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닮은 그대에게
함께 맞이하지 못했던 겨울을 지나 새로운 겨울로
미국에 온 지 10년. 추운 겨울의 냄새가 온 거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무더운 여름날 헤어져 짙은 그리움보다 더 깊게 내 안에 박힌 듯한 그 사람은 차가움과 동시에 따듯함을 지녔다는 것마저 겨울을 닮아서, 춥기만 하다며 겨울을 싫어하던 나를 기어코 겨울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내 첫 동료이자 형이자 친구인 사람. 다른 이들은 더 많은, 다양한 인연들을 찾기 바빴지만, 나에겐 당신이 있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건, 어떤 짓을 하든 늘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니 굳이 다른 것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여겼거늘. 당신은 나보다도 나를 알아서 그런 내게 세계를 넓혀 보라는 숙제를 주었었다. 그 당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맹목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당신이 내 세상의 전부였으니 기준도 함께 옮겨졌던 것이었겠지. 내 세상을 가져가고 기준마저 새로이 옮겨버린 당신이 내린 명령과도 같은 숙제를 안 따를 수 없었던 나는 당신의 말을 열심히 따랐다.
주위를 신경 쓰기 위해 관찰하고, 말하기보단 들었으며 행동에 있어 과하진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인내심을 길렀다. 그렇게 당신의 말을 따른 지 얼마 안 가 내 주위로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덕분에 늘 비어있던 달력에는 새로운 약속들로 빼곡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고2 중반 애매한 때에 유학 온 동양인 소년. 오른손잡이 마을에 떨어진 왼손잡이처럼 주위에 있는 이들과 다름을 매 순간 느끼고 있던, 제 외로움도 눈치채지 못한 미성숙한 아이에겐 그 모든 것들은 유혹적이었으며 참으로도 달콤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나, 거의 매 주말마다 썼던 편지를 피곤하다는 이유를 들어 하루, 이틀 늦게 보내기 시작한 것이. 다른 사람들은 고작 하루, 이틀이라 하겠지만 당신과 나에겐 전혀 아니었음을 안다. 지금과 다르게 모든 게 느렸던 시대였기에 매주 편지를 써도 상대에게 닿는 건 약 2주일의 시간이 지난 뒤였고, 그 시간마저 늘 아쉽고 안타까워 전전긍긍하던 나였으니 나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당신이 그 큰 변화를 몰랐을 리가 없다.
여느 때와 다르게 뒤늦게 보낸 당신의 답장에는 뭐라 적혀 있었더라…. 아, 친구를 사귄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좋아 보인다는 말이 있었다. 당신의 말을 잘 따랐다며 칭찬받고 싶은 마음 반과 그 때문에 당신에게 보냈어야 할 편지를 제때 보내지 못했다는 약간의 죄책감 때문에 내가 그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는 걸 당신을 알까? 그때 내가 베개에 파묻고 싶었던 것은 내 얼굴이 아니라 당장의 즐거움에 눈이 팔려 당신을 뒤로 미뤄둔 나 자신이었음을 나는 지금에서야 와서 깨달았다.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당신을 덜 외롭게 했을 텐데…. 원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탓에 후회하는 법이 없던 나는 부끄럽게도 당신의 일만 되면 밥 먹듯이 후회하곤 한다.
어째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겐 늘 모자라거나 틀린 답을 내뱉는 건지. 이것도 당신의 손길이 닿으면 나아질까? 그렇게 기간이 길어진 편지에도 당신은 나를 가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나와 달리 내가 매주 편지를 받아 볼 수 있게끔 편지를 보내온 당신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당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내어주기 시작했고, 나는 새끼 새가 먹이를 받아먹듯 당신이 내어주는 모든 것을 삼켜내기에 급급했다. 당신의 손때 묻은 편지가 내 상자에 하나둘 쌓이면 쌓일수록 어리숙했던 정우성도 마치 그 상자 속에 담기는지 희미해져만 갔고, 그렇게 미국에 온 지 3년쯤 되던 해. 나 정우성은 어리숙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었다.
