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물품 반입금지

호열송희, 센티넬버스 au

(준달맛 이스트(@pikamanju_147)님과의 연성교환입니다. 가볍게 쓴 글이라 모자람이 많겠지만 모쪼록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후우. 감독관의 차가운 말 소리에 정송희는 숨을 가다듬고 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잡고 1m 떨어진 테이블 위에 올려진 돌을 자신에게로 옮기는데 집중했지만 돌은 아슬아슬하게 들리다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서 굴러 떨어졌다. 정송희는 힐끗 감독관의 눈치를 보았다. 감독관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차트에 날카로운 펜 소리로 무언가를 휘갈겨 적더니 탁 소리 나게 펜을 차트 위에 내려놓았다.

"테스트 종료. 나가봐."

".... 네..."

차트에 그리 좋은 말이 적혀져있지 않을 거란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송희는 조심스레 시험실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 코를 훌쩍였다. 아니, 새삼스레 서러워진 것은 아니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염동력 계열의 센티넬이면서도 능력이 매우 약해 일찌감치 C등급 판정을 받은 것은 그리 놀랍지도 않은 예삿일이였다. 다만 이렇게 하찮고 적은 능력을 사용한 것에 비해 그녀의 부작용은 매우 귀찮고 극심한 편이였고, C등급인지라 담당 가이드는 커녕 그때 그때 시간이 되는 아무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언제나 불만이 많았다. 아는 이도 아니고 언제나 항상 모르는 이와 몸을 접촉하며 가이딩을 받아야한다니. 아무리 단순 치료라 생각하려해도 동성 친구와의 스킨쉽도 낯간지럽다 생각해온 그녀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정송희는 오늘도 몸이 어지럽고 한기가 도는 이 부작용을 그냥 견뎌내기 위해 코를 훌쩍이고 몸을 움츠린채 제 팔을 부지런히 쓰다듬으며 휴게실에서 잠시 쉬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정송희는 어지럼증을 조금이라도 몰아내기 위해 어서 좋은 것들을 생각했다. 휴게실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정수기도 있고, 담요를 덮을 수 있는 간이침대도 있고, 원래는 규칙 위반에 해당하긴 하지만 자신이 몰래 카운터 서랍 구석에 꿍쳐둔 휴대용 찜질기도 있었다. 물병은 챙겼으니 따뜻한 물을 받아 마시면서 뜨끈하게 몸을 덥히면서 누워 쉬면 된다. 그래, 한 두시간만 그렇게 푹 쉬면 이 부작용은 아주 사라지진 않지만 견딜 수 있는 만큼은 되었다. 온갖 따뜻하고 편한 걸 생각하자 울렁이던 머릿속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허나 오늘의 신은 그녀에게 그리 관대하지 못한 모양이였다.

[ 휴게실 리모델링으로 인해 잠시 폐실합니다. ]

그녀는 잠겨진 휴게실의 문을 괜히 덜컹덜컹 열려 노력해보며 절망했다.

'그럼 내 찜질기는...?'

최악의 경우 그냥 버려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찜질기는 명백히 허가 받지 못한 개인물품이였기에 휴게실같은 공용 공간에 숨겨놓는 것 자체가 약간의 위법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절망했다. 한기가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올라와 온 몸이 추웠다. 머리가 미칠듯이 어지러워 휴게실 문고리에서 한 두 걸음 멀어져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어떤 손이 턱,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울렁거림을 간신히 참고 뒤를 돌아보았다.

"분실물, 주인 되세요?"

눈썹을 찡그리고 흐릿하게만 눈을 떠서 상대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였다. 진한 흑발의 머리를 왁스로 깔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의. 그러고보니 어딘가 익숙한 인상이기도 했지만 이젠 한계였다.

"아마... 아마도요..."

정송희는 겨우 그 말을 마치고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꿈뻑이며 눈을 뜨자 몸은 신기하게도 가벼웠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몸의 한기도, 어지럼증도 없었다. 아주 푹 잘 자고, 잘 쉬고서 일어난 느낌. 그녀는 여러번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 자신이 어떤 방의 침대에 누워있는 걸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갑자기 일어나면 또 어지러울텐데요."

가벼운 말투.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기자 방금 그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빙글 웃는 낯으로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정송희는 영문도 모른채로 쇼핑백을 받아들어 안을 살폈다. 그 곳에는 그녀의 찜질기가 있었다. 휴. 다행이다... 안도하며 쇼핑백을 끌어안자 남자가 말했다.

