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왜 뽀뽀를 해가지곤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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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거기 공 좀 주워주세요.」

「태섭아, 중식이 좀 봐줘라.」

「선배, 여기 포카리요.」

「드리블 치는 데 힘 너무 많이 들어간다, 손목 힘 빼고 해라.」

평소와 같은 대화지만 그 사이에 드문드문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대만은 씩 웃으며 공을 던져주었을 테고, 태섭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대거리를 했을 텐데, 오늘은 둘 다 너무 얌전했다. 바보트리오의 첫째 둘째 같지 않다는 느낌. 둘 다 이상하게 서로를 신경 쓰고 있었고, 둘 다 닿기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오일이가 다가가서 설마 대만이 형이랑 싸웠냐고 물어보고, 중식이가 태섭이 선배와 안 좋은 일이 있었냐고 넌지시 떠보아도, 둘 다 완전 괜찮다고 기계적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뭔가가 있었고,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심지어 서태웅조차 그 이상꾸레한 공기를 느낄 정도로.

「오늘은 여기까지! 돌아가서 푹 자고, 내일 일곱 시에 보자!」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도 안녕히 주무십쇼!」

기합이 잔뜩 들어간 1학년들은 기세 좋게 대답하고는 저들끼리 모여 쑥덕였다. 야외 농구장에서 더 하고 들어갈래? 원온원? 2 대 2도 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달재 선배 끼워서 같이 하자고 하자. 태섭이 선배나 대만이 선배는…. 안 되겠지? 솔직히 그 두 분은 너무 사기잖아. 그리고 오늘 왠지 둘이 같이 붙여놓으면 안 될 거 같기도.

치수가 은퇴하면서 주전 자리가 하나 비자, 1학년들은 너도나도 스타팅 멤버가 될 거라며 제 나름대로 분발하고 있었다. 백호가 부상으로 잠깐 빠진 것도, 1학년의 각성에 보탬이 되었을지 모른다.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기특하다가도, 한편으로는 해도 되지 않을 걱정을 시킨 거 같아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태섭은 괜히 제 옆에서 더블팩 안에 수건과 유니폼을 쑤셔 넣는(아니, 실제로는 매우 곱게 칼각을 맞추어 접어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대만을 흘겨봤다. 대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짐을 챙기다가 태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을 흐렸다. 뭐, 왜. 따라 인상을 쓰니 더 미간을 구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다, 내가 저 인간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태섭이 한숨을 쉬며 더블팩을 어깨에 멨다.

「내일 뵈요.」

「오늘은 뽀뽀 안 할 거냐?」

태섭은 저도 모르게 락커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쾅, 소리가 정적으로 가득 찬 탈의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워, 저렇게 때리면 손마디 안 아픈가. 대만은 태섭이 평생 이해하지 못할 생각을 하면서 잔뜩 힘이 들어간 태섭의 주먹과 팔뚝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래 전에 해먹은 앞니가 갑자기 시려워졌다. 태섭이 주먹을 거두곤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개소리 좀 작작해요.」

「개소, 야!」

이 새끼가 지금 선배에게 뭔 개싸가지 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따끔하게 호통치려 했으나 태섭이 먼저 자리를 비워버렸다. 태섭은 내일 보자는 말에 대한 답도 듣지 않은 채 잽싸게 문을 열고는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찌나 세게 문을 밀쳤는지 미닫이문이 그 반동으로 닫히면서 쾅!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냈다. 저런 식으로 열고 닫으면 얼마 안 가서 문이 걸레짝이 되겠는데. 대만은 허망하게 자기 혼지 열리다 닫히기를 반복하는 부실 문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길이길이 놀림감이 되지 않기 위해선. 그러나 문을 잠그려던 대만은, 태섭이 부실 열쇠를 든 채 도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이 새끼가 진짜! 정신을 어따 빼먹고 사는 거야!

태섭은 학교 뒤편 주차장에서 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다가 부실 열쇠를 그대로 들고 온 것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가 그것이었던 탓이다. 아, 왠지 지금 가면 정대만이랑 마주칠 텐데. 그러나 사적인 이유로 주장의 의무를 버릴 순 없었기에 태삽은 한숨을 푹 흘리며 제 발로 탈의실로 돌아갔다. 아니나다를까 부실 앞에서 대만이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 서서 태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섭이 옆으로 치우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비켜봐요. 잠그고 나오게.」

「해보던가.」

순순히 협조하면 정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만은 문간에 딱 붙어선 태섭을 째려보고 있었다. 이게 지금 나랑 뭘 하자는 건데. 이쯤 되니 태섭도 성질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대만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나, 이렇게 제 고집대로 굴어봤자 대만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후배랑 악다구니 나누는 것밖에 더 얻을 게 있을까. 그런데 왜 자꾸 이러는 건지. 태섭은 대놓고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고 으름장을 놓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라고요.」

「그럼 넌 왜 그때 안 비켰는데.」

「뭐가요.」

계속 대화가 헛돌고 있다. 대답을 듣고 싶은 사람과 대답하길 거부하는 사람이 긴장의 양쪽 끝을 잡고 팽팽하게 잡아 당기고 있었다.