무사히 대학에 들어가 막 새내기가 된 나는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고작 1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차이를 크게 느끼곤 했다. 그나마 당신의 조언으로 인해 내 몸에 익숙하게 배어있던 습관들로 간신히 버텨나가고 있었는데... 당신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대학 생활 이야기를 꺼내 나와 당신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었고, 나는 덕분에 당신의 대학 생활을 글로 보며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대체 얼마나 큰 용기를 낼 수 있는 걸까. 당신이 나와 같음을 알고 나서부터 안정이 된 나는 무사히 적응을 마쳐, 짧아졌던 편지의 기간을 다시금 길게 만들어 냈다. 그때 당신은 무언가 말을 얹기보다는 저번과 똑같이 내게 잘 적응한 것 같아 보인다며 다행이라고 말해 주었고 나는 그 점에서 한 가지 문제점을 느꼈다. 전과 같다? 맞다. 당신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내 상황을 빤히 내다보는 것처럼 내가 궁금했을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그 틈틈이 내 걱정이 담긴 것도, 마지막으로 내가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선을 지키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전과 같은 당신이 문제였을까? 아니. 문제는 한쪽만 그대로였다는 것에 있었다. 즉, 내가 달랐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던 것이다.
처음이 어렵다고 처음으로 말한 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도 나와 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일까. 처음을 이미 겪은 나는 그의 말처럼 더 이상 당신을 뒤로 미뤄두는 게 어렵지 않았고 속상하지도 않았다. 약간의 미안함은 아직 남아있었으나 그마저도 저번보단 덜했는데 이번에도 당신은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조금씩 편지를 줄여 보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당신처럼 매 주말마다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 게 뭐가 그리 좋다고 그렇게나 기뻐했는지…. 멍청한 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해졌음을 깨달았다. 어느샌가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은 없고 내 생활을 추측하는 듯 보이는 내용만 가득 담겨져 있는 당신의 편지가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혀 맞지 않는 상황에 최근 편지들을 모두 꺼내와 살펴보니 답들이 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이 보였고, 이와 반대되게도 공통점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찾아낸 공통점이라고는 모든 편지가 약 일주일씩은 더 밀려있다는 것이었다. 화가 났다면 화를 냈을 것이었고 편지를 그만 보내고자 했다면 그것 또한 편지로 단칼에 통보했을 텐데, 그저 평소보다 일주일씩 더 밀린 것으로 보이는 것 말고는 이상이 없어 보이는 편지를 보며 이상함을 느낀 나는 당신의 주위로 연락하려다 아는 번호가 없어 그만두었다.
나는 당신의 친구 이름을 알지만, 번호를 모르고, 당신이 머무는 곳의 위치는 알아도 갈 수가 없다. 그나마도 안다고 말하려면 산왕밖에 남지 않건만 매번 연락을 주고받던 당신과도 이 정도로밖에 연락을 안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당신이 알려준 그 무엇도 난 당신에게 써 본 적이 없었음을 이때 깨달았다. 이는 내 신경이 조금도 당신에게 가지 않았단 소리였고 이는 오랜만에 내게 부끄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부끄러워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 터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킨 인터넷에서 열심히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뒤지던 중, 그런 나를 불쌍하게 여기기라도 한 것인지 당신의 사진이 턱하고 나왔다. 한 손으로는 머쓱한 건지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경례를 하는, 어엿한 군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과 처음 보는 것 같은 장발의 모습을 한 당신의 사진이 나란히 함께. 그 두 사진을 봤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멍청한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는데 이건 너무 멍청해서 입에 올리기도 싫지만…. 말해야겠지. 그래, 나는 군대 간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은 당신에게 섭섭함과 함께 서러움을 느꼈다. 편지가 늦게 온다고 신나 했던 주제에, 홀가분해 했던 주제에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
또 그것뿐이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나는 당신에게 따질 생각도 했었다.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이렇게 매번 편지를 보내면서도 왜 편지 내용엔 당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은 죄다 빠져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남아있던 양심이 그런 나를 뜯어말렸다. 미숙하지 않기는 개뿔. 그때의 나는 아직도 미숙함 투성이에다 유치함까지 고대로 가지고 있었다.
