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소소] 가출을 잘 하는 사천당가의 독녀

[청명소소] 가출을 잘 하는 사천당가의 독녀 (3)

거기 가주님 딸이 있는데, 데려와야 한다고요? 제가요?

* 원작파괴 시점: 당가에피와 운남에피 사이

* 청명이 당가를 방문하기 수년 전 소소가 강호로 자의 반 타의 반 가출을 하여 비영의(飛影醫: 그림자를 날리는 의원)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청명이가 당군악의 부탁으로 비영의를 회유하러 갑니다

* 무협알못

* 연기 씌우다: 과거 백정들이 쓰던 소를 죽이고 고기를 처리하는 과정을 칭하는 은어. 여기에서는 암살하다는 의미의 은어라는!자체 설정!으로 썼습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청명을 앞서 걷는 비영의가 물었다. 이젠 가장할 마음도 없다는 듯 차가운 어조였다.

"내가 들은 말이 있어서."

청명은 당군악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흑도와 관련이 있다면 장강의 수로채일 가능성이 높네. 중경은 장강이 관통하는 곳이니까. 수로채같이 여러 지점으로 분산된 조직이 외부의 인력을 고용해 알력싸움을 벌이는 것 또한 드물지 않아.

- 만에 하나 당가주님이 염려하는 일이 사실이면 어떻게 할까요?

당군악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 ...두려움을 알려주게. 자신이 하려던 일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

청명은 일부러 아는 사람만 아는 은어를 썼다. 

"연기 씌우는 솜씨가 깔끔하다던데?"

그 순간, 당소소의 소매에서 비도가 튀어나왔다. 청명이 검을 세로로 들어 미간을 향해 쇄도하는 쇠붙이를 검면으로 막았다. 손쉽게 일 수가 땅으로 떨어졌다. 당소소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

"뭐... 나쁘지 않네."

훔쳐 배운 것 치고는.

독왕의 열 초식도 버텨낸 청명에게 당소소의 비도는 어린아이가 던진 공처럼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명은 티내지 않고 그녀가 펼치는 다음 수를 기다렸다. 당소소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꽤 재빠르긴 한가보네?"

당소소가 억지로 웃어보였다.여유로운 어조였으나, 청명은 그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 당소소는 이 한 수로 청명을 이기긴 어려울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여유를 가장하며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녀의 말과 동시에 당소소의 손에서 젓가락 같이 가느다란 암기 대여섯개가 날아왔다. 청명이 그리는 검의 궤적에 가로막혀 힘없이 떨어졌다.

얼핏 보면 그냥 던진 것 같지만 청명은 알아볼 수 있었다. 눈과 이마를 노리는 둘을 막으면 팔 다리를 노리는 다른 네개를 막을 수 없도록 던져진 암기였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간단하게 쳐냈지만, 발출되는 각도와 시간차를 정교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구사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녀가 호기롭게 던진 양자택일의 시험이 허무하게 파훼되었다. 당소소의 얼굴이 점차 눈에띄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기세를 이어갔다.

'살아남는 법은 잘 배웠군.'

야생동물은 피를 철철 흘리는 순간에도 위협하는 눈을 바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약한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를 결심한듯 한 당소소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소매가 허공을 나부꼈다. 그녀가 곧게 뻗은 나무 줄기를 타고 뛰었다. 빠르게 이동하며 여러 방향에서 청명에게 암기를 던졌다. 빠르게 쇄도하는 암기 뒤에 조금은 느린 한 수를 감추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는 암기를 동시에 던졌다. 쉴틈없는 연격이 마치 점점 조여오는 새장의 창살같은 궤적을 그어댔다. 

그러나 청명은 이 야심찬 공격들을 모두 귀신같이 흘려내거나 쳐냈다. 무엇 하나 닿지 않자 당소소의 성난 침음이 들렸다. 

픽 모습이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청명의 뒷편에 나타난 당소소가 다시 한번 그의 뒷덜미를 향해 동전을 던졌다. 청명은 고개를 꺾어 손쉽게 피했다. 당소소의 공력을 버티지 못하고 쪼개진걸 보니 당가인들이 무기로 쓰는 당문전이 아니라 평범한 동전이다. 슬슬 무기가 떨어진 모양이다. 이걸 어쩌나.

