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 부록

어떤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모음집

<1> 벌레 탈옥 사건

“수겸아!! 왜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먼저 들어온 사람이 더 늦게 오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반갑게 마주하는 건 이 신혼부부에겐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지금의 정환은 마치 구세주라도 보는 눈빛과 목소리로 수겸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수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으려는데 정환이 후다닥 수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지금 큰일이야. 완전…. 비상이라고.”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나 정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울먹이다 못해 붙잡은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정환이 이토록 겁먹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수겸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나. 젠장. 내가 빠따를 어디다가 뒀더라. 수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는데 앞장서던 정환의 움직임이 멈췄다. 따라서 걸음을 멈추고 앞을 보자 파리해진 얼굴의 정환이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저기에….”

“어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기…. 밑에….”

손가락 끝이 조금 더 아래쪽으로 움직이자 수겸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그 끝에 보이는 건 바닥에 놓인 쓰레기통이었다.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것도 이상했으나,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똑바로 세워진 게 아니라 뒤집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겸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정환을 바라보았다. 정환은 정말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질색하며 입을 열었다.

“안에 있어….”

“뭐가?”

“벌레….”

호들갑을 떤 것치곤 초라한 정체였다. 수겸은 그 커다란 덩치로 자신의 뒤에 숨은 정환에게 고작 벌레 하나에 이 난리를 치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그래. 사람마다 두려움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 덩치가 곰만 한 녀석이 벌레를 무서워할 수도 있지. 도둑이 아닌 게 어디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제거 대상이 고작 벌레라면 이 일엔 수겸이 적격이었다.

“일단 저기 밑에 가둬놓기는 했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어.”

“알았어. 내가 해결할게.”

아마도 벌레가 들어있을 거라 추정되는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정환이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수겸은 덤덤하게 대답하고선 탁자 위의 티슈를 몇 장 뽑아 들었다. 그러자 수겸의 등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정환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그럼 뭐가 더 필요해?”

“아니. 날개가 달린 것 같았는데…. 쓰레기통을 열자마자 날아가 버리면 어떡해?”

“하, 너 나 못 믿어? 나 운동선수 출신이야.”

그러면서 주먹 쥔 손으로 허공에 잽을 날리며 눈을 빛냈다. 수겸의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에도 정환은 영 못 미덥다는 표정이었다. 수겸이 곧장 문제의 쓰레기통 앞으로 가서 무릎을 굽히고 앉자 정환은 반사적으로 뒤로 두세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도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정환아.”

“왜? 벌써 열었어? 잡았어?”

“그게 아니라.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며, 정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제일 먼저 수겸의 떨떠름한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눈이 돌아간 곳은, 바닥에 엎어놓은 쓰레기통의 비스듬히 열린 사이로 보이는 텅 비어있는 바닥이었다.

잠시 후, 평화롭던 집안에 정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신혼집에서 발생한 난데없는 벌레 탈옥 사건에 정환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수겸이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문제의 탈옥범은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밤이 되자, 정환은 도저히 이 집에서 잘 수가 없다며 호텔로 가자고 수겸을 설득하려 했으나 고작 벌레 하나 때문에 사람이 나가는 게 말이 되냐며 묵살 당했다. 겨우겨우 진정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도 정환은 평소보다 더 찰싹 수겸의 옆에 붙어있었다. 그런 정환을 보며 피식 웃은 수겸이 물었다.

“벌레가 그렇게 무서워? 어떻게 생겼길래?”

“그냥 날파리 정도가 아니야. 내 손바닥만 하고, 그리고 더듬…, 더듬이도 있고, 다리도 많았….”

“알았으니까 그만 얘기해도 돼.”

“나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아. 수겸아.”

진짜로. 속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대로 수겸의 품으로 더 파고든 정환이 불안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설마 우리가 잘 때 침대로 올라오거나 하진 않겠지?”

“제 발로 찾아오면 땡큐지. 보이면 말해. 내가 바로 잡아줄게.”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진짜 무섭다고.”

“너 그러면 귀신보다 벌레가 더 무서워?”

