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눈 (雪)

눈이 올까요?

바스락, 바스락

커다란 몸이 움직이는 대로 이불이 흐트러지며 고요한 방안을 작은 소음들로 가득 채웠다. 잠시 고요해진 방안 속 끄응, 거리는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두터운 두 발이 침대 아래로 길게 쑥 뻗어 내려와 부드러워 보이는 러그 위에 안착했다. 발의 주인은 꽤나 이불을 벗어나기가 싫었는지 한참을 러그 위에서 발장난을 치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실내화에 대충 발을 끼워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 ..... 추워 뿅 "

작게 중얼거린 명헌은 추웠는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어내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말려져 있던 이불을 들어, 제 몸에 감싸고선 거실로 걸어갔다. 이불로 온 몸을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추위는 명헌이 그토록이나 싫어하는 겨울이 무르익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명헌은 미간을 찌푸리곤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가 찬장 위에 있는 코코아 통을 꺼내 들었다.

오래된 선수 생활과 더불어 원체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명헌이었지만 이렇게 짜증이 날 때만큼은 유별나게 단 것을 찾았으므로 늘 잊지 않고 한 쪽에 구비해 두었었다. 무심하게 코코아 통을 열어 핫초코를 만들면서도 겨울이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저번 겨울에도 이렇게까지 짜증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번 겨울은 이토록 시리게 느껴지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 답은 딱 하나. 제 어린 연인으로 이어져 명헌은 신경질 적으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정우성. 왠지 모르게 이름에서부터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제 연인은 이름 뿐일까.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NBA까지 진출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이를 뒷받침할 성실함. 목표를 향한 열망과 집착력도 대단해 마치 농구선수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우성은 그 얼굴까지도 완벽했다. 명헌은 가끔 신이 정성을 들여 만든 인간이 있다면 우성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이번 겨울만큼은 아니었다.

" 완벽은 개뿔 뿅; 거짓말쟁이 삐뇽. "

롱디 12년 차 명헌은 사실 살갗에 닿아오는 열기보단 차가운 화면이, 깨끗한 음성보단 노이즈가 섞인 우성의 목소리가 더 익숙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 시작된 인연은 하필 그 어떤 인연들보다 가혹해서, 연애 기간 중 붙어있었던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욱 길었던 탓이었다. 지금보다 한참은 더 어렸을 때에는 밀려드는 외로움에 괜히 드넓게 보이는 바다를 원망해보기도, 광활한 하늘을 째려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어째 그때보다 그러지 않는 지금이 더 유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 .... 하아 "

명헌은 코코아 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 시커멓게까지 보이는 핫초코가 든 컵을 조심히 집어 들고는 거실에 깔린 러그 위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명헌이 새로 집을 구할 때 반드시 주택이어야 한다며 아주 귀찮게 군 우성 덕에 오게 된 전원주택은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손이 많이 가, 꽤 귀찮았다. 가격 때문이라면 저가 낼 것이고 관리도 저가 할 테니 반드시 주택이어야만 한다고 우겨댔던 우성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여름이 되면 금방 무릎 밑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사람을 불러 잔디 관리를 하는 것도, 이렇게 겨울이 되면 끝을 모르고 쌓이는 눈을 치우는 것도 전부 명헌이었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이면 쌓일 수록 떠올려지는 것은 우성의 빈자리였으므로 명헌은 이 곳에 앉아 밖을 바라볼 때마다 전원주택을 고집한 우성이 밉다는 생각을 했다.

" .. 자주 오지도 않을 거면서 "

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을 내뱉곤 밖을 바라봤을까. 핫초코마냥 시커멓게 타들어 간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을 수 놓는 새하얀 눈은 명헌의 심기를 뒤틀리게도, 또 그가 가장 사랑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게도 만들었다.

우성과 그저 선후배이기만 했던 시절. 우성이 1학년 저가 2학년이었던 때, 지금처럼 눈이 한가득 내렸던 적이 있었다.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예상하지 못한 폭설에 온 주변이 눈 난리라 건장한 농구부원들은 이곳저곳으로 불려 나가 눈을 치워드리곤 했었는데 훈련과 더불어 눈 치우는 일에 바빠, 방학을 즐길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감독 선생님은 겨우내 눈을 치워내느라 지쳐 있던 부원들을 향해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과 함께 하루의 자유시간을 주었었다.

