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준호] 에이스와 부주장의 육아사정 5
-태웅이랑 준호가 육아(?)하고 썸도 타는 이야기-
다음 날, 백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체육관엔 나왔다. 그것도 머리를 박박 밀고 얼굴에는 밴드를 잔뜩 붙이고서. 맨 처음 백호를 본 대만과 태섭은 그 꼴이 뭐냐며 웃었지만 백호는 의외로 화내지 않았다. 치수와 준호를 포함한 다른 부원들도 백호를 보고 놀랐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머리를 밀고 온 그에게서 느껴지는 결의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멍청이"
벽에 기대 앉아 휴식하던 태웅은 치수에게 훈련표 일정을 건네받는 백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돌아온 거야 그렇다쳐도 어제 그렇게 싸우고도 아직도 패배가 자기 탓이라 우기는 그가 마음에 들지않았다. 어제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못 알아들다니 역시 멍청이야..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백호를 보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백호가 와서 다행이야. 그치?"
"......네"
작게 그리고 뒤늦게 나온 대답에 준호는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훈련표를 보고 뭔가가 불만이 있는 듯 꿍얼대는 백호와 그런 백호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치수가 보였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준호는 나지막히 말했다.
"백호랑 싸웠니?"
"..."
"싸운거지?"
태웅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혼잣말 하듯이 멍청이가 먼저 잘못했어요. 라고 중얼거렸다. 공 튀기는 소리에 묻힐 뻔했지만 준호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하는 표정으로 다시 태웅을 쳐다보는 준호는 얼굴에 붙은 밴드의 갯수를 셌다. 심하게 싸운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백호가 뭘 어쨌길래 싸웠어?"
"...진 건 자기 탓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 그거뿐이라면 싸움까지는 안 갔을 것 같은데?"
준호는 그렇게 물으며 태웅의 대답을 기다렸다. 포카리를 홀짝거리던 태웅은 자신이 답하지 않으면 그가 계속 기다릴 거라는 걸 느꼈고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의 실수가 승패를 좌우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진 건 내 탓이라고."
생각도 못한 말에 준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설마하니 태웅의 입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었다.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고 공 튀기는 소리와 체육관 바닥에 운동화가 마찰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준호는 찬찬히 그때의 경기를 돌이켜봤다.
"혹시 경기 중에 교체된 것 때문에 그래?"
태웅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포카리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준호는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태웅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갑작스러운 준호의 행동에 놀란 태웅은 어깨를 움츠린 채로 그의 손길을 허용했고 덕분에 단정했던 머리가 까치집이 되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에 당황스러움이 섞인 걸 보며 준호는 손을 거뒀다.
"책임감이 강한 후배들이 있어서 든든하네. 하지만 이건 확실히 말해둬야겠어."
"..."
"진 건 백호 탓도, 네 탓도 아니야. 태웅아"
준호는 상냥하게 웃으며 태웅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코트 위를 뛰어다니는 부원들을 보며 무릎을 끌어안은 준호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치수가 부상으로 빠졌을 때 내가 대신 들어갔잖아. 그 때 솔직히 압박감이 굉장했어. 치수 몫까지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최강자 해남, 그것도 이정환을 앞에 두고 있으려니까 자꾸 쓸데 없는 생각만 나더라. 부주장씩이나 돼서 말이야.. 치수가 없으니까 내가 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한심하지? 하면서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하는 준호를 보고 태웅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준호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다리를 쭉 펴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근데 그 때, 태웅이 네가 계속 득점을 해줬어. 치수가 없어서 생긴 불안을 네가 메꿔준 거야. 그게 너무 든든했어. 그 결과로 무리를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정말 잘해줬어. 우리 북산의 에이스."
준호는 까치집이 된 태웅의 머리를 다시 만져줬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아까와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했다. 태웅은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살짝 숙인 채 감사합니다. 라고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웅이 고개를 숙이자 그것을 더 만져달라는 뜻으로 이해했는지 준호는 계속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패배한 게 네 탓이라는 생각은 하지마. 팀의 패배는 모두가 함께 나눠 짊어지고 이겨내야 하는 거야."
까치집이었던 머리를 다시 단정하게 만들고나서야 준호는 손을 뗐다. 백호의 자세를 봐주던 치수가 준호야 하고 부르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넌 조금 더 쉬어. 라고 말하고 자리를 뜬 준호의 뒷모습을 보며 태웅은 조금 전까지 준호가 쓰다듬고 있던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태웅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 해준 선배는 없었다. 선배들에게 에이스로서 기대받는 건 익숙했지만 보통은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라는 방임이나 에이스니까 네가 알아서 해. 에 가까운 떠넘기기에 가까웠다. 자신이 선배가 되었을 때는 후배들에게 받는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패배했을 때도 선배인 자신이, 주장인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건 준호가 처음이었다. 태웅은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내려 제 가슴 쪽으로 가져왔다. 왼쪽 가슴 아래에서 뛰는 심장박동이 마치 공이 튀기는 소리마냥 크게 쿵쿵하고 울리는 게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졌다. 아까부터 계속 쉬고 있는데 왜 이렇게 뛰지.. 이상해.. 그렇게 생각한 태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쿵쿵 울리던 심장소리는 공 소리와 기합소리에 묻혔다.
***
농구부 훈련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머리를 밀고 온 건 보여주기가 아니었는지 백호는 전보다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다. 백호가 진지하게 나오니 가르치는 치수 역시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열심히였다. 무림고와의 시합을 앞두고도 둘은 늦게까지 체육관에 남았다.
"오늘도 늦게까지 있는 거야? 내일 시합인데."
"내일 시합이니까 더 연습해야지."