“차라리 귀신이 낫지. 귀신은 본 적 없지만 벌레는 실제로 눈에 보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레가 널 더 무서워하겠다.”

대답과 동시에 수겸의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슬슬 자야겠다 싶어서 눈을 감는데, 옆에 있던 정환이 갑자기 수겸의 잠옷 끝자락을 세게 잡아당겼다. 수겸이 눈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하얗게 질린 정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벽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라고 중얼거렸다. 수겸은 코웃음을 쳤다.

“야, 안 속아! 귀신 나온다고 장난칠 타이밍인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나 장난이 아니었다. 정환이 가리킨 쪽으로 돌아보자 깨끗한 벽면에 무언가 까맣고 이상한 것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그건 바로, 온종일 정환을 불안에 떨게 했던. 정환이 귀신보다도 무서워한다는 벌레임이 분명했다. 정환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수겸이 잽싸게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잡지를 집어 들더니 돌돌 말아 손에 쥐었다. 그러더니 곧장 일어나서 침대 끄트머리를 딛고 목표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거의 날아올랐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손에 든 잡지로 벽에 붙은 목표물을 내리쳤다.

아마도 즉사했음이 분명한 벌레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정환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수겸이 마치 쾌남처럼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김감독, 점프 폼 아직 안 죽었지?”

그 순간 이정환은 자신의 남편이 농구선수가 아니라 슈퍼히어로 같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2> 연봉 협상에 실패한 김감독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냐만, 확실히 감독은 선수와는 달라서 커리어와 연봉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김감독이 연봉 협상에 실패했다는 소리다. 

연봉이라는 게 매년 오를 수 없다는 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겸이 감독 중인 대학의 이번 리그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선수 개개인의 평가도 좋았기에 이번 재계약 때 연봉이 좀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남들이 보기에 수겸은 이까짓 일에 동요하지 않을 만큼 멘탈이 단단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아무리 강철 같은 멘탈의 소유자여도 응당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트레스는 받는 법이었다. 이럴 땐 수겸도 누군가에게 속상함을 털어놓고 싶었다.

[ S : 나 연봉 협상 실패. 동결이다.]

결혼해서 좋은 점은, 확실한 내 편이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수겸은 남들에게 보이지 못 하는 속내도 정환에게 털어놓고 마음껏 투정도 부릴 수 있었다. 

확실히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것보다 말이라도 한 번 뱉고 나니 속상했던 마음도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그래. 내년에 더 잘하면 된다. 새로운 다짐과 함께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휴대전화 불빛이 번쩍거렸다. 전화기를 들어 확인해보니 은행에서 온 알림이었는데 수겸의 계좌에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입금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잠깐만. 이게 0이 대체 몇 개야?! 수겸의 눈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설상가상으로 금액 옆엔 입금자명 대신 단 네 글자가 찍혀 있었다. ‘연봉인상’.

탄성과 함께 몸이 저절로 튀어 올랐다. 기쁨을 주체 못 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동시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뭐지? 하늘이 내 푸념이라도 들어줬나?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월급제로 계약이 되어있는데 연봉이 왜 일시불로 들어오지? 그럼 이 돈은 대체 뭔데? 출처가 불분명한 거금이 통장에 꽂혔다고 생각하자 환호는 일순간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은행에 전화라도 해 봐야 하나 싶은 찰나,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 J : 김감독 연봉 내가 올려 줌^^]

아, 진짜! 이정환 매력 과하다고!


<3> 엘리베이터 꼬마 1

“저 혹시…. 김수겸 감독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초면의 남자가 물었다. 옆에는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손을 꼭 잡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부자 관계인 듯 보였다. 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귀여워서 수겸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역시 맞으셨구나! 저희 아파트 사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설마 같은 동이신 줄은 몰랐어요. 저 감독님 선수 시절에 완전 팬이었습니다.”

“아아, 그러셨구나.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겸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남자가 호들갑을 떨면서 마주 잡았다. 손이 떨어지고 나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옆에 있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서준아. 이 감독님이 예전에 엄-청 유명한 농구선수셨다? 우리 서준이도 농구 알지?”

