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伏魔殿)

[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3

구 탐정 정대만

"괜찮은 겁니까?'

조수석에 앉은 동오는 뒷좌석에 앉은 명헌을 백미러로 보며 물었다. 명헌은 플라스틱 총을 만지작거리며 뭐가? 라고 되물었다.

"정대만 말입니다. 괜히 끌어들이는 건..."

동오는 말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사이드미러로 옮겼다. 지금까지 대만에게 의뢰를 맡긴 건 자신이었다. 전직 경찰 출신인 그를 이용해먹기 좋겠다라는 생각에서 몇 번 의뢰를 했고 대만은 생각보다 싫은 기색없이 의뢰를 받아줬다.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고 방심하고 말았다. 대만을 끌어들인 일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동오의 눈빛을 읽은 명헌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야뿅."

명헌은 플라스틱 총을 옆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허윤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이야뿅."

명헌은 사무실을 떠나기 전 대만의 요청대로 그가 모르는 사실에 대해 알려줬다. 왜 허윤진을 찾는지, 산왕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전부는 아니지만 그가 알아야 할 만큼 알려줬다. 얘길 듣는 그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깊어지는 미간의 주름이 대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줬다. 

"미꾸라지가 개울물을 흐리고 다니겠다 하면, 그거까지 계산에 넣어 이용할 뿐이야뿅."

백미러에 비친 명헌의 얼굴에선 그 어떤 곤란도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명헌과 그 일당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대만은 줄담배를 피워댔다. 사건이 심상치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자신의 생각 이상이었다. 

'이건 산왕의 운명을 가를 다툼이지뿅. 거기에 눈치없이 경찰이랑 네가 끼어든 것뿐이고'

"운명은 개뿔..."

대만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그래봤자 지들 밥그릇 두고 싸우는 것밖에 더 돼? 대만은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헌이 그에게 준 정보에 거짓은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확언할 수 없었다. 산왕으로부터 이 이상의 정보를 얻는 건 어려울 게 뻔했다. 그렇다고 경찰쪽에서 정보를 기대하는 건 더 어려웠다. 채치수는 그렇게 쉽게 일반인에게 정보를 넘기는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해야할 건 하나였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대만은 어수선한 사무실을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갔다. 이런 정보에 능할 자신의 친구를 찾아서.

***

허윤진의 사망은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채 은밀하게 수사가 진행되었다. 피해자의 신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검결과는 아직이었지만 단순 살인이 아니다 라는 것만은 확실했고 그건 강력 1팀도 경찰 윗선도 모두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마약수사팀과 공조하기로 했다."

"잘 부탁해. 강력 1팀 여러분."

"한나랑 수사라니...말도 안돼. 이거 꿈인가"

태섭은 강력 1팀 회의실로 찾아온 마약수사팀 이한나 형사를 보고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치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팔짱을 꼈다. 둘이 연인 사이인 건 경찰서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공사를 구분 못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치수는 송형사 하고 나지막히 그를 불렀고 한나를 보며 넋놓고 있던 태섭은 움찔거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수사 중에 정신 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텐데."
"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럼, 일단 산왕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부터 진행할게요. 앞으로 수사를 계속 하려면 다들 알아둬야 하는 사항이니까."

한나는 회의실에 불을 끄고 미리 준비해둔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하자 치수도 팀원들 옆에 앉았다. 벽에 설치해둔 스크린에 산왕의 조직도가 비춰졌다. 최상단에 있는 보스 도진우와 그 밑으로 있는 행동대장들 그들이 각자 무슨 역할을 하는지 꼼꼼하게 적혀 있는 조직도에는 피해자 허윤진의 얼굴도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피해자 허윤진은 산왕의 조직원이었고 거기서도 마약 국내유통을 도맡고 있었어. 사실 산왕은 8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다른 조폭들과 다를 거 없이 룸살롱. 소위 말하는 물장사로 돈을 버는 조직이었어. 그런 산왕의 조직 색깔이 바뀐 건 마약 밀매에 손을 대면서였지."

한나가 화면을 넘기자 스크린에 세계지도와 함께 압수수색을 당하는 공장의 사진들이 떴다. 지도 중에서 아프리카 쪽 지도엔 붉은 색으로 몇군데 동그라미 쳐진 곳이 있었다.

"처음엔 해외에서 마약을 밀반입해 국내에 유통하는 정도였지만 점점 유통시키는 양이 많아지더니 급기야 해외에 자신들의 마약 공장을 만들기 시작했어. 그렇게 만든 공장이 우리가 파악된 것만 5개. 그 중 3개를 현지경찰과의 공조로 폐쇄시켰지만 2개는 산왕쪽에서 먼저 정리하고 숨어버렸지. 폐쇄시킨 공장도 산왕과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어. 배후로 지목돼서 잡힌 이들은 산왕과는 관련 없는 이들이었고."

