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 흑의 움직임을 예측하라

명헌태섭 - 01~04 (1부)

마지막 순간 흑의 움직임을 예측하라

1부

*1편부터 4편까지 합한 분량입니다.

*5편부터는 2부로, 포스타입에 올라와 있습니다. 2부 분량이 완성되면 합본으로 올라옵니다.


01.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태섭아. 확률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아? 달재가 물었다. 최근 빠졌다는 비디오 게임 얘기인 것 같았다. 게임에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어도 달재가 하는 얘기를 빠뜨리지는 않았던 태섭이 잠시 위를 바라보며 달재가 했던 게임 얘기를 떠올렸다. 

 "확률을 높이면 이기겠지?"

맞아. 사람들은 대부분 숫자를 올리면 이길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고 생각한대. 달재가 웃었다. 나이 답지 않은 순한 웃음에 태섭도 픽, 하고 웃었다. 그러면? 그게 아니야? 

 "응. 확률을 뒤집을 수 있는 수가 필요한 거지." 

딱 한 번. 대부분의 게임에는 그런 반칙 룰이 존재한다고 하더라. 송태섭은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달재야. 대학 가서도 농구 계속하자." 

 "갑자기?" 

 "확률을 뒤집는 게 중요하다며." 

아무도 우리가 계속 농구 할 거라고 생각 못 했을 거 아냐. 보여주자고. 달재의 콧등이 붉어졌다. 홍조증이 있는 이달재는 농구 연습을 하다 보면 주근깨 있는 부근이 온통 홍당무처럼 새빨개지고는 했는데, 꼭 연습을 한바탕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섭이 낄낄 웃자 달재가 태섭에게로 몸을 기울여 부딪혀 왔다. 툭, 툭. 

 "그래. 태섭아. 난 네가 계속 계속 농구 했으면 좋겠어." 

그때 이달재와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생각난 건, 인터하이의 다음 상대가 산왕공고라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송태섭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확신도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주어진 일에 뛰어드는 것이 좋았다. 당장 닥친 일에 열중할 때는 어떤 생각이라도 자신을 휘두를 수 없었으므로. 

누가 이 싸움에서 북산이 산왕을 이기는 데에 배팅을 할까? 

관중이 백 명이라면 아마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다섯 명 정도가 북산의 승리에 손을 들지도. 고작해야 오 퍼센트의 확률이라면 지금이 바로 확률을 뒤집는 반칙 룰이 필요한 게 아닌가?

인터하이가 열리는 도쿄로 떠나기 전날 밤, 송태섭은 생일 케이크를 너무 급하게 먹어 체한 것 같은 기분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뒤척거리다 책상에 붙여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송태섭의 상체가 크게 한 번 부풀었다 가라앉는다. 

나는 오키나와 대표도 아니고 형처럼 대단한 선수가 되지도 못했지만, 최강산왕을 이기고 나면 형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오퍼센트의 행운이 꼭 필요해. 포스터 속 산왕 유니폼을 입은 남자는 굳은 입매와 눈을 하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면 어느 한쪽으로 비뚤어질 법도 하건만, 중앙 정렬이라도 맞춘 것처럼 눈 코 입이 모두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인간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과연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

아, 미안, 합니다. 뚝뚝 끊기는 목소리에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첫 패배를 맛본 이명헌과 경기장 어디선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상상. 물론 상상 속의 송태섭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어깨에 멘 가방을 열어 티셔츠를 꺼낸다. 현실에서는 표정 관리는 커녕 목소리 끝도 분명하지 못하지만. 상상 속 태섭은

이명헌 선수, 실례가 안 된다면 싸인 부탁해도 되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티셔츠를 내민다.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상상할 때마다 다르다. 받아주는 이명헌이라면 으레 그 무표정한 얼굴로 티셔츠를 받아들고 어디에 써줄까. 하고 묻고, 받아주지 않는 이명헌은 귀찮다는 얼굴로 송태섭을 보고 지나친다. 어느 쪽이든 그럴 듯하다. 

월간 농구에는 이명헌의 이름이 고유명사처럼 등장한다. 다른 선수들의 인터뷰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는 선수는? 존경하는 다른 학교 선수가 있다면? 가장 만나기 싫은 선수는? 그럴 일은 없지만 송태섭에게 월간 농구에서 인터뷰 취재를 온다면 아마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산왕공고 이명헌이요. 

인터하이에서 만날 수 있는 상대 중 이명헌만큼 어려운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확률을 뒤집고 북산은 산왕을 이겼다. 그래서 농구라는 게 재미있는 것이다. 전력 분석으로는 경기 내용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단단한 몸에 부딪힌 송태섭이 코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사과했다. 

 "앞을 못 봤어요. 미안합니다." 

이명헌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마른침을 삼켰다. 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얼굴 들어."

경기 중에도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둘 사이의 긴장을 깨뜨렸다. 마주 본 이명헌의 얼굴은 패배에 젖어 있지 않았다. 울고 있지도 않았고 분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명헌은 손을 들어 송태섭의 입술과 코 사이를 스치듯 만졌다. 한참 코를 붙잡고 있었더니 코피라도 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송태섭의 입술이 공간을 만들고 벌어졌다. 

코피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이명헌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공이 림을 통과한 뒤 점수판을 바라보던 찰나의 표정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명헌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와 맞붙어 이길 생각을 하다니. 확률은 반반, 아니 많이 쳐줘도 절반 이하인데도. 스스로 생각해도 건방진 생각에 멋쩍은 웃음이 걸렸다. 턱. 턱. 오차 없는 발걸음의 무게가 묵직하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던 송태섭은 뒤를 돌아 이명헌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해 인터하이는 송태섭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움과 마주하는 법을 배웠고, 피하려고 했던 일들에 부딪혔고, 넘어졌고, 다시 일어났다. 준섭이 있는 바다는 이제 외롭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혼자만 간직했던 준섭의 손목 보호대는 햇볕 잘 드는 식탁에 올려두었다. 가만히 식탁 위에 두어도 먼지는 붙지 않았다. 이제 그리울 때면 식탁에 앉아 형의 손목 보호대를 슬쩍, 만져보기 때문이다. 아마 태섭이 만지지 않은 날엔 엄마가, 엄마가 하지 않은 날엔 아라가 건드려 볼지도 모른다. 