"개인물품은 휴게실에 반입금지죠?"

뜨끔. 그녀는 남자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남자는 여전히 가볍게 빙글 웃는 낯이였다. 나무라는 어투도 아니였다. 그러나 그녀의 양심은 콕콕 찔리듯이 가책이 있었기에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 안에 넣은거니까, 몰래 가져가세요."

남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였다.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쇼핑백을 더 꼬옥 끌어안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긴... 그, 잠깐 쓰러졌던 것 같은데 도와주신건가요..?"

정송희는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는 휴게실은 명백히 아니였다. 간이침대가 아닌 제대로 된 커다란 침대 하나, 2인용 소파 하나, 간단한 원형 테이블과 의자, 테이블 위에 올라간 서류뭉치들과 볼펜 등이 있었다. 남자는 눈썹을 올리고 흥미롭게 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요. 가이드실이니까요. 여기."

남자는 자연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가이드실. 정송희도 막 처음 들어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는 공간이였다. 가이드마다 다르긴 했지만 그녀가 만난 가이드 중에는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가이딩은 맨살이 접촉될 것을 기반으로 하기에 어쩔 수는 없으나 정말이지 수치스러웠었다. 그 뒤로는 부작용이 엄청 심하지 않으면 찾지 않았었는데.... 머릿속이 팽글팽글 돌았다.

"그, 그럼... 가이드신가요...? 그래서 저를....?"

"아, 네. 뭐. 딱 봐도 부작용으로 쓰러진 센티넬이셨으니까요. 이름이... 정송희씨?"

정송희는 말을 더듬으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물어보았다.

"마, 맞는데요... 어, 어떻게...?"

정송희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게 고맙고 감사하지만 동시에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당황에 절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잠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풋, 웃었다. 웃긴 상황인건가? 그녀는 잠시 발끈했다.

"아하하, 당연히 알죠. 같은 지부에서 활동하는 모든 센티넬의 간단한 정보와 이름을 외우는게 가이드의 첫번째 할 일이니까요."

그녀는 그 말에 어깨에 잔뜩 들어가있던 힘을 풀었다. 그랬구나... 그녀는 아직 일이 몸에 익지 않은 초보 센티넬일 뿐 가이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남자는 의자을 끌어와 그녀가 있는 침대와 가까이 앉은채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익숙한 탓도 있고."

그건 아주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라 그녀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을거라 생각했다.

"....네..?"

"아니에요. 이제 가이딩도 다 마쳤고, 부작용도 사라졌을테니 일어나도 돼요. 갑자기 너무 무리하지만 말고요."

의자를 가까이 끌어와 앉기에 더 할 말이 있나 싶었는데 남자- 그러니까 가이드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기...!"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아본 그는 천연덕스레 의아한 얼굴을 하고있었으나 이 말도 못한 채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저기... 감사합니다. 물건도 찾아주시고, 음... 가이딩도 해주셔서요."

그녀는 잠시 이 남자가 혹여 자신의 옷을 허락없이 벗겼는지, 어떤 방식으로 가이딩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으나 몸에는 아무런 통증이나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입고 다니던 가디건은 그녀의 습관처럼 여전히 밑단추 두개만이 잠겨져있었다.

"혹시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적어도 그녀가 원치 않는 방식의 가이딩을 했을 확률은 적었다. 설사 그렇게 가이딩을 했다 해도, 부작용에 시달리다 기절까지 한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시행하는 것은 가이드의 의무였기에 그를 탓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는 잠시 아- .... 하는 감탄사인지, 탄식인지 하는 소리를 내뱉더니 입꼬리만 올려 빙그레 미소지은 얼굴로 말했다.

"양호열입니다. C급 가이드. 전담 센티넬이 없으니 절 찾으려면 데스크에 문의하는게 더 빠를거예요."