그러고 보니, 당소소는 독을 쓰지 않는다. 아마 독을 조달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겠지. 아무런 경고도 않는다 싶더라니 진짜 독을 쓸 생각이 없던 것이다. 독만큼 값이 비싸고 금방 사라지는 무기가 더 있을까? 당가인들이 독을 던지는 행위는 어찌보면 돈을 바닥에 펑펑 뿌리고 다니는 사치와 비슷할것이다. 

독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는 당소소는 어쩔수 없이 비도술만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지금부터 마음껏 독을 쓸 수 있다 해도, 어릴때부터 내성을 꾸준히 기르지 않았기에 사용이 가능한 독물에 있어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다보니 강제로 당보의 의지를 잇는 꼴이 되었다. 본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또한, 본래 비도를 던지는 이는 좀 체 검을 든 적에게 거리를 좁히며 움직이지 않는다. 비도의 특성상 원거리를 유지할수록 유리하니까. 

그녀 정도의 수련 기간을 감안하면, 아직은 땅에 발을 붙이고 단단히 중심을 잡아야 제 위력을 내는 비도술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당소소는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 치곤 정확히 비도를 다룰 수 있었다. 비도의 사거리가 짧은 대신 스스로 움직여 간격을 좁히는 도발적인 방법을 쓴다. 

얼핏 보면 비도의 장점을 무력화하지만, 그만큼 급소를 노리기엔 알맞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비도의 위력은 더욱 치명적이게 된다. 모 아니면 도다 이거인가?

만약 독공과 병행했다면 비도에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력과 배포는 내가 인정한다!'

당소소가 다시 암기들을 던졌다. 암기로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본래 여자의 머리 장식이었던 것들이다. 자꾸 소매에 손을 넣을 시간을 주는 것이 미심쩍지만 알게 뭐람. 천천히 추론해볼 시간 따위 그녀에게는 없다. 아껴둔 서너개의 암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며 청명의 목, 가슴, 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호오."

청명이 살짝 비껴서며 손쉽게 두 자루의 암기를 피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한 자루는 반쯤만 뽑은 검신으로 흘려내었다.

"그 솜씨란게 이 정도야?"

당소소가 비도가 묶인 손목을 들어 날아드는 그의 검을 막았다. 손목이 부러질 정도로 강한 충격에 그녀의 눈자위 한구석이 붉게 물들었다. 핏줄이 터졌다. 당소소는 검을 밀어내자마자 제 손목에 붙여 묶은 비도를 던졌다. 아마 이 비도가 마지막일 것이다.

치열한 공세에 청명은 과거 친우의 말을 떠올렸다.

"...형님하고 싸워보니 알겠습니다. 당가의 무학도 약자의 입장에서 펼쳐야 비로소 발휘되는 진가가 있군요."

"그러냐." 

꾸준한 노력. 타고난 재능. 뛰어난 전략. 그걸로는 도저히 좁히지 않는 격차란 것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서서히 깨닫고 받아들여 가는 것이 무를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가의 무학은 자신보다 한 수 위인 이를 이길 수 있는 아주 작은 변수를 극대화하려는 시도들이다.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아무리 경지가 낮은 상대이더라도, 당가의 독과 비도를 다루는 주의해야 한다. 당가인들이 독랄함을 이유로 백안시 당한 이유엔 이러한 위협감을 풍기는 것도있었다.

물론 청명 앞에서는 산산히 부서졌지만. 

"형님 만나기 전엔 진짜 몰랐단 말입니다, 이런 감각. 내가 진짜 살다살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발려본 적이 없는데... 하..."

"할 말 끝났으면 전낭이나 꺼내라."

"아우가 고뇌에 빠졌는데 그딴 말만 나오시오?

만약 다른 무공이었다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의지는 대단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죽음을 피하기는 어렵다. 당소소가 가진 것이 당가의 비도술이었기에 스승도 없이 짧은 수련 기간에도 여기까지 죽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청명의 검격을 받아내고 마지막 비도까지 던졌지만, 역시나 닿지 못했다. 당소소가 남은 위력을 흘려내지 못하고 휘청였다. 넘어지다시피 다리가 굽혔다. 그러면서도 흙을 집어 넓게 뿌렸다. 크고 작은 알갱이가 청명의 입에 들어갔다,

"악, 에페페. 흙! 비겁하게!"

"그런 수단과 방법 따질 때가 아니거든!"

뒤로 솟구쳐 멀리 물러선 당소소가 다급하게 땅에 양손을 뻗었다. 청명의 눈에 돌들이 미세하게 그녀의 손아귀로 덜걱이는 것이 보였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 하던가. 그녀의 경지에서 이정도의 섭물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부를 정도의 이변이었다. 당소소는 제가 그 정도를 해냈는지 인지조차 못하고 있지만. 

