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한나 - 신랑이 사라졌다 1
1장 - 프로포즈 (1)
- 한국어 대사 프리텐다드
- 영어 대사 리디 바탕
“좋아해.”
“······.어?”
✻
졸업식 전날 둘 사이에 속삭여진 그 한 마디는 둘의 관계를 졸업 후에도 이어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 한 마디는 둘을 이어주다 못해 그 어느 때보다도 끈끈하게 붙여놓았다. 태섭이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말이다. 두 사람은 어느 날은 태섭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또 어느 날은 한나가 미국에 방문해 같이 시간을 보내며 수년간 관계를 이어갔다. 둘 다 각자의 삶으로 인해 여유가 되지 않을 때는 대신 편지나 전화로 사랑을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며 둘 사이의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너 일찍 일어나려면 이만 자야지! 잘 자고, 사랑해, 송태섭!”
“한나야 너도! 우리 꿈에서 봐! 나도 정말 많이 사랑해!!”
언제나처럼 길게 이어진 한나와의 통화가 끝나자 태섭은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봤다. 검게 변한 화면에 얼굴이 비칠 즈음에는 말없이 왼손의 반지로 시선을 옮겼다. 태섭의 마음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 한나와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이미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긴 하지만,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옆에서 걸어가고 싶다고. 그다음 곧장 떠오른 생각은 프로포즈였다. 한나는 그간 태섭의 곁에서 머무르며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사랑했다. 태섭은 그런 한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프로포즈를 하고 싶었다.
‘프로포즈······.’
태섭은 학창 시절 한나와 연애하기 전부터 종종 프로포즈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다만 그렇게 상상은 많이 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상 제대로 아는 건 없었다. 그 상상마저도 정확히 떠올리기 어려운 화려한 공간에서 자신이 멋진 정장을 빼입고, 한나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꽃다발을 내미는 정도에서 끝나곤 했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계셨다면 물어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적어도······.’
태섭은 잠시 자신의 형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자신이 헤어나올 수 없는 깊고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기 전 머리를 내저으며 애써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섭은 농구 훈련이나 시합, 혹은 자신의 개인 스케줄 사이에 틈틈이 프로포즈 후기글을 검색했다. 문제는 그마저도 광고글이 대부분이었고, 정작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선 정보를 구할 수가 없었다. 강백호나 서태웅 등, 북산부터 연이 이어진 다른 선수들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그 누구도 아직 결혼한 사람이 없었다. 태섭은 고민 끝에 미국에서 친해진 다른 기혼 선수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웬 죽상이냐? 안 어울리게.”
락커 앞 벤치에 앉아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 태섭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앉았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온 정우성이었다.
“한나 씨한테 고백하려고?”
“엿들었냐?”
“뻔하지 뭐. 그리고 방금 제임스 목소리가 아주 벽을 뚫고 나오던데. 아무리 여기 벽이 유리장 같아도 그렇지.”
둘은 그간 정규 시즌은 물론이고 오늘과 같은 연습 게임이나 다양한 훈련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렇게 이제는 식사도 같이하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꽤 친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시기 집을 떠나 타지에 같이 있었으니, 두 사람이 친해지지 않기가 더 어렵기는 했다. 다만 우성은 태섭에게 대하는 것과는 달리 한나를 칭할 때는 매번 존칭을 썼다. 태섭과 달리 우성과 한나 두 사람이 만날 일이 그다지 없기도 했다. 동시에 북산의 이런저런 상황을 추후 어느 정도 알게 된 우성이 그 당시 북산의 매니저로서 모든 상황을 버텨낸 한나에게 나름의 존경을 담아 부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 이 형님 먼저 결혼하러 가신다. 천사랑.”
태섭은 씨익 웃으며, 목에 걸친 수건을 잡아내려 손에 들었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장소······. 하고 혼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그런 태섭을 가만히 바라보던 우성은 툭툭, 태섭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미리 축하할게. 나도 청첩장 주는 거 까먹지 말고. 그래서, 프로포즈는 어디에서 할 건데?”
“땡큐. 아직 고민 중이야. 방금 제임스는 나한테 애인이랑 처음 만난 곳에서 청혼했다고 말하더라.”
“흠... 뭐, 시즌 전에 잠깐 귀국해서 할 거면 네가 한나 씨한테 처음 고백한 곳도 괜찮지 않냐? 아니면 모교에서나. 둘이 같은 학교도 나왔겠다.”
“어, 모교? 북산고에서?”
“그러면 뭐, 산왕공고 앞에서 하게? 내 후배들 앞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그 말에 태섭은 피식 웃었으나, 우성의 아이디어는 태섭에게 새로운 고민을 가져왔다.