먼저 화딱지가 날 줄 알았는데, 대만은 아무 말도 없이 송태섭만 노려봤다. 네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죽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시위하듯이. 그 기색에 태섭이 먼저 화가 머리 끝까지 도달했다. 태섭은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쿨하지 않았다. 뭐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1학년 때부터 문제아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태섭은 신경질적으로 줄 한쪽 끝을 내팽개치고 언성을 높였다.

「뭐요, 그럼 공공연하게 얘기할까요? 우리 입술 부볐다고?」

「말 똑바로 해라. 니가 멋대로 키스한 거다.」

「어쨌든 선배도 안 피했으니까 쌍방과실이잖아요. 뭐 그럼 나는 벽에다가 입맞췄나?」

「어, 졸라 맞네. 벽에다가 키스한 거.」

「지금 치사하게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에요?」

「치사한 건 너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토꼈잖아. 난 그게 첫 키스였다고 새끼야!」

첫키스였다고 새끼야! 단 둘만 있는 탈의실과 체육관에서 대만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태섭은 턱이 떨어진 사람처럼 경악에 찬 눈으로 입을 벌리고 대만을 쳐다봤다. 아 썅 괜히 말했다. 대만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제 머리카락만 사납게 헤집었다. 태섭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폭탄을 떨구었다.

「헐…. 그 나이 먹고 첫키스요?」

「야 뭐 사람이 이 나이까지 키스 한 번 안 하고 그럴 수도 있지 넌 어디서 새빠지게 구르고 왔나 보다?」

태섭의 순수한 동시에 잔인한 질문에 대만은 욱해서 아무렇게나 쏘아댔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몰아쉴 때에야 태섭의 표정이 보였다. 그런데 쟤, 왜 저렇게 얼굴이 빨갛냐. 뛰어오느라 뻗은 열은 진작 식었을 텐데. 나랑 대거리할 때도 저렇게 시뻘겋진 않았던 거 같은데…. 아 설마. 험한 말과 함께 머릿속에 레드라이트가 켜졌다. 대만은 방금 전 태섭과 똑같은 표정으로(그러나 더 당혹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태섭을 가리키며 물었다.

「야…. 너 설마 아다냑.」

「으아아아아악!」

태섭이 영문 모를 비명을 지르면서 대만을 향해 부실 열쇠를 던지고는 냅다 복도 밖으로 도망쳤다. 졸지에 얼굴에 묵직한 금속 열쇠를 맞은 대만은 얼굴을 부여잡고 한참 끙끙대다가 부실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거 이 부러지면 니가 변상해라 개새꺄!!!」

그나저나, 저리 격한 반응을 보이며 도망치니 정말 궁금해졌다. 과연 송태섭은 동정일까, 후다일까? 어느 쪽이든 꽤 열받을 것 같았다.

그러게 왜 뽀뽀를 해가지고

 

「야.」

「왜요 또.」

태섭은 안면 근육을 총동원해 인상을 쓰면서 대만을 째려봤다. 3학년이, 그것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학교 양아치 넘버원으로 불리던 선배가 2학년 복도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다들 눈치를 보면서 그와 함께 있는 태섭을 피해갔다. 하 진짜 도움이 하나도 안 돼. 태섭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최대한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자 대만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따졌다.

「말 좀 이쁘게 하시지?」

「아니 여기서 뭘 더 예쁘게 말해요.」

「저저 말투 띠꺼운 거 보소.」

「선배 말투도 띠겁거든요.」

3학년 일짱에게 띠껍다고 대놓고 말하는 2학년이라.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닌 척을 하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지루한 학교에서 연애와 싸움은 가장 큰 흥밋거리였다. 아예 복도 쪽 창문을 열고 구경하는 정신머리 없는 녀석도 있었다. 대만은 그들을 흘겨보다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주임 선생을 목격했다. 아, 걸리면 골치 아픈데. 대만은 눈짓으로 아직 사태 파악을 못한 주임을 가리켰다. 태섭이 똑같은 바라보더니 먼저 손으로 나가는 제스쳐를 취했다. 대만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움직였다. 야 이 새끼들아 곧 있으면 종 치는데 어딜 처나가! 고함을 지르던 주임은 문제의 두 명이 농구부의 그 문제아들이라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무작정 대만을 따라갔더니 하필이면 본관 뒤편이었다. 몇 달 전 양아치 정대만 무리에게 시비 털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와 여기 추억의 장소네 그쵸? 태섭이 모른 체 하며 말했다. 대만이 태섭으 째려보며 다시 따졌다.