“진짜? 이 형아가?”

“아이고. 하하하! 감독님이 워낙 동안이셔서 그런가 봐요!”

어린아이의 의도치 않은 립서비스 덕에, 그날 엘리베이터에서의 팬 미팅은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날의 에피소드는 평소 자신의 인기에 별 감흥이 없는 수겸조차 신이 나서 정환에게 자랑했을 정도로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겸은 정환과 함께 그 꼬마 팬을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 또 만났네.”

“형아, 안녕.”

“아이고. 어른한테는 ‘안녕하세요.’라고 해야지. 그리고 감독님이라고 불러야 해.”

“전 괜찮습니다. 얘가 그 애야. 저번에 나한테 형이라고 했던.”

수겸이 옆에 서 있는 정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말했다. 정환이 아이 눈높이에 맞게 몸을 수그리고 인사를 하자 처음 보는 정환을 경계하는지 아이가 아빠 다리 뒤로 숨으며 고개만 꾸벅 숙였다. 뒤늦게 웅얼거리며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앞니가 하나 빠진 게 보였다. 

그런 아이가 너무 귀여웠는지 정환이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었다. 애들을 좋아하는구나. 수겸은 몰랐던 정환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정환이 수그렸던 상체를 다시 세우며 똑바로 서자 이번엔 수겸이 몸을 낮추며 아이에게 물었다.

“놀다가 아빠랑 집에 들어가는 거야?”

“네. 강동님도 아빠랑 집에 가요?”

아이의 순수하고도 잔혹한 한 마디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 아빠?! 잠시 당황했으나 수겸이 상황 파악을 끝내는 데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라고 불린 대상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정환의 상처 받은 얼굴을 보아하니 여기서 웃었다간 최소 일주일은 삐져있을 게 분명했다. 

“에이, 설마. 감독님 아빠치고는 너무 젊으시지.”

침묵을 깨고 아이 아빠의 해명이 들려왔다. 어떻게든 사태를 모면하려 급히 내놓은 티가 나긴 했으나 다행히 정환의 얼굴엔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가차 없었다.

“그럼 삼촌?”

이 순간 정환을 두 번 죽이는 건, 삼촌이라는 물음에 아이 아빠가 지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4> 스타일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정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준섭과 호장이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이더라니. 무슨 사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호장이 평소보다 2배는 더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전혀! 정환이형 지금 완전 본인 나이로 보이시는데. 왜요?”

보통 이 정도 반응이면 만족하며 풀어졌는데 오늘은 어쩐지 끄떡도 없었다. 호장은 적잖게 당황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보다 심한 소리를 들었던 건가. 고민하고 있는데 정환의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에 아파트 이웃 어린이한테 내가 수겸이 아빠냐는 소리를 들었어….”

큰일 났다! 비상이다!

다년간 정환의 곁에서 그의 노안에 대해 피의 쉴드를 치던 호장의 경험상, 이건 입에 발린 칭찬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비교 대상이 정환과 동갑이자 극악무도한 동안의 소유자인 김수겸이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한담. 다행히도, 호장이 쩔쩔매는 동안 준섭이 먼저 대응에 나섰다. 

“수겸이 형이 워낙 동안이라.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더 나이 들어 보이지 않을까요?”

준섭이형, 나이스샷!

사건의 원흉을 상대방 탓으로 돌려버리는 훌륭한 계책이었다. 이런 동생들의 필사적인 변호가 통했는지. 정환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하긴. 그렇지? 수겸이는 고등학생 때 얼굴에서 바뀐 게 없으니까.”

그건 형도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간신히 도로 삼켰다. 해남대부속고 시절, 호장이는 이미 강백호에게 정환이형은 ‘이래 봬도’ 18살이라고 했다가 한동안 정환의 원망을 산 전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호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맞아요! 내일모레면 마흔인데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수겸이형이 잘못됐죠, 이건!”