이때의 명헌도 겨울을 싫어하기는 매한가지였기에 사실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한들 밖을 나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눈싸움을 하러 가자며 건넨 성구와 현철의 권유를 뿌리치고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으면, 고요해진 방안에 똑- 똑- 똑 하는 일정한 소리와 함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명헌 선배 저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

" 들어와용. "

분명 저를 제외한 부원들 모두가 눈싸움을 하러 간다 들었던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성에 무언가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생각한 명헌이 책을 내려놓고 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성이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고 나서도 눈을 바삐 굴려 주변만 바라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우성에 조금 초조해진 명헌이 몸을 일으켰을까. 우성이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웅얼거렸다.

" 가, ...안돼요? "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우성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명헌이 허리를 숙여 우성의 시선을 마주하곤 되물었다.

" 뭐가 뿅? "

가까워진 명헌의 얼굴에 무심코 뒷걸음질 친 우성이 눈동자를 바삐 굴리며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 그...! 눈싸움이요! 다들 하고 있는데 선배만 없어서요! 같이 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

" 같이 하고 싶어용? 내가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용. "

" 아... "

" 아니면, 우성이 내 말 하나 들어주면 나갈게 뿅. "

" 어떤 거요? "

축 쳐져 있었던 좀 전과는 달리 눈을 빛내고 있는 우성에, 명헌이 뒤를 돌아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을 하나둘 껴입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 나도 형이라고 불러주면 나갈게 뿅. "

" ... 네? "

" 현철이도 형, 성구도 형, 동오도 형, 낙수도 형인데 왜 나만 선배일까용? 혹시 나 우성에게 미움받고 있어용? "

" 아니, 아니에요! "

" 그럼 그렇게 불러줄건가용? "

어느새 옷을 다 입은 명헌이 우성의 앞에 서서 묻자, 우성이 입을 앙다물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알겠어용. 가자 뿅. "

그렇게 운동장으로 나온 두 사람이 열심히 뛰놀고 있는 부원들과 가까워졌을까. 현철의 야유와 함께 의아한 듯한 동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 춥다고 안 나올 거라더니? 우성이 녀석이 뭐라 말했길래 이명헌이 이 추운 날 밖을 다 나오셨을까?

- 명헌이 너 추운 거 싫어하는데 괜찮아? 오늘 많이 추운데.

현철과 동오의 말을 들은 우성이 명헌을 향해 시선을 돌렸으나 명헌은 개의치 않고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 거래를 했어용. 그리고 나오기만 한 거지 눈싸움은 안 할 거야 뿅. "

- 오? 무슨 거래길래? 궁금한데 들어나 볼까?

" 비밀 뿅. 너희는 얼른 눈싸움이나 해 뿅. "

명헌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현철이 손에 있던 눈 뭉치를 던지자 잠시 중단되었던 눈싸움이 재개 되고, 이에 관심이 분산된 것을 확인한 명헌은 그제야 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 우성도 얼른 가서 눈싸움 해 뿅. 나는 보다시피 추운 게 싫어서 눈싸움까지는 무리 뿅. "

" ... 추운걸 싫어해요? "

" 추위를 많이 타서용. "

" 그러면 괜히 저 때문에.. "

" 우성, 거래한걸 잊었어 뿅? "

" 네? "

" 거래 했잖아용. 나 그냥 나온 거 아닌데 뿅? "

" .. 그건 굳이 거래가 아니었더래도... 형이 바랐다면 그렇게 불렀을 거예요. "

" 아쉽게 됐네용. 진작 말할걸 뿅. "

" 지금이라도 들어가요 얼른. 너무 추운데 "

" 이왕 나온 거 눈이라도 보고 가지 뭐, 우성도 얼른 놀아야지 안 놀 거야 뿅? "

" 저 때문에 나왔는데 혼자 둘 순 없죠. "

" .. 혼자 있다고 외로움을 느낄만한 나이는 아닌데용. "

" 그건 저도 알고 있거든요! "