옆 방에서 아라와 엄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슬쩍 기울여 보니 텔레비전 소리가 함께 들렸다. 나도 같이 티비나 볼까. 내일의 연습 메뉴가 적힌 공책을 닫고 의자에서 일어서려는데 책상 위쪽 벽에 붙여뒀던 포스터의 테이프가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오래된 포스터는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군데군데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농구 잡지를 사고 받은 부록이다 보니 퀄리티가 썩 좋지는 않았다. 태섭이 손을 뻗어 말려들어 간 포스터 귀퉁이를 붙잡고 위로 쓸어올렸다. 인터하이의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는 건 아마, 방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이명헌의 포스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 이명헌은 송태섭과 동갑이다. 2학년에 산왕 주장이 되면서 단독 인터뷰를 했던 때 한정판으로 나눠주던 A3 사이즈의 포스터.

자신의 턱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붙잡고서 태섭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제 떼도 되지 않을까. 현실에서 이명헌을 만났고, 이겼으니 상징적 의미로서의 '이명헌'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손을 다시 벽 쪽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떼어냈다가를 반복하던 태섭이 뒷머리를 긁었다. 꼭 지금 당장 떼내야 하는 건 아니다. 포스터를 떼어내면 변색된 주변 벽지 때문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며 태섭이 고개를 젓고 방을 나섰다. 

 "뭐 재밌는 거 해요?" 

문을 연 태섭이 경쾌하게 물었다. 아라가 엉덩이를 엄마 쪽으로 붙이며 오른쪽 자리를 두드린다. 오빠, 지금이 하이라이트였거든? 방금 장금이가 뭐라고 한 지 알아?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한 것이온데... 애기가 연기 너무 잘해. 대박이야. 요새 인기있다는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있는 모녀를 보다 태섭도 자리에 앉았다. 




윈터컵이 있기 직전, 산왕과 해남이 연습 경기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먼 아키타에서 여기까지 온다고요? 놀란 태섭을 위해 안 감독이 친절히 덧붙였다. 산왕은 미국 원정도 다녀오는 팀인데 아키타에서 카나가와까지 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미국이라... 그 말을 듣고 나니 인터하이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감독님. 누가 오는지 아세요?" 

안 감독이 태섭을 흘깃 보았다. 보고 싶은 선수라도 있나 보군요. 태섭이 머리를 긁었다.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워낙 다 대단한 선수들이라 윈터컵 전력이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요. 

 "3학년들 중 남은 건 이명헌군 한 사람 뿐이라고 하더군요." 

예? 왜요?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했지만, 이명헌만 남았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당황한 태섭은 마시던 포카리 스웨트를 뱉어낼 뻔한 걸 겨우 삼키고 입 주변을 닦았다. 도감독의 부탁이었겠지요. 나라도 그런 분위기에서 이명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안 감독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차피 산왕공고 주전 3학년들은 죄다 스포츠 전형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명헌도 굳이 윈터컵을 뛸 이유는 없었다. 마지막 인터하이를 그렇게 흘려보냈다고 할지라도 3년간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는 법이다. 

도감독의 부탁을 듣고 이명헌은 흔쾌히 남겠다고 결정한 걸까. 쉬운 결정은 아닐 텐데. 송태섭은 포인트 가드로서, 또 이제는 한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 이명헌에 대해 다시 또 재고해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책임감이 있는 타입. 뿅. 말투는 이상하지만. 

정우성은 인터하이가 끝나자마자 미국에 갔고, 3학년들 대부분은 은퇴했고, 이명헌과 2학년, 1학년 후보 선수들이 내려온다고 했다. 1일 차에는 해남과 2일 차에는 능남과, 마지막 3일차 오전에는 해남, 능남, 산왕이 번갈아 가며 더블 헤더를 뛰고 곧장 올라가는 스케쥴이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피곤한 스케줄에 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그, 혹시 저희랑은 안 한대요?" 

 "아, 도감독이 연락 왔었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우리는 아직 전력이 갖춰지지도 않았고, 백호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윈터컵에서 가장 힘든 상대는 이번에도 산왕이 될 가능성이 크거든. 그 말에는 태섭도 공감했다. 쩝,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부활동 일지를 내려놓는 태섭에게 안 감독이 은근슬쩍 얘기했다. 그래도, 연습 경기 정도는 보러 가도 좋겠지. 태섭군이 간다면 내가 감독에게 따로 연락해주고. 

송태섭이 어떤 선택을 할 지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씩 웃은 태섭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럼 당연히 가야죠. 제가 잘 보고 와서 팀에 얘기해줄게요. 

 "태섭군에게는 산왕이 좀 특별한가요?" 

 "그렇게 보이셨어요?" 

 "인터하이 때도, 지금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원래 태섭군은 쿨한 게 매력인데 말이에요. 장난스럽게 웃는 안 감독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보였다면 고쳐야지. 경기 중에도 정대만에게 쫄지 말라고 한 소리 듣지 않았던가. 정대만에게는 이상하게 본심을 잘 숨길 수 없어서 들켰다 해도, 안 감독님 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티가 났나 싶어 송태섭은 잠시 속으로 반성했다. 

산왕을 특별하게 여겨왔던 건 형 때문이었다. 준섭은 언제나 태섭을 걱정했었다. 숫기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늘 형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형이 하려는 건 뭐든 했고, 농구도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 송태섭이 준섭은 퍽 걱정이었던 것 같다. 강해져야 해. 태섭아. 파도에 이기는 건 더 큰 파도인 것처럼. 

형도 이기고 싶어 했던 산왕을 이긴다면, 이제 바보 같은 동생이라고 걱정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꼭 이기고 싶었다. 

인터하이에서 혼자만의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산왕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올려다보기만 해서 그런 걸까. 오랜 시간 꿈꿔왔기 때문일까. 포스터는 여전히 태섭의 방에 붙어 있었고, 달달 외울 수 있는 이명헌의 인터뷰가 농구를 할 때도 생각이 났다.

준섭이 알려준 건 삶의 방식이었고, 이명헌의 인터뷰는 송태섭의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농구가 힘들 때 그의 인터뷰 문구를 생각하며 이를 악무는 것이다. 나도, 나도 할 수 있다고. 

*

 "어디 가?"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는데, 아라가 눈을 비비며 미닫이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송태섭이 가슴에 손을 얹고 아 깜짝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냐고..."

 "산책." 

 "...걸어서?"

