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계절풍.

백호열


고백하겠어, 울적한 첫사랑의 유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하여. 미토 요헤이는 열대의 조각같은 가나가와의 해변에서 발가락 사이로 얽혀드는 흰 모래를 샌들로 밀어내며 길게 걸었다. 나가보지 못한 타국에서의 태양빛은 이렇게 차갑거나 이렇게 요란하지 않다는데,  평생 자신은 알지 못할 것들을 곱씹는 현실적인 습관은 그의 어릴 적부터 시작된다. 동급생이라 불리는 동년배들과 본격적으로 섞이고 부터다.

타인과 다르다고 인지할 때부터, 사람의 시야는 또렷해진다. 객관적 넓이라는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미토는 그 스스로 내면이 무언가 어긋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보호자나 이웃에게까지 어떤 어그러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최소한 아주 나쁘지 않은 상태 - 말을 빌리자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 놓고 줄 돈이 미묘하게 맞지 않는 것 같은 따끔한 감각을 느끼는 - 였던 것이다. 누군가 손을 뻗어서 머리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때 마다, 이것은 그런대로 좋고 이것은 애매하구나, 하는 것을 좀 더 일찍 깨쳤다. 빠른 교육 탓이 아니었다. 가정 환경이 영 험악하다던가 종교적인 사유로 한쪽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학습을 한 것 역시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본의 가정에서 평범하고 ‘표준’ 유성애적인 이야기를 듣고 자라다보니, 초등생에서부터 중학교 삼년의 미토는 자연스레 사춘기 소년이라면 한번씩 던져볼 다소 노골적인 대화에서 스스로를 도려내듯이 소외시키고 있었다. 남자라면 여성을 만지고 싶고, 닿고 싶고, 나아가서 관계를 하고 싶어한다고. 어떻게 가져왔는지 상상하기도 싫은 아메리카의 도색잡지를 들춰보는 동그란 반 안의 무리들이, 미토 넌 의외로 재미 없구나. 하고, 농거리로 자신을 삼았을 때에도 미토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어색하게 빙긋 웃고 넘어가고 말았다. 아직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하면서. 어디라도 좋으니 여기에서 좀 빠지고 싶다.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동급생들에게 섞여 있을 때 마다, 저 말을 듣고 있으면 사람을 어떻게 해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두통으로 꾹꾹 당겨오는 이마를 가만히 누르면서, 각이 잡힌 파란색 보급형 샤프의 날카로운 몸체를 단단히 잡고 미토는 빨리 어른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교실을 나가버리고 싶다고 바랐다. 원초적 본능을 꾹꾹 누르는 것이 미덕인 사회로 진출하고 싶다.

그런 결벽적인 매무새가 어쩌면 이성 학우들의… 어떤 부분을 자극 했던 것 같다. 미토는 자주 끌려나가 고백을 받았다. 청량한 여름, 나무그늘 아래에서 사붓한 속눈썹을 가진 후배가 꼭꼭 눌러 쓴 글자의 편지를 전한다던가, 목덜미를 살짝 덮는 길이의 단발을 한 선배가 교제를 제의한다던가, 같이 주번을 하던 동급생이 바닥을 쓸기 위해 올린 의자를 내리면서 무슨 말을 한다던가. 그 때마다 미토는 아주 곤란해하면서, 스스로의 부족한 면과 그들의 좋은 면을 기왓장처럼 어슷하게 올려 에둘러 거절을 했다. 그 때마다 미토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믿는 신은 없었지만 어쩌면 기도도 했던 것 같다. 신이시여, 제발 이런 생각을 고쳐주세요,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것 처럼, 평범하게 살게 해 줘요, 그러나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한살 더 나이를 먹고 교복을 바꿔 입을 때 까지 미토에게 평화로운 삶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 때, 넉넉한 반팔 셔츠를 꺼내 입을 때 즈음, 전학생이 왔다. 다른 지방에서 온 말량광이라고. 부친의 전근 덕택에 이 곳에 머무르게 되었노라며, 모쪼록 잘 대해 달라 예의바른 말씨로 칠판 앞에 서서 인사를 시키는 선생 옆에서 교실 뒷편을 빤히 보는 눈에 미토는 그만 시선을 놓지 못한 것이다. 말량광이 - 기실 행동의 수준이 무지막지해 말썽쟁이라던가 난봉꾼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만 같은 - 라 박아놓은 별칭과 똑같이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짙은데다가 끝이 높게 올라간 눈썹은 강단을 넘어 성격이 있어 보였고 그 아래 두툼하게 나온 외꺼풀은 참으로 신경줄이 굵어 보였다. 짙은 갈색 눈은 커텐을 걷은 창 밖에서 밀려오는 오전의 자작한 태양빛에 속이 깊은 카키색으로 빛나는 것 같다. 색이 짙은 입술은 부드러울지도 몰라. 건강하게 뻗은 팔다리와 그 끝에 붙은 손을 잡아 악수를 해보고 싶었다. 손바닥은? 거기는 거칠거칠할까? 괜찮다면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 얼마나 튼튼하고 그 이상으로 따뜻할지 알아보고 싶었다. 저 먼 곳에서 교실을 빙 둘러보는 때에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왔다. 잘못을 하고 벌을 받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미토는 괜히 교복 바지에 급하게 손을 문질러 닦으며 시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아, 미토 옆이 비었구나. 사쿠라기 군, 저기 가서 앉으렴. 이 일이 너무나도 두렵다. 이 이후의 일이, 그렇게 계속 허벅지에 손바닥의 눅눅한 습기를 가라앉히며 필사적으로 시선을 넘기던 때에, 

 

어이, 난 사쿠라기 하나미치다. 너 이름이 뭐야?

 

갑작스레 날아온 봄 계절풍에 미토는 머리가 희게 변했다.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입을 약간 벌리고 화사하게 뻗는 붉은 머리칼과 그 아래의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에 온 마음이 쏠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 화들짝 놀라서는, 요헤이, 미토 요헤이. 하고 이름을 덧붙였다. 어설프게 내민 손을 마주 잡았을 때, 미토는 그만 감격으로 울 것만 같다. 처음 잡아본 손은 따뜻하고 강하게 자라 있어서 한 평생 이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요헤이? 이름 멋진데! 씩씩하게 말하곤 손을 흔드는 행동을 보며, 미토는 새가 사냥당하기 직전 깃을 잔뜩 부풀리는 모양으로 직감한다. 나는 너를 좋아하겠구나, 그래, 긴 시간 너를 좋아할거야. 미토는 예의 자상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을 할 때의 숫한 상냥함과는 거리가 있는 표정이었다. 진실된, 마음이라는 우물에서 퍼올린 감정의 찬물이었다. 어서와, 사쿠라기 군. 나는 평생 누구를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해보겠구나. 스스로에게 하는 고백 따위가 처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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