'독하다 독해.'

얘도 당씨 성을 쓰는 사람이라고, 기어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네. 이 정도 집념이면 독공의 일부로 쳐주어야 한다.

당소소가 공력을 두른 돌들을 던졌다. 보통 사람이 맞았다면 뼈가 뚫렸겠지만, 청명에게는 그저 그런 돌팔매질일 뿐이다. 간단히 목을 꺾어 피했다. 죽립의 그늘 아래에서 빛나는 당소소의 눈에 서서히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문득 청명은 자신이 '빼앗으려는 입장'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이런 입장이 된 적은 얼마 없는데. 

청명이 그녀에게서 느끼는 것은 미친 마인이나 시정잡배들은 가질 수 없는 집념이다. 

목숨 못지 않게 잃고 싶지 않은것. 놓고 싶지 않아서 악이 받쳐서 내지르게 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목숨 그 이상의, 삶에 대한 갈망이었다. 몸 뿐만 아니라 영혼도 숨쉬는 삶에 대한 집념. 아마도 이것이 당소소의 동력일 것이다.

그리고 청명은 그녀에게서 그것마저 빼앗으려는 적이고.

청명이 검신을 완전히 치켜들고는 당소소에게 달려들었다. 역수로 쥔 검은 정확히 당소소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청명은 맹렬하게 달려들며 다시금 당소소의 눈을 보았다. 청명의 본심엔 그녀를 베어버리겠다는 마음 따위 추호도 없었지만 그녀에게 지금은 목숨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당소소의 눈엔 팽팽한 긴장이 있을지언정 흔들림은 없었다. 

당소소가 제 손목을 세워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짧고 강하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손목 안쪽에 묻혀있던 독분이 순식간에 청명의 코 속으로 들어갔다. 직접 코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근접한 거리에서 불어넣었기에 독분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돌았다.

"......."

그 순간 멈춰선 청명의 눈꺼풀이 점점 풀리더니, 좌우로 휘청이며 뒤로 풀썩 쓰러졌다.

"......"

잠시 굳어있던 당소소도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죽는 줄 알았어."

당소소가 혀를 찼다. 이판사판으로 소매 안쪽에 묻혀둔 마비독을 손목에 덜어 썼는데 이게 먹히다니. 살아남아서 다행이지만 자칫 잘못했다면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 

이 녀석을 얕본건 분명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는 실수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대 또한 그녀를 얕보았다. 당소소가 중얼거렸다. 

"얘는 뭐 하는 애야?"

가공할 무공을 구사하며 저를 농락하더니 이런 마비독엔 바로 쓰러져버렸다. 당소소가 쓰러져 잠든 청명을 손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커어어어억..."

황당하게도, 그는 대자로 팔다리는 뻗어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한참을 찔러보아도 요지부동이었다.

"잠든 건가...? 마비 독으로? 그게 가능해?"

독공이 아닌 의술로 만들어낸 마비 독이다. 양을 조절하면 마취에 쓸 수 있다. 물론 양민에겐 치사량이지만...

당소소의 눈이 청명이 허리에 찬 검으로 갔다.

"매화... 뭔가 익숙한데."

당소소는 비도를 회수해 청명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는 잠시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망설였다.

"......역시 안되겠어."

당소소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애당초 자신을 죽일 의사가 없었다. 목을 노려왔지만 그것도 진심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몇 수만 나누어도 자신과 이 사내의 격차를 알 수 있었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그는 진작에 그녀의 목을 가져갔을 것이다. 독분을 불던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원한도 없고 자신을 죽이려는게 아닌 이상 처음 본 상대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당소소는 비도를 거두고 소매에서 끈을 찾아 꺼냈다. 

"그냥 손 발을 묶어서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이곳을 떠나자."

그때, 번쩍 눈을 뜬 청명이 당소소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당소소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넘어뜨려 제 아래에 깔아 눕혔다. 

당소소가 뒤로 넘어지면서 죽립이 벗겨져 땅을 구르고, 긴 갈색 머리칼이 흙과 풀 위에 쏟아졌다. 청명이 드러난 당소소의 턱을 덥석 잡았다.

"어디보자. 닮았나?"

속아 넘어갔음을 깨닫자 당소소의 두 눈에 분노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사내의 손아귀 속에서 잔뜩 모아진 입술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야비한 새끼가!"