아라가 입술을 삐쭉이며 물었다.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태섭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조심조심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외엔 고요하다. 송태섭이 아라의 머리 위에 왼손을 얹었다. 바이크 사고 뒤 송아라는 새벽의 자그마한 기척에도 자주 깨곤 했다. 종종 새벽마다 방문 앞을 서성이던 아라의 그림자를 생각하면 속이 미식거렸다. 

 "당연히 걸어서지. 너한테는 비밀 없기로 약속했잖아." 

 "그리고 나는 엄마한테 비밀 지켜주고." 

맞아. 태섭과 아라가 마주 보고 킥킥 웃었다. 바이크를 타고 시속 180km로 달렸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만 같다. 고작 몇 달 전인데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곧 또 전국체전이잖아. 뭔가 기분이 들뜨는지 잠이 안 와서 그래." 

 "...오빠 보러 가는 거 아니고?" 

맞아. 바다 보고 있으면 잠이 잘 오니까. 송태섭이 허리를 펴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녀올게. 아라가 옅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닫고 나선 태섭은 차가운 밤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새벽은 벌써 겨울 같네. 어깨를 움츠린 태섭이 맨션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걸어서 바다까지 십오 분. 뛰면 십 분.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니 새벽 두 시 십 오 분이었다. 내일 2교시 수학이니까 모자란 잠은 그때 보충하자... 머릿속으로 시간표를 더듬어 본 태섭이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에 발을 내디뎠다. 사각, 사각, 모래가 발에 밟히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달리는 속도에 맞춰 모래가 종아리까지 튀어 올랐다. 새벽에 보는 바다는 준섭과의 비밀기지를 떠오르게 한다. 초등학생 송태섭이 시험에서 20점을 맞았을 때, 아라가 넘어져서 다쳤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혼났을 때, 아라가 깬 접시 때문에 대신 혼났을 때. 송태섭은 엉엉, 소리 내 울 장소로 형과의 비밀기지를 자주 이용했다. 

고요하고, 아무도 없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다 받아줄 것 같은 검푸른 바다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울 일이라고는 없는데 어쩐지 코가 시큰거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땀은 흐르자마자 차가운 공기에 닿아 식었다. 폐까지 차가운 숨이 가득 들어찼다. 송태섭은 이마를 적신 땀을 닦아 내리며 바다를 마주 보았다. 

 "형!" 

앞서가는 형을 부르듯, 한 번 불러보았다.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되어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바다를 향해 몇 번 더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만큼 그리움은 커지고, 슬픔은 줄어들었다. 

 "형!"

 "..." 

 "형.."

태섭이 아직 차오른 숨을 내뱉는 사이, 사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행인이겠거니,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발걸음 소리는 송태섭 근처에서 멈췄다. 옆을 돌아보자 캡 모자를 쓴 사람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어둡게 져서 얼굴이 전부 보이지는 않았지만 포스터로 몇백 번을 본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이명헌... 방금 전까지 큰 소리를 냈던 터라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명헌을 불렀다. 

이명헌은 여전히 바다를 보면서 말했다. 왜. 송태섭. 


02.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두 사람


왜, 송태섭. 이명헌이 아무렇지도 않게 송태섭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현실 감각이 사라졌다. 새벽 두 시 반은 그러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카나가와에 와 있다는 소식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는데도 가장 익숙한 풍경 속에 이명헌 하나가 툭 떨어진 것만으로도 낯설게 느껴진다. 바다와 이명헌, 정말 안 어울리네.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아온 송태섭에게는 이명헌이 꼭 하얀 백지에 찍힌 검은 얼룩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기는 농구 코트가 아니고, 지금은 경기 중이 아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물기 하나 없었으나 침을 모아 삼킨 태섭이 어금니를 깨물며 잠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긴장감을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 반말해서 미안합니다."


놀라서 부른 이름이라고 해도, 전통 있는 강호 고등학교인 산왕의 주장이다.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어 먼저 그 부분부터 사과했는데 이명헌 쪽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송태섭의 한 쪽 눈썹이 솟아올랐다. 사람이 사과를 했는데 대꾸가 없어? 


 "미안하면..." 


그럴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답지 않게 말을 하다 말고 끊는다. 송태섭은 양손을 뒤로 맞잡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격 급한 송태섭의 입이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았다. 깊게 한숨을 내쉰 이명헌이 말을 이었다. 곁눈질로 바라보니 말하는 스스로도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하루만 신세 좀. 뿅." 


그제서야 송태섭은 카나가와에 연습 시합을 하러 온 이명헌이 왜 이시간에 바닷가에 나와 있는지 생각했다. 혹시 길 잃어버렸어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이명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는 침묵이 그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일 때가 있는 법이다. 고민하던 송태섭은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다가 이명헌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명헌에게서 열 걸음쯤 떨어졌을 때 뒤를 슬쩍 돌았다. 뭐해요, 안 따라오시고. 

집으로 가는 길에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카나가와 시내에 자리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일, 이학년 녀석들은 대부분 곯아떨어졌고, 3학년 중 유일하게 주전으로 남아있던 이명헌과, 은퇴하지 않고 남아있던 매니저만이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몰래라고는 해도, 도감독이 눈감아줘서 가능한 외출이었다. 매니저와 이명헌은 농구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아마추어 록 밴드를 좋아한다는 점이 그랬다. 매니저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명헌 대신 씨디를 사다 주기도 했고, 좋아하는 밴드의 신보가 나왔을 때 용돈이 부족하면 서로 빌려 듣기도 했다. 매니저가 명헌에게 근처에 라이브 하우스가 있다는데 가보겠냐고 물었고, 이명헌은 당연히 오케이했다. 수상쩍은 빡빡머리에 출입 제한을 당할까 봐 근처 상점에서 캡 모자를 하나씩 구매했다. 

운이 좋게도, 명헌이 좋아하는 밴드 하나가 그날 공연이 잡혀 있었다. 두 시간을 넘게 앞 줄에 서서 공연을 보고 있으니 목이 말랐다. 노래에 심취한 듯 눈을 감고 있는 매니저를 남겨 두고 명헌 홀로 인파를 빠져나왔다. 음료 쿠폰을 들고 바에 가자 캡 모자를 쓴 명헌에게 묻지도 않고 생맥주가 담긴 테이크아웃 컵을 건넸다. 미성년자라고 바꿔 말할 기회도 없이 손에 들려진 맥주를 분위기에 취해 전부 마셨다. 이명헌이 단숨에 컵에 든 맥주를 모두 마시자 바 카운터에 있던 여자는 목이 말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이번만 서비스라며 한 잔을 더 채워주었다. 하얀 거품을 내려다보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다에 있었다고 한다. 매니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연락할 방법도 없는 데다 숙소 위치도 이름도 기억나는 게 없어 멋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해변에 누군가 있길래 길이라도 물어볼까 싶어 다가갔는데 송태섭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말에 태섭이 볼을 긁었다. 형을 부르는 소리도 다 들었을 텐데도 명헌은 형에 대해서는 따로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걸 물어볼 사이는 아니었다. 