평소보다 과장되게 맞장구를 쳤다. 너무 과해서 수상해 보일 정도였으나 어쨌든 정환에게는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안도하는 표정으로 웃어 보인 정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김비서 말로는 옷차림 때문에 그랬을 거라더라. 그때 나는 정장 차림이었고 수겸이는 후드티에다 반바지였거든.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와, 이거였네! 스타일이 문제였던 거였네! 김비서 말이 완전 일리 있는데요?”

“맞아요. 애들은 정장 입으면 다 아빠인 줄 알 거예요.”

두 사람은 속으로 김비서의 노고에 말 없는 박수를 보냈다. 

“역시. 그렇지? 그래서 스타일 좀 바꿔보려고. 오늘 청바지에 셔츠 입고 왔는데. 어때?”

“어쩐지! 정환이형 오늘따라 완전 어려 보이시더라!”

“맞아요. 진짜 잘 어울려요.”

“고맙다.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빈 컵은 내가 치울게.”

뿌듯한 얼굴로 트레이를 들고 일어서는 정환을 보며 동생들은 끝까지 접대용 미소를 잃지 않았다. 멀어지는 정환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호장이가 옆에 앉은 준섭에게 바짝 다가가서 귀에다 속삭였다.

“와, 김비서 월급 올려줘야겠는데요?”

“사회생활이란 원래 그런 거야, 호장아.”


<5> 2세의 대부는?

“형! 수겸이 형! 빨리 와보세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눈을 빛내고 있는 준섭과 호장이 보였다. 뭔데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지? 수겸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에요. 형들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난다면 저랑 준섭이 형 중에 누굴 대부로 삼으실 거예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호장의 입에서 나온 별 시답잖은 소리에 수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정환이 아끼는 후배라고 너무 오냐오냐해줬더니 간땡이가 부은 게 분명했다.

“당연히 저죠? 이 전호장이 딱이죠?”

“호장아. 수겸이형 곤란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호장의 헛소리를 저지하는 준섭의 목소리에 수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나마 둘 중의 하나는 제정신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가시는 느낌에 손을 머리에서 떼어낸 수겸이 한 발짝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에 다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유유서도 모르니? 첫째는 내가 대부야.”

“에엑. 치사하게 나이 들먹이는 게 어딨어요! 수겸이형, 둘째까지 낳을 생각 있어요??”

“이 자식들이 대체 날 뭐로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애를 어떻게 낳냐! 못 낳지!!”

젠장. 끼리끼리 유유상종이라고. 호장이랑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준섭이 저 녀석도 정상은 아닌데 잠시 간과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성큼 다가온 수겸이 호장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예상 범위였는지 호장이 재빨리 쿠션을 들어서 막았다.

“히히. 장난이에요. 장난!”

“이것들이 진짜…. 이런 장난 하면 재밌냐?”

“형이 매번 이런 반응이니까 재밌죠.”

“준섭이 너까지 왜 그러냐. 그리고 너희한테 대부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수겸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우리 2세 대부는 현준이가 먼저다.”

“…형. 아까는 못 낳는다면서요.”


<6> 엘리베이터 꼬마 2

 

“감독님 집에 놀러 가도 됨미까?”

“엥…?!”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자기 집에 초대하거나, 혹은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묻는 건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이웃사촌으로 오가며 마주친 게 다인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가정방문을 할 정도로 친해진 건지 모르겠으나 잔뜩 기대하는 듯한 꼬마의 눈망울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튼 수겸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결과 아이는 현재 수겸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현관문을 나서던 아이 아빠의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던 것이 떠올라 수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럴 때 이웃끼리 서로 돕고 그러는 거지. 생각보다 아이가 얌전한 편이라 몇 시간 봐주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울 것도 없어 보였다.

수겸의 예상대로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의젓해서 실내에서 뛰어다니지도 않고 함부로 물건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들뜬 마음을 숨기진 못 하고 사뿐사뿐 걸어서 온 집안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집 구경도 시켜주고 식탁에 앉아서 간식도 나눠 먹고 있을 때였다.

또 다른 손님의 방문을 알리며 초인종이 울렸다. 이런. 오늘 놀러 오기로 한 다른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수겸이 서둘러 출입구를 열어주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는데 아이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운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예요? 우리 아빠예요?”