"수단 방법 가릴 이유는 없어서."

청명이 자신을 가격하려는 당소소의 양 손목을 한 손에 모아 잡아눌렀다. 쳐올리려는 다리는 무릎으로 압박했다. 당소소가 낑낑대며 뒤척였다. 완전히 제압할 수 있으면서 굳이 이정도만 붙잡아두는 것이 더욱더 그녀를 화나게 했다. 뭐지? 변태새끼인가?

"놔!"

"손을 보니 수련을 부단히도 하긴 했지만 제대로 시작한지는 채 몇 년 되지 않았군. 왼 손은 또 왜 이래?"

"너는 누군데...!"

"당소소."

청명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열이 올라 소리를 지르던 당소소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라신다."

당소소의 얼굴이 쓴 웃음으로 바뀌었다.

"역시 아버지께서 보내신 놈이야? 내가 누군지 다 듣고 왔구나?"

"정확히 말하면 부탁을 받은 거지."

"나를 두들겨 팬 다음 들쳐메고 데려오라고?"

"필요하다면?"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소소의 가슴팍에 난 옷깃의 틈 사이로 연둣빛 독사가 튀어나와 청명의 목을 꽉 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소소가 눈을 부릅떴다.

"보보(寶)!"

"아오...! 따가."

청명이 독사의 허리를 콱 잡아 제 목에 이를 박아 넣은 독사를 떼어냈다. 아직은 어린 독사가 억센 힘에 힘없이 축 늘어졌다. 

"부, 분명 중독되었을텐데..."

당소소는 아연실색했다. 사천에서 길러진 독사의 독은 중독된 사람이 죽어가면서도 시체 곳곳을 돌며 핏줄을 지글지글 말리고, 골수에 고인 피까지 들끓게 하는 맹독이다. 당소소도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이상 경고로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런데... 멀쩡하다?

'독사의 독이 안 통해...?'

한편 눈 앞의 괴물은 다른 것이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얘 이름이 보야?"

"그래."

"왜...?" 

"항복할 테니까 걔는 놔 줘. 이 독도 안 통하는 괴물...!"

청명이 손아귀를 풀자 독사가 재빨리 당소소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암습을 해도 어림없어."

보아하니 주인을 지킬줄 아는 영물이었다. 분명 죽음의 목전에서 그녀를 여러번 구했을 것이다. 이 험한 강호에서 혈혈단신으로 잘도 살아남은 이유가 짐작이 갔다.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의도한게 아냐. 아버지가 보냈다며. 그걸 알고도 내가 너를 죽이겠어?"

당소소가 가감없이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네 눈엔 내가 무슨 야멸찬 살수로 뵈나 본데, 나도 나름 의원이야. 죽이려고 용쓰느니 살리려고 애쓰는게 성미에 맞는 사람이라고."

청명도 이 부분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보이긴 하더군."

그녀는 청명의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았음에도 바로 독사를 날리지 않고 살생력이 적은 마비 독을 우선으로 사용하려 했다. 아마도 이 뱀을 수단 이상으로 여기는 듯 했다. 명줄이 짧아지긴 하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살수보단 의원에 가까운 행동이기도 했다. 청명이 일부러 그녀 앞에서 잠이 들어버린 척 했을때도 당소소는 그의 목숨을 가져가길 주저했다.

"살생은 제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한 되도록 삼간다, 라... 성격이 무른 거야? 아니면 다른 쪽으로 고집이 센 거야."

"누가 누굴 평가해? 연기를 씌운다느니 어쩌니 먼저 질 낮은 말들을 처 지껄인 주제에."

그래. 니가 무른 거면 맹독도 순하다 해야지...

"그 말 뜻은 잘도 알고 있네?"

"아, 그래서 내가 돈받고 목숨 가져가는 놈들이다? 나쁜짓 하는거 단속이라도 하려고 왔, 꺄악!"

청명이 매운 꿀밤을 먹였다.

"묻는 말이나 대답해."

"질문도 안하고 이 새끼가!"

아, 내가 그랬나? 잉... 나이를 먹다보면 방금일도 가물가물할수 있지.

"흑도것들 의뢰 받은 적 없냐고."

"어. 죽이긴 했지만."

"더 자세히 말해."

"그 전에 이제 좀 놓아! 언제까지 내 위에 올라타 있을건데?"

청명이 손목을 놓고 일어나 섰다. 당소소가 숨을 고르며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화가 나서 고르는 숨이었다.

