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청춘의 요람.

백호열

미토 군은 손 끝이 섬세하네. 같은 궁도부의 야마사키가 한참 과녁의 천을 당기던 와중 불쑥 그런 말을 했다. 그런가? 미토는 원이 그려진 천을 뒤집어 씌워 판판하게 당기며 답했다. 응. 미토 군이 씌운 과녁은 한참을 쏴도 안 벗겨져. 신기하지? 하고 뭐가 좋은지 꺄르르 웃었다. 힘이 좋아서 그런걸까. 하며 웃음으로 넘기자 야마사키는 귀엽게 뺀 애교머리를 검지와 중지를 예쁘게 모아선 손 끝으로 쓱 귀 뒤에 넘기곤 마저 과녁을 정돈했다. 그럴지도. 미토 군은 남자다운데 꼼꼼해서 대화 하는게 정말 재미있어. 잠깐 탁 트인 사격장의 바깥을 바라보다가, 그런가? 하고 와하하 웃어버린다. 두 사람 분 소리가 섞인다. 낙낙하게 퍼지는 하카마 자락과 찌르르 우는 풀벌레의 울음에 둘러진 채 둘만 남은 공간이 영 뻑적지근하다. 미토는 물 아래 가라앉은 조개처럼 입 다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모든 것은 쉽게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맞은편의 여자아이는 그 나이 아가씨들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손길과 온정적인 눈빛은 미토 요헤이를 자상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있잖은가, 누이를 보듯 다정스러워지는 것과 연인을 보듯 다정스러워지는 것은 사이에 큰 강이 있었고, 미토는 불행하게도 그 차이를 너무 뚜렷하게 아는 나이였다. 인공적으로 조성 된 듯한 청춘의 요람에 꽉 묶인 기분이 든다. 미토는 말이 날카로운가 너무 성기지는 않은가 동시에 너무 깊은 심경고백 따위를 하지 않는가 바짝 예민해져서 새 과녁을 집어들었다. 야마사키의 울새같이 또랑또랑하고 여린 목소리가 귓가를 매만지면, 미토는 시선을 내려 괜히 잘 닦은 과녁을 한번 더 닦는다. 미토 군은. 립크림을 발라 조금 반짝거리는 입술이 말을 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며 움직일 때에 미토는 정말이지 식은땀이 쭉 흘러서 척추뼈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새롭게 깨닫는 경지까지 올랐다. 참으로 이 분위기라는 것이, 어디에다 가져다가 붙여야 할런지 감은 오는데 붙이고 싶지 않으니 괜히 답만 어중간하게 내놓게 된다. 야마사키, 그거 줘, 시간 늦었으니까 내가 하고 갈게. 이 시간 즈음에 어머님이 데리러 오신다며. 사붓하고 배려있는 말씨가 졸졸 흐르는 대화라는 강줄기를 똑 끊어버린다. 미토는 짧고 날카롭게 빠지는 눈썹 끝을 살짝 늘어트리며 관절마디가 부드러운 손에서 과녁을 받아갔다. 어서 가. 걱정 말고. 야마사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정말 자상하구나. 고마워. 말을 남기고선 내일 보자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부실을 빠져나갔다. 발바닥이 스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멀어진다. 반들하게 닦아놓은 바닥과 활이 줄지어 걸린 벽면을 바라보던 미토는 잠시간 그 정적을 음미하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미토 요헤이는, 청춘 로맨스의 한 장면을 꿈꾸거나 반짝이는 미래를 기다리며 아득한 미소를 짓거나 하는 고등생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면 또 다시 하루가 오고, 그런 식으로 천천히 성장한 뒤 열린 무릎뼈가 닫히고 성장통이 끝날 때면 착실하게 나이든다는 사실만을 어깨에 둘러맨 조금 조숙한 청소년이었다. (보통 이런 성향을 냉막하다거나 냉소적이라거나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단어가 어떻게 읽히느냐에 따라 그의 성격이 달리 나타날 터이니 여기에선 아주 다른 말을 쓰기로 한다.) 적정량의 교우와 딱 할 만한 정도의 성적을 가지고 사회에 편입되는 것이 그에겐 나이스한 상황이라는걸 숨기지 않았다. 이 짓도 슬슬 그만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순전히 주변에서 잘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얼렁뚱땅 잡은 일 치곤 순풍에 돛 단 듯 미끄럽게 흘러갔지만, 여전히 미토는 이 일 자체에 특별한 감정선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책임은 져야 한다. 다름 아닌 친구의 호응이 있었다. 절절한 우정 아닌가. 그는 차근차근 과녁을 닦는다. 우정. 미토는 쓰게 웃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간다. 