“아니. 내가 아는 동생이야.”

“어른이에요?”

“어른이긴 한데. 너랑 정신연령은 비슷할 거야.”

역시 양반은 못 되는 녀석이다. 수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호장이 쿵쾅거리며 들어와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수겸이형! 저 왔어요! 어라. 그 꼬마는 누구예요? 설마, 설마…?”

수겸의 앞에 앉은 아이를 발견하자 호장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수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호장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장난에 시동을 걸었다.

“혀엉-! 저희한테 말도 없이 언제 낳으신 거예요?!”

…참자. 미취학 아동 앞에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차마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까지는 숨길 수 없었던 수겸이 그대로 돌진해오자 호장이 재빨리 눈을 질끈 감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건 꿀밤이 아니었다. 호장은 수겸에게 팔뚝을 붙잡힌 채로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순식간에 집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매정하게 닫힌 현관문 소리에 잠시 멍하니 있던 호장이 곧 정신을 차리고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형! 수겸이 형! 잘못했어요! 농담인 거 다 아시잖아요!! 문 좀 열어주세요! 복도 춥단 말이에요!! 다신 안 그럴게요!! 수겸이혀엉-!!!”


<7> 애들은 거짓말을 못 해

“너희 이렇게까지 해서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니?”

“네. 완전히요.”

“그러면 수겸이한테 잘 보였어야지. 왜 그런 장난을 쳐서. 나 없으면 놀러도 못 오게 돼버렸잖아.”

“힝, 수겸이형이 그 정도로 싫어하실 줄은 몰랐죠.”

“하여간 호장이 넌 적당히 멈출 줄을 모른다니깐.”

풀이 죽어서 입이 삐죽 나온 호장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정환이 웃었다. 그 모습에 준섭도 따라 웃었다. 최근 그들에게 출입 금지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호장이 수겸에게 밉보였던 탓이었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그들은 기어코 정환을 앞세워서 그 집에 놀러 가고 있었다. 

“형네 집이 위치가 딱 좋아요. 저희 집이랑 호장이집 중간이잖아요.”

“지하철 안 갈아타도 되고, 택시비도 많이 안 나오고.”

“집 앞에서 먹을 거 사가기도 좋고.”

“술 저장고도 있고, 냉장고도 크니까 남는 음식 넣어놓고 다음에 또 먹으러 오면 되고.”

“아이고, 우리 집이 무슨 만남의 광장이야?”

준섭과 호장이 손가락까지 접어가면서 이 집에 놀러 오는 이유를 하나하나 읊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살짝 비꼬긴 했으나 정환도 그들이 놀러 오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안 그래도 저번에 수겸이형이 여기서 술 먹을 거면 콜키지라도 내라고 하긴 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네.”

“우우, 정환이형까지….”

“말은 그렇게 해도 수겸이형이 저희 오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준섭의 마지막 말에 호장이 눈을 빛내며 정환을 쳐다보았다. 긍정의 답을 기대하는 게 빤히 보였으나 정환은 일부러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또 기고만장해진 호장이 까불다가 수겸의 심기를 건들면 중간에서 피곤해질 게 뻔해서였다. 벌써 결혼한 지 반년 차. 정환에게도 가정의 평화를 위한 요령이 생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 저기 수겸이형 아니에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정환의 집 쪽으로 걷고 있는데 호장이 정환의 어깨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단지 내 위치한 야외 농구 코트가 있는 쪽이었다. 준섭과 정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호장의 말대로 수겸이 그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농구를 하는 게 보였다.

“와, 수겸이형 농구 하고 있네요? 얼른 가서 구경해야지!”

호장이 신나서 그쪽으로 달려가자 정환과 준섭도 뒤따라 갔다. 먼저 도착한 호장이를 발견한 수겸이 곧바로 뒤에서 걸어오는 정환을 발견하고 팔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 모습에 코트 위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정환을 쳐다보았다. 한순간에 이목이 쏠리자 민망한지 웃어 보인 정환이 입가에 손을 대고 수겸에게 멀리 소리쳤다. 

“수겸아! 이제 집에 가자!”