해변을 빠져나온 송태섭과 이명헌은 한참 침묵을 유지했다. 이 사람이랑 농구 말고는 정말 공통분모가 없구나. 인터하이 때는 당연히 그가 은퇴할 거라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에 들떠서 싸인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명헌 선수, 팬이었습니다. 

그를 이긴 다음 그런 말을 하는 건 꽤 시건방지고 멋지게 보인다지만 윈터 컵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곧 다시 붙을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뭘 물어야 분위기가 미묘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명헌이 먼저 물어왔다. 


 "지학전에서 진 원인이 뭐라고 생각. 뿅." 

 "...갑자기 아픈 구석을 찌르네." 

 "형편 없었으니까."


보통 그런 말을 할 땐 조금이라도 웃지 않냐고, 차라리 비웃기라도 하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형편없다고 말하는 게 더 상처였다. 태섭은 고개를 젖히고 숨을 뱉었다. 

채치수는 거의 확정이나 다름 없던 대학 추천이 취소되었고, 정대만은 분한 마음에 2일간 부 활동에도 나오지 않았다. 송태섭도 패배에 젖어 며칠을 멍하니 보냈고, 백호는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주전들 중 유일하게 서태웅만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연습량을 소화했다. 기특한 후배에게 수건을 건네며 너는 분하지도 않냐, 물었을 때 서태웅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분하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또 지니까요. 

그 말을 들은 송태섭은 곧바로 정대만의 교실로 갔다. 나와요. 연습하게. 얼빠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대만을 끌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윈터컵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또 그렇게 질 수는 없다. 무력하게, 백퍼센트의 힘을 다하지 못한 채로. 

북산의 가장 큰 장점은 약점이 명확하다는 것이고, 가장 큰 단점은 약점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송태섭은 주장으로서 윈터컵이 시작하기 전 그 약점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쪽이 봤으니까 더 잘 알겠죠 뭐." 


은근슬쩍 떠보는 말이었다. 이명헌이라면 경기에 대해 더 좋은 분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해서. 


 "강백호가 없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이름을 다 기억하네요? 의외다. 송태섭은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순수한 감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상대들 이름 전부 기억해요?


 "너는?" 

 "저는 당연히 기억하죠. 전국 대회 경험이 뭐 얼마나 된다고 그걸 기억 못하겠어요." 

 "상대방을 잘 알고 나를 잘 아는 게 중요. 뿅"


국어 시간에 배웠던 거 같은데 뭐더라. 송태섭이 골똘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하자 이명헌이 다시 말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맞다. 그거요. 지피지기 백전백승. 그쪽도 그래요?"


태섭이 그랬듯 명헌도 대화 맥락을 벗어난 말을 던졌다. 


 "비디오로 봤을 때보다 직접 보는 게 더 거슬려." 

 "누가요." 

 "너." 


송태섭은 웃었다. 뭐가 거슬려요. 농구 플레이가? 지금까지 농구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 인터하이의 농구 경기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한 태섭은 긴장 없이 웃었다가 이어지는 말에 입매를 굳혔다. 


 "그쪽이라는 호칭도 거슬리고, 피어싱도 거슬리고..." 


정대만과 워낙 편하게 대화하다 보니 체육부 상하관계에 대해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태섭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명헌도 세 걸음쯤 더 걷다가 멈췄다. 


 "그쪽이라고 말한 건, 실수했어요. 말버릇이라." 

 "그게 거슬린다고 한 거 뿅." 


무슨 소린지? 태섭이 되묻자 명헌이 달빛을 등지고 태섭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진 얼굴에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림자보다 더 까만 눈동자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편하게 불러. 어차피 거슬린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뭘 할 수 있다면 했을 거라는 전제조건이 깔린 말투였다. 진짜 틈이 없는 사람이구나. 태섭은 제 피어싱을 매만지며 음,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이명헌 선수라고 부를게요. 그쪽...은 제 주장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니까. 됐죠? 


 "근데, 우리 집에 여동생이랑 엄마 뿐이라 제 방에서 자야 해요."

 "..." 

 "저는 거실에서 잘 거니까 혼자 쓰면 돼요."


이명헌은 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태섭이 하는 어떤 말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새벽에 일어난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라, 태섭이 사는 맨션을 올라가는 익숙한 계단 소리 마저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탁. 탁. 탁. 하는 태섭의 발소리 바로 뒤에 이어지는 명헌의 발소리가 꼭 저를 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3층, 305호.  

열쇠를 꺼낸 태섭이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명헌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태섭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소리가 나지 않고 문 여는 방법을 알고 있는 손놀림이다. 문이 열리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송태섭이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며 고갯짓을 했다. 들어가라는 말에 명헌이 다리를 움직였다. 태섭이 뒤에서 문을 닫고는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명헌의 등을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저, 이명헌 선수. 이쪽 방이에요. 현관에서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미닫이문을 열면 태섭의 방이었다. 씻고 싶어도 아침까지만 참아요. 태섭의 말에 명헌은 고개를 저었다. 잘 곳 마련해 주고, 내일 숙소까지 데려다준다는데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미닫이방 안쪽으로 들어간 이명헌은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는 술이 깨는지 자꾸 관자놀이 부근을 눌러댔다. 

태섭이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흠. 한참 이것저것을 들었다 놓던 태섭이 꺼낸 건 주스 병과 보리차였다. 컵 하나와 페트병 두 개를 안아 든 태섭이 문 앞에 내려두었다. 집 안의 모든 불이 꺼진 상태라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명헌의 옷을 손가락으로 붙잡은 태섭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끌어당겨도 움직이지 않던 몸이 툭, 툭, 두 번 당기자 발을 옮겼다. 

 

 "물 마시고 싶음 마시고, 화장실은 저기고요. 혹시라도 엄마나 아라랑 마주치면... 아, 아라는 제 여동생이에요. 농구부 선배라고 하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명헌이 캡모자를 벗었다. 잘 자요. 태섭은 군더더기 없이 문을 닫았다. 





