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2차

[금룡송백] 午睡 : 오수

* 짧음

[午睡 : 오수]

 

드물게 한갓진 오후였다. 매일매일, 주야가 어제와-, 또 그제와 같게 돌아가는 나날 중에서도 가끔은 그런 날이 있기 마련이었다. 해야할 일들이 예기치 못하게 손을 떠나는-, 그런 날.

최근 들어 사문 내에서 큰 일이 없다보니 각 전각마다 한가해진 참이었고, 그로인해 오늘은 이쯤하고 쉬어도 괜찮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렇게 금룡은 두시진 가량의 꽤 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럴 때 보통은 조금 부족했던 검을 다시 들기 마련이었으나, 가끔 금룡에게도 모든 것을 잊은 채 한가함을 누릴 시간이 필요 하곤 했다.

 

*

 

금룡은 장 속에서 오래된 금을 꺼내들었다. 어머니가 켜던 것으로 제 손에 넘어온 지 십오년이 넘었다. 자주는 아니나, 그래도 틈날 때마다 연주한 것은 그보다 더 햇수가 오래되었다. 무에 집중하면서 그보다 연주할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을 뿐, 검을 떠나면 여전히 마음이 종종 연주에 기울 때가 있었다.

금룡은 현을 튕겨보며 음을 확인해보았다. 줄의 탄성엔 딱히 문제가 없었으나 그간 오래 손대지 못한 탓인지, 음이 어색하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손을 내려다보니, 손끝도 어색하게 굳어있는 것만 같았다. 금룡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간 수련에만 매진하느라 연주를 꽤 손에 못대긴 했다.

금룡은 잠시 고민하다 금을 옮겨 볕이 드는 자리에 앉았다. 열어둔 창으론 선선한 바람이 나부꼈고, 며칠 전 내린 비로 진해진 풀내음 여즉 가시지 않은 채 향긋하게 방을 메웠다. 드문드문 나무그림자가 바닥을 쓸어대는 것이 제법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 속에서 금룡이 어색한 손끝을 잠시간 굴려보았다. 한참을 그리 현 위를 더듬어보다-, 눈을 감고 줄을 크게 퉁겼다. 진동하는 줄이 디링-, 하며 높은 음을 울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조금 더 낮은 음이 따라붙고, 그보단 높은 소리가 이어 울렸다. 그렇게 몇번의 의미없는 소리가 더 흩어지는 듯싶더니, 금룡이 다시 눈을 떴다. 곧 손끝에서 선율이 퍼졌다.

금룡은 오랜만에 집중하여 손을 움직였다. 검을 움직일 때의 날카롭고 단단하던 손짓과는 달리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현을 내려다보느라 속눈썹이 장막을 드리웠는데-, 어느 순간 기별도 없이 눈이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듣기 좋던 선율이 갑작스레 뚝 끊겼다.

“무슨 일이냐.”

물음을 던진 곳은 창 밖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던 곳에서, 천천히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안다.”

아마 지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음악소리를 듣고 방해하지 않고자 멈춰 서 있었을 것이고.

그런 식이었다. 이송백은.

“고산유수(高山流水)로군요.”

“음악에 영 소질이 없는 것 같더니. 알아는 듣는구나.”

실제로 이송백은 정파에 속한 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다룰 만한 악기 중 그 무엇에도 조예가 없었다. 그럼에도 송백은 뻔뻔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듣는 것은 잘 합니다.”

“종자기(鐘子期)가 따로 없군.”

“하하, 그럼 사형이 백아(伯牙)로군요.”

백아가 금을 타자 종자기가 알아주었다는 노래. 뜻하는 바는 다를텐데도-, 자신이 악기를 연주하자 나타나 이리 대화하는 이송백을 보고 있자니 제법 그럴듯하다 싶었다.

“그럼 내 너를 잃으면 현을 끊어야겠구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말씀 마십시오.”