" 정말 괜찮으니 다녀와, 정 심심하면 눈사람이나 만들고 있을테니까용. "

" 싫어요. 그럴 거면 그냥 형이랑 눈사람 만들래요. "

" 정말, 말 안 듣네용... "

단호하게 거절하는 우성에 더 이상 권유하기도 어려워진 명헌이 우성과 함께 눈싸움을 하는 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시간이 흘러 따분해진 명헌이 우성을 향해 시선을 옮겨보면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는 우성이 눈에 들어왔다. 어쩜 이렇게나 투명하고 순수할 수가 있는 건지. 보통의 고등학생이라면 눈싸움을 보고 이렇게까지 눈을 빛내진 않을 텐데, 아니 빛내더라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함이란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이맘때쯤의 남학생들에겐 쥐약이나 다름 없었으니 다들 제 속을 숨겨내기에 급급했고 이는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허세를 부릴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지만 명헌은 어렸을 때부터 제 속이 드러나는 것에 있어 꽤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당했던 일도, 속내를 드러내 부끄러웠던 적도 없었건만 왜 그리도 속내를 내보이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명헌은 혹여 속내를 드러낼까 싶어 말을 줄였고, 말이 준 것을 보고 걱정하기 시작한 주변에 이상한 어미를 사용해 주의를 돌려내며 저를 꽁꽁 감추어냈다.

그런 명헌 앞에 나타난 정우성이란 존재는 놀람을 넘어선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솔직하고 투명하지? 우성의 솔직함은 가끔 현철의 레슬링 기술을 불러오긴 했지만 명헌은 그런 우성이 좋았다. 주위에서 조금은 재수 없다 말하는 우성의 솔직한 언변도, 우성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투영해내는 얼굴도 모두 포함해서. 그리고 그 솔직함과 투명함이 저를 향한 애정을 품었을 때 명헌은...

" ..ㅎ... 명헌이 형! "

" ... 불렀나용? "

" 무슨 생각을 하길래 대답이 없어요. "

우성이 입을 비쭉이며 말하자 명헌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 귀여운 거 뿅. "

" ..? 갑자기요? "

" 그래서 왜 불렀어용. "

" 아, 이거 때문에요. 형 손 좀 내밀어봐요. "

" 왜? "

" 양쪽 전부 다요. "

우성의 말에 명헌이 패딩 주머니에 푹 파묻혀져 있던 손을 꺼내 우성에게로 내밀었다. 명헌이 내민 손 위로 우성이 따듯한 핫팩을 올려두자,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따듯함에 명헌이 제 손 위에 올려진 핫팩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까. 활짝 웃어 보인 우성이 핫팩 위로 손을 올려 명헌의 손까지 꽉 쥐고는 말했다.

" 이러면 따듯하죠!! "

" ..... "

" 열심히 눌렀는데도 이제서야 따듯해진걸 보면 추우면 추울수록 핫팩이 잘 안 따듯해지나 봐요. 어때요? 이제 덜 추워요? "

" ... 얼굴이 추운데 뿅... "

" 얼굴이요? 어떡하지... 더 없는데... "

명헌의 말에 고민하던 우성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명헌의 손을 덮고 있던 손을 올려 그대로 명헌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 이러면 핫팩보단 아니지만 따듯하죠! 핫팩을 그대로 얼굴에 가져다 대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된다더라고요. "

" ..... "

무엇이 그리도 좋은 건지 배시시 웃어 보인 우성이 명헌에게 얼른 손을 집어 넣으라며 재촉하고는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다시 시선을 돌려 눈싸움이 한창인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우성을 보며 눈을 지긋이 감은 명헌은 제 뺨을 감싼 우성에 손에 기대, 우성의 손이 식을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우성의 손이 차가워진 것을 눈치챈 명헌이 손을 빼내 우성의 손을 맞잡곤 따듯한 입김을 불어 녹여주자, 우성이 허둥거리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어, 어...! 안 해줘도 돼요! 형 손 다시 차가워지잖아요. "

" 우성, 손 너무 차가워 얼른 이리와 뿅. "

" 괜, 괜찮다니까요!? 아, 저 눈사람, 눈사람 만들 거라 괜찮아요! "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치던 우성이 갑자기 눈사람을 만들겠다 말하며 주저앉아 버리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명헌이 중얼거렸다.

