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06

우리 같이 살까?

신혼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자 정환과 수겸은 이제 공식적으로 부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 일상으로 복귀한 신혼부부에게 주변인들의 무수한 관심이 쏟아졌고, 개중에는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신혼여행은 어땠냐, 결혼하니까 뭐가 좋으냐, 신혼생활은 잘 즐기고 있냐는 둥 물어오면 곤란하다는 듯 웃어넘기기 바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할 말이 없으니까.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엔 부부였으나 까고 보면 친구도 연인도 아닌, 진짜 뭣도 아닌 사이였다. 오히려 결혼하기 전보다 더 어색해졌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한집에 살지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수겸이 청약 당첨으로 분양받은 신축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는 거로 되어있었으나 정작 이에 대해 당사자끼리 합의된 내용은 없었다. 아직은 입주 전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으나 계속 이런 식이라면 주위의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그러는 사이 점점 입주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거주 방향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나누기엔, 지금 두 사람은 너무 바빴다. 정환은 신혼여행 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수겸은 아파트 입주일에 맞춰서 잔금을 치르고 이사 준비까지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대망의 < 더퍼스트로얄센트럴시티앤리버팰리스 > 아파트의 입주일!

이날 수겸은 정말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녔다. 전날부터 이삿짐 싸느라 밤늦게 잠들고 먼지 구덩이인 방에서 일어났는데, 은행 문 열자마자 대출 들어오는 거 확인하고 자취방 보증금도 돌려받아서 잔금을 겨우 맞추느라 아주 진을 다 뺐다. 그러고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곧장 주민센터로 달려가서 전입신고까지 하고 나서야 급한 서류 절차는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서 새 보금자리로 복귀했더니 이번엔 현관 앞에 쌓인 엄청난 양의 이삿짐 박스가 그를 반겨주고 있었다.

우습게도, 수겸은 혼자 살면 이럴 때 서럽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웃긴 말이었다. 엄연히 배우자가 있는 몸인데 말이다. 이럴 때면 정환과의 부부 관계가 보여주기식 가짜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잡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이 많은 짐을 오늘 안에 정리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도 모자랐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고 상자를 하나씩 안으로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문 뒤에서 ‘배달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킨 적이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문 뒤에서 어떤 인영이 요란스럽게 소리치며 나타났다.

“짜잔-! 귀여운 후배가 짜장면 배달 왔습니다!”

“….”

“…반응이 그게 뭐예요. 안 반가워요?”

정환의 후배인 호장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수겸이 물었다.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정환이형이 부탁했어요. 감독님 오늘 이사하는 날인데 혼자 하면 힘들 거 같으니까 가서 좀 도와달라고. 식사 아직 안 하셨죠?”

수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며 호장이 으스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집주인은 제쳐두고 신나게 새집을 이곳저곳 살피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아마도 집구경이 하고 싶어서 자진해서 온 게 분명했다. 수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라. 식탁 없어요??”

“새로 주문했는데 아직 안 왔어. 그냥 바닥에 신문 깔고 먹어. 원래 이삿날엔 그렇게 먹는 거야.”

부엌을 서성거리던 호장이 난색을 표하며 묻자 수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바닥에 신문지를 대충 깔고 앉고서 손짓하자 호장이 마지못해 포장된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마주 앉아서 하나씩 비닐을 벗기는데 벌써 군침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짜장면을 이렇게 먹어보긴 또 처음이네요.”

“너 진짜 곱게 자랐구나? 그런 녀석이 이삿날 짜장면 먹는 건 용케도 알고 있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저도 이삿날 짜장면 정도는 먹어 봤어요. 식당에서 먹긴 했지만.”

“거 봐. 진짜 곱게 자랐네. 근데 이거 맛있다. 어디서 사 왔냐?”

“이거 단지 후문 앞 상가에서 포장이요! 안 그래도 주문할 때 뭐 시킬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었는데 왜 안 받았어요??”

“바빠서 전화기 볼 시간도 없었어.”

생각난 김에 휴대전화를 확인했더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꽤 와 있었다. 그 중엔 정환에게 온 연락도 있었다.

[ J : 이사 잘하고 있어? 내가 도와주러 갔어야 했는데. 못 가서 미안.]

[ J : 밥은 먹으면서 하는 거야?]

[ J : 호장이한테 먹을 거 사서 가보라고 했어. 먹고 짐 정리 같이해.]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문자 보냈을 정환을 생각하니 괜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걱정하고 있을 정환에게 답장을 보내주고 나서 마저 식사하는데 먼저 그릇을 비운 호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구경하더니 한쪽에 놓인 짐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결혼사진 아니에요? 저 봐도 돼요?”