"녹하채 수적들이 대뜸 칼을 들이밀고 끌고 와선 부상으로 자리에 누운 자기 조장을 살려달래서, 그러마 하고는 관자놀이에 암기를 꽂아주고 왔지." 

당소소가 흙먼지가 붙고 너덜너덜해진 소매 속에서 장죽을 꺼냈다.

"그런데 그놈들은 내가 대가도 없이 그랬을거라는 생각을 못 하더라?"

그 사건 이후로 당소소는 종종 따라붙은 수적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었지만, 수적들에겐 그녀와 내통했을 다른 수로채를 찾는 데에 더욱 혈안이었다. 원수를 갚겠단 의리보단 세력 간의 알력이 더욱 중요했기에. 청명은 이것도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사파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엔 순수하게 의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이 있지. 강호에서는 단 칼에 죽는 것도 복이다."

그 말은 즉, 강호에는 당가 정도의 의술로 치료한다면 살 수 있는 부상에 죽는 이들도 많다는 의미이다.

"바로 깔끔하게 죽기에는 확실한 부상이 아니어서 몇 시진동안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밖에 나와 보니까."

자유를 찾아 나온 세상엔 고통이 가득했다. 당소소는 자신이 할수 있는 방법으로 낯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다.

비영의라는 이름은, 죽은 줄만 알았다가 의식이 돌아와 눈을 떠보았더니 자신을 치료하고 떠나는 어떤 죽립인의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에서부터 시작된 별호였다.  

그러나 녹하채의 조장 하나를 죽인 이후로 그 이름엔 암살자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녀의 주장일 뿐이지만, 거짓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사욕에 의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경멸이 느껴졌기에. 청명이 관련된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비도를 던진것만 봐도 그러하다.

당소소는 해명에 이어 푸념했다.

"이름을 널리 날리지는 못해도 암살 의원이라고 여겨질 줄이야. 이거 서러워서 원. 피가 거꾸로 솟지만 말할 곳도 없고."

"이 정도면 딱 예사 안이지. 뭘 그래? 집안에 있으면 절반이라도 가지. 집 나오면 무슨 완벽한 세상이라도 펼쳐질줄 알았냐. 쯧쯧."

자신을 온실의 꽃으로 취급하는 그 말에 당소소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다만 담담히 얘기했다.

"그 말이 맞아. 집에 있는 것도 마냥 불행하지는 않았을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


당소소가 살수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던 비수를 꺼내었다. 이런 일까지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누구의 짓인지는 뻔하디 뻔했다. 

행렬을 돌아보았다. 홀로 살아남은 신부가 땅 위를 나뒹구는 호롱불 사이를 거닐었다. 흙에 흥건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핏물이 치맛단을 붉게 적셨다. 

이미 죽어 차갑게 식어가는 호위들과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는 인원도 있으니 아마 곧 혼례 행렬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제 몸을 지키고 있으면 곧 집에서 누군가가 구하러 올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 생각하던 당소소의 머리에 문득 서하의 말이 스쳤다. 

- 어디든 길은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참고 견디는 것이더라도.

- 근데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참고 견디는 것 밖에 없다면, 그것도 내가 선택한 길이다 하고 만족해야 하는 건가요?

- 죄송해요, 제가 주제 넘었어요.

"......."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어른들의 눈엣가시일 뿐이다.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숨 붙이고 살려면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권위에 기대어야만 한다. 그러나 당가주의 주도권은 완전하지 않다. 앞으로도 살얼음판을 지속될 것이다. 그럴 바엔...

당소소는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차오르지는 않은 달이 구름에 둘러싸여 홀로 빛나고 있었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서늘한 숲의 공기가 기도와 폐부를 드나들며 흥분한 당소소의 머리를 서서히 식혀주었다. 잠시 진정하니 자연히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녀를 막을 이는 없다. 

방금 이 비도로 꿰뚫어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은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

그때, 조금씩 허공에 스미는 미약한 호흡 소리에 당소소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시비 아이가 덜덜 떨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이 깊게 베인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칼을 맞고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당소소는 그것을 보기 무섭게 어디론가로 달려가, 엎어진 짐수레에서 무명 천이나 약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잠시 피가 멎도록 처치를 해주었다. 얼굴이 창백한 시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 한 문장만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었다. 

