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관하여
태섭대만
7대운에 판매한 앤솔로지 『내 우주는 전부 너야』 수록 단편입니다.
나도 당신의 파도가 되고 싶어. 웬만해서는 외부의 풍파에 휩쓸리지 않는 당신이 나한테 휩쓸려서 갈팡질팡하는 게 보고 싶다면, 나는 나쁜 녀석인가? 그런데 뭐, 애초에 문제아로 태어났으니 새삼스러운 비난인가. 그러니까 나한테 잡혀줘. 나 때문에 휘청거리면서 내게 도와달라 손을 내밀어 달라고. 내가 먼저 당신을 발견했는데. 내가 먼저 마음에 두었는데. 당신 옆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면, 꽤 힘들 거 같아.
나를 잡아줘, 정대만.
파도에 관하여
“어이, 송태섭이. 요즘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대만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태섭은 그를 애써 무시하고 몸을 허공에 띄웠다. 이번에도 공은 림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옆에서 한나가 엑스 자를 쳤다. 10번 시도해서 겨우 2개 들어갔다. 태섭은 혀를 차며 뒤통수를 긁었다. 산왕전 이후로도 중거리슛이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감이 잡히나 싶었는지 도루묵이다. 태섭은 대만이 던져준 공을 다시 잡았다.
지금까지는 스코어러인 대만이나 태웅이 든든하게 버티고, 치수가 덩크를 적재적소에 꽂아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굳이 점수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치수가 은퇴하고, 대만의 졸업이 조금씩 다가오는 시점에서 태섭 역시 점프슛을 익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앞으로 좋은 선수가 얼마나 들어오든, 적어도 프리스로만큼은 성공률을 높여야 했다. 산왕전에 두 번의 프리스로를 성공하고, 대만이 4점 플레이로 점수 차를 줄인 것이 큰 교훈이 되었다. 파울을 당해 기회를 얻어도 살리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프리스로라도 잘 넣으면 3점슛도 가능할지도, 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공은 태섭의 말을 따라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태섭의 연습을 지켜보던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태섭의 오른손을 덥석 쥐었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놀란 태섭이 흐아악! 하고 멋없는 비명을 지르며 공을 들어 대만의 얼굴을 쳤다. 뻑 소리가 나면서 대만이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개그 만화 세계관이었다면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겠지만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대만에게 다가갔다. 잘못 넘어져 등이라도 다치면 큰일이다. 이미 북산에는 등 부상으로 재활에 전념 중인 선수가 있다. 하물며 상대가 무릎 부상으로 농구를 그만두기까지 했던 정대만이라 사안이 심각했다. 삼삼오오 흩어져 연습 중이던 후배들이 죄 달려와 대만을 일으켰다.
“선배, 괜찮아요?”
“등은 어때요?”
“코피는 안 났어요?”
“니네 선배 안 죽었다….”
끙끙대면서 나불거리는 모습을 보고 한나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멀쩡하네, 다시 연습하자! 대만은 태섭을 한 번 째려보고는 몇 걸음 떨어졌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친 태섭이 입술을 비죽이며 공을 주워들자, 턱짓으로 골대를 가리켰다. 넣어보라는 뜻인가? 태섭은 3점슛 라인에서 드리블을 하며 레이업 슛을 넣었다. 그러자 대만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태섭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3점 라인을 가리키며 슛을 넣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가르쳐주기라도 할 심산인가. 태섭은 눈썹을 삐쭉 올리며 다시 외곽으로 돌아갔다.
걸어갈수록 골대가 멀어졌다. 정대만은 대체 이 거리에서 어떻게 그런 정밀한 슛을 쏘는 거지. 슈터란 참 경이로운 포지션이다.
태섭은 한참 드리블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다가 몸을 허공에 띄웠다. 제대로 조준하고, 다리에도 충분히 힘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백보드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아깝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벗어난 궤적에 태섭은 아익, 하고 짧게 투정을 부렸다. 대만이 느긋하게 다가와 공을 주우며 말했다.
“제대로 조준을 하지 않으니까 빗나가지.”
“제대로 맞췄거든요?”
태섭은 투정을 부리듯 반박했다. 선배한테 말대꾸는. 대만이 피식대며 태섭의 옆으로 와 섰다. 뭘 하려고 이러나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태섭의 오른손과 왼손을 잡아 흔들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태섭은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뭐, 뭔데요.”