그럼 이만, 하는 말과 함께 남자는 살짝 목례하고서 가이드실을 빠져나갔다. 정송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가 닫고 나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양...호열. 양호열. 그건 분명히 그녀가 아는 이름이였기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입을 떡 벌린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퇴근한 직후 크지도 않은 5평 자취방 현관에서부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랬다. 오늘 만났던 그는 양호열이 맞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쥐뜯을듯이 부여잡았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는 그녀의 모교이기도 한 북산고등학교에서 꽤 유명인이였다. 어느 쪽이냐 하면 안 좋은 쪽에서. 그녀는 그를 흉본 전적도 있었다. '해동 중학교에서 온 애한테서 들었는데, 강백호랑 걔 친구들 말야. 굉장히 불량스럽대-' 그녀는 순하고 참한 친구 소연을 위한 조언 삼아 한 말이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철없고 낯 부끄러운 말이 없었다. 정송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송희는 그 양호열에게 민폐를 끼치고,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무리 친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북산 농구부원인 백호를 팬으로서 좋아하게 되면서 가끔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그로부터 그녀는 입시 준비에 바빠져 농구부나 경기에 발걸음 할 수 없었고, 소연이가 알음알음 전해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넘쳐 흐르는 부끄러움에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딱 죽고싶었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는다고 세상이 멸망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현관에서 신발을 주섬주섬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로 다이빙하여 베개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 밤은 다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내내 그녀에게 이불킥을 당할 애꿎은 이불을 손으로 꾸욱 쥐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라고 하였는가.

다행히 아침에 눈을 뜨니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거울을 보니 못 잔 눈은 어느 때보다 퀭해져 얼굴은 좋지 못했지만 머릿속은 또렷했다. 어쨌거나 양호열은 그녀를 도와주었으니, 그에게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감사를 표하면 되었다. 그녀는 출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여러 음료들을 바라보며 고심하다 캔커피 두개를 산 후 단단히 마음을 먹은 채 출근을 하였다.

"양호열 가이드... 가능한가요..?"

오늘도 반복된 테스트와 훈련을 마치고 피곤한 컨디션과 결합되어 지금 당장 졸도해도 큰 무리가 없는 상태로 덜덜 떨며 그녀는 데스크에 그를 찾았다. 정송희가 가이딩을 위해 이 곳에 찾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특히 가이드 지정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기에 데스크 직원은 급히 키보드 자판을 쳤다.

"네. 가능하네요. 10번 방으로 가세요."

그녀는 직원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마치고 10번 방으로 향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 무슨 말투를 사용할 것인지 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픈 몸 상태 덕인지 그녀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10번 방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었던 그는 그녀를 보자 벌떡 일어나 부축했다. 그가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긴 한가보다. 미간이 팍 좁혀진 그 얼굴에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실없이 웃으며 말을 할 수 있었다.

"미안해. 호열아. 못 알아봐서. 몇 년 못 보기는 했지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도 도와줘서 고맙고-... 나, 너에게 답례로 캔커피도 샀는데... 아..."

캔커피는 정신이 없어 깜박 잊고 가져오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는 울상을 지었지만 그는 단호히 그녀를 서둘러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끝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방이 따뜻하게 덥혀지도록 난방을 더 올리고서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녀의 양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녀는 그 행동에 조금 놀랐으나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양호열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빨리도 말한다. 괜찮으니까, 눈 감아. 편히 있어."

왠지 그의 목소리에 더 긴장이 되는 기분이였으나 정송희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공간이 멀게 느껴지고, 오롯이 그의 체온과 맞닿은 자신만이 존재하는 느낌이 들었다. 손 끝으로 천천히 따뜻한 온기가 전해들어왔다. 그녀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마치 따뜻하고 느린 파도에 손 끝부터 몸을 적시는 느낌이었다. 아주 느리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그 파도는 느릿하게 그녀의 몸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추워 떨리는 곳을 보듬어 만지며 덥히고, 어지러운 머릿속 안에 바닷물을 가득 채워 생각을 밀어내었다. 그녀는 숨을 참지 않고 계속 쉬는 것에 집중하며 그 물의 흐름에 온전히 그녀를 맡겼다.

감독관에게서 그녀가 가이드를 제대로 신뢰하지 않아 가이딩 효율이 떨어진다는 꾸중을 들었던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지금처럼 온전히 그녀를 가이드의 손에 쥐어주며 마음을 놓은 것은 처음이다.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양호열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그녀는 조심스럽게 흘러드는 물의 온기를 느끼며 양호열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밀려들었던 파도가 점점 잔잔해져가고, 바다가 물러나고 갯벌이 드러나는 것처럼 더이상의 물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을 때, 그녀는 가이딩을 끝났음을 알았다. 이때까지의 가이딩은 불편하고 껄끄럽기만 했기에 그녀는 자신이 가이딩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가 아니라 아쉬움을 느낀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천천히 미련이 남은 손을 물리고 눈을 뜨자, 그녀가 익히 알고있던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의 그가 보였다.

"어제 쪼오금 서운하긴 했지? 고등학교 때에 비해 그리 늙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닌가? 가벼이 말하며 그는 그의 턱을 쓸었다. 그녀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한 부분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듯 해 아련한 그리움마저 들었다. 그녀가 잊고 있었던 한 조각.