실없는 농에 제법 진지한 얼굴로 대꾸해온다. 그 모습에 금룡은 피식 웃었다. 송백도 짐짓 굳은 척 하던 얼굴 위로 푸스스 옅은 웃음을 띄웠다.

“연주를 더 하실거라면, 여기서 듣고 가도 되겠습니까?”

“안에 들어오지 않고.”

송백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면 충분합니다. 이 자리에서 보는 풍경이 제법 좋거든요.”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그 아래 창에 사형이 앉아있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았다. 심지어 선율까지 함께 한다면 도원이 따로 없을 터-. 송백은 마루에 앉아 밖으로 다리를 내렸다. 늘 들고다니던 검을 꼭 제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곧게 세워 기대놓기까지 했다.

“듣고 싶습니다.”

연주해주십시오. 요구하는 모습이 제법 뻔뻔하기 이를데 없어 금룡이 기가 막힌 숨을 허-, 하고 내쉬었다.

“명령인 것이냐?”

“제가 어찌 감히 사형께 그러겠습니까.”

능청스러운 놈. 금룡은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자세를 세우곤 금을 내려다보았다. 촘촘히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로, 매끄러운 눈동자가 현을 훑었다.

조금 기다리니-, 아까전 끊겼던 고산유수가 다시 흘러나왔다.

송백은 현 위를 섬세하게 매만지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제법 간질거릴 만큼-, 길고 긴 시선이었지만 금룡은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는 듯했다.

고아한 음 사이로 솨아-, 바람결에 나뭇잎이 자아내는 소리가 더해졌다. 평화로운 노랫자락에 송백이 눈을 감았다.

 

*

 

연주가 끝난 금룡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보이는 장면에 헛숨을 터트렸다.

“허-.”

몇번째인지 모를 기막힌 한숨이었다. 이번 것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나온 것이었다.

금룡은 금을 무릎에서 내려 옆으로 치워두었다. 창가에 가까이 다가가 바깥 기둥쪽에 기대 앉은 송백을 내려다보았다.

“잘도 자는군.”

기울여진 고개하며, 닫혀져 뜨일 생각이 없는 눈꺼풀까지. 아주 다디 단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연주해달라더니.”

어이없는 중얼거림에도 송백은 좀체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괘씸함도 분명 있었으나 어이없음이 더욱 컸다. 금룡은 창가에 기대서서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무언가를 보곤 몸을 바로 세우곤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빙돌아, 송백이 있을 곳을 향해 걷는 동안에도 바람은 조용하게 불었고, 햇볕은 따사롭기만 했다. 아니나다를까, 도착해서도 이송백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잠이 든 채였다.

금룡은 손 끝을 한 번 쥐었다 펴며, 방 안에서부터 눈에 보여 거슬렸던 송백의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 하나를 떼어주었다. 그러자 이파리에 붙어 몇가닥의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금룡은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송백의 머리카락까지 정리해주었다.

하나가 거슬리니 뒤따라 보이는 것이 많았다. 늘 하나로 묶어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 아래로 늘어진 하얀 끈도 하나는 앞에 있고, 하나는 뒤로 넘어가 있었다. 뒤쪽에 있는 끈을 잡아 앞으로 내려주려던 금룡의 시야에 문득 잠든 송백의 얼굴이 들어찼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얼굴이 제법 준수했다. 언젠가 눈 아래를 작게 찢어먹었다곤 해도,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모나지 않은 것이다.

수영(樹影)이 여울진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 갈증이 나는 듯했다.

하얀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 안에서 끈이 주름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금룡은 잠시간의 충동에 몸을 맡겼다.

금룡이 고개를 기울임과 동시에, 입술에 말캉하고 따듯한 온도가 옮겨붙었다. 늘 궁금했던 감각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각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금룡은 더 내리누르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삼키곤-, 그대로 입술을 뗐다. 여전히 감긴 눈을 보며 금룡은 손에서 놓지 못한 끈을 다시금 꾹 쥐었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어깨 앞으로 가지런히 정리까지 해주고서야 금룡이 몸을 틀었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이송백이 조용히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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