙한 곳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원하는 답이 뭐냐고 물으려 청명이 고개를 든 순간,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삼 형님!”
장문사형의 처소 앞에서 어느 제자가 이렇게 큰소리를 치나! 청명이 눈이 뒤집혀 뒤를 돌아보자, 도복조차 입지 않은 아이가 청명의 팔을 잡아당기며 어딘가로 뛰어갔다. 장문인 앞에서 이 무슨 실례냐며 꾸짖으려 하였으나, 정작 청명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아, 아보.”
“이리 미적거리면 장 닫힐 때쯤 도착하겠소, 빨리 갑시다!”
“아이고, 형 좀 그만 재촉하렴.”
달리기가 빠른 아이를 뒤쫓느라 급하게 따라온 여인이 숨을 몰아쉬며 아보를 붙잡아 달랑 들어 제 앞에 똑바로 세웠다. 성질 급한 아보가 또 금세 어디로 갈까 무서워 잽싸게 아보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해준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초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오늘도 잘 부탁한다.”
“네, 걱정 마세요.”
말 안 들으면 그냥 패면 그만이었다. 아보를 덥썩 붙잡은 초삼이 제 생각을 귀신같이 감추고 해맑게 웃자, 흠칫한 아보가 초삼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아보야 짐승의 시야에 들어 굳이 자극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으나, 여인은 역시 보가 초삼을 각별히 따른다고 생각하는 듯 흐뭇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생환 - 5
“형님! 이것 좀 보시오, 이거!”
“소리 안 질러도 잘 들린다.”
아보가 초삼을 친형처럼 따르게 된 데엔 지극히 단순하고 무식한 연유가 존재했다.
동네 또래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아보가 어느 날 골목에 나타난 거지인 초삼에게 시비를 걸었고, 초삼은 아보를 때려눕혔다. 뒤늦게 아보가 유복한 집안 자식임을 알게 된 초삼이 귀찮게 되었다며 홀연히 떠나려 하였으나, 아보가 초삼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가 진 게 처음이라며, 다음 싸움을 기약해버리는 게 아닌가.
초삼은 저보다 작고 어린아이가 당연히 제가 이길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큰일로 번지지만 않는다면야 이 인심 좋아 구걸 수완이 제법 좋은 동네를 급히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아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싸우기를 몇 번. 아보는 미운 정이 든 건지, 아니면 너무 많이 맞아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초삼에게 친밀히 굴었다.
당연히 아보의 집안에서는 제 자식이 웬 거지랑 어울려 다니며 형님, 형님 하니 뒷목 잡고 기절할 지경이었다. 어른들이 기함하여 아보를 뜯어말리고 초삼을 냉대하였으나 아보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고, 초삼도 눈칫밥 먹는 데에는 도가 튼 인간이었다.
그리 묘한 관계가 유지된 지 몇 달, 집안 어른들이 마음을 열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아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실종된 아보를 그 누구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지 몇 시간, 아보를 찾겠다며 떠났던 초삼이 산에서 굴러 정신을 잃었던 아보를 등에 업고 돌아왔다.
온종일 산을 뒤지느라 땀에 흠뻑 젖고 흙투성이가 된 어린 거지를 본 어른들이 처음으로 군말 없이 밥을 내주었다. 그 이후로는 적어도 초삼이 아보를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생겼는지, 집안의 골칫거리인 이 악동을 초삼에게 맡기고 그 대가로 식사를 챙겨주는 일이 슬슬 빈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도 제정신은 아니야.’
대체 뭘 믿고 집안 애를 거지 자식에게 맡기는 걸까? 꽤 자조적으로 생각한 초삼은 바삐 돌아다니는 아보의 팔을 꽉 붙잡으며 시큰둥한 낯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빨리 튀어나오지 못해 안달이 나 방방 뛰는 아이, 그리고 그 뒤를 가볍게 따라가는 소년의 모습에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잔웃음을 흘렸다.
“헉.”
바쁘게 뛰던 아보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서더니 숨을 흡, 들이마셨다. 아보의 시선을 따라 본 초삼은 고개를 기울였다. 웬 세공품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초삼의 눈엔 오늘 숱하게 본 물건들과 비슷하여 다를 게 하나도 없어보였다. 초삼이 허리를 숙여 아이의 귀에 속삭였다.