" .. 눈사람? 지금? "

명헌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것인지 우성이 대답 없이 눈을 뭉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잠시 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던 명헌도 우성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누가 보아도 다급함에 튀어나온 변명 같았건만 우성은 마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 집중하여 눈을 뭉치고 있었다. 눈싸움보다는 덜하지만 반짝이는 눈, 추위 덕에 올라온 홍조와 그보단 덜 붉게 물든 오뚝한 코 끝, 집중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인지 앙다문 입술까지. 그 모든 게 우성을 천진난만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천진난만이라.. 고등학생에게 천진난만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그것도 건장한 체육계 남자아이에게? 명헌은 시야를 가득 채운 새하얀 눈을 바라보며 부원들을 향해 천진난만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떼보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한... 신현철, 천진난만한... 김낙수.. 그만하도록 하자. 혹시 얼굴이 문제였나 싶어, 천진난만한 최동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아닌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저보다 덩치 큰 건장한 남자아이가 어떻게 이토록 천진난만하고 귀여워 보일 수 있는 것일까? 명헌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면 두껍게 입은 옷을 뚫고 팔 부근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 .. 형 오늘 이상해요. 혹시 지루해요? "

지루할리가 있나, 네 얼굴만 봐도 재밌는데 지금.

" 아니용. 안 지루해용. "

" .. 근데 왜 계속 딴생각해요? 계속 불렀는데도 대답도 안 해주고... "

우성이 눈을 내리깔고 입을 살짝 내민 채로 말하자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필시 제 얼굴이 어떨 때 잘 먹히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성이 살아오며 이렇게 제 얼굴을 잘 써왔을 것을 생각하면 왜 이리도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인지, 명헌은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내곤 담담함을 가장해 대답했다.

" .. 주변이 온통 하얘서 그런가, 멍때리게 되는 걸 어떡하나용. "

"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형! 혹시 어지럽진 않아요? 머리가 아프다거나 또, "

" 우성, 진정해용. 그저 추위를 잘 타고 추운 날에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으니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뿅. "

" ... 그래도요.. "

" 애초에 내가 얼마나 튼튼한지 알면서 괜한 걱정을 하네용. 어지럽다고 해도 쓰러지거나 하진 않으니 걱정 마 뿅. "

" ... 걱정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

풀 죽은 우성의 얼굴에는 명헌을 향한 애정을 바탕으로 속상함과 섭섭함 외에도 여러 감정들이 드러나 있어, 명헌은 방금 저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보며 생각했다.

' ... 혼낸 기억은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풀이 죽었지? 게다가 얘는 숨길 생각이... 없나?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드러내고 있는 건가?... '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끝 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에 명헌이 한숨을 참아내며 시선을 움직였을까. 눈사람을 만드느라 벌겋다 못해 퍼렇게 변한 우성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 정우성!! 너 손! "

" !!? "

갑작스러운 명헌의 고함에 놀란 우성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있자. 명헌이 얼굴을 굳히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우성의 손을 그러쥐었다. 핫팩에 의해 제 손이 보통의 온도보다 뜨끈뜨끈하다 하더라도 우성의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손끝이 둔하게 살짝 굽혀지는 것만 보더라도 손이 곱아든 걸 알 수 있겠건만, 대체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울컥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명헌이 묵묵히 우성의 손을 녹이고 있으면, 그런 명헌의 눈치를 보고 있던 우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명헌이 형, 저 손 괜찮아요. 진짜로요! 다른 형들은 눈싸움도 하는데요 뭐, 정말 괜찮아요. "

명헌은 겨우 참아내고 있던 한숨을 뱉어낸 뒤, 우성을 흘겨보았다.

" 하아... 너 지금 손 곱아들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대체 어디가 괜찮아. 쟤네들은 장갑이라도 꼈지, 너는 맨손인데 쟤네랑 너랑 같아? "

" ..... "

"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내 걱정을 하고 있는 게 말이 돼? 이러다 손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손 관리 안 하지 정우성. "

" ..... "

우성의 손을 녹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을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들리지 않는 대답에 이상함을 느낀 명헌이 고개를 들면, 입을 앙다문 채 울상을 짓고 있는 우성이 있었다.