모교, 고등학교, 북산. 태섭에게 있어 한나의 옆에서 말 그대로 피, 땀, 눈물 다 흘리며 다사다난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장소. 그러나 갑자기 늦은 밤에 고교 안으로 들어가자니 (아무리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명성이 높다고는 해도) 두 사람은 이미 졸업한 외부인이었다. 오로지 프로포즈를 위해 학교를 대여할 수도 없었다. 체육관이라도 밤에 어떻게 잘 빌려서 프로포즈를 해 볼까 고민하던 태섭은, 결국 이런 면으로 항상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던 아라에게 조언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제정신이야?!”
아라는 수화기 너머로 귀청이 떨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어우, 내 귀. 야, 아무리 미국이라도 소리 안 질러도 잘만 들려! 진짜 거의 뭐 옆에 있는 줄 알았네.”
태섭은 그 반응에 툴툴거리면서도 금세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대여가 어려운 건 둘째 치고서라도 땀과 먼지가 가득한 그 체육관에서 프로포즈를 하기엔 영 문제가 많긴 했다.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태섭이 새 아이디어를 떠올리려 끙끙 앓고 있으려니, 아라가 새로운 한 가지 제안을 내밀었다.
“아니면 바다는? 한나 언니 바다 좋아하잖아. 모래사장이랑.”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야, 우리 한나 애인은 나거든?”
“뭐래.”
바다. 아라의 말처럼 한나는 바다를 좋아하기는 했다. 다만 태섭에게 있어 바다는...
“일단 생각해볼게.”
태섭은 곧 전화를 끊고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태섭에게 있어 바다는 어떤 장소인가? 그에게 바다는 추억이 쌓인 장소이자, 동시에 추억이 떠나간 장소였다. 준섭과 같이 농구도 하고 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떠나보낸 곳. 태섭에바다는 그런 장소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섭은 한나와 데이트를 하거나 주변 사람과 여행을 갈 때 바다를 전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나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태섭은 기꺼이 데이트 장소로 바다를 고르곤 했었으니. 태섭은 잠시 앞을 가만히 바라보다 둘이 같이 바다에 갔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
그날은 둘이 연애를 시작하고 약 삼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나는 바다에 갈 때면 항상 태섭과 같이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조금 모래 위를 거닐다, 파도 근처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면 한나는 그 장면을 자신의 카메라로 찍어 사진으로 남긴 뒤, 바로 옆에 쭈그려 앉아 그 발자국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태섭은 그 옆에서 그런 한나의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곤 했고. 한나의 어떤 행동이라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태섭이었으나, 그도 사람인 만큼 그런 한나의 행동에 궁금증을 가졌다.
“한나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왜, 자기야?”
“헤헤······. 아, 그, 왜 매번 바다에 올 때마다 발자국을 찍는 거야? 아, 그, 뭐라고 하려는 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절대 당연히 진짜 아니라! 난 보고 있으면 한나 네가 너무 귀엽고 행복하고 그냥 너무 좋지만······. 순수하게 정말 궁금해서 그래. 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음······.”
한나는 잠시 바다 너머 저편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치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한나의 곱슬머리는 바닷바람에 흩날려 이리저리 흔들렸고, 한나의 눈빛에는 약간의 슬픔이 엿보였다. 태섭은 그런 한나를 재촉도, 강요도 않은 채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파도 몇 방울이 바위에 부딪혀 튀어 올라 한나의 볼을 톡 건드릴 즈음, 한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가족이랑 다 같이 바다에 온 적이 있었어. 그때 부모님이랑 같이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놀았는데, 그게 정말 행복했다? 아직도 여전히 선명히 기억이 날 정도로. 그래서······. 너랑도 같이 하고 싶었나 봐.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한데, 이렇게 발자국을 찍고 그걸 보고 있으면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까지 같이 떠오르는 거 같거든.”
✻
“우히히······.”
그때 한나의 말을 들은 태섭은 떨리는 심장을 붙잡은 채 있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뛰며 자신이 몇 번이라도 발자국을 찍어주겠다며 난리를 피웠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도 태섭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큼...”
그렇게 한참 옛날 생각에 히죽거리다 간신히 진정한 태섭은 다시 고민했다. 비록 바다는 고등학교처럼 두 사람이 처음 만나거나 고백을 한 곳은 아니었다. 적어도 태섭이 기억하기에는 그랬다. 그래도 여전히 바다는 분명 두 사람이 같이 많은 추억을 쌓은 곳이었고, 동시에 각자의 행복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바다, 좋지.”
태섭은 마침내 바다에서 한나에게 청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고향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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