맨살이 닿았다는 데에 신경을 썼더니 말을 더듬었다. 이 형한테는 쿨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막상 옆에 있으면 그게 잘 안 된다. 이러니까 맨날 후배 취급만 받지. 태섭은 툴툴대면서 잡힌 팔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의외로 대만은 태섭이 버둥거리자 순순히 놓아주었다. 아니 뜬금없이 뭔데요. 이 이상 휘둘리기 싫어 날카롭게 말해도 대만은 무덤덤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뱉었다.
“너, 균형이 안 맞다.”
“예?”
“슛 넣을 때마다 뭔가 몸이 기울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직접 잡아 보니까 맞네. 너 중심이 왼쪽으로 쏠려 있다.”
너 왼손잡이냐? 벼락치기 공부할 때랑 여름합숙할 때 봤으면서 대만은 또 엉뚱한 것을 물었다. 오른손잡이거든요, 태섭은 불퉁하게 대꾸했다.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체 왜 그러지’를 반복했다. 곧 원인을 찾기보단 해결책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는지 대만은 태섭의 어꺠를 잡아 오른쪽으로 잡아 당겼다.
“악! 아프잖아요!”
“아, 아팠냐? 미안하다.”
대만은 싱겁게 사과한 후 다시 자기 일에 몰입했다. 그는 태섭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힘을 오른쪽으로 좀 더 줘 봐. 아직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오른쪽으로? 뭐 어떻게 하라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지만 운동 선수인 만큼 태섭은 바로 대만의 지시를 따랐다. 무게 중심을 옮기자 대만이 더더더, 하면서 재촉하더니 그만, 하고 외쳤다. 확실히 전보다 두 발이 지면에 딱 붙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만은 그대로 10초 동안 있으라고 말했다. 평소와 다른 자세로 서 있으니 금방 몸이 떨렸다. 10초가 지나자 대만이 볼 트레이를 들고 와 하나씩 태섭 앞에 던져주었다.
“당장 림에 넣는디고 생각하지 말고, 백보드에 맞춘다는 느낌으로 쏴 봐.”
초보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태섭은 드리블을 두어 번 하고 몸을 허공에 띄웠다. 대만의 자세를 떠올리며 최대한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팔은 쭉 뻗고 몸이 일직선이 되도록.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공을 밀어낸다. 놓고 온다는 느낌으로 던지는 레이업 슛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손끝에서 팔, 전신으로 전해졌다. 밀어내는 힘이 약했는지 림에 맞고 떨어졌다. 백보드에 맞추라는 지시를 따르지 못했는데 대만은 괜찮다는 듯이 다시 공을 건넸다. 이번에도 드리블 후 점프, 50m가 아니라 100m 뒤에 있는 것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힘을 실어 던졌다. 이번에는 백보드에 맞았지만 림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빗겨났다. 대만이 격려했다.
“괜찮아. 몸 균형은 좋아! 그래도 한 번 더!”
어느 새 1학년이 몰려 와 태섭과 대만의 특훈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배이자 주장으로서의 가오가 있지 다 보는 앞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오기가 먼저 들었다. 태섭의 눈에 불이 들어오자 대만이 씩 웃었다.
“이제 제대로 할 생각이 든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요?”
태섭은 날카롭게 응수하고 시선을 들었다. 림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 거리도 끼마득하게 느껴지는데, 3점 라인에서 공을 던져 넣는 놈들은 얼마나 괴물인 거야. 제 팀원 중 둘을 간단히 괴물로 만들어버린 태섭은 대만이 잡아준 대로 균형을 맞추었다. 전신을 똑바로 펴서, 한 번에 뛰어 오른다. 몸이 끝까지 떠올랐을 때, 다시 말해 극점에 도달했을 때 대만이 외쳤다.
“됐다, 쏴!”
태섭이 공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한없이 올라가던 공이 서서히 중력에 이끌려 떨어졌다. 공은 빙글빙글 돌면서, 그러나 어딘가로 벗어나는 일 없이 림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들어가라, 들어가라. 주먹을 꾹 쥔 태섭이 눈앞에 있는 대만을 보았다.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눈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슈터에겐 슈터의 직감이 있다. 포물선을 보고도 들어간다, 안 들어간다를 알아챌 수 있는. 몸으로 쌓은 직감이.
저건 들어가는 공이다. 태섭은 대만의 눈을 보고 알아챘다.
슉 하고 그물망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농구공이 림 안에 들어갈 때 그물에 스치면서 나는 소리 말이야, 꼭 파도 소리 같지 않아? 언젠가 들은 말이 귓가에 들렸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의 말대로 태섭은 공이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렸다. 먼 고향 바다 파도 안에 잠긴 사람.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농구를 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공을 넣으며 몇 번이고 그 시절과 다른 파도를 불러온다. 결코 같지 않은, 그러나 어린 시절처럼 울렁거리는 쾌감과 같은 소리를.