슬슬 해가 지고 있어서 더는 밖에서 농구 하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수겸이 공을 내려놓으려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서 물었다.

“형네 아빠예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우뚝 멈춰선 호장의 등 뒤로 몰래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이면 지금 정환의 옷차림도 캐주얼한 복장이라 이젠 더는 댈 핑계도 변명도 없었다. 

“…저희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호장아, 얼른 가자.”

“네, 네! 정환이형, 저희 가 볼게요! 수겸이형, 저 가요!”

준섭의 말을 신호로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서둘러 양쪽에 인사를 던지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술 먹을 장소를 다시 찾아봐야겠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 먹다가 체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8> 호장이 좀 맡아주세요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수겸이 전화기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대며 물었다. 분명히 한국말인데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준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제대로 이해하신 거 맞아요. 호장이 좀 맡아주실 수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호장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뭘 어떻게 맡아달라는 건데?”

[그냥 호장이가 평소보다 자주 연락하고 자주 놀러 올 텐데 그거 잘 받아주시면 돼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다 막혔다. 내가 알고 있는 호장이는 물론 철이 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성인 남성인데? 이 정도로 남의 돌봄이 필요하다고? 수겸의 이런 생각을 읽었는지 준섭이 즉시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저나 정환이형 중에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하필 저도 원정 가는데 정환이형도 출장이라…. 호장이가 외로움을 엄청 많이 타거든요.]

“근데 왜 나야? 나 말고도 다른 친구 많지 않아?”

[그렇긴 한데 호장이가 형이랑 있고 싶어 하는 눈치라서요. 아시잖아요. 호장이가 형 많이 좋아하는 거.]

끄응-. 수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저 좋다는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할 정도로 수겸은 모질지가 못했다. 그런데도 귀찮을 게 뻔해서 선뜻 그러겠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데 준섭이 다시 한번 부탁 조로 말했다.

[일주일 뒤면 정환이형 출장도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준섭의 간곡한 목소리에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준 것이 화근이었다.

 


김수겸은 여태 살아온 세월을 비교해봤을 때 농구를 하지 않았던 시간보다 농구를 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만큼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근데도 이건 정말 쉽지 않았다.

“수겸이형 뭐해요?”

“형, 어디 가요? 쓰레기 버리러요? 저도 같이 가요.”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요? 한식? 중식? 양식?”

“혀엉~. 지하철 끊겼는데 자고 가면 안 돼요?”

호장이는 정말이지….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심심한 걸 못 참는 녀석이었다. 원래 알고 있긴 했지만 문제는 지금 호장이 치댈 수 있는 사람이 수겸밖에는 없어서, 그 모든 치댐을 수겸이 혼자서 고스란히 견디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쉴새 없이 떠들고 졸졸 따라다니며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다 보니 고작 몇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근데도 호장이는 지칠 줄을 모르고 쫙쫙 뽑아낸 수겸의 기운을 그대로 흡수하는 듯 갈수록 텐션이 높아져 갔다.

전호장을 혼자서 맡게 된 첫날. 결과는 수겸의 녹다운이었다. 소파에 똑바로 누워서 힘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야에 호장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이 녀석, 지치지도 않고 수겸에게 바짝 붙어서 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다. 수겸이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는 중얼거렸다.

“옛날에, 해남하고 시합이 있거나 하면….”

“네? 갑자기요?”

“…좀 들어 봐. 네가 코트 위에서 까불거나 하면 정환이가 널 끌고 가서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그랬었는데. 그때는 아무리 그래도 1학년 후배한테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거든. 근데 이제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헤에, 그 말 들으니 옛날 생각나네요. 저 정환이형이 너무 좋아서 주말에도 형 가는데 쫓아다니고 그랬거든요.”

이정환 이거 완전 성인군자였네. 수겸이 중얼거린 말이 뭐가 그리도 웃긴지 호장이 바닥에 누워서 배를 잡고 웃었다.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웃음이 나올 나이는 한참 지난 거 같은데. 쟤는 뭐가 저렇게 웃긴 건지. 팔을 슬쩍 내려서 호장을 힐끔 쳐다보며 수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그러면 근 20년 동안 정환이랑 준섭이 쫓아다니고 있는 거야? 진짜 징한 녀석.”