미숙함과 유치함 투성이어서 내 탓을 하기가 죽기보다 꺼려졌던 나는 내 탓을 하기 전에 당신 탓을 하기 바빴으니 어찌 보면 당신의 군대 입대는 내 미숙함을 깨달을 절호의 기회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 역시, 내가 늘 그랬듯 오답을 골라낸 바람에 그대로 다 망쳐버렸다. 2주에 한 번 보내던 편지를 심통 났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에 한 번 보냈으니…. 그것도 군인에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미숙하기만 하고 귀여움 없는 후배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껴주고 챙겨준 건지, 당신의 따듯함에 매번 새삼스럽게도 놀란다. 그때에도 당신은 줄어든 내 편지에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내 일상이 궁금하다며 물어왔을 뿐이었고, 나도 늘 그랬듯 당신을 핑계로 삼아 뒤에 숨어 따르는 척, 내 비겁함을 숨겨내기에 급급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편지인지 아니면…. 그저 생존 확인용 종이 쪼가리인지 모를 것을 주고받으며 또 4년이란 세월이 지나, 내가 미루고 미루던 군대로 가야 했을 때쯤엔 운 좋게도 기회가 되어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각종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한 한국에서 당신을 만났을 땐…. 솔직히 낯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습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당신을 보며 내가 기쁨보다 낯섦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당신은 내게 면식이 있는 고등학교 후배 정도의 거리감을 지닌 채로 대했고 나는 그 부분을 못 견뎌 했다.
못 견디겠으면 당신에게 다가가 솔직하게 말하고 응석을 부렸으면 될 일을 –당신은 아마 못 이기는 척하며 분명 받아줬을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대했는지. 나는 겁도 없이 당신에게 다가가 당신이 가르쳐준 가면을 쓰고 당신이 꾸며내 준 정우성을 연기했다. 변명해 보자면 그것이 감히 당신에게 어떤 느낌으로 와닿았는지, 또 당신을 어떻게, 얼마나 훼손시킬지를 알 수 있었더라면 난…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 같은 정우성은 제 미래도 모르고 당신을 멋대로 휘둘렀고, 이 때문에 점점 더 멀어지는 사이가 무색하게도 우리는 농구에 있어서는 역사를 써냈다. 아마 7년씩이나 떨어져 있었음에도 나를 가장 잘 아는 게 당신이란 것에는 변함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놀라운 성적에 각종 매스컴은 우리에게 연일 플래시를 터뜨려 댔고 당신은 맨 앞에 서, 그 모든 빛과 시커멓게 그지없는 질문들을 홀로 감내하며 마치 뒤에 서 있는 우리를 보호하듯 그렇게 서 있었다.
귓가에는 열을 숨겨낸 채 담담함을 가장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시야에는 어느샌가 나보다 많이 작아진 당신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뭐지? 이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은? 아, 그때와 똑같다. 산왕 시절과 똑같아. 산왕 시절 당신의 뒷모습을 현재 당신의 뒷모습에 겹쳐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진정 원하고 있던 것을 눈치채곤 내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추상적인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이것을 내내 아쉬워했던 거야. 나를 처음으로 품어준 선배이자 형, 주장인 당신과 좀 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뛰고 싶었어. 설령 다른 사람들이 멍청이라며 손가락질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미국행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것을 용인해 줄 사람이 아니었지. 그래서 나는….
이때의 나는 앞이 캄캄해진다는 게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뿐일까? 충격으로 인해 그런 건지는 몰라도 이날의 기억은 머릿속의 생각 말고는 전부 다 흐릿하게 남아있어 떠올리려 해도 떠올려지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대체 뭘 얻고자 미국에서 아등바등했었던 걸까. 농구? 맞지. 하지만 친구를 사귀고 주말마다 약속에 나가며 당신을 뒤로 미뤄둔 것을 농구를 위해서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애초에 저런 것에 무관심했던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한 이유는 전부…. 당신이었는데 어째서 저것들을 당신보다 위에 두고 앞에 둘 수 있었지? 어떻게…. 당신의 이런 무거운 애정을 받고도 무엇하나 돌려주는 일 없이, 당신의 관심이 평생 내게로 쏟아질 거라 생각했던 거냐고.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쏟아졌고 나는 그것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상황도 당신도 내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변명할 기회조차 주기 싫은 듯 내게 거리를 두는 당신과 다음 경기를 위해 공항에 가야 한다며 재촉하는 팀 매니저 덕에 떠밀리듯 미국으로 온 나는, 맡은 바를 철저히 해내면서도 속으로는 당신만을 찾아대며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다. 혹시나 올 편지를 내내 기다리며.