“이게 그렇게 좋은 거야?”
초삼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아보는 영문 몰라 하는 대신 세공품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바삐 끄덕일 뿐이었다. 그에 초삼이 그래, 하면서 아보를 들어 옆구리에 끼고서는 저벅저벅 그 앞을 떠났다.
“아니, 왜!”
아보가 소리치며 항의했으나 초삼은 성의 없이 아보의 입을 제 손으로 꾹 틀어막을 뿐이었다. 그에 아보가 눈이 뒤집혀 초삼의 팔 안에서 버둥거렸다. 이 보는 눈 없는 거지가! 어째서 저런 물건이 이 도떼기 바닥에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물건은 한때 이름 날렸던 장인의 것이 분명하건만! 만들어진 재료가 비록 비싼 게 아니어도 그 가치는 가히 천금과도 같은 것인데, 이 미친 인간이 이 기회를 놓쳐버리네, 놓쳐!
“야, 다 들리거든?”
실컷 읍읍거리던 아보가 흠칫, 하며 추욱 늘어져서는 초삼을 올려다보았다.
입 막힌 김에 실컷 욕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이 귀신에게는 다 그 뜻이 들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내뱉은 게 아닌 이상 잡아떼면 그만. 말로 나온 건 없잖아, 한 번만 봐줘. 순식간에 무슨 말이냐는 듯 순진무구한 눈빛을 가장하는 아보에 초삼이 에휴, 한숨 쉬며 아보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다 놓았다.
바닥에 착지한 아보는 바로 떠나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멀어진 가판대에 아보가 빠르게 뛰어가려 하자 초삼이 아보를 다시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다시 갈 거니까.”
“다시 갈 거라고…? 근데 그럼 왜 이리 멀리 왔소?”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네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어렵게 구하려 들 게 뻔했으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오?”
“너 얼마 있어.”
아보가 순순히 제게 있는 금전을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초삼이 흠칫 놀랐다. 부잣집 자식인 건 알았는데, 고작 어린아이에게 이 정도를…? 이놈을 데리고 내가 이 사람 많은 곳을 누비고 다녀도 되나 싶어질 정도의 금액에 조금 아찔해진 초삼이 제 이마를 짚었다.
“왜, 너무 적소?”
“아니, 너… 됐다.”
이 부잣집 자식한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혀를 쯧 찬 초삼이 일단 따라오라며 아보를 끌었다.
초삼은 조금 전 세공품이 있던 가판대로 가질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에 있는 가게들을 한 차례 들렀다. 그리고 여유롭게 길거리 음식들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고기로 속을 채운 빵, 가지각색 꼬치들, 새콤달콤한 과채 음료들을 하나씩 사며 아보에게 한 입씩 먹였다. 그러나 아보는 집안에서 받는 훈련 탓에 속이 좋지 않아 많이 먹질 못했다. 자극적인 향신료 범벅인 길거리 음식을 한 입씩 먹고 죄다 거들떠보지도 않자, 초삼이 남은 걸 죄다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아보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이 인간이 제 돈을 죄다 음식으로 거덜 내려고 작정했나…? 아니, 그런다고 사라질 돈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빨리 가지 않으면 제가 봐놓은 물건을 다른 사람이 가로챌 수도 있으니 조바심이 났다.
아보가 초삼을 당기며 재촉하니, 초삼이 귀찮게 군다며 오히려 역정을 내었다. 그에 얼이 빠진 아보가 입을 떡 벌리니, 초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보를 끌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 가판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조용히 하고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쓰읍.”
“…형님 뜻대로 하시오…….”
아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초삼이 씨익 웃으며 가판대 앞에 섰다. 초삼의 뒤에서 고개를 쏙 내민 아보는 가판대 위에 제가 봤던 물건이 그대로 놓여있는 걸 보고 눈을 빛냈으나, 초삼이 아보를 슬 잡아 제 뒤로 두었다. 그리고 바삐 물건을 팔고 있던 상인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였다.
“이게 아까 네가 본 물건이던가?”