정환과 수겸의 결혼사진이 담긴 액자가 포장도 벗겨지지 않은 채로 세워져 있었다. 포장지를 뜯으려는 듯 호장의 손이 모서리로 향하자 수겸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거 뜯지 마.”

“왜요? 어차피 벽에 걸려면 뜯어야 하잖아요?”

“…나중에. 나중에 걸을 거야. 그보다 아직 밖에 있는 짐이나 안에 들여놔 줄래?”

호장이 김이 팍 샌 표정으로 액자에서 손을 떼었다. 다행히 금방 흥미를 잃었는지 시킨 대로 밖에 있는 짐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수겸도 빈 그릇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의 후배를 부려 먹으려니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고양이, 아니, 원숭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확실히 백지장도 맞들면 나았다. 혼자 할 땐 막막했는데 둘이 하니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구가 많아서 빈자리가 더 많았지만, 얼추 있는 짐이라도 정리하고 나니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수겸은 바닥 한켠에 놓인,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액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비어있는 벽들을 눈으로 훑으며 결혼사진을 어디에 놓을지 상상해보았으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수겸이 형! 여기 와서 이것 좀 보세요!!”

그새 친해졌다고 멋대로 호칭을 바꿔버린 호장이 호들갑을 떨면서 수겸을 불렀다. 가까이 가자 거실의 넓은 창에 찰싹 붙어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호장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진짜 뷰 좋아요. 저기 한강에 불빛 비치는 것 좀 보세요!”

수겸은 말을 잃었다. 내 집에서 보이는 풍경이 이렇게 멋지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순히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마치, 그간 열심히 살아온 김수겸이 받아야 마땅한 선물 같았다.  

그는 이 선물 같은 야경을 정환과도 나누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정환을 위해서 사진을 찍어 그에게 전송했다. 수겸은 마치 이 야경 속 도시의 불빛처럼 자신의 인생 2막도 이처럼 빛나리라 기대에 부풀었다.

수겸이 호장과 함께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사이, 휴대전화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 J : 한강뷰 아파트 주인이 된 걸 축하해, 수겸아.]

  


옛말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었다.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수겸은 옛말이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새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부터 수겸의 인생이 확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넓고 쾌적한 새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전보다 훨씬 마음이 여유로웠다. 비록 달마다 빠져나갈 대출 원리금을 생각하면 통장 사정은 여유롭지 않았지만. 그것보단 이 집이 언젠가 때가 되면 방을 빼야 하는 남의 집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구입한 온전한 내 자산이라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훨씬 더 컸다.

수겸이 거실 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수겸은 겉으로 보기에도 신수가 훤했다. 근심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퇴근하고 한강뷰를 바라보며 맥주 한 캔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생이라니. 김감독, 이만하면 성공했다!

창가에서 벗어나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남은 맥주를 홀짝이는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번쩍이는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해보니 정환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귀에 갖다 대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수겸아! 너 지금 집이야?!]

“어? 집인데?”

[하…. 정말 미안하다, 수겸아…. 그러니까, 지금…. 우, 우리 어머니가 거기로 가고 계시거든?]

“…뭐?”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어선 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오고 있다고? 정환이네 어머니가? 우리 집에? 갑자기? 지금 바로?!

수겸이 사태 파악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수화기에서 정환의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미안해…. 내가 문자를 너무 늦게 확인해서…. 이제야 봤는데 지금 전화를 안 받으시네…. 시간상 아마 곧 도착하실 거 같거든?]

그제서야 수겸의 시야에 집안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와 먹다 남은 음식과 온갖 쓰레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콰드득. 손에 들려있던 빈 맥주캔이 악력에 의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지금 수겸의 머릿속엔 한 가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좆.됐.다.

[나도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까. 나 올 때까지만….]

“야, 끊어!!!! 빨리 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휴대전화를 소파에 내팽개치고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되는대로 처박아 넣기 시작했다. 입에선 쉬지 않고 욕이 나왔다.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그 시각, 정환은 한강을 통과하는 다리 위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차 안에 갇혀 있었다. 가뜩이나 퇴근길 러시아워에 걸렸는데 앞에서 사고라도 났는지 차들이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차를 버려두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순 없으니 애꿎은 핸들만 초조하게 두드려댔다.

불안한 마음에 오는 내내 수겸과 어머니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음이 끝나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음성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가 어떨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이제 디졌다. 김수겸한테.