하지만 그동안 내 오만방자함에 벌을 내리듯 당신은 길고 길었던 펜팔을 끊어냈다. 그렇게 당신의 편지가 오지 않은 지 일 주, 이 주, 삼 주…. 그리고 한 달. 한 달이 되어서야 인정한, 더 이상 당신의 편지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내 상상 이상으로 타격이 컸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자라선 왜 아직도 속은 이다지도 무른 것인지. 조금씩 무너져 가던 나는 당신의 편지가 오지 않음을 인정하고 나서부터 빠르게 무너져 갔다. 무너지고 또 부서져 티끌 정도의 의지만 남았을 때쯤. 바보 같은 나는 내가 무른 이유의 답이 당신에게 있었다는 걸 뒤늦게서야 알았다.
왜 나는 유독 당신이 아프게 하는 것에 있어 속수무책인 것일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기억은 단 하나. 당신이 나를 아프게 했던 기억이었다. 아니, 당신은 늘 내가 아프게 두지 않았으니 애초에 말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까이에 있어도, 또 멀리 있어도 내가 아픈 것을 두고 보지 않는 당신으로 인해서 나는 당신이 주는 사랑에 대해선 내성이 있을지언정 아픔에는 내성이 없던 거였다.
당신 덕에 모르고 살던 것을 당신 때문에 알게 하다니. 당신이 준 애정에 취해 따듯한 여름인 줄 착각하고 있던 내게, 당신은 당신을 앗아가 버림으로써 내게서 단번에 태양을 앗아가고 시린 바람을 불러일으켜, 내가 있는 현실이 차디찬 겨울임을 짚어주었다. 그런 당신이 겨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과거의 잘못과 당신의 부재에 좌절하기도 잠시. 내게는 이럴 시간이 없었다. 당신을 붙잡아야 해. 붙잡아서 내 곁에 두고,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돌려줘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펼쳐 든 것은 전화기도 아니고 비행기표도 아닌 편지지. 그래 어긋난 곳이 있다면 다시 그 부분부터 하나씩 돌이켜 보면 된다. 당신이 읽지 않아도,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돼. 그저, 내가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도 충분하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전화를 두고 멍청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이명헌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이명헌을 아는 나는 그렇게 해선 안 됐다. 지금 이 멍청한 상황을 만든 것도 나.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것도 분명 나 하나니까. 이명헌이 가꿔온 정우성이라면 분명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당신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매 주말 무슨 일이 있건 편지를 써 당신에게 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당신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 뜻은 편지를 반송하지 않았단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편지가 반송되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변함없이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렇게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쌓여가면 쌓여갈수록 이것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잠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돌아가는 것이기에 계약 문제도 그렇고 정리해야 할 게 산더미였지만 이것만 마치고 나면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복잡하기보단 간단하게 느껴져 어렵지 않게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구단 계약과 매니지먼트 계약기간이 모두 끝나고 주변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3년의 세월이 지나 미국에 온 지 10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신이 읽을지 안 읽을지 모르겠지만 전후 사정을 세세하게 적은 편지를 미리 보내 두었으니 더 걱정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혹시, 만약에라도 편지를 당신이 읽었다면 공항에서 당신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이번 비행이 그동안 수 없이 타봤던 모든 비행 중 가장 지루하고 길게 느껴질 것임을 확신하며 나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끄응.”