해가 뜰 때까지 결국 잠에 들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명헌과 송태섭은 서로 모르는 사이에 가까웠다. 고작해야 이름, 포지션, 농구 스타일 정도. 물론 송태섭이 그보다는 이명헌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있기는 하다.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랬던 이명헌이 송태섭의 가장 개인적인 장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밀고 들어온다. 역시 만날 때마다 독특한 감상을 남기는 사람이다. 담요를 덮고 누워 있던 태섭이 몇 번 뒤척이다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세 시간 동안 못해도 몇백 번은 몸을 뒤척인 것 같다. 

안 감독님의 말도 다시 한번 상기한다. 산왕을 의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명헌이라는 가장 이상적인 포인트 가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피곤하니까 별 생각이 다 드네..."


새벽에 만난 게 진짜 이명헌이 맞겠지? 유령 같은 거에 홀려서 이상한 거 데려온 건 아니겠지. 송태섭은 미닫이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이제 막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파고든 방 한 가운데에 이명헌이 정좌한 채 앉아있었다. 빡빡 민 머리부터 허리까지 일자로 곧게 뻗은 몸을 보니 꼭 도를 닦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송태섭은 구부정하게 기울어져 있던 다리를 바로 했다.  

늘 한 쪽에 개켜두는 이불은 만진 흔적도 없었다. 태섭처럼 한숨도 안 잔 모양이었다. 책상 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던 이명헌이 고개를 돌려 송태섭을 올려다본다. 농구 할 땐 정신이 없으니까 몰랐는데, 뱀 같은 눈이다. 삼백안이라고 하던가 이런 눈을? 

그가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서 송태섭도 책상 쪽을 보다가 그제야 아직 벽에서 떼지 않은 포스터를 발견했다. 아 미친. 송태섭이 낮게 욕을 읊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얼마나 뜨거운지 목까지 간지러웠다. 붉어진 얼굴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허둥대며 포스터를 가리고 섰다. 2년 전의 자기 자신과 마주 보고 앉아있던 이명헌이 송태섭을 부른다. 


 "송태섭." 

 "...네?"


주륵, 대답과 동시에 코피가 흘러 턱을 타고 툭, 떨어졌다. 태섭이 코를 붙잡고 급하게 휴지를 찾는데 명헌의 뒤에 티슈가 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티슈를 가리키며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명헌은 뒤로 고개를  돌려 각티슈를 보고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뭐지. 송태섭이 눈썹을 찌푸리며 결국 한 손으로 코와 턱을 받친 채 방을 가로질러 갔다. 이명헌의 몸집은 송태섭의 방에 차고 넘쳐 방해일 뿐이었다. 

그의 무릎을 넘어서려는 발목이 붙잡힌 건 한 순간이었다. 이명헌이 발목을 잡고 끌어당긴 탓에 한 순간에 무게 중심을 잃었다. 허리에 힘을 주고 단단히 버텨 꼴사납게 넘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남은 한 손으로 이명헌의 어깨를 붙잡고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송태섭이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놔요. 

송태섭은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다. 구분도 명확했다. 제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인간이 있다면 똑같이 갚아준다. 이명헌은 어느 쪽인가. 폭력을 휘두르려는 사람인가, 달재와 같이 송태섭의 곁에 서는 사람인가. 

손으로 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서, 손을 타고 흐른 피가 이명헌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송태섭은 침을 삼키며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얼굴에 떨어진 피를 닦았다. 닦아주려던 것이었으나 피가 번져 더 흉측해졌다. 


 "저기...이명허-ㄴ" 


말을 뱉기도 전에 이명헌이 머리카락을 쥐어 당긴다. 크게 아프지는 않았으나, 머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목과 머리가 고정되니 팔도 힘을 잃었다. 그래도 우선 송태섭은 주먹을 쥐었다. 중지를 조금 더 높게 쥐고, 손톱을 깊게 살 속으로 박아 넣었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반응할 새도 없이 이명헌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서로의 입술이 맞부딪혔으나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입술 안쪽이 이에 눌려 찢어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터졌다. 물리적 고통에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아! 밤잠을 설친 탓에 목소리는 평소보다 쉬어 있었다. 

이명헌, 씹...피 난다고...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지만 송태섭은 이런 종류의 폭력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키스가 폭력이 될 수 있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걸 어느 쪽에 넣어야 하는지 고민할 새도 없었다. 

송태섭의 주먹이 떨릴 때쯤 이명헌이 물러섰다. 여전히 송태섭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마주 본 두 사람은 피칠갑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03. 오프닝 게임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요. 송태섭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입안을 가득 채운 살덩이를 느끼기 전까지는. 피 맛이 나는 물컹한 살덩이가 숨구멍을 막았다. 저기, 저기요. 어깨를 밀어내고 싶어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팔 근육이 힘이라도 써볼 텐데, 빈틈없이 맞물린 몸 덕에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읍.으으읍. 키스를 한다기보다는 납치를 당하는 사람처럼 앓는 소리를 내던 태섭이 머리채를 잡히는 순간 고개를 꺾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두피에 느껴지는 고통은 없었다.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로 이명헌은 허리를 숙여왔다. 이러다 송태섭 아니고 송새우 될 거 같다. 목과 허리를 최대치까지 꺾어낸 송태섭의 눈이 뒤집히기 직전 이명헌이 떨어져 나갔다.

피와 침과 그보다는 점도가 낮은 눈물로 (그걸 보고서야 송태섭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범벅이 된 이명헌의 얼굴이 기괴했다. 송태섭은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앉아있는 편을 선택했다. 빌어먹게도 지금 이게 송태섭의 첫키스였고, 바깥에는 아라와 엄마가 있었다. 가장 사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진 폭력같은 첫키스에 송태섭은 분노보다는 공포가 앞섰다. 그리고 송태섭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잘...하네요."

송태섭의 비장의 무기 중 하나는 모든 일을 0으로 만들 수 있는 농담 따먹기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에 써본 적은 없다는 거고.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헉헉대는 송태섭을 바라보던 이명헌이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처음인데."

농담 아니고 진짜겠지 저 사람? 송태섭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웃었다. 일단 대꾸하지 말자. 말은 안 하면 제로고 하면 마이너스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명헌의 다음 말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송태섭의 바지 위.

"섰어."

"악!"