" ....... "

" ...... "

" ... 왜, 왜 울어용. "

" 크흡... "

" 아니 난 걱정되니까 말한거지.. 울지마용.. "

" 킁... 형은 왜 그렇게 말해요..? 눈사람 만들다가 형이 대답 없으니까 형 부른거고.. 추위 싫어하는 사람 억지로 부른 걸까 봐 신경 쓴 게, 그게 그렇게 킁... 잘못이에요? "

" 아니지... 잘못 아니지... 그냥 너 손 다칠까 봐 걱정한거잖아용... "

" 누가 그렇게 걱정하는데요! 흐엉....킁, "

" ..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울어용.. 얼굴 다 얼어용..... "

" 킁....훌쩍 "

다행히도 금방 울음을 그친 우성에 안도의 숨을 내쉰 명헌이 손을 들어 우성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 이렇게 추운 날 울어버리면 얼굴 다 상해용... 벌써 붉게 변한 것 좀 봐용.... "

" ...저 못생 킁, 못생겼어요 지금? "

설마, 그럴 리가 있냐?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해?

" 아니용. 잘생겼어용. 산왕 최고의 미남 다워용. "

" 킁, 그럼 됐어요. "

우성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힘이 풀릴 지경인 명헌은 우성의 손을 쥐어 다시금 상태를 살폈다. 조금 전보다 확실히 나아졌지만 아직도 벌겋게 되어있는 것이 이대로 두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아, 명헌은 우성의 손에 핫팩을 하나씩 쥐여주며 함께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다.

" 어어...? 형 눈사람은요? "

" 정우성. "

" 눈, 코,입만 달면 끝인데... "

" 네 손을 봐. "

" 나뭇가지만 꽂으면 되는데... "

" 하아... "

" 형이랑 처음으로 본 눈으로 만든 눈사람인데... "

" 그럼 내가 만들 테니까 너는 주머니에 손 넣고 있어. "

" 앗, 하지만 "

" 이것도 싫으면 지금 당장 기숙사 가고. "

" .. 형이 만들어줘요. "

한숨을 내쉰 명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무 밑으로 걸어가더니, 손으로 눈을 파헤쳐 떨어진 나뭇가지와 작은 돌들을 주워 와 눈사람에 박아넣기 시작했다. 눈사람이 형태를 갖춰가면 갖춰갈수록 지금의 상황이 어이없게 느껴져 손이 느려지는 것과 동시에, 우성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와... 형 눈사람 만들어 본 적 있어요? 잘 만드네요? "

" 어렸을 때 만들어봤지 뿅. 다들 그러지 않나용.. "

" 저는 농구만 했어서 만들어 본 적 없거든요. 친구도 없었고. "

우성의 말에 잠시 멈칫한 명헌의 손이 다시금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코, 입, 손을 지나 마지막으로 단추를 표현한 돌을 끼워 넣은 명헌이 우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눈사람을 처음 만들어본 소감은? "

명헌의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떠 보인 우성이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 최고로 좋은데요? "

눈이 많이 내려 주변이 전부 설원으로 변한 공간 속, 시끌벅적한 소리들은 사라지고 옅게 내리쬐는 태양 빛이 한사람만을 비춘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멍하니 우성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이던 명헌이 피식 실소를 흘리며 우성의 손목을 잡곤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 가냐며 묻는 다른 부원들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거침없이 걷는 명헌의 뒤로는 명헌을 부르는 우성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 명헌이 형- 천천히 가요!! "

" 명헌이 형- "

" 명헌이 형- 일어나봐요. 형. "

계속 되는 부름에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명헌이 잡히지 않는 초점으로 인해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면, 방금 전 우성보다 조금 많이 커진 우성의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멍한 정신에 명헌이 손을 뻗어 우성의 얼굴을 더듬거리면, 차가운 살갗이 느껴져 명헌은 그제야 제 앞에 있는 우성이 꿈이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 너... 어떻게 여기에, 분명 못 온다고 했잖아. "

