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유월 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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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랜만이야. 웬일로 전철을 탔어? 오후 세네 시, 한산한 전철 아무 데나 기대서 외출. 어딘가를 바쁘게 가고 있네.

이 계단은 낯이 익어. 작년에 같이 걸었던 계단이었나. 바닥이 끓다시피 했던 정도의 눈 시린 아지랑이가 일렁이던 유월이었겠지. 너는 누군갈 찾으러 여길 왔었어. 또 거긴 내가 있었어. 반신반의한 믿음이 확신이 되고, 몇 발짝 내디뎠을 때에 허무에 내려앉던 너의 뒷모습을 기억해. 너는 천천히 녹아내렸지. 실망이라거나 슬픔은 없었어. 알고 있었으니까. 너는 돌아설 거고, 나는 여기 서 있을 거야.

마침 네가 뒤를 돌았을 때,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어. 곰보자국처럼 진득하게 달라붙는 빗방울을 서둘러 헤치면서 너를 바라보는데, 그랬는데.


너는 그 비를 부러 끌어들이는 것 같더라. 네 발이 닿는 땅은 열기가 식었고 너는 네 머리, 어깨, 팔뚝…에 비를 보란 듯이 맞고 있었어. 비에 맞아서 너는 녹아내렸던 걸까? 네 손끝의 초콜릿 조각처럼 극명한 비의 온도에 천천히, 너는.

비에 축 젖은 지하도 계단을 도로 내려가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했어?



 
갑작스러운 비에 사람들이 너의 옆을 바쁘게 지나가. 발자국 소리와 빗소리가 시끄럽게, 그저 걷는 너의 옆을 스쳐지나갈 때. 켜진 불빛에 너의 뺨도 더 창백해졌을 거고, 더군다나 그 어떤 서두름도 불안도 없는 너의 알 수 없는 얼굴, 내딛는 걸음걸음들. 거리를 걸으며 너는 점점 녹아내려. 이러다 도중에 없어지지 않을까 싶게.

어디로, 어디로 걷는 걸까. 어딘가로 가는 거야? 집으로? 너는 가서 현관문을 꼭 닫고 한숨이나 쉴까? 물이라도 좀 데워서 마실 거야?

몰라, 너는 그 느릿한 발걸음으로 대답했어. 너는 어딜 갈 수 있을까. 어딜 향해. 딱히 목적지는 없는 것처럼 보여. 그냥 걷는 거야. 어딘가로 가기 위해.

너는 무엇 때문에 지금 이렇게 풀이 죽어있는 거야? 누굴 찾으러, 뭘 보러 여기 왔던 거였어? 말해줘. 네 옷, 물을 흠뻑 먹어서 점점 무거워져. 널 부스러뜨리고 녹이고 있잖아.
 




…그래, 그랬구나.

예전엔 항상 둘이 붙어있었나? 그 앨 보러 여기까지, 참 멀리 왔구나. 걷고, 지하철을 수 번 갈아타면서, 여기까지. 그 앤 없었지만.
 
이건 비밀인데, 그 애도 널 보러왔어. 너처럼 여기까지 와서, 그 애는 비에 젖어서, 계단을 걸어 올라왔어. 유월 아무개 날에 만나자고 약속했던 거지? 그 앤 꽃을 들고 왔어. 아주 작은 걸로. 그리고 걔도……비에 녹아 사라졌어.

너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넌 내 얘길 듣자마자 거기 주저앉은 모양이네. 작은 구름들이 몰려와 너를 감싸. 작은 비바람이 너에게 들이쳐. 이제 일어나, 집에 가야지.

집에 가서 너는 녹아 흔적도 없어져버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집에 가서 아무 예쁜 유리병에 작은 꽃을 꽂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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