「그래서 너 왜 그랬는데.」

「뭘요. 아 혹시 화요일 연습게임에서 선배 말고 달재에게 패스한 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쪼잔하네.」

「아니 내가 그것 때문에 그랬겠냐? 그때는 위치상으로나 나한테 몰린 선수 수로 따지나 달재에게 패스를 주는 게 더 성공률이 올라가니까 그럴 수 있지. 나 농구로 쪼잔하게 그러는 사람 아니다.」

일부로 달재 이야기를 하자 대만은 욱하면서 그쪽에 정신이 팔려 주절댔다. 이대로 주의를 돌려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귀신 같이 알아챈 대만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 이걸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지.」

「아씨 좀만 더 했으면 성공이었는데.」

「꼼수 그만 쓰고 말해라. 왜 키스했냐고.」

아오, 왜 나한테 이래. 태섭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굳히고 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이 잘 붙어 있나 확인하려고요. 됐어요?」

결국 한 대 얻어 맞았다. 넌 오늘 연습할 때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대만은 으름장을 놓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어딜 가느냐고 물으니 출석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또 역정을 냈다. 요즘 수업 때는 졸지 않고 열심히 듣는다더니.

대만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태섭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수업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겠다, 옥상에서 남은 시간을 때울 요령이었다. 날도 좋은데 낮잠이나 잘까, 그러나 그 생각은 계단을 한 칸씩 밟아 올라갈 때마다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진짜 왜 그 선배한테 뽀뽀한 거지?

 


 

사건의 발단은 바로 지난 주 목요일이었다.

그들은 이른 오전부터 체육관에 나와 패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목표는 완벽한 타이밍. 태섭의 노룩 패스도, 그것을 받아 바로 슛을 쏘는 대만의 기술도 정교했으나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치수가 은퇴를 하면서 스크린을 만들어줄 멤버가 없어졌기 때문에, 대만은 자력으로 수비를 뚫고 나와야 했다. 반대로 태섭은 그렇게 공간을 만들어낸 대만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곳으로 완벽한 패스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 인터하이가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패스를 받아 슛으로 연결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그 연습을 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원온원이 이어졌다.

그 날은 두 사람이 특훈을 시작한 지 정확히 한 달 째가 되던 날이었다. 더워서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말이 맞는지 대만은 평소보다 컨디션이 별로였다. 그렇다고 연습량을 줄이거나 일찍 끝내는 일은 없었다. 태섭은 컨디션 관리를 위해 10분 일찍 마치려고 했으나 대만이 봐주지 않았다. 야 넌 선수 컨디션이 별로라고 농구 시합 시간이 40분에서 30분으로 줄어드는 거 봤냐. 그렇게 떵떵거린 주제에 30분 만에 녹초가 되어 코트에 퍼졌다. 태섭은 혀를 차면서 대만을 일으켜 세우곤 수건과 물병을 안겨 주었다.

「어쨌든 한 시간만 채우면 되잖아요. 농구 시합에서도 선수 컨디션이 별로면 선발로 안 보내요.」

「어…. 고맙다….」

대만은 심하게 헐떡대면서 벤치로 돌아가 물병을 열려고 했다. 손이 심하게 떨리는 탓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태섭이 대만이 또 이상한 생각에 잠기기 전에 선수를 쳤다. 냅다 물병을 빼앗아 뚜껑을 열어준 다음 도로 대만에게 건넸다. 마셔요, 대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목을 축였다. 태섭은 그 앞에 팔짱을 낀 채 쳐다보다가 물었다.

「요즘 계속 잠을 못 자네. 더워서 그런가?」

「아무래도. 야 어떻게 8월 밤보다 9월 밤이 더 덥냐.」

대만은 투덜거린 다음 다시 물병을 비웠다. 체육관 문이 열리더니 안 선생님이 들어왔다. 대만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싶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벤치에 앉아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두 분 다 아침부터 열정적이군요, 그 말로 화두를 뗀 안 선생님이 태섭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태섭 군, 잠깐 시간 될까요.」

「네? 아, 네.」

무슨 일이지. 주장을 부를 일이라면 친선 시합이나 연습경기 이야기일 거 같은데. 태섭은 대만이 목에 걸쳐놓은 수건을 머리 위에 얹은 다음 말했다.