"공, 공녀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곧장 산길을 내려가자. 인적이 남아있는 곳을 벗어난지는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으니 갈 수 있을거야. 사람들이 많은 곳에 도달하면, 아무나 붙잡고 내 혼례 행렬이 습격당했다고 알려. 그럼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살려낼테니까. 네가 살 길은 그것 뿐이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소소가 잔뜩 더러워진 겉옷을 벗었다. 그것으로 충년 이후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머리 장식을 감쌌다. 그리곤 시비의 손 안에 쥐여주었다.

"이것도 전해주렴. 그게 내가 널 살려주는 값이야. 무언가를 더 묻거든 모르겠다고만 하고."


"그럼 후회는 없다는 거야?"

청명이 퉁명스레 물었다. 이것이 그녀가 스스로 정한 삶이라면 굳이 끌고 올 이유는 없다. 의술을 전해받을 방법은 당소소가 아니더라도 여럿 있을 터이다. 당소소가 청명을 빤히 바라보며 뭔가를 고민하더니, 침음을 흘렸다.

"으음... 후회도 조금 드네."

"후회할거면서 도망친거냐?"

후회할거면서 이러면서 아버지와 형제들 마음 고생시키고 뭐하는 거냐? 이 못난 녀석이! 라고 쏘아붙이려던 청명을 향해 당소소가 척 제 검지를 뻗쳐 가리켰다. 

"이런 게 우리 집에 굴러들어올 줄 알았으면 그냥 몇년 더 버틸걸 그랬나? 싶어서."

이... '이런'거? 나?

"뭔 소리야?"

당소소가 당황하는 청명을 보고 픽 웃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칼이 아니라 다른거 맞추고 있었으면 좀 달랐을걸?"

"그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그냥 좀 버티다가 집에서 널 홀라당 꼬셔버리는 건데. 어휴! 운도 없지. 내 팔자야."

강호에서 혼자 살아온 여인네의 거침없는 입심에 청명은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당소소가 다리를 쩍 벌린 채 쪼그려 앉고는 장죽 연기를 후 뿜었다. 허공에 번져가는 한줄기 연기가 쓰게 뿌옇다. 

"저기... 나 도사거든?"

그 말에 당소소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마치 호걸의 박장대소처럼 거침없고 간드러진 웃음소리였다.

"기껏 지어낸 거짓말이 그거야? 차라리 박수무당이라고 해라."

"……."

내가 도사라는게 그렇게 못 믿을 일인가? 아무리 도복을 입지 않고 오긴 했지만... 

- 이정돈 예삿일이지.

이 양반이 편은 못 들어줄 망정!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마. 나도 딱히 첫눈에 반하고 그런 건 아냐. 니가 알아줘야 할 마음도 없고. 그저 차기에 절대고수가 될 이의 아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니까."

당소소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까 드러냈다.

"원래 영웅이 된 고수들이 집안에서는 대역죄인인거 알아? 강호를 누비고 협의를 행하고 다니느라 어얼마나 바쁘겠어. 걸음마 떼는것도 보지 못하고 훌쩍 자란 아이들은 제 아비와 데면데면 하고. 부인은 혼자만의 시간들을 버티다가 얻은 은은한 원망을 품고 남편을 보지.

"나, 도사..."

"근데 나는 그런거 없다니까? 나를 챙겨주든말든, 수년 간 집에 들어오든 말든 전혀 신경 안 쓴다고. 그냥 자유롭게 두면 돼."

"너 미쳤냐?"

글렀다고 한탄하더니 왜 갑자기 꼬시려고 하지?

"이렇게 된 김에 지금이라도 매달려봐야지! 없던 연심도 생길 수 있잖아? 설마 아직 연심을 모르는건 아니지?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 말투를 하면서."

당소소가 뻔뻔하게 고개를 내밀고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맞춰왔다. 말린 풀 태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녀의 눈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거라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장문사형...'

청명은 이대로 등을 돌려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약속된 삼일이 지나려면 아직 이틀하고도 반나절이나 남았다.

청명이 이글거리는 당소소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삼일이 아니라 이틀, 아니... 딱 두 시진이라고 할걸...

비무씬 어려움+포타 임시저장이 계속 날아가서 늦어짐...

소소가 보(애칭:보보)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애껴서도 있지만

아직은 다루기 어려워서도 있습니다

제대로 겁먹으면 절대 나오지 않는 기회주의자 뱜이라서

하지만 소소가 쫓겨나던 밤에는 용기내어 탈출해서 가마 속으로 들어왔음 

그렇게 소소는 당가의 루팡이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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