악, 악. 악.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태섭이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어머니와 아라가 깨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놀란 두 모녀가 문을 두드렸다. 태섭아! 오빠! 송태섭은 냅다 앞에 보이는 이명헌의 맨투맨을 끌어당겨 얼굴을 닦았다. 비릿한 피 향기는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 엄마. 미안. 악몽 꿨어요."

"그래... 현관에 못 보던 신발이 있는데, 누구 왔니?"

"응... 농구부 선배랑 새벽에 농구하다가."

"알았어. 아침 먹을거지?"

옅은 한숨과 함께 문에서 기척이 멀어지나 싶더니, 우당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라야! 태섭이 당황해 이름을 부르자 아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농구를 어떻게 했길래 피가 나?"

싸웠어? 말은 송태섭에게 하면서 이명헌을 노려본다. 명헌은 그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송태섭이 시비 걸리기 좋은 인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자주, 많이 다친 모양이라고. 이명헌은 송아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 뿅.

뿅? 의뭉스러운 얼굴로 명헌을 보던 아라가 헉, 하고 헛숨을 들이킨다. 그러더니 책상 쪽으로 다가가 벽을 한 번 보고, 명헌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서야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대박... 포스터 씨다.

"송아라. 예의 없게 굴 거면 나가."

"집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보다는 예의 있네요."

태섭이 눈을 부릅뜨자 아라가 문을 닫고 나간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태섭은 차라리 아라가 있을 때가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까는요."

그러자마자 명헌이 시선을 내려 송태섭의 바지를 본다. 이명헌이 '섰다'고 말하며 송태섭의 바지를 가리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성기는 흐물해졌기에 지금은 문제 없음 상태였다. 송태섭은 평범한 (고릴라같은) 남고생보다는 성욕이 없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위를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키스를 할 때 자위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버겁기만 했다. 다만 자위가 끝나면 밀려오는 피로함과 묘한 자책감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왜 섰을까. 사람이 너무 놀라거나 무서우면 발기를 하기도 하나. 인체의 신비에 대해 고민하던 송태섭이 왼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거고요. 자고 일어나면 그렇게 되는 거랑 비슷해요."

"..."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얼굴에 송태섭이 물었다. 그쪽이야말로 왜 키스했어요.

"그쪽이라고 하길래."

이게 무슨 선문답 같은 소리인가. 그러고 보니 어제도 호칭에 대해 명헌과 대화를 했던 게 생각이 났다.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저 이명헌 선수 안 좋아해요."

게이도 아니고요 (아니겠지? 송태섭은 방금 전 키스라고 하기도 어려운 행위로 발기했던 걸 떠올렸다.) 아니, 오해를 했다고 해도 그렇지 갑작스럽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미쳤나.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면 뺨 맞고 경찰서 가고 농구도 못해요. 알아요?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이명헌이 상의를 벗었다. 맨투맨 안에 들어있던 맨 몸이 드러나자 송태섭이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기어갔다. 경악한 얼굴을 잠시 들여다본 명헌이 손을 내밀었다.

"옷 좀 빌려줘. 피 묻은 옷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아. 네."

맞는 말이었다. 말도 없이 외박한 선수가 피 묻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면 내가 감독이라도 놀라서 헛구역질이 나올지도. 송태섭은 몸을 일으켜 옷걸이에 걸린 후드티들 중 어떤 게 가장 사이즈가 클지 가늠해보았다. 집에서 자고 간 적 있는 정대만에게도 옷을 빌려준 적이 있지만, 그보다 키는 작아도 몸이 두꺼워서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다.

바닥에 옷을 내려놓고 고민하는 송태섭에게 이명헌이 물었다.

"내가 오해한 게 맞아?"

"뭘 오해했는지 몰라도, 아닙니다."

"..."

"이명헌 선수랑 키스하고 싶었던 적 없어요."

그래. 이명헌은 제 민둥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슥슥 쓸었다. 편지를 받았었거든. 뿅. 뭐, 러브레터인가 봐요? 그래. 근데 호칭이 똑같아서... 거기에도 '그쪽'이라는 호칭이... 그렇게 말하다 말고 명헌이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경기중에도 거의 변화 없는 얼굴이라, 송태섭에게는 낯선 얼굴이다. 생각해보면 이명헌의 모든 것들이 다 새롭고 낯선 것 뿐이었다.

송태섭은 새 것보다는 헌 것을 좋아하고, 남의 손에 한번 들어가 길들여진 것을 좋아했다. 물건 이야기다. 왜 하필 이명헌의 새로운 표정을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송태섭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이명헌도 다른 세계에 간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게. 왜 너라고 생각했을까. 뿅"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고... 송태섭은 손에 집히는 옷들 중에서 그나마 품이 가장 넉넉해 보이는 후드티를 건넸다. 입고 밥 먹어요. 데려다줄 테니까.

*

송아라는 '포스터 씨'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밥을 먹는 내내 그를 힐끔거렸다. 막상 이명헌에게 말을 걸 용기는 없는지 애꿎은 태섭에게로 마이크를 넘겼다.

"오빠. 어떻게 만난 거야?"

"주웠어. 새벽에."

"주워?"

이명헌이 먼저 대답했다.

"길을 잃었다 뿅"

아하? 아라는 더 궁금한 게 많아진 얼굴로 태섭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지 태섭과 나란히 앉은 명헌을 번갈아보았다.

명헌은 반찬보다 밥을 많이 먹는 편인지 식탁 위 반찬은 그다지 줄지 않았는데, 밥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 태섭이 아는 선배라구요?"

"이명헌입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 응. 명헌이."

명헌이. 거리감 없는 호칭에 송태섭의 젓가락질이 조금 느려졌다.

"선배는 아닙니다."

"..."

"라이벌에 가깝죠."

얼굴이 한순간에 뜨거워진다. 이유를 모르고 달아오르는 몸에 태섭이 물을 찾았다. 오빠, 물 줘? 비어있는 물컵을 보고 아라가 물었다. 이명헌의 입에서 직접 '라이벌'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윈터컵이 생각났다.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저..."

"아, 밥 더 줄까?"

명헌이 기다렸다는 듯 밥그릇을 내밀었다. 제가 밥을 좀 많이 먹어서. 느릿한 그의 말을 되새기면서 송태섭은 자신의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밥을 더 먹어서 몸을 키우는 게...

"이렇게 대단한 선수가 태섭이 라이벌이라고 하니까 신기하네."

"엄마가 포스터 씨를 어떻게 알아?"