어쨌든 제아무리 지옥 불구덩이여도 1초라도 빨리 뛰어들어야만 했다. 겨우 정체 구간을 벗어나서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정환은 정신없이 차를 몰아서 수겸이 사는 아파트 입구로 진입했다. 차가 밀리지 않았다면 벌써 도착하고도 한참 지났을 시간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정환의 어머니였다. 서둘러 전화를 받아보니 벌써 수겸의 집에서 나와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별일 없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시는데 기분이 좋으신지 목소리가 밝았다. 정환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왔다 가신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통화를 종료하고 때마침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일단 한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수겸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정환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한 층, 한 층, 수겸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띵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겸이 사는 집의 현관문이 보였다. 정환은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심호흡한 뒤에 초인종을 눌렀다. 방문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리자마자 거의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정환은 화들짝 놀랐다. 수겸이 바로 앞에서 흉흉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이를 갈면서 노려보는 수겸과 눈이 마주치자 정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납작 엎드려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야 한다. 그렇게 선처를 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정환은 현관 앞에서 구두도 채 벗지 못하고 냅다 무릎부터 꿇었다. 

“수겸아…. 내가 정말 잘못 했, 헤엑…?!”

그러나 정환은 사죄의 말을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은 정환에게 쿵쾅거리며 다가온 수겸이 정환의 양 볼을 붙잡고 쫙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이.정.환.!!!! 너, 이 자식-!!!!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떻게 해-!!!!”

“차가, 막혔….”

“그럼 더 일찍 나왔어야지!!! 아니, 애초에 네가 어머님 연락 미리 받았으면 내가 이렇게 급하게 마주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양 볼을 꼬집듯이 붙잡고 쭉쭉 잡아당긴 탓에 아프기도 아팠지만,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던 수겸이 마침내 정환의 볼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세게 붙들었는지 양쪽 뺨이 다 얼얼했다. 그래도 여기 오는 내내 여차하면 수겸에게 맞을 각오까지 했던 정환인지라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맞아.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수겸아.”

“…됐어. 불쌍한 척 그만하고 이제 일어나. 무릎은 또 왜 꿇었냐.”

“하하. 진짜 미안해서 그런 건데.”

“아무튼. 들어와.”

그제야 무릎을 펴고 일어날 수 있었다. 수겸을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정환은 연신 두리번거렸다. 수겸이 종종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긴 했지만 실제로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처음 수겸과 만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일이 바쁘긴 했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신혼여행지에서 수겸이 정환의 첫사랑임을 들켜버린 게 서로를 어색하게 만들어서 연락하기 어려웠던 게 컸다. 정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너 우리 집 오는 거 처음이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가 있냐?”

정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건지. 수겸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수겸이 이렇게 말한다면 정환도 억울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음, 하지만 네가 한 번도 날 초대하지 않았잖아.”

“뭐? 난 네가 바쁜 줄 알고 먼저 말 못 한 거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꼭 초대해야 올 수 있는 거야? 그냥 네가 먼저 와도 되냐고 물어봐도 되잖아!”

억울하다는 듯 쏘아붙이는 수겸을 보며 정환은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 사이라니. 수겸이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구나. 그건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크기보다 수겸이 가진 마음의 크기가 더 작으므로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고 말할 수 있어서겠지.

처음부터 각오하고 시작한 결혼이었지만 쓸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겸이 저렇게 본의 아니게 기대하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정환은 여지없이 흔들렸다.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기대가 크면 나중에 실망이 더 클 텐데도. 그래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욕심내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억눌렀다. 

수겸을 따라서 부엌으로 가니 식탁 위에 다 마셔서 비어있는 찻잔이 두 개 놓여있었다. 제법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자리에 앉으며 정환이 물었다.

“이거 혹시 어머니가 사 오신 건가?”

“응. 차랑 같이 세트로 사 오셨더라. 이거 말고도 이것저것 많이 선물로 가져오셨어.”

“어쩐지. 엄마가 좋아하는 브랜드네. 혹시 우리 어머니가 너한테 실례되는 말씀 하시진 않으셨어?”

“전혀. 미리 연락 못하고 와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그런데 대체, 어머님이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아신 거야?”

“호장이한테 들으신 모양이야. 호장이가 우리 엄마하고 친하거든….”

순간 수겸의 머릿속에 이 집에서 신나게 돌아다니던 호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 자식 언젠가 거하게 사고 칠 줄 알았어…! 반사적으로 한쪽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에 만나면 일단 꿀밤부터 먹여줘야지.

“호장이가 이 집 좋다고 계속 말했었거든. 그렇다고 설마 우리 엄마가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은 몰랐네. 아무튼, 내 불찰이야. 미안하다.”

“아니, 뭐…. 집에 오시는 건 괜찮아. 미리 연락만 해주면.”

정환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두 눈을 끔뻑였다. 그 모습에 수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표정은 뭐야?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해?”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우리 부모님 마주치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너희 어머니인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리고 우리 ‘진짜로’ 결혼하자고 한 건 너잖아! 필요할 때마다 부부인 척 하기로 했으니까. 나도 너희 부모님 앞에선 사위인 척 최선을 다해야지.”