" 못 오는 게 어디 있어요- 형이랑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미리 앞당겨서 끝내고 바로 날아왔죠. "

" 근데 왜 말은 그렇게 했어? "

"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음... 서프라이즈? "

" 나가. "

" 아, 형 미안해요. 서프라이즈 아니고 진짜 확실하지 않았는데 괜히 온다고 했다가 형 못 보면 어떡해요... "

" ...... "

" 저 일 끝내자마자 날아와서 춥고 피곤하고 힘든데 안 안아줄 거예요? 응? 되게 기특한 일 했는데? "

" 기특하기는, 다시는 이런 서프라이즈는 하지 마. 알겠어? "

" 으응... 알겠으니까 얼른 안아줘요. 진짜 오랜만인데 "

우성의 보챔에 결국 백기를 든 명헌이 팔을 벌려 우성을 안아주었다. 실상은 누워 있는 명헌의 품으로 우성이 파고 들어간 것이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헌의 팔이 우성의 목 위로 둘러지고 우성의 손이 익숙한 듯 명헌의 허리를 파고들어 갔을까. 뜨끈한 몸에 닿는 차가운 기운에 명헌이 기겁하며 우성의 몸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 윽, 너 뭐 했길래 손이 이렇게 차가워! "

" 아- 궁금해요? 보여줄까요? "

" 무슨, "

말이 끝나자 마자 명헌을 가볍게 안아 든 우성이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몸이 들리는 바람에 떨어질까 두려운 명헌이 우성을 끌어안으면, 우성이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명헌을 향해 말했다.

" 형, 저기 봐요. 저-기 "

" 대체 뭐가 있다고, "

우성의 말에 고개를 돌린 명헌이 창밖을 바라보자 눈에 들어온 것은 꽤 큰 눈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만들었던 눈사람보다 크고 조금은... 못생긴 눈사람. 멍한 표정으로 눈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명헌에, 우성은 신이 난 듯 들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 형 기억나요? 전에 고등학생 때 눈 오는 날 눈사람 만들었던 거? 그때 처음으로 형한테 형이라고도 부르고, 첫눈도 맞고 좋았는데 하필 그 뒤로 내가 미국으로 가버려서 우리 학생 때 겨울은 그 기억이 끝이잖아요. "

" .... "

" 미국으로 가서 처음 맞는 겨울날 그게 얼마나 아쉽고, 저 기억이 얼마나 달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하필 그 지역은 눈도 안 내려서 형 생각이 얼마나 났는지. "

" .... "

" 거긴 한국에 비해선 춥지도 않은 편이고 눈도 안 내리니까. 형이 오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매 겨울마다 했어요. "

" ..... 너, "

" 그러니까. 형 우리 결혼해요. 사실 결혼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형도 국내에서 뛰어야 하고 저도 아직 미국에서 뛰어야 하니까. 하지만 시즌 오프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서로가 있는 곳으로 날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연인이 아닌 배우자로 소개 할 수 있게 되겠죠. 저는 그걸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왔고 고민도 많이 해왔으니까. 형도 진지하게 생각해주세요. "

" ..... "

" 저는요, 제 평생을 농구가 아닌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그건 형일 거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놨었거든요. 알죠? 목표가 정해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아가는 거. "

" ... 알지. 내가 제일 잘 알지. "

" 그러니까 형이라고 해도 별수 없을걸요? 제가 못해낸 건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

" 프러포즈가 아니라 협박처럼 들리는데? "

" 설마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져달라는 귀여운 애인의 간청이죠. "

" 내가 싫다고 하면? "

" 어쩔 수 없죠. 미국 가는 거 미루고 겨울이 다 갈 때까지 형 쫓아다니면서 눈사람이나 만들 수 밖에 "

" 오, 나쁘지 않은데 뿅. "

" 어? 뿅? 오랜만, 아니지. 형! 너무해요! 나쁘지 않다뇨? 여기서는 받아주는 흐름 아니었어요?? "

" 싫은데 뿅? 우성은 말 한 건 지키는 남자니까.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나 따라다니면서 눈사람이나 만들어 뿅. "

" 아, 아!!!! 혀엉!!!!! "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는 추운 겨울과 상반된 환하고 따듯한 웃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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