아라가 놀라 물었다. 태섭의 인터하이를 보러 간 건 아라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기에 윤희는 찔린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딱 봐도 농구를 잘 할 거 같으니까... 농구를 잘 하는 얼굴이라는 게 따로 있나? 아라와 엄마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태섭은 명헌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반찬 한 번 먹고 밥 두 숟갈을 먹는다. 목 안 막히나 싶어 국그릇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니 그 손가락 한 번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국은 마지막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밥 먹는 것도 순서를 정해두고 먹나.

"그... 저기. 내가 농구는 잘 모르거든. 명헌이가 보기엔 어때?"

"..."

"태섭이가 하는 농구가 어떤지..."

태섭이 모래라도 씹는 것처럼 느리게 밥알을 굴렸다. 명헌은 예의 그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밥그릇을 식탁에 내려두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평가가 나올까.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이명헌을 의식하고 있을까.

"송태섭은, 제가 정말 싫어하는 타입입니다."

"..."

"빠르고, 센스가 좋고, 가능성이 많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많아서요."

같은 팀이었다면 아꼈을 겁니다.

같은 팀이었다면... 송태섭은 잠시 오키나와 동굴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 불 나갔다."

식탁 위 조명이 몇 번 깜빡이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아침 식사 후 명헌이 이를 닦기 위해 욕실을 쓰는 동안, 태섭은 식탁 위에 달린 전구를 갈았다. 태섭이 밟고 선 의자를 잡아주던 아라가 포스터 씨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거 같다며 말을 걸었다. 왜 좋은 사람 같은데? 태섭이 묻자 솔직히 나도 엄마도 농구 잘 모르잖아. 그냥 아 농구 잘하죠! 하고 대답할 수도 있는데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해 줬잖아. 오빠 농구를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거잖아? 대답한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 간 전구에 빛이 들어왔다.

그런가?

04. F4, 버드 오프닝


(커미션, m님)

백, f4로 이동하는 게 확실합니까?

이명헌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줄 것처럼 물었다. 실수라면 리셋을 해. 물끄러미 체스판을 내려다보던 송태섭은 앉아있던 의자 손잡이를 손톱으로 탁탁 내리쳤다. 송태섭이 어떤 타입의 플레이어인지는 아직 겨뤄보지 않아 백퍼센트 파악할 수 없다. 보통 체스의 오프닝에서라면 선택하지 않는 수를 쓰는 게 치기인지, 패기인지. 이명헌은 이런 플레이어 타입은 좋아하지 않았다. 

리셋 안 합니다. 게임 계속하시죠. 

흑은 동요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명헌이 쥔 검은 말이 d5로 움직인다. 

리버스트 더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체스판에 흑이 웃었다. 그럼 지금부터 송태섭에 대해 알아보면 될 일이다. 

***


아이들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친다. 난 세상에서 제일 빠르니까 절대 못 잡지! 꺄르르 웃는 아이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보며 이명헌은 어제 새벽 자신이 꽤 많이 취해있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송태섭과 같은 길을 걸어 왔는데 왜 낮과 새벽에 본 길이 이렇게도 다르게 느껴지는지.

낙엽을 밟으며 앞서 걷는 송태섭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제멋대로였다. 꼭 저같이도 걷네. 이명헌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송태섭이 뒤를 돌았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나온 머리가 눈두덩이를 아슬아슬하게 덮는다. 지금까지 이명헌이 느끼고 있던 송태섭의 인상은 그 날카로운 갈매기 눈썹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빤히 바라보니 왼손을 들어 제 앞머리를 매만진다.

아, 곱슬이 심해서요.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덧붙인다.

곱슬이라서 머리 손질하는 데에 시간이 진짜 많이 걸려요. 얼마 전에 좋은 왁스를 찾았는데 추천해 줄까요.

명헌은 대답 대신 제 머리를 가리켰다. 송태섭은 금방 입을 다물고 제 목덜미만 매만졌다. 난처해하는 얼굴에 '괜히 말했다'라고 글씨가 쓰여 있는 것 같다.

이명헌은 산왕 2학년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미국에 간 정우성도, 빈 주전 자리에 들어온 배진수도. 그 외 여러 2학년 녀석들을 보더라도 송태섭처럼 부끄럼을 타는 녀석은 없었다. 그러니 착각한 것이다. 송태섭이 이명헌을 좋아한다고.


"뭐가 그렇게 민망한지 모르겠지만..."

"..."

"그 머리도 잘 어울려 뿅"


사실 송태섭의 머리가 이렇든, 저렇든 이명헌과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꼭 둘 중의 하나 어울리는 머리를 고르라면 송태섭에게는 이상한 브로콜리 머리가 더 잘 어울렸다. 그 갈매기 눈썹이야말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으니.

그러나 머리 때문에 부끄럼을 타는 거라면, 그리고 그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자꾸 또 이명헌을 신경 쓰이게 한다면 관계가 있었다. 그게 싫어서 빈말로 칭찬을 했더니 송태섭은 금방 단순하게 풀어져서는 다음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래서, 어제는 왜 나왔어요?"

"라이브 공연 보려고용."

"라이브 공연?"


노래 좋아하는구나. 의외라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태섭에게 명헌이 덧붙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 으레 어떤 가수나 장르를 좋아하는지 묻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명헌이 말하는 밴드를 태섭이 알 가능성은 아마 아주 낮을 것이다. 새벽에 잠시 머물렀던 태섭의 방에는 CD 몇 장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오아시스, 마이클 잭슨, 그린데이, 프린스... 모두 좋은 노래였지만, 명헌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난 아마추어 밴드가 좋아. 태섭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해서 듣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물었다. 아마추어 밴드면 뭐가 달라요?

명헌이 대답했다.

"쉽게 말해 자체 제작 CD를 팔았을 때 오십 장 팔리면 많이 팔리는 거고 백 장 팔리면 대박 난 밴드 뿅"

오십 장, 백 장... 태섭은 잠시 북산의 자랑, 북산의 명물 북산고 밴드부 'DOG'를 떠올렸다. 축제 기간이면 공CD에 노래를 넣고, 네임펜으로 커버한 곡 이름을 적어 판매를 하곤 했는데, 대부분이 강매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못해도 백 장은 넘게 팔았던 거 같다.

아마추어 밴드 라이브 공연을 보는 이명헌이라...


"역시 이상한 거 같아요."

"뿅?"

"이상하다구요."