짝짝, 날카로운 박수 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잘했어 송태섭! 이제 알겠지? 어떻게 해야 공이 들어가는지!”
대만이 한달음에 다가와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뭐하는 거예요! 태섭은 성질을 잔뜩 부리면서도 그의 손을 결코 뿌리치진 않았다. 한나와 소연이도 옆에서 같이 박수를 쳤다.
“뭐야, 드디어 하나 넣은 거야?”
“굉장해요 선배! 조금만 더 잘하면 성공률이 금방 올라갈 거예요!”
“겨우 하난데 너무 띄워주지 마라. 버릇 나빠질라.”
대만이 찬물 끼얹는 말을 했지만 태섭의 성공은 모두에게 크고 작은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1학년들은 너도나도 프리스로 연습에 들어갔고, 멀찍이서 보고 있던 태웅은 대만을 조용히 끌고 가더니 3점슛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미 잘하는 놈이 왜 날 찾는데. 대만이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렸다. 태섭은 흥건한 땀을 닦고는 대만에게 다가갔다. 어꺠에 손을 얹어 가볍게 두드리자 엉? 하면서 순진한 얼굴로 돌아봤다. 손에 땀이 다시 차올랐다. 시합 중엔 3점슛 부탁한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는데 ―대만은 나 좀 그만 찾으라며 투덜댔지만 막상 공을 받으면 무조건 공격을 시도했다― 왜 개인적인 부탁을 할 때는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를 않는지. 태섭은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애꿎은 제 발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답답했는지 대만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기며 성질을 냈다.
“얌마, 뭔 생각을 하길래 불러놓고 말이 없어.”
요 작은 머리통 굴려봤자 네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대만이 착, 소리 나게 태섭의 양볼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꾹 눌렀다. 노골적인 동생 취급에 기분이 또 싱숭생숭해졌다. 자신을 이렇게 연하 취급하는 사람은 형이 죽은 이래 없었다. 운동부 후배라면 모를까…. 이러면서 바깥에서 사적으로 만난 적은 거의 없는 게 코메디였다.
채육관에서 농구하다가 연습이 끝나면 헤어지는 관계. 북산 농구부원의 관계는 딱 이 정도였다. 달재는 중학생 때부터 아는 사이었으니 사적인 만남이 잦다고는 하지만 다른 부원과는 공과 사가 뚜렷했다. 지금 태섭은 그 묵시적인 규칙을 깨려고 하고 있다. 금서를 뒤적이는 사람의 기분이 이럴까. 태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일 같이 연습해요.”
“어? 나야 상관없긴 한데. 몇 시에? 나 오후에는 부모님이랑 외식 있어서 안 되는데.”
“그러면 아침 일찍 해야겠네요. 아직 낮에는 좀 더우니까.”
“그래. 아침 여섯 시면 되겠지?”
“네. 아침 여섯 시에. 저기 해변 쪽 야외 농구 코트에서.”
“어? 여기가 아니라?”
대만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으나 태섭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미련없이 등을 돌리고 떠났다. 새끼, 싸가지가 없어…. 대만은 불퉁하게 입술을 비죽이다가 태웅에게 끌려갔다. 아직 공격 한 번 남았어요. 그래 그래 니가 지니까 다급해졌냐? 대만이 피식 웃는 소리가, 소음으로 가득 찬 농구장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태섭은 제 귀를 만지작댔다. 피어싱을 하지 않은 깨끗한 오른쪽 귀를.
주장 신고식 날에는 아대를 두 개 다 끼었지만, 이제 태섭은 손목에 아무것도 차지 않는다. 형의 유품은 어머니에게 돌려주어서 그렇다고 쳐도, 왜 검은색 아대까지 하지 않는지는 스스로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아마, 더 이상 힘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물론 아직까진 그렇다는 말이고, 시합이 잡히면 어떨지는 또 모른다.