고기를 질겅 씹으며 초삼이 성의 없이 든 물건은 절대 아보가 보던 세공품이 아니었다. 아보가 보던 것부터 크기와 재료, 사용 용도까지 죄다 다른 것이라 황당한 아보가 입을 열려 하였으나 초삼이 아보의 어깨를 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이 인간이 대체 오늘 왜 이런데, 싶던 아보는 초삼의 번뜩이는 눈을 보고 문득 깨달은 게 있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구먼요.”
초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상인은 곧 아보의 옷차림과 생김새를 알아보고선 급하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게 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겁니다.”
“크으, 역시.”
뭐? 상인의 말에 아보가 초삼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아무리 봐도 저게 가장 비쌀 수는 없었다. 물론 상인이 보는 눈이 없으니 이 허름한 가판대에 이름난 장인의 작품을 무방비하게 내놓았겠다만은, 솜씨를 떠나 재료로만 따져도 초삼이 든 건 싼 편에 속하는 축이었다. 곧이어 상인이 말해주는 가격에 아보는 상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쁘게 팡, 팡, 팡, 연달아 초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미친 거 아냐? 어떻게 물건 판다는 인간이!’
거지가 거지의 안목으로 고른 저 물건에 저 정도 가격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아보가 노심초사해서 초삼을 바라보는 사이, 초삼이 큼큼 헛기침하며 눈매를 늘어뜨렸다.
“이런… 제가 선물을 드리고 싶어 물었는데, 시장 물건치고 가격이 제법 나가네요?”
“아…… 손님께서?”
상인이 빠르게 초삼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다시 아래에서 위로 한 번 훑었다. 요즘 들어 이 거지에 대한 얘기가 이 지역 상인들 사이에 파다했기 때문에 정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거지가 산다는 사실에 시들해진 상인이 목소리에 힘을 빼며 대답했다.
“큼큼, 그럼 아무래도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만…”
이제 와 물건의 가격을 낮춘다고 한들 신용만 떨어질 뿐이다. 차라리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거지 놈을 빨리 내쫓는 게 나았다. 상인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거지는 끝내 무언가를 사고 싶은지 이것저것 들어 상인에게 계속해서 가격을 물었다. 거지가 얽혀있는 집안이 보통 집안은 아니다보니 혹시나 하며 가격을 조금 세게 부르던 상인은 곧 빠르게 실망하였다. 몇 번의 실망스러운 문답이 오고 간 끝에 상인이 부르던 가격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음… 이건 얼마죠?”
초삼이 힘없이 들어 올린 물건에 상인이 별 기대 없이 대답하였다. 그에 초삼이 곤란한 안색을 하다가 이 정도만 깎아주면 안 되겠냐며 슬며시 흥정을 걸었다. 본전 정도만 겨우 찾을 수 있는 가격에 상인이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더 붙잡아봤자 다른 손님들만 맞이하지 못할 뿐이다. 사지도 않을 주제에 지위가 높아 대접은 해야 하는 손님이 있는 일행은 빨리 보내는 게 좋았다. 마음이 급해진 상인이 결국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삼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폈다.
겨우 값을 치른 세공품을 든 초삼이 아보의 손을 잡고 끌어 가판대를 떠나갔다. 가판대를 떠날 때만 해도 설렘에 가득 찼던 얼굴이 차차 식다가, 다시 평소와 같은 불퉁한 얼굴로 돌아갈 때만치 멀어져서야 초삼이 아이의 손에 물건을 쥐여주었다.
“이거 맞지?”
아보는 겨우 기절을 면할 지경이었다. 아보가 생각하던 이 세공품을 초삼이 그 값어치보다 한참은 싸게 구하였다. 아보가 눈을 크게 뜨며 세공품을 푹 안자, 초삼이 피식 웃으며 꼬치에 남은 고기를 이로 한 번에 주욱 빼 먹었다.
‘훨씬 싸게 구해다 줬으니 좋아하겠지?’
그러나 초삼의 생각과는 달리 아보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가 조금 처진 것도 같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에 초삼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문제야?”
“제값을 쳐주지 않고 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오. 장인의 물건을 이리 형편없는 가격에 사는 게 아니거늘.”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초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싸게 살 수 있는 걸 구태여 비싸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상인을 포함하여 이 시장에 방문한 사람 대부분이 저 세공품의 드높은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형성된 가격에 샀을 뿐이다.