쾅쾅 요란한 발소리가 저 멀리서 부터 들린다. 일단 방금 나간 동급생은 아니고. 차닥거리는 소음이 딸려오는 것으로 보아 맨발이다. 암만 그래도 맨발이라니. 조심성 없는 걸음걸이로 부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막 들어온 신입이거나 친구를 찾으러 온 타 부원이다. 신입부원들은 한참 전에 배웅했다. 미토는 구태여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를 느끼지 않아 과녁을 닦으며 입 열었다. 애들 다 갔어. 무슨 일 있으면 내일 일찍 오는게 좋겠다. 그럼에도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코 앞에서 멈추었기에 결국 미토는 고개를 들고야 만다. 얼레? 드문 멍청한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샌다. 하나미치? 눈에 드는 것은 들풀에 번진 불 같은 빨강이다. 박박 깎았던 머리가 가을에 들어와선 좀 길었다. 그래서 더 혀를 날름대는 불길처럼 보인다. 사쿠라기는 읏샤, 하는 소리를 내며 미토의 맞은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길쭉한 다리가 접히자 바지 무릎오금에 오글오글하게 주름이 졌다. 어이. 불량아의 특권같은 올림머리를 내친지 사개월, 참으로 그는 혼자 푸르스름한 여름 대로변을 뛰어가는 것만 같이 보였다. 그러다가 꽈당 하고 넘어졌다. 영광의 순간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크레이터 따위가 그의 봄꽃같은 인생에 들이닥쳤다. 음. 아니. 사실 우리들은 계속해서 균열을 뛰어넘으려 살아갔다. 다만 그 균열을 목도하기 전 무얼 했는가가 다를 뿐이지. 미토는 멀거니 사나운 얼굴을 보았다. 재활은? 천재니까 천재답게 끝냈지. 중간에 '오늘의 재활' 이라는 말이 미끄덩 빠져있다는 것을 미토는 안다. 그 뿐인가. 그 곳에서 미토가 있는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수십분, 걸어서 또 수 분 걸어 와야 한다는 것 역시 안다. 미토의 짧게 깎인 눈썹에 힘이 들어가 좁아든다. 잠자리의 활공 직전 날개처럼. 너는. 미토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사쿠라기의 두꺼운 손바닥으로 딱 막혔다. 조금 체온이 높고, 식은땀이 스몄는지 습윤하고, 약간은 달려온 사람의 바람냄새. 이 모든것이 순서도 모르고 뒤엉킨다. 미토는 입술에 닿는 두툼하고 까칠한 손바닥의 감촉이 어쩐지 부도덕하게 느껴저 입술을 말아문다. 성기게 자란 심장의 고동이 단정하게 여문 앞판 안쪽에 가로막혀서 캉캉 소리를 낸다. 철판을 도다리는 것만 같다. 호흡만 찬 판막을 건너 벌렁거리면서 떨리는 숨이 닿을까봐 미토는 자신의 가슴을 으스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에 반하는 차분하고 장난스러운 동작으로 사쿠라기의 손바닥을 치워냈다. 목 끝까지 올라왔던 합리적인 잔소리가 쑥 들어갔다. 그래, 농구천재. 이제 좀 달릴 정도 여유는 되나보지? 미토는 부러 이죽거리며 말했고 사쿠라기는 퍼득 어깨를 떨었다가 손을 거두고선 느슨하게 주먹 쥐고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안 뛰었는데. 진실로 형편없는 거짓말이다. 미토의 새까만 눈이 도륵 굴러 바람에 휘날린 냄새가 남은 손을 보다가 그만둔다. 가느스름한 눈이 제 자리를 찾으면 그제서야 사쿠라기는 가슴이 저 아래까지 떨어졌던 것이 우물물 긷는 모양으로 도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을 먹는다. 그래. 미토에게 쫄았다. 사쿠라기에게 미토는 명랑한 바보였지만 꼼꼼한 바보기도 했다. 한번 걸리면 지독하게 굴었다. 그나마 그가 마음이 좀 어수룩해서 망정이지 좀만 독했으면 아주 학을 떼었으리라. (뭐 사쿠라기가 그를 잘못 본 것도 있지만 그가 열심히 한 이미지 메이킹을 망칠 필요는 없으니 청소년의 밝은 시야를 망치지는 말자.) 하여간, 미토는 사쿠라기를 정말 보고 싶었다만, 대관절 그가 여기까지 왜 왔는지가 참을 수 없는 의문이었으므로, 그래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하나미치? 말씨에 묻어난 감정은 아주 풍성하고 부드러웠으나 그 짧은 말에서도 답지않게 맥을 다듬어놓은 티가 났다. 어설프고 달콤하다. 그리고 - 하나미치는 그 온정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빙이라도 하듯 가슴을 쭉 펴고 한번도 숙여본 적 없는 인간마냥 당당하게 굴었다. 임마, 이 몸께서 널 보러 왔는데 이유가 필요하냐? 일갈한다. 미토는 소마냥 느리게 눈을 씀뻑이다가, 그러게. 네가 날 보는데 이유가 필요는 없지. 그리곤 웃는다.