“그렇긴 한데요. 형들도 저 좋아해요. 제가 안 보이면 막 먼저 찾는다니까요?”

“완전히 길들였구만. 근데 이정환은 그렇다 치고. 신준섭은 너 요만큼도 귀찮아하지 않는 거 같던데.”

“맞아요. 준섭이형은 저한테 화도 한 번 낸 적 없어요.”

“…신준섭. 이 독한 새끼.”

비록 첫날은 수겸의 완패였으나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쨌든 본인 입으로 맡겠다고 한 이상 중간에 내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막연히 생각했던 전호장 임보(?) 계획을 대폭 수정하기 시작했다.


[어. 현준아. 왜 전화했어?]

뛰다 말고 멈춰서 전화를 받은 듯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도 같이 들리는 걸 보니 밖에서 러닝이라도 한 건가. 현준이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그냥. 시간이 나서. 너 뭐해?”

[나 호장이 산책시키는 중.]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호장이라는 이름의 개를 입양이라도 한 거야?”

[아니. 네가 아는 그 호장이 맞아.]

“근데, 산책을 시킨다고? 보통은 같이 산책한다고 하지 않나.”

[그럴 일이 좀 있어. 내가 며칠 간 호장이 좀 맡아주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그런 표현은 사람, 아니, 어른한테는 안 쓴다고.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나. 감도 잡히질 않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수겸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다, 현준아. 내가 살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 낮에 힘을 좀 빼놔야 밤에 얌전해지고 잠도 잘 잔단 말이…. 야, 야! 전호장! 너 혼자 멀리 가지 마!]

“…수겸아. 나 그냥 끊을 게. 힘내라.”


전호장 임보 3일째. 이제는 수겸도, 호장도, 제법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각자 나름대로 템포를 맞춰가고 있었다. 비로소 유지되는 평화에 수겸은 제법 감격스러웠다. 이만하면 자신도 신준섭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정환 만큼은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루틴이 되어버린 산책 코스를 호장과 함께 걷고 있을 때였다.

“어! A상가 부동산 아저씨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까 반대편에 지나간 부부 말이에요. XXX동에 사는 사람들인데 남편분이 어디 병원 의사고, 아내분도 그 병원 의사시래요.”

“방금 인사했던 할머니는 OOO동 사시는데 자식들이 다 미국에 있다네요.”

“저 집은 아들만 둘인데, 첫째는 군대 갔고 둘째는 올해 수능 본대요.”

누가 보면 이 아파트 산지 족히 10년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친화력이었다. 심지어 호장이는 이 아파트 입주민도 아니었다. ‘핵인싸’ 라는 말은 호장이 같은 녀석한테 쓰는 말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왜인지 한숨도 같이 나왔다.

“어? 저기 D상가 꽃집 사장님이다! 근데 수겸이형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왜?”

“약간 뭐랄까…. 좀 질린다는 표정인데?”

“딴 건 모르겠고. 네가 왜 살이 안 찌는 지는 알 것 같다.”


전호장 임보 4일째. 호장이 녀석이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형. 저도 주시면 안 돼요? 저 그거 진짜 필요해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무릎까지 꿇고선 손바닥을 싹싹 비비기까지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볼까 무서워서 주위를 두리번거린 수겸이 조용히 윽박질렀다.

“안 돼! 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아, 혀엉-! 제발요. 저 그거 너무 갖고 싶어요. 진짜 호장이 소원!”

“시끄럽고. 절대 안 되니까 그런 줄 알어.”

“그치만 그거 저만 없단 말이에요. 저 너무 속상해요. 진짜.”

우는 소리를 내도 통하지 않자 호장이 녀석은 급기야 수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기까지 했다. 길바닥에서 이게 무슨 추태냐고! 더는 주변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참지 못한 수겸이 소리 질렀다.

“야, 인마! 네가 왜 우리 아파트 입주자 카드가 필요한 건데?!”