태섭은 농구화와 공, 수건과 물통만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인 덕에 날이 선선하다. 스쿠터를 타고 갈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미적거리고 싶은 기분이 들어 걸어가기로 한다. 약속 장소까지의 거리도 가까워서 도보로 20분이면 충분하다. 딱 여섯 시에 도착할 듯하다. 걸음이 가벼워진다. 가까워질수록 정대만 생각이 난다. 그 형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약속을 잊고 늦잠이나 자고 있는 건 아닐지. 농구 한정으로는 성실한 사람이니까―어느 정도냐면, 지난 여름처럼 성적이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며 다시 교재를 펼칠 정도였다― 태섭보다 일찍 나와 연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절반 쯤 왔을 때 태섭은 자신이 약속장소를 애매하게 고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해변 쪽에는 농구 코트가 세 군데 있다. 태섭이 생각한 코트는 가운데에 있는, 바닥이 하얀 코트장이었다. 그들의 첫만남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어쩌면 자신이 오지 않을 코트장에서, 수없이 공을 던져 넣으며 ‘얘는 대체 언제 오는 거람’ 따위의 투덜거림을 뱉고 있을 정대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오기 전에 한 번 전화해볼걸. 그러나 이도 대만이 먼저 외출했다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쩐지 스쿠터를 타고 갈까 싶더니. 태섭은 짧게 뺨을 긁적인 다음, 일단은 약속 장소로 가보기로 했다. 없으면 열심히 뛰어서 찾으러 가야지 뭐. 잔소리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태섭은 걸음을 재촉했다.
숨이 조금 가빠질 때 즈음 코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전히 곧은 자세로, 그때보다 더 정교해진 기술로 3점을 넣는 사람이 하나.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태섭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는 대만이 철장 너머에서 태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4년이 지난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대만이 묵묵히 제 몸을 허공에 던지고, 태섭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섭은 어느 새 숨까지 죽이고 연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고요함 속에 제 소란스러운 드리블 소리를 끼우면 방해만 될 것 같았다.
20번째 슛이 들어갔을 때, 대만은 떨어지는 공을 잡지 않았다. 허리에 손을 짚고 후, 깊은 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구경꾼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태섭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대만이 돌아보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계절은 이제 여름을 지나 가을을 향해 가는데, 그를 마주할 때마다 한여름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멍 때리고 있으니 대만이 아무 신호도 없이 공을 던졌다. 텅, 공이 펜스에 맞아 튕겨져 나왔다. 태섭은 깜짝 놀라 대만에게 항의했다.
“그러다가 사람이 맞으면 어쩔 뻔했어요.”
“내가 너 펜스 너머에 있는 줄도 모르고 던졌겠냐? 그리고 안에 들어와 있으면 뭐, 네가 어련히 받았겠지. 안 그래?”
송태섭은 정대만을 믿는다. 어떻게 패스를 해도 공을 받아서 점수든 흐름으로든 이어주니까. 그렇다면 정대만은 송태섭의 무엇을 믿고 그가 공을 받아주거나 던져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만이 튕겨져 돌아온 공을 잡는 사이 태섭은 코트 안으로 들어왔다. 볕이 들지 않는 그늘에 가방을 내려놓고 자세를 잡자 대만이 공을 넘겨주며 말했다.
“던져 봐.”
“미쳤어요?”
미쳤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태섭은 3점슛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도 거리가 가장 먼 정중앙에. 여기에서 어떻게 넣어. 무리, 완전 무리. 이런 건 서태웅이나 정대만이나 정우성 같은 괴물들이나 가능한 거고. 태섭은 고개를 세차게 젖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나 이미 튀어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 대만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왜, 못 하겠어?”
방금 전까지 무리라며 지레 겁먹었던 주제에 남학생 특유의 무모함과 욱함이 발동했다. 태섭은 공을 툭툭 치며 선전포고했다.
“한 번에 들어가면 형이 점심 사요.”
“내가 설마 후배 밥도 못 사줄까.”
대만이 산뜻하게 웃었다. 오냐, 열 번 다 넣어서 열 번 타먹는다. 태섭은 이를 악물고 골대를 노려봤다. 그냥 거리가 더 멀어졌을 뿐이다. 어제 프리스로 라인에서 성공한 것처럼 던지면 된다. 내가 초짜 강백호도 아니고(강백호 역시 정석적인 자세는 아니었지만 프리스로를 성공했다) 못 넣겠냐. 태섭은 드리블을 한 뒤 공을 잡고 림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대만은 림 뒤쪽을 보라고 했지. 태섭은 림 뒤쪽을 조준하고 양발로 코트를 박찼다. 몸이 떠오르기 직전, 태섭을 응시하던 대만이 툭 말을 뱉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에서 만난 거 같지 않냐?”
“네?”
아래를 보는 바람에 중심이 무너졌다. 다 허물어진 자세로 쏜 공은 림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섭이 노려보자 대만은 깔깔 웃으며 외쳤다.
“야, 그걸 믿냐!”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 아래에 반짝이는 얼굴이 얄밉기만 했다. 태섭은 얼굴을 붉히고 씨근덕대기만 했다. 그치만 진짠줄 알았단 말이야. 당신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다고. 태섭은 억울해서 대만의 등만 눈으로 좇았다. 대체 왜, 항상 휘둘리는 건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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