「저 금방 올게요. 좀 쉬고 있어요.」

「어. 땀 식기 전에 갔다 와라.」

대만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예상대로 그가 태섭을 부른 이유는 친선경기 때문이었다. 무량금융고등학교라는 곳인데, 바로 지난 학기에 농구부가 신설된 곳이었다. 기량을 확인할 상대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 근방의 고등학교 농구부는 다들 현 대회 우승 강력 후보들이라 레벨이 맞지 않아 북산에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 요청은 언뜻 북산의 현재 기량이 신생 농구 팀과 비슷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대만이 들었으면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냐>하고 한참이나 투덜거릴 발언이었지만, 태섭은 벤치 선수들의 기량을 확인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치수와 준호가 은퇴하고, 태웅은 국가대표 소집 중, 여기에 백호는 부상으로 휴식 중이니, 네 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어떻게든 벤치를 주전으로 꾸려 경기를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재를 제외한 나머지는 정식 경기를 뛰어본 적이 없기에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태섭은 아주 잠깐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애들 실력 좀 확인해보고 그러죠. 장단점도 찾아보고. 태섭의 시원한 대답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무량금융고 감독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안 선생님은 태섭에게 말했다. 한나와 다른 학생들에게 말해주세요.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 일주일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준비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태섭은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중에 생각했다. 현 북산 멤버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이 대만이니, 어쩌면 그가 센터 자리로 갈 지도 모른다. 병욱이도 좀 크긴 했지만 치수나 그만큼 스크린과 견제에 능한 건 아니었다. 이 참에 스크린 연습을 집중적으로 해볼까. 치수 선배가 멘토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선배도 직감으로 움직이는 편이라(이런 생각을 하면서 태섭은 자신이 발칙하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과연 잘 될지…. 대만 선배가 센터로 빠지게 된다면 누가 슈팅가드를 하지. 최근 호식이가 대만 선배에게 감동 받았는지 매일 3천 번씩 슈팅 연습을 하던데. 내일 불러서 한 번 시켜봐야 되겠다. 꽤 괜찮으면 인터벌 연습을 시켜야지. 상대의 견제를 빠져 나오는 게 관건이니까…. 아 그런데 리바운드는 좀 아슬아슬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안고 체육관 문을 열었다. 대만은 벤치에 앉은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잘 거면 편한 자세로 자든가, 하여간 사람 신경 쓰게 만드는 데 도가 텄어. 태섭은 허리를 숙인 채 조용히 자고 있든 대만을 살폈다. 평소에는 얼굴이 시끄러워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조용한 정대만은 수수하면서도 화려한 인상이었다. 머리카락은 고운 생머리인데, 짧게 자른 탓에 뻗쳐 있는 것이 소년 같았다. 반면에 눈썹과 턱선은 진해서 남자다웠고, 콧날은 선명하고 곧게 서서 어른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 은근 속눈썹이 길구나. 태웅이만큼 길거나 많지는 않지만 예쁘장한 인상에 한몫 하는 속눈썹을 가만히 구경하던 태섭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눈가를 살살 만지고 내리깔린 속눈썹을 만져도 대만은 깨지 않았다. 태섭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젖살이 덜 빠진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제가 낸 턱 흉터를 가만히 쓸어보고는, 점차 입가로 다가갔다.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섭이 천천히, 소리 없이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댔다. 침 삼키는 소리도 심장 소리도 너무 컸다. 그럼에도 대만은 깨지 않았다. 덕분에 태섭의 손은 파렴치함을 모르고 대범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엄지가 입꼬리에 닿았다. 평소엔 거친 말이나 시끄러운 고함, 웃음소리만 내는 입술은 의외로 말랑했다. 이 부분만 이질적이었다.

한참이나 입술을 만지작대던 손이 물러남과 동시에 태섭은 대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하지만 태섭은 양심이 내는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대만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살며시 겹쳐 보았다. 따로 뭔가를 바르지 않는 입술은 예상대로 거칠었으나 너무 뜨거웠다. 태섭은 멈추지 못하고 한참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뭐하냐.」

대만의 입술이 움직였다. 태섭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쪽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그 짧은 순간 어찌나 빨리 기어갔는지 어느 새 대만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대만은 머쓱한 표정으로 태섭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기겁까지 할 일….」

태섭은 더 듣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체육관을 나갔다. 워낙 정신머리가 없어 짐을 죄다 라커룸에 두고 왔다는 것까지 까먹고 집까지 내달렸다. 대만은 휑하니 열린 체육관 문을 쳐다보고는, 와, 하고 어이없어 하는 탄식을 뱉었다. 아니 키스당한 건 난데 왜 지가 지레 놀라서 도망치냐….