미토 군은, 그러니까 친구의 구구절절 하지도 않은 말 몇마디에 떠밀려 궁도부에 늦게 입부해버린 미토는 이 웃음에 완전히 녹아내려 성씨를 떼어버리고 요헤이가 된다. 하나미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 요헤이에게 하나미치는 평생을 가도 모를 존재일 것이다. 제 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엉터리 바보. 그러나 멍청이는 아닌.

너 옷 잘 어울린다. 그래도 나만하진 않겠지만. 톡 던지는 말에 쿡 하고 찔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요헤이는 잘 싸맨 과녁으로 들판에 번지는 불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툭 쳤다. 시끄러워. 정리 다 끝났으니까 병원까지 데려다 줄게. 하나미치는 좋다고 실실댄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다. 요헤이는 과녁을 차곡차곡 쌓아 들고 올바른 자리에 놓아둔다. 하카마 자락이 스륵스륵 스치며 정중한 소리를 내는 것을. 하나미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움직임을 듣기만 했다. 궁도의 곡선은 자연물의 흔적이라던가. 시위를 걸 때의 흐름이란 정과 동의 화합이라던가. 육인실 병실에 짐을 풀고 누워있을 적 나누던 이야기를 하나미치는 기억한다. 품이 넉넉한 옷이 스치는 소리.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정취. 하나미치는 팔을 뒤로 해 상체를 뒤로 기울여 느슨하게 풀면서 눈을 감았다. 건조한 초가을의 풍경을 맡는다. 하나미치. 엉? 옷 갈아입고 올게. 그래. 타박타박 울리는 발걸음. 하나미치는 다시 발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무릎꿇은 요헤이의 앞모습을 그렸다. 검은 하카마. 팔꿈치 언저리에서 똑 떨어지는 흰 직선 소매. 꿇은 무릎 위에서 하나씩 움직이는 천조각. 그 천을 쥔 단정한 손 끝. 시선. 집중하는 얼굴. 먹을 묻힌 붓으로 쓱 쓸고 간 듯한 담백한 눈매. 그런 것 따위로. 하나미치는 가슴이 절절 끓는 것을 느끼며 정적 속에서 눈꺼풀만 가만히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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