정환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겉으론 웃어줘야 할 것 같은데, 속으론 조금 울고 싶었다. 수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연기라고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환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수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너희 어머니는 우리가 당연히 이 집에서 같이 사는 줄 알고 계시더라. 아직 따로 지내고 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셨어. 그래서 오기 전에 너한테만 연락하셨던 거고.”

말하면서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정환의 어머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신혼여행 다녀온 아들과 사위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던 찰나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들 후배한테서 신혼집에 갔다 왔단 소릴 들었으니 한번 와보고 싶으셨겠지. 그래서 아들한테 연락하고 갔는데 답이 없어서 좀 늦게 들어오나 생각하고 먼저 갔을 뿐. 막상 따로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적잖이 당황하셨을 것이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수겸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이건 정환의 어머니 잘못이 아니다. 단지, 두 사람이 거처 문제를 제때 논의하지 못하고 회피해버려서 주변 사람들을 오해하기 만든 게 잘못이었다.  

“내가 명확하게 설명을 해놨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아니. 너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야.”

정환의 사과에 수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더는 미룰 수 없고 어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걸. 그런데 누구 하나 쉽게 입 밖으로 이 주제를 꺼내지 못했다. 

뭐라 말해야 할까. 우리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보면서 결정을 상대방 몫으로 돌려버릴까. 아니면 우리 같이 사는 게 어떠냐며 직구를 던져볼까. 너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내가 이렇게 묻는 건 너무 내 욕심일까.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안타깝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다가 결국 정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집 구경해도 돼?”

“어, 어! 먼저 보고 있어. 나 여기 정리만 하고 갈게.”

부엌을 벗어나서 거실로 향하는 정환을 힐끗 쳐다보면서 수겸은 식탁 위에 남은 잔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용한 잔은 싱크대에 넣고 안 쓴 잔들은 찬장에 넣어두면서도 고민의 연속이었다. 반드시 오늘 안에 담판은 지어야 하는데. 사실 수겸은 본인이 어떤 결론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이정환하고 같이 살고 싶어? 아니면 살기 싫어? 스스로 물어봐도 좀처럼 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민에 빠진 채로 거실로 향하는데, 한쪽에서 벽을 바라보고 있는 정환을 발견했다. 뒤돌아있는 정환을 부르려던 수겸의 말문이 턱 막혔다. 정환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벽에 걸린 정환과 수겸의 결혼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수겸이 허둥지둥 다가와서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는…! 그래도 신혼집인데 결혼사진 하나 안 걸려있으면 이상하게 보실까 봐! 그래서 걸었는데…. 그, 급하게 하느라 좀 비뚤어진 거 같다. 나중에 다시….”

“…수겸아.”

“응?”

“우리 같이 살까?”

정환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찍힌 결혼사진을 보니 욕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실 한 가운데에 결혼사진이 걸려있는 이 집에서 수겸과 함께 살고 싶었다. 혹시 거절당하더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보인 정환과 달리, 수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너, 넌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

“나 쉽게 한 거 아닌데. 엄청나게 고민하고서 하는 말이야.”

“아니, 이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 먼저 정해야 할 것도 있고….”

“뭘 정해야 하는데?”

“방을 어떻게 쓸지도 상의해야 하고. 뭐 생활비 문제라던가….”

“그런 건 내가 다 맞춰줄 수 있어.”

“야, 이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니야! 너 이 집 대출 원리금이 한 달에 얼마가 빠져나가는지 알기나 해?!”

대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울컥 해버렸다. 정환 앞에서 되도록 금전적인 문제는 거론하고 싶지 않았으나 같이 살게 된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환 역시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같이 사는데에 너도 동의하는 거야?”

“그거야 그렇지만. 네가 어떻게 해결하려고.”

“같이 살면 이 집 대출금은 내가 갚아주려고 했지.”

“…전액? 전부다?”

“응? 당연하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덤덤하게 대답하는 정환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심지어 대출금이 얼마냐고 묻지도 않는다. 갑자기 이정환이 잘생겨 보이는 걸 넘어서서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후광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그러면 이 집 절반은 네가 사는 거나 다름없는 건데. 혹시 공동명의 하자는 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네 명의로만 해도 돼.”

남자의 매력 중에 최고는 재력이라더니. 지금 이정환의 매력은 너무 과했다. 아찔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안 넘어가면 그게 사람이냐! 마음이 넘어가 버리니 몸도 자동으로 넘어가 버렸다. 수겸이 갑자기 정환에게 달려들어서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렸다. 깜짝 놀란 정환이 얼떨결에 수겸을 받아 드는데, 수겸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속삭였다.

“자기야. 우리 침대는 라지킹으로 바꿔야겠지?”

그새 새 침대를 갈아치울 생각을 하면서 호칭까지 바꿔버린 김감독이었다.


* 얘네 합방시키기 드럽게 힘드네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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