"너무 무리하진 마."
준호는 락커룸의 문을 닫으며 말했고 치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치수가 있으니까 걱정할 필욘 없겠지.'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준호는 가방을 고쳐 매고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무림전 그리고 모레 능남전. 두 번의 시합을 하고 나면 전국대회에 진출하는 학교가 결정된다. 4팀 중에서 2팀만이 전국으로 간다. 항상 예선 1차에서 탈락했던 북산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감격할 일이었지만 여기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준호야, 네가 농구를 좋아한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너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다. 진로를 생각해야지. ..아빠 말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2학년으로 올라가는 봄, 준호의 아버지는 아들을 앉혀두고 그렇게 말했다. 같이 입부했던 친구들은 대만이 떠나고하나둘씩 농구에 대한 흥미도, 의욕도 잃고 부를 떠났다. 신입생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혹독한 훈련 탓인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인원만이 남았다. 준호의 아버지는 그런 농구부에 아들이 매달리는 걸 바라지 않았다. 준호 역시 아버지의 의중을 알았다. 무엇을 바라시는지,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그래도 준호는 농구가 좋았다.
'내년 여름까지 할게요.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아요.'
'....알았다.'
1년이란 시간 동안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아들의 간절함을 아는지 준호의 아버지는 그 이후로 농구부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3학년이 되니 조바심이 나는지 아내에게 준호 요즘 어떠냐는 식으로 묻는 날이 많아졌다. 준호는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자기가 정한 끝이니 그 전까진 그저 농구부 활동에 집중하고 싶었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어색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상념에 빠져 있었음에도 몸이 이미 기억하는 하굣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역 앞에 도착해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곧 있으면 집 방향으로 가는 전철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철의 도착을 알리는 방송 소리를 뒤로 하고 준호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그렇게 도착한 체육관에는 아직 불이 훤히 켜져 있었고 안에선 백호와 치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틈으로 백호가 슛을 날리는 걸 보고 준호는 박수를 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스 슛. 상당히 멋진 폼이 됐는걸."
"응? 안경선배"
"아직 집에 안 갔던 거냐?"
"역까지 갔는데 왠지 돌아오고 말았어."
멋쩍게 웃어보인 준호는 뭐 도와줄 거 없어? 라며 물었다. 치수는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대신 패스를 부탁했다. 이미 6년을 알아온 사이였다. 준호가 무엇 때문에 되돌아왔는지 본인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준호는 교복셔츠를 벗어두고 백호의 훈련에 동참했다.
"준호 선배?"
준호가 학교로 돌아와 백호의 연습을 돕던 그 시각, 태웅도 학교에 있었다. 사실 체육관에 남아있던 건 백호와 치수 둘만이 아니었다. 준호와는 엇갈렸지만 태웅도 조금 전까지 체육관에서 연습 중이었다. 치수는 백호를 봐주느라 정신이 없어 태웅에게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태웅은 신경쓰지 않았다. 내일 두번째 경기를 앞두고 조금이라도 실력을 익혀야 하는 건 백호 쪽이었으니까. 남아서 좀 더 연습을 하다 먼저 가겠다며 나온 게 몇십분 전이었고 그 사이에 준호가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인사를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연습에 들어가려는 셋을 보고 태웅은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준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만약 전국대회에 나갈 수 없다면... 모레 능남전이 마지막이야."
마지막. 이라는 말에 태웅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3학년들은 보통 여름이 지나면 은퇴해서 입시를 준비한다는 건 태웅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준호가 뱉은 마지막이란 말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북산이 전국대회에 나가고 윈터컵에도 나가면 당연히 거기엔 준호도 함께일 거라 생각했다. 계속 같이 농구를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3일이었다.
"전국대회는 나간다."
태웅을 정신차리게 한 건 치수의 목소리였다. 전국대회에 나가게 되면 3학년의 은퇴는 미뤄진다. 그러면 조금이지만 준호와 더 농구를 할 수 있다. 태웅은 발걸음을 옮겨 자전거 보관대에 있는 제 자전거를 꺼냈다. 페달을 밟는 그의 다리엔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체육관 앞을 떠난 태웅은 집에 도착해 가방을 두고 농구공 하나만 든 채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등 뒤로 어디 가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농구하러 가요."
"또? 이 시간에?"
"내일 시합이라서 조금 더 연습하고 싶어요. ...금방 올게요."
"너도 참.. 저녁은 어떡하려고?"
"이따 와서 먹을게요."
그렇게 말하곤 태웅은 집 밖을 나섰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그가 향한 곳은 집 근처 공원. 세준과 준호와 농구를 했던 그 곳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공원에 인기척은 거의 없었다. 농구 코트쪽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었지만 가로등이 잘 되어 있어 연습하는 데 문제 되지 않았다. 코트에 선 태웅은 공을 손에 든 채 눈을 감았다.
'슈퍼루키 서태웅이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을거야.'
'비가 많이 오니까 쓰고가.'
'정말 잘해줬어. 우리 북산의 에이스.'
준호가 그에게 해줬던 격려를 되새기며 태웅은 눈을 떴다. 역시, 조금 더 선배와 농구를 하고 싶다. 마지막이라고 하고 싶지 않아. 태웅은 그 자리에서 골대를 향해 공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공은 깔끔하게 림 안으로 들어갔다. 데구르르 굴러 골대 기둥에 부딪힌 공이 다시 태웅의 쪽으로 굴러왔다. 몸을 숙여 공을 든 태웅은 후 하고 숨을 내뱉고는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그렇게 혼자서 1시간 넘게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태웅을 기다리고 있던 건 어머니의 불호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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