 

태섭은 지금 매우 초조했다. 무량금융고와의 연습경기가 이번 주 수요일이다. 그 전에 대만과 어찌저찌 오해를 풀긴 풀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 틈이 안 났다. 대만을 불러내 단둘이 이야기하려고 하면 다른 애들이 픠드백을 받으러 다가왔다. 그러면 또 거기에 집중하다가 대만과 의견 충돌로 말싸움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대만이 내 말대로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구시렁대면서 멀어지면 그제야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하고 떠올랐다. 이걸 거의 사흘 째 반복하고 있으니 태섭도 미쳐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었다.

태섭은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단둘이 남아 연습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금요일부터 어제까지, 이 패스 연습 시간에 제대로 된 연습이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대만과 태섭 둘 다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으니까. 이러면 안 된다. 오늘에야말로 끝장을 봐야 한다. 태섭은 어색하게 공을 만지는 대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선배, 우리 얘기 좀 해요.」

쫄지 않은 척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는 덤이었다. 싸움과 대화의 기본은 기세다. 뭘 하든 기가 가장 센 놈이 이긴다. 일종의 선빵 필승 공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역시나 대만은 살짝 쫀 얼굴로 태섭을 보았다가, 똑같이 힘이 들어간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짚으며 대꾸했다.

「뭔 얘기. 니가 먼저 말 돌리면서 피했잖아.」

「이번엔 선배가 뭐라고 하든 안 피하고 답할 테니까, 얘기 좀 하면 안 돼요?」

「그럼 내가 먼저 물어봐도 되냐.」

「지금 먼저 말 꺼낸 사람은 난데요.」

아, 이게 아닌데. 태섭은 관성적으로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이렇게 영양가 없는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 그때 있었던 일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사과하고, 깔끔하고 쿨하게 끝내야 하는데. 이상적인 루트와 달리 상황은 계속 질척하고 꼬이고 엉키고 있었다.

태섭이 초조하게 입술만 잘근거리는 게 대만의 눈에 안 보일 리 없었다. 저거 저거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 거 봐라.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새끼. 대만은 자신이 태섭을 은연중에 귀여워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타들어가는 태섭의 속이나 구경했다.

첫키스는 맞지만 대만은 딱히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남이랑 입술 부빌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대만이 가장 신경 쓰이는 지점은 태섭의 반응이었다. 그냥 <키스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한마디면 끝날 일을 이날까지 질질 끌고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왜 했느냐고 추궁하니 자꾸 다른 소리만 하면서 대만이 궁금한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입이 무거운 건지 그래서 외려 가벼운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대만이 먼저 한 발 물러났다. 어차피 제가 여기에서 자존심 세우며 바락대봤자 태섭은 더 뒷걸음질 치고 도망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틈을 내주면 된다. 저녀석이 뻔뻔하게 비집고 들어올 틈을.

대만은 공을 쥔 채 태섭을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태섭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태섭은 순간 몸에서 힘을 빼며 대만에게 다가왔다. 험한 발걸음이었으나 대만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드디어 두 사람이 서로를 똑바로 바라본 채 섰다. 태섭은 발끝을 한 번 쳐다봤다가, 용기를 내 대만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몰래 뽀뽀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잘 하네.」

대만은 태섭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고는 먼저 골대 밑으로 향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쫄래쫄래 그를 따라갔다. 대만이 공을 던졌고,, 태섭은 패스를 받자마자 몸을 틀어 백코트했다. 바로 뒤에서 대만이 함께 뛰어왔다. 이쯤이면 대만이 외곽에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대만은 정면보다는 외곽에서 슛을 노리는 편이다. 오른쪽 방향으로 공을 돌리자 예상대로 대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대만은 손에서 공을 굴리는 일 없이 바로 뛰어올랐다.

슛은 들어갔고, 모든 것이 해결된 듯 보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송태섭은 왜 정대만에게 도둑 뽀뽀를 했는가. 그것은 태섭조차 이렇다 하고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대체 나는 그때 무슨 바람이 불어서…. 태섭은 다시 대만이 던져준 공을 들고 돌파를 시도했다. 어느 새 적이 된 대만이 태섭을 집요하게 구석으로 몰아갔다. 진지하면서도 묘하게 들뜬 얼굴이 지척에서 보였다.

어라, 설마.

태섭이 슛을 올렸다. 림에 한 번 맞은 공이 그 위를 구르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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