"그러네. 진짜 안 변했다."

"너도."

양호열은 손을 뻗었다. 정송희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가이딩과는 다르게 살짝 흔들어지는 악수였지만 부작용이 사라지고 말끔한 정신으로 느끼는 그의 손은 단단하고 거친 느낌이 있어 왠지 더 쑥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수줍게 고개를 숙이자 양호열은 작게 웃으며 편히 말했다.

"세상 참 좁지. 이렇게 보게 됐으니 잘 부탁해. 송희야. 앞으로도."

그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어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부탁해. 호열아."

그녀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맞춰져 오는 눈에 그는 잠시 놀란 듯 했으나 금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정 붙일 사람 없는 이 곳에 즐거웠던 한 때를 함께한 동창을 만났다는 사실이 어느새 그녀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되었다.


휴게실 리모델링이 끝난 이후로도 정송희는 휴게실이 아니라 가이드실을 착실하게 드나들었다. 양호열 가이드가 프리면 그로, 아니라면 순번을 기다릴 정도로 그녀는 유독 한 가이드만을 고집하게 되었다.

있지, 있어. 전담을 가질 수 없는 C급들이지만 걔네들한테도 상성이란게 있긴 한 모양이지.

왜, 저번에 한 가이드가 등급이 변경되어서 지부 이동했던 거 기억나? 걔만 찾던 센티넬이 글쎄 폭주를 일으켜서 고생 좀 했다니까. 암만 C급이여도 센티넬이긴 한가봐. 폭주 때는-

점심시간 정수기 앞에 모여 사사로이 잡담을 나두던 데스크 직원들은 양호열이 지나가자 입을 합 다물었다. 양호열은 예의 익숙히 짓던 비즈니스 미소를 걸치고 간단히 목례를 하고서 정수기 물을 떠갔다. 머쓱하게 서로를 곁눈질만 봐도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너무나 뻔하여 양호열은 지루함을 느끼며 방금 탄 커피믹스 한 잔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정부는 C급 이하 센티넬과 가이드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일단 발현은 했기에 폭주나 사사로운 능력 사용을 막기 위해 일반인들과의 구분을 위해 한정된 장소에 모아놓고 있을 뿐이다. 이 곳에 있는 센티넬들은 매번 훈련과 교육만을 받을 뿐 다른 고등급 센티넬들과 다르게 임무에 직접 투입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렇기에 비교적 사건사고들은 적었지만, 한번 사건이 생기면 놀기 쉬운 장난감이 된듯 여러차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양호열은 언제나 그렇듯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며 옥상 난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이 곳에서 뜻하지 않게 정송희를 만난 것이다. 그녀가 이 곳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새로 들어온 프로필을 읽어보던 양호열은 조금 놀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다시 보기는 어려울거라 생각한 얼굴이였다. 처음 경기장 관객석에서 흥미 없어보이던 눈이 이윽고 긴장을 하기도, 놀라기도 하다, 이윽고 반짝거리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양호열은 모든 애정을 갖게 된 사람들이 저리도 반짝이는지 고심해보았다. 글쎄. 딱 잘라 말하긴 어려워도 그녀의 표정은 오래도록 눈에 밟혀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입시 준비로 인해 경기장으로의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을 때도.

그저 스쳐지나갈 사람. 양호열은 그녀를 그리 정의했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서 스쳐지나가서, 나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 자신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자신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자신은 알지 못할 웃음을 짓겠지. 양호열은 막 태어난 여리디 여린 자신의 감정에 미리 초를 쳐놓았다. 그리하여 졸업 이후에도 그는 그리 힘들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과 더 시간을 함께 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면 명실히 더 고난했을 작업이었다.

그는 다 마셔버린 커피믹스 종이컵을 주먹 안에 가벼이 구기며 마지막으로 한없이 푸른 낮의 하늘을 담고 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참 좁다. 만나지 못할거라 생각한 인연은 다시 만나고, 계속 이어질거라 생각한 인연은 쉽게 멀어지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양호열은 우연으로 재회한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후회없이 소중하게. 그것은 말 만큼 쉽지만은 않았을 것임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곧 그를 찾아올 그녀를 생각하며 누구도 보지 못할 미소를 잔잔히 입꼬리에 올렸다.




"호열아!"

"응?"