한나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가는 걸 보고 태섭은 덩달아 인상을 썼다. 우리 한나한테 저런 표정을 짓게 하다니...

"마약 제조 및 유통으로 번 돈으로 산왕은 급격히 세를 불려나갔고 현재는 국내 조폭들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게 됐어. 현재 국내에 유통되는 마약의 절반은 산왕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지. 수사팀에서도 이것들 잡아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꼬리자르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놈들이라 항상 잔챙이들만 체포했어. 그런데 그런 산왕에게도 변화가 찾아왔어."

"변화요?"

가만히 듣고 있던 태웅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크린에는 맨 처음에 보았던 산왕의 조직도가 다시 비춰졌다. 조직도 맨 위에 있는 인물을 가르키며 한나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1년 전, 산왕을 이끌던 보스 도진우가 최근에 갑자기 사망했고 그 뒤를 2인자인 이명헌이 차지했는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어."

보스 도진우라고 적힌 조직도 밑에는 상당히 젊은 것으로 보이는 이명헌의 사진이 있었다. 

"너무 젊지 않아요? 많이 봐야 섭섭이 만한 것 같은데?"

"선배님이라고 했지."

"맞아. 송형사보다 한 살 더 많을 거야. 채팀장님이랑 동갑이겠네. 이명헌은 10대 때부터 산왕에 몸 담고 있어서 나이는 어리지만 뒷세계 경력으론 뒤지지 않지. 그래서 그런지 도진우의 총애를 받아 2인자 자리까지 올랐지. 2인자가 젊은 피니까 그를 따르는 이들도 자연스레 젊은 편이야. 간부들로부터 신뢰도 높아서 보스감으로는 손색이 없긴 해. 그런 이명헌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한나는 이명헌의 사진 옆에 있는 또 다른 남자를 가르켰다.

"그 한명이 바로 이 녀석. 김현수야. 산왕이 마약에 손을 대게 된데 가장 큰 공로가 있는 놈이지. 이 녀석이 현재 산왕의 마약제조 및 유통을 총괄하고 있어." 

"그렇다는 건 저 놈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거네요."

"뭐, 비슷한 거지. 마약 유통으로 조직에 가져다 준 이익이 막대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김현수의 입지가 올라갔고 도진우가 사망하기 전까진 이명헌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인물이었어."

"쳇, 그래봤자 조폭들이면서 후계자라니 웃기지도 않아."

태섭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무슨 지들이 왕족이라도 돼? 라면서 투덜대는 그의 말에 한나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진우가 죽고 그의 유언장대로 이명헌이 보스 자리에 올랐는데... 김현수는 그걸 순순히 납득하지 않았어. 그래서 이명헌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다고 해."

"그래도 되는 거에요? 거 뭐냐 상명하복? 그런 거 중요하지 않나? 그쪽 세계에선?"
"원래라면 조직에서 축출되고도 남을 사안이지만 아무래도 산왕의 가장 큰 돈줄인 마약을 총괄하는 위치다보니까 이명헌도 손을 쉽게 못 대는 모양이야."

"..후계싸움이 아직도 진행 중인거네요."

"응, 그렇다고 봐야지. 근데 단순한 후계싸움이 아니야. 다른 문제도 있어."

스크린에 비친 화면이 다시 한번 넘어갔다. 그러자 이번엔 어느 계좌의 내역이 보였다. 계좌의 잔액은 0원이었다.

"이건 산왕에서 가지고 있는 계좌 중 하나야. 여기에 있던 건 도진우가 사망 전 마약 제조 및 판매 건으로 생긴 금액의 일부로 만든 비자금이지. 그 금액이 20억이야. 근데 이게 감쪽같이 사라졌어. 시기 상으로 보면 도진우의 사망직후에 빠져나건 건데... 이 돈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유언장에도 이 비자금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고 해. 이명헌도, 김현수도 이 20억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고.. 아마 이번 피해자 허윤진이 사망한 것도 이런 산왕 내부의 알력 다툼과 비자금의 행방과 관련이 깊을 거라고 생각해."

"으... 피해자 발견했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번 사건 만만치 않겠네."

태섭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태웅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턱에 손을 대고 말없이 화면을 쳐다봤다.

"일단 브리핑은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산양 놈들 내부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겁니까? 이런 걸 그쪽에서 외부에 알리고 다닐 리도 없는데"

"저도 그게 궁금해요."