“정녕 이 가치를 저 시장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단 말이오? 어째서 이 작품이 누구에게도 감명 주지 못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높게 치는 평가가 과연 정당한 평가냔 말이오.”
초삼은 아보의 손에 들린 작품을 바라보았다.
‘음…….’
아무리 봐도 초삼 눈에는 그냥 영 엉성한 부조로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간 사람들이 안목이라 부르는 게 이 거지에게 있을 리 없었다. 하여간 초삼은 장인들한테 둘러싸여 자라 안목 드높은 부잣집 자식이 영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으니 참 생경했다.
“글쎄, 모르겠다. 내가 뭔 얘기를 하겠냐, 그냥 네가 생각 참 많은 놈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나 들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민을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근데 말이다, 원래 모든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 아니겠냐.”
“무슨 뜻이오?”
“같은 꽃 한 송이라도 제가 직접 가꿔 피워낸 건 귀하고, 꽃밭에 널려 있는 건 흔하게 느껴지지?”
“…그렇지요?”
“근데 들판에 있는 꽃이라도, 네가 매일 가 그 꽃의 그림을 그린다고 치자. 피어나는 모습부터 지는 모습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다 보면 그게 죽을 때 다른 꽃들과는 퍽 다른 기분이 들지 않겠냐.”
초삼이 다 먹은 꼬치의 대로 탁, 탁 아보의 머리를 쳤다.
“원래 모든 건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게 소중한 줄 모르는 상인의 손에 있었으니 그 가격이었던 거고, 이제 그 소중함을 잘 아는 네 손에 있으니 비싼 가격이 되겠지.”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적어도 아보에게는 제법 괜찮은 의미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생각에 잠겨 제가 산 세공품을 아보가 내려다보는 것도 잠시, 곧 아보가 고개를 들어 초삼을 마주했다.
“그거, 내 안목이 높다는 소리지요? 칭찬 하나도 그리 솔직하지 못해서야,”
“시끄럽다, 가자.”
“거참!”
“거참은 무슨, 어린놈이 거참이야.”
‘하여간 손 많이 가는 녀석.’
납득한 건지 뭔지 조금 나은 기색을 한 아보에 초삼이 겨우 안심하여 속으로 숨을 흘렸다. 어쩔 땐 잔뜩 꼬인 매듭 같아 풀릴 일이 요원해 보이면서도, 어쩔 땐 단순하기 그지없어 쉽게 방방 뛰니 참 예상 못 할 아이였다. 저 작은 머리통 안에 무슨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는지 완전히 아는 날이 오긴 할까. 작은 궁금증을 흘리며 초삼은 다시 기력 찾은 아보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저녁이 되고, 길거리 가득 메워졌던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한적한 시간이 찾아왔다. 초삼은 산에 가자고 조르는 아보를 따라 시장을 벗어나 산에 올랐다.
“지난번에 산 타다가 큰코다칠 뻔했으면서, 산을 왜 이렇게 좋아해?”
“형님이 있으니 무서울 게 어디 있겠소?”
“말은 잘하지.”
계속해서 더, 더 올라가려는 아보를 초삼이 강제로 붙잡아 널찍한 바위 위에 앉혔다. 힘들어서 헐떡이고 있는 주제에 내버려 두면 밤 되는 줄도 모르고 정상까지 오를 기세였다.
“여기서도 볼 수 있잖아. 여기서 봐.”
아보는 유난히 산에서 지는 노을 보기를 좋아하였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취미인지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초삼도 이 시간을 썩 싫어하지 않았다. 아보의 옆에 털썩 앉은 초삼이 드넓은 풍광을 눈에 담으며 발을 까딱였다.
“…….”
잠시 둘 사이에는 조용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대화 하나 나누지 않았으나 불편할 건 없었다. 각자 위에 드리운 나무 그늘을 받침대 삼아, 하늘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여유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저 멀리 세상을 가르듯 선명한 햇빛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살랑,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자 옅은 파도 소리와 함께 녹음의 푸릇한 내가 났다.