가이딩을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그녀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쉬고 있었을 때, 그녀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이름을 불렀다. 잠시 누워 흐트러진 머릿결이 귀여워 손으로 살짝 매만져주자 움찔이긴 했어도 피하진 않았다. 그 사실이 양호열에겐 무척 기꺼웠다. 손을 거두고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잠시 머뭇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음, 괜찮아? 그러니까... 음... 가이딩 말이야."

아.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지만 양호열은 그 질문에 담긴 뜻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항상 쉽진 않지."

양호열은 천천히 말했다. 가이드로 활동하며 별의 별 일들이 다 있었다. 어차피 오늘만 보고 내일은 안 볼 가이드. 무례하고 함부로 대하며 가이딩을 요구하는 센티넬들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가이드의 지시를 잘 따르며, 가이딩을 마칠 때까지 조급해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센티넬인 그녀가 조금 더 희귀한 케이스였다.

"그래도 요즘엔 날 전세내듯이 불러주시는 어떤 분 덕분에."

양호열은 장난스레 정송희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였다. 정송희는 웃었지만 얼굴이 발긋해져 양 손으로 볼을 가렸다. 쑥쓰러워하는 걸까. 양호열은 자신이 이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나도.. 쉽진 않았는데 너랑... 너에게 가이딩 받고 나서 많이 편해진 것 같아. 음... 센티넬과 가이드는 상성이 잘 맞을수록 효율이 좋다던데, 우리는 상성이 좋은 게 아닐까?"

순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장점이였다. 아무리 작은 옛 기억을 공유했던 동창이여도 말이지. 양호열은 그런 생각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럴 수도 있지. 상성이 잘 맞으면 센티넬의 컨디션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양호열의 생각으로는, 그녀가 이때껏 높은 강도의 스킨쉽을 동반하는 가이딩을 불호하고 가이딩을 받는 것보다 부작용을 참는 위험천만한 선택을 오래 고수해왔기에 (이에 관해선 따끔하게 일러주었다. 부작용에 시달린 센티넬은 언제든 폭주할 수 있고, 폭주한 센티넬은 능력이든 건강이든 그 이전보다 훨씬 손 쓰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다 일러주었다. 겁을 주기 위해 부러 과장한 부분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받은 가이딩으로 인한 효과가 더 크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싶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고 그녀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었다.

"...C급도 전담 계약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양호열은 그 말에 과하게 흥분하지 않으려 뒷짐을 쥔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날 매일매일 부려 먹으려고?"

그런게 아닌거 알잖아! 가볍게 토라진듯이 화를 낸 그녀가 입술을 조그맣게 삐죽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이제는 그들에게 무척 익숙해진 가이드실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침대, 소파, 테이블, 의자. 특정한 행위만을 위한 형식적인 이 장소. 그녀를 오직 이 공간에서만 단둘이 볼 수 있는 양호열은 그 사실을 슬퍼하기보다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으나 오늘따라 왜인지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있잖아... 전담 계약... 각인을 한 센티넬과 가이드는 서로 가까이 있지 않아도, 눈을 감고 있어도 서로를 느낄 수 있대. 상성이 좋으면 상대가 아주 기쁜지, 아주 화나는지, 아주 슬픈지 정도는 그냥 알 수가 있대."

신기하지 않아? 아주 깊은 사이가 되도 표정과 목소리로 상대의 감정을 유추할 뿐 완벽히 알 수는 없는데 그들은 가능하다는게. 그리고 너는 너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니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린 그녀가 불현듯 하하 크게 웃었다.

  "미, 미안..! 이상한 말을 했네. 너랑 만나서 편해져서 그런가봐. 오늘도 고마웠어. 호열아."

그녀는 부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내일 보자며 서둘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양호열은 어느새 비어버린 그녀의 자리를 보며 그의 안에 설레발을 치는 여러 어린 감정들이 자신의 설렘을 이리저리 마음껏 떠들어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양호열은 부러 천천히 숨을 내쉬며 느릿이 눈을 깜박였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에게 각인을 시도해보지 않겠냐는 미친 소리를 지껄일 것만 같았다.


후기: 그렇습니다… 어쩌다보니 중간에 잘린 것 같은 오픈 엔딩으로 끝나게 되었네요. 그래도… 둘이 귀엽지 않나요() 제가 만약 호열송희를 쓴다면 꼭 서로 존댓말을 쓰는 둘을 보고싶었어요. 그래서 첫 장면이 떠올라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센티넬에유가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예상대로 찰떡처럼 잘 어울려서 무척 기뻤습니다. 조그만 도토리 호열송희지만 모쪼록 즐겁게 읽으셨길 바라며…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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