"야, 새치기 하지마! 내가 먼저 물어봤거든?"

백호는 눈을 흘기며 맞은 편에 앉은 태웅을 쳐다봤지만 태웅은 그런 백호를 무시한 채 한나를 쳐다봤다.

"정보가 너무 상세한데요. 내부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모를 정보잖아요."

"그건..."

한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말이 없다가 뭐 괜찮겠지 라며 팔을 풀었다.

"그건, 우리 쪽 스파이가 산왕에 있기 때문이야."

"스파이?"

"여기서부터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기밀사항이야. ....5년 전 우리는 산왕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려고 팀원 중 하나를 산왕의 조직원으로 투입시켰어. 조직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고"

"그래도 되는 거에요?"
"작전을 위한 거니까. 그리고 윗선에는 제대로 허락 받고 한거야. 넘겨준 정보가 특별히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아, 누군지는 말 안할거야.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라는 말도 있잖아?"

백호는 그런 게 어딨냐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한나는 씩 하고 웃어줄 뻔이었다. 

"어쨌든 마약 수사팀에선 이걸 기회로 보고 있어. 산왕을 완전히 박살낼 기회로... 그러니까 강력 1팀도 전력을 다해서 협조해주면 좋겠어. 이번엔 진짜로 그 빡빡머리들 다 잡아넣을 거니까."

"당연히 전력을 다하지! 걱정마 한나야!"

"이형사랬지. 자, 그럼 브리핑은 여기서 마칠게. 관련 자료는 전부 정리해서 넘겨줄테니까 다들 꼼꼼히 읽어보고.. 채팀장님, 부검 결과는 언제 나온대요?"

"권 검시관 말에 따르면 내일 중으로는 나온다고 하더군. 부검서가 나오면 바로 마약수사팀에도 공유해줄테니 걱정말도록."

치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팀원들을 바라봤다.

"이형사 말대로 이건 조직 산왕을 뿌리채 뽑아 박멸할 기회다. 그러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사에 임하도록. 상대가 상대인 이상 위험한 상황이 얼마든지 나올 수도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하도록. 그럼 이만 해산."

치수의 말을 끝으로 수사팀의 회의는 종결됐고 한나와 치수는 앞으로의 수사 방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에 남았다. 태섭은 백호와 태웅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와 자신들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들의 책상에는 한나가 가져놓은 것으로 보이는 사건 파일들이 놓여 있었다. 백호는 자기 자리에 앉아 사건 파일을 하나씩 넘겨 읽었다.

"스파이가 있으면 그런 거까지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냐? 왜 알려주고 그런데 쪼잔하게."

"야, 강백호 너 지금 누구보고 쪼잔하다는 거야 어? 그리고 너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뭐? 말이 심하네 섭섭이"

"선.배.님 이라고 부르랬지."

태섭은 팔짱을 낀 채 백호를 쳐다봤다. 백호의 옆에서 턱을 만지며 사건 파일을 읽던 태웅은 뭔가 생각난 표정으로 태섭을 쳐다봤다.

"...이미 말해주고 있었네요. 누가 스파이인지."

"오, 서형사는 눈치챘나보네. 누구누구씨보단 낫네. ...맞아 정확히 누구라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스파이 후보는 알려준 거라고."

"뭐야? 뭔데? 나도 알려줘."

전혀 감을 못 잡은 표정을 한 백호를 보며 태섭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데서 눈치가 없네. 이 녀석... 눈을 껌벅이며 아무것도 몰라요 상태인 백호를 보고 태섭은 팔짱을 풀고 다가갔다.

"자, 생각해봐. 아까 전에 네가 물었잖아. 어떻게 그렇게 산왕 내부 정보를 잘 아냐고."

"그랬지."

"한나는 거기에 스파이가 있다고 대답했고."

"응"

"근데 그 정보라는 게 그냥 말단조직원이 얻을 수 있는 정보냐는 거야. 일개 조직원이 전 보스가 만든 비자금 같은 얘길 알 수 있겠냐고."

백호는 팔짱을 끼고 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정보...조직원...보스.....간부..... 뭔가 생각난 듯 백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이제 알겠어? 말단은 물론 그냥 일반 조직원이라고 해도 그런 정보를 아는 건 택도 없는 일이야. 적어도 간부급은 돼야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 그리고 아까 한나가 보여준 산왕 조직도에 간부들 사진이 쭉 걸려 있었지."

"그렇다는 건..."

"그들 중 하나라는 거야. 경찰 쪽 스파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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