푸하하. 송태섭이 손을 들어 입을 막긴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는 못했다. 이명헌은 그가 정신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는 몰라도 송태섭은 헐떡거리며 웃고, 다시 진정했다가 또 웃었다.


"뿅뿅 거리는 것도 이상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밴드 노래만 찾아 듣는 것도 이상하고, 술에 잘 취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

"그리고 어제도 그래. 이상하잖아. 사람을 착각했다고 대뜸 그렇게... 심지어 코피도 나는데."


보통은 더럽다고 생각할걸요. 송태섭은 이제 피가 흐르지 않는 코 밑을 쓱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걷다 보니 풍경은 금방 바뀌었다. 낮은 맨션들을 지나, 작은 농구 코트를 지나, 바다를 끼고 있는 직선도로를 지나면 낯선 간판들이 한가득 달린 거리다.


"인터하이 때는 이명헌도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거든요."

"북산이 이겼는데도 뿅"

"맞아요. 내가 이겼는데도, 그쪽이 사람 같다는 생각 못했어요."

"..."

"지금은 사람 맞네요. 근데 좀 이상한 사람."


방에서 이미 봤으니까 말하는 거지만, 그냥 포스터 속에만 존재하는 거 같고, 별로 실감이 안 났어요. 산왕과 싸우는 거 자체가 저에겐 꿈 같은 일이었거든요.

앞을 바라보는 태섭의 눈이 반짝인다. 그 얼굴에서 명헌은 열 살짜리 사촌 동생을 겹쳐 보았다. 꼭 처음 농구를 배운 어린애 같다.

꿈 같은 일.

그 표현이 명헌은 좀 실망스러웠다. 스포츠는 결국 강자만이 남는다. 이기는 것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러러보는 마음으로는 이길 수 없다. 북산이 산왕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기세'가 전부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더욱.

전국대회에서는 다양한 팀을 만나게 된다. 경기마다 눈에 띄는 녀석들도 한 명씩은 만나게 된다. 그런 명헌이 보기에도 북산은 이상한 조합이었다. 보통 자유분방하고 질서가 없거나, 개성이 강한 녀석들이 모인 팀의 경우에는 그래도 팀워크가 잘 맞는 경우가 많다. 명헌은 종종 그런 녀석들과의 경기는 음악으로 따지자면 재즈 같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하는 즉흥 연주 같아도 다 각자의 규칙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재즈여도 씨 마이너면 씨 마이너 코드를 잡아야 하는 것처럼.

경기가 끝나고 몇 주인가 지나서 3학년들끼리 인터하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모두들 공감했었다. 북산은 정말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당장 3일 전에 만나서 결성된 팀 같았다. 마음도 손도 안 맞고, 경기 중에 윽박지르는 건 기본에 더블드리블 룰도 모르는 초짜가 있다. 대부분 학교 레벨에 맞게 실력도 고만고만하기 마련인데, A, B, D, F. 실력도, 농구 센스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런 개성 강한 녀석들 사이에서 송태섭은 따지자면 평균값이었다. 산왕의 주전 멤버들 중 누구도 송태섭을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서태웅이나 강백호, 그도 아니면 정대만. 키플레이어라면 이 셋 중 한 명이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셋 모두 첫 인터하이 출전이라 쌓인 데이터가 없어 분석이 어려웠다.

송태섭, 북산의 2학년.

꽤 괜찮은 실력의 포인트 가드, 그러나 체구가 작고 득점률이 낮아 공격력은 높지 않다. 흐름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할 것. 그리고 명헌에게 주어진 송태섭의 공략법이 하나 더 있었다.

도진우 감독이 이명헌을 콕 집어 말했다.

"침착하지 못한 타입이니 한번 무너지면 호흡을 되찾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명헌아."

명헌도 도감독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송태섭은 이명헌의 집요한 공격에도 호흡을 되찾았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인터하이 뿅"


마지막 순간, 이명헌이 팀에게 수신호를 보내기 위해 주먹을 들어 올린 순간, 꼭 송태섭의 호흡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관중들의 환호 소리도 도감독의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먹먹해진 귀의 감각을 닫으니, 송태섭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보였다. 그 턱 끝에 매달린 땀방울만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호흡을 빼앗아야 하는 상대에게 반대로 호흡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나간 경기에 연연하는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꼭 나를 잘 안다는 듯 말하네 뿅"

"...그건 아니지만요."

"맞아. 지나간 경기엔 관심 없어용."

"..."

"근데 진 경기는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잖아."


고작 한 번 진 건데도요? 송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그쪽보다는 많이 져봤으니까요. 경기에서 지면 엄청 기분 나쁘고 자책하게 되고,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왜 못 했지. 하는 생각은 들어도 몇 개월씩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어차피 또 다음 경기가 있으니까. 그 생각 할 시간에 연습 더 하면 되고요. 그쵸?

꼭 선배라도 된 것처럼 어드바이스 하는 게 우스웠다. 저걸 혹시 위로라고 하는 건가 지금. 명헌이 입술을 움찔거리다 손등으로 꾹 입술을 눌렀다. 송태섭. 하고 부르면 또 약간 긴장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본다.


"고작 한 번 진 거니까 신경 쓰이는 게 당연 뿅"

"...허."


재수 없네요 은근히. 이명헌은 송태섭이 눈을 흩기는 걸 못 본 체 하며 걸었다.


"아까 엄마한테 했던 말 말인데요."

"무슨 말."

"그, 내가 그쪽 학교에 갔으면..."


송태섭은 슬쩍 이명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에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요. 명헌이 뭐라고 물어보려는데 누군가 명헌을 큰 소리로 불렀다. 이명헌! 명헌아! 아, 둘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산왕 농구부가 머무른다는 숙소 로비 앞에 도감독과 매니저가 나와 있었다. 이미 아침에 전화도 했건만 어지간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역이니 그럴 수밖에.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숙소 앞이었다. 빨간불을 한번 올려다본 태섭이 명헌의 가방을 한번 툭. 쳤다.


"건너가는 것만 보고 갈게요."

"..."

"만나서 재밌었어요."

"나도."

"새벽 일만 빼고요."


웃음기 서린 태섭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초록 불로 바뀐다. 사람들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명헌도 그들을 뒤따라 걸었다. 송태섭은 약간 삐딱하게 기울어진 자세로 명헌을 배웅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도감독이 명헌의 어깨를 붙잡았다. 북산 송태섭의 집에서 잤다고? 어쩌다? 명헌은 대답 대신 자신이 걸어온 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처럼 송태섭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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