어처구니 없게도. 호장이 요구하는 건 수겸이 사는 아파트 단지의 입주자 카드였다. 이 카드가 있으면 아파트 공동 현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단지 내 각종 커뮤니티 시설에도 출입이 가능한, 아파트 주민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카드였다. 한 마디로, 외부인인 호장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소리다.

“형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호출하고 문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거 너무 불편하고.”

“너는 이 아파트에 허락 받고 들어와야 되는 사람이거든?”

“헐. 너무해요. 진짜 잔인하다. 저 상처 받았어요! 그리고 여기 카페나 헬스장 들어갈 때도 다른 입주자들이랑 같이 들어가야 입장이 된단 말이에요.”

“하, 진짜…. 카페는 그렇다 치고. 네가 여기 헬스장을 왜 이용해?”

“저 헬스장 사장님하고 친해요. 그리고 카페는 반상회 어머님들이랑 같이 종종 커피 마시러 가는데요?”

“네가 우리 아파트 반상회에 왜 참여를…. 됐다. 말을 말자.”

이번만큼은 수겸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친해도 이건 아파트 관리 규약상 말이 안 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은 호장이 잔뜩 토라져서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덕분에 수겸은 혼자 남은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정말로 단단히 삐지긴 한 건지. 다음 날에도 호장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요 며칠간 퇴근하고 저녁까지 쭉 붙어있었다 보니 조용한 집안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호장에게 굳이 연락해서 오라고 하진 않았다.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한담. 삐진 거야 나중에 어떻게든 풀어주면 된다. 게다가 이틀 뒤면 정환의 출장도 끝나니까. 그때 되면 아마 부르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와서 반길 게 분명했다. 

역시나. 수겸의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보다 더 빨랐다. 정환이 출장에서 돌아오기 하루 전날에 호장이 벌써 찾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싱글벙글한 얼굴로.

“너 기분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네! 그럼요! 짜잔-!”

호장이 무언가 손에 쥐고 수겸의 눈앞에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다. 그건 수겸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절대로 호장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너, 너! 그게 너한테 왜 있어?!”

“후후후. 저 이 아파트 샀거든요. 저도 이제 당당한 여기 주민이란 말씀!”

수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언제부터 아파트가 갖고 싶으면 바로 살 수 있는 거였나. 나는 이 아파트 사겠다고 이정환한테 청혼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신혼여행도 가고 이정환 전남친한테 협박도 당하고 별 쇼를 다 해가면서 겨우 얻었는데?!

생각할 수록 어이없고 열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호장은 눈치도 없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묻지도 않은 사실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랑 부동산 사장님이랑 친한 건 아시죠? 제가 전부터 이 아파트 사고 싶다고 했더니 이번에 급매로 싸게 나오자마자 저한테 알려주셔서 제가 잽싸게 샀죠!”

시발. 이 불공평한 세상아! 급매로 나온 싼 매물 주워가는 건 인맥 빨 갖춘 현금 부자들이라더니! 무주택자 시절, 부동산 전문가들에게 들었던 잔혹한 현실이 지금 수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단순히 호장이 이 아파트를 샀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잠깐. XXX동이면 나랑 같은 평수인가? 너 얼마에 샀어?”

모르는 게 약이라는 선조들의 지혜를 또 한 번 간과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김수겸은 참을 수 없었다. 수겸이 인생의 모든 걸 배팅해서 겨우 손에 넣은 이 집이 도대체 얼마에 팔렸는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호장의 입에서 나온 액수는, 수겸이 뒷목을 잡고 드러눕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형? 수겸이형? 갑자기 왜 그래요?”

“너…. 그 가격에 냉큼 사 버리면…. 젠장! 이러면 실거래가가 분양가 대비…, 이러면 시세 형성에…, 엄청난 악영향이…, 그럼 앞으로 거래 추이가….”

“네? 형 지금 뭐라고요?”

“네가…, 네가 지금 내 자산 가치를 폭락시키고 왔다고!! 너 이리 안 와?!!”

다른 건 다 참아도, 집값 떨어지는 것 만큼은 절대 못 참는 김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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