“형님.”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적을 먼저 깬 건 아보였다. 거의 드러눕다시피 편한 자세를 취한 초삼이 왜, 하고 답하였다.
“여기에 정착할 생각은 없소?”
“…….”
“형님이 머문다면, 우리 집에서도 잘 봐줄 텐데.”
“거지 함부로 집에 들이는 거 아니다.”
“형님이 어디 단순한 거지요? 좀만 시간이 지나면 어디서 좋든 나쁘든 이름을 날리고 있을 게 뻔한데, 우리 집도 손해 볼 건 없으니 말하는 거지.”
초삼은 참 오늘 열심히 흥정한 보람 없게도 아보가 또 가격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세공품 따위가 아니라 제 가격이긴 하다만. 초삼이 심드렁한 낯으로 대답했다.
“또, 또 비싸게 사려고.”
초삼의 말을 알아들은 아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안목이 높다고 하지 않았소?”
“별.”
“내가 이 높은 안목으로 형님을 알아보았으니, 비싸게 쳐줘야지.”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네 눈이 내가 생각한 만큼 좋은 것 같지가 않다.”
“나 같은 인간이 알아봐줬으면 고맙다, 해야죠.”
“건방진 자식.”
제 가치니 뭐니 사람한테 품질 매기는 모양인데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걸 보니 저도 단단히 정이 들긴 한 모양이라며 초삼이 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 아보는 어리니 더 그러한 양인지라 이리 매달리는 거겠지.
음. 초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계속해서 떠돈 이유는 사람들이 오래 본 거지에게는 인정을 잘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먹을 것 찾아 이리저리 도는 인생, 누가 의식주를 챙겨준다면 굳이 더 돌 이유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 대가로 아보를 계속해서 챙겨야 할 가능성이 크나, 이미 한 번 때려잡은 놈이니 두세 번은 못 휘어잡을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물론 아보의 말만 믿을 게 아니라 아보네 집안 어른들 의사도 한 번 확인은 해야겠지마는.
“뭐, 어른들께서도 같은 생각이라면 그때…”
초삼은 아보를 힐끗 바라보았다. 산을 타느라 땀을 흘려 발그스름해진 뺨 위로 노을빛이 물들고 있었다.
-청명아.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초삼이 눈을 깜빡였다가, 숨을 멈추었다. 아보의 얼굴에 비친 노을빛이…
“형님?”
“……아.”
초삼이 벌떡 일어서자, 아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초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초삼은 아보를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 아보의 얼굴에 드리운 붉은색이 더는 노을로 보이지 않았다.
피에 적셔진 잔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드넓은 들판을 가득 메운 시체들의 산. 까마귀조차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곳에서 그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이렇게 잃고 말 것이라 예상했음에도 끝내 각오하지는 못했던 죽음들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초삼의 손이 덜덜 떨렸다.
“돌아가야 해.”
“어디로요?”
“…안 돼, 나는. 다시는.”
손만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삼이 눈을 질끈 감자, 아보가 일어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보가 초삼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손을 덮은 온기에 초삼 또한 다시 눈을 떴다.
-화산에 안 있으면 뭐 했을 것 같냐고? 청문 진인께서 그런 걸 물으셨단 말입니까? 참… 왜 물으셨는지 알 것 같긴 한데.
-알 것 같다고?
-뭐, 뻔하지 않소. 문파는 원래 입문도 자기 선택이고, 떠나는 것도 제법 자유롭지 않소. 속가제자하던지 뭐… 근데 도사 형님에겐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고 보시는 모양이지.
-그것참… 실없는 소리였네.
-하하, 그렇지. 한 곳에서 쭉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못 떠나는 건 아니니 말이오.
-……너는, 네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 적 있냐?
-에이… 그래도 내가 당가 사람인데. 어쨌든 그래도 당가 사람이라, 도사 형님 마음을 더 이해하는 거 아니겠소?
초삼이 아보의 눈을 쳐다보았다. 노을빛을 등져 초삼을 바라보는 아보… 아니, 당보의 얼굴에는 어느새 놀란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새 자라난 당보가 다 이해한다는 듯 차분히 청명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좀 더 어렸을 때, 좀 더 짊어질 게 적었던 어린 시절에. 아니, 어쩌면 짊어질 게 없는 두 사람으로 만났다면 그건 제법 즐거웠을 것 같지 않소?