기나긴 회상을 끝낸 우성이 오랫동안 감고 있어 뻑뻑하게까지 느껴지는 눈을 힘겹게 떠냈다. 덜컹거리는 기내와 섣부르게 일어나려는 손님들을 제지하는 승무원들의 단조로운 목소리까지. 곳곳에서 들려오는 한국어에도 우성은 한국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눈을 끔뻑이다가 공항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명헌을 떠올려 보고는 이내 다시 몸을 굳히며 긴장했다.
명헌에게 배운 대로 행동했다지만 그것이 정말 명헌에게 닿았을지는 모르는 일. 한참 동안 기내에 구겨져 있느라 다 굳어버린 몸을 어찌저찌 움직여 입국심사를 마친 우성은 입국 게이트 문 하나만을 남겨두고선 멈추어 섰다.
문 하나였다. 문 하나만 나서면 명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겁이 나, 쉬이 밖을 향해 나서지 못했던 우성은 대부분 사람이 다 빠져나가 혼자 게이트 안에 남게 되자, 결국 움직이지 않으려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게이트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성의 몸이 문밖으로 나온 순간, 우성의 시야에는 넓은 공항 내부와 함께 한 남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완전히 들어오고 나서야 드는 안도감에,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천천히 명헌에게로 걸어간 우성이 평정을 가장한, 하지만 울음이 가득 묻어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 더 넓은 세상도 봤고, 하고 싶은 것도 전부 하고 왔어요.”
“.. 그래용?”
“네. 다 이뤘는데 아직 하고 싶은 게 남아서, 제일 하고 싶은 게 떠올라서 급하게 다 정리하고 돌아왔어요.”
“그게 뭔데?”
명헌의 말에 무릎을 꿇은 우성이 주머니 속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열어 보였다.
“세상을 넓혀봐도 기준을 아무리 옮겨봐도 형이 아니면 안 되겠어요. 애초에 세상을 넓혀 보려 한 것도, 기준을 옮기려 한 것도 모두 형 말이라서 한 거였다는 걸 내가 바보여서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형 말대로 넓은 세계를 보고 기준을 옮기니 새로운 것들이 보였고 그것들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그것들도 형이 없으니까 죄다 쓸모가 없어졌어.”
“.....”
“형이 알려준 모든 게 내게 쓸모가 있으려면 형이 내 곁에 있어야만 해요. 내가 아무리 바보라 해도 아무 말이나 듣진 않으니까.”
“뭐…?”
“형이 한 모든 말 들을 생각 없이 따랐던 게 다 뭐 때문인 것 같아요?”
“그야… 익숙하니까. 내가 주장이기도 하고 편하니까 그랬겠지.”
“설마요. 편하다고 누가 모든 걸 다 맡길까.”
“그럼?”
“형이 내 기준이라, 내 세상이라서 그랬어요. 이미 기준인 사람이라 형이 날 어떻게 휘두르든 신경 쓰지 않았던 거야. 근데 그게 내가 의식하고 벌어진 게 아니다 보니까. 깨닫지 못하고 그동안 너무 멍청하게 굴어서 형이 날 못 믿게 만들었죠.”
“.....”
“애초에 형이 아니었다면 평생 시도해 보지 않았을 일들이었어요. 그러니 내가 넓힌 게 아니라 형이 넓힌 거야.”
“.... 그래서?”
“이젠 다른 세상이 궁금하지도 않고 새로운 걸 경험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특히 그게 형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미워도 기회를 한 번만 줘요. 형에게 받은 걸 전부 돌려줄 수 있게…. 옆에 있게 허락해 줘요.”
우성의 말에 고개를 떨군 명헌이 왼쪽 손을 뻗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 다 돌려줄 순 있고?”
명헌의 말에 눈물이 맺힌 얼굴로 활짝 웃어 보인 우성이 명헌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대답했다.
“.. 글쎄요?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기한을 평생 정도는 해줘야 가능할 것 같은데요?”
우성의 웃음기 섞인 대답을 듣고 있던 명헌이 우성을 힘껏 끌어안자, 우성도 그런 명헌을 힘주어 안아주고는 그리웠던 명헌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저를 빛날 수 있게, 자유롭게 하기 위해 제 몫의 쓸쓸함까지 품고 있었던 명헌의 품에서는 그와 닮은, 짙은 씁쓸한 겨울의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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