“압니다. 때때로 바라긴 해도.”
모든 짐을 다 내려놓기를 바란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정말로 모든 짐이 사라진 순간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잊어서는 안 되는 짐이 있으니까. 단순한 부담 아니라 제 생명까지도 살릴 귀한 짐이니 지어 마땅하다.
“…결국 무엇 하나 놓을 수 없어서, 그래서 돌아가게 되죠? 고생할 거 뻔히 알면서도.”
“…….”
당보가 허리를 숙여 청명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주었다.
“형님만 내 가치 아는 게 아닌 것처럼, 나만 형님 가치 아는 것 아니라 곤란하지 않습니까. 우리 둘 다 참… 이걸 좋다 해야 할지, 미련해서 헛고생한다고 해야 할지.”
다 털어낸 당보가 허리를 펴 청명의 얼굴을 마주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청명이 한탄과도 같은 짧은 숨을 흘리며 그 이름을 읊조렸다.
“당보야.”
“네, 형님.”
“내가 욕심이 많아 그렇다.”
“이미 압니다. 형님만큼 욕심 많은 사람 어디 있다고.”
언제 흔들렸냐는 듯 청명은 덤덤한 낯으로 당보를 바라보았다. 당보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어차피 이 또한 제 환상이고 상상이기에 더는 무용함을 알아 그렇다. 제가 원하던 말을 이리 더 투영하여 남이 하는 말처럼 들어 무엇 한단 말인가. 이미 모든 말은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사라져가는 당보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청명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그를 불렀다.
“당보야.”
어느새 청명은 익숙한 전장 한가운데였다. 새빨간 세상 속 새카만 무복 입고 우뚝 선 청명이 입을 벌려 피비린내 나는 숨을 들이켜 마셨다.
청명이 느릿하게 속삭였다.
“나는 두렵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는 것이.
* * *
잠에서 깨어난 청명은 눈을 다 뜨기도 전에 제 손을 붙든 온기를 느꼈다. 오랜 꿈을 꾼 기분이라 몽롱한 기분인데도, 그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 자명했다.
“나도, 당신도… 누군지는 모르겠어.”
청명이 입을 열자, 제 손을 덮은 손이 움찔 떨리더니 곧 손가락이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을 뜬 청명이 멀어지는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근데… 난…… 항상, 당신을 기다렸던 것 같아.”
귓전을 울리던 건 단순한 환청이었던가. 그 순간 느꼈던 감정들은 단순한 세뇌였던가. 그러한 추측보다는 더욱 선명한 직감이 청명 속에 울렸다.
그건 기억이었다.
기다리지 않았다면, 간절히 바라지 않았다면 당신이 흘렸던 그 수많은 말들을 기억할 리 없었겠지.
“……나를.”
“그래.”
당신을. 작게 속삭이듯 말한 청명이 다시 눈을 감았다. 더는 청명에게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언제 깨어났냐는 듯, 다시 일정해지는 옅은 숨소리를 들은 당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꽤 독한 걸 썼는데, 그걸 일어나네. 하여간 좀 다르게 돌아올 생각은 없었소?”
그래도 검존의 몸 그대로 돌아온 게 아니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내력도 내력이거니와 내성 때문에 그 어떤 약을 쓰더라도 제대로 들기 힘들었을 테다. 급한 치료와 짧은 회복을 반복했던 검존은 어느 순간부터 속 편히 정신을 잃지도, 고통을 잊지도 못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야….’
게다가 이전 몸 그대로 고스란히 돌아왔다면, 또 제 몸 한 번 돌보지 않고 바로 선두에 나섰겠지. 오랜 시간 잊혀 있던 걱정들이 곧바로 떠올라 끝없이 꼬리를 무는 것에 당보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럼, 기다렸겠지, 이 인간아…. 맨날 쫓아가는 건 내 몫으로 둬 놓았으니.”
단 한 번 쫓지 못했을 때, 그를 잃었다. 당보가 주먹을 꾹 쥐었다. 창백해진 낯 위로 결연과 다짐이 우겨져 뚝뚝 흘러내렸다.
“다시는… 놓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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