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tandard cherisher 12
잉게르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맥스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피하고 흘끗 눈치를 봤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잉게르 너...
-....왜... 왜요...
-...아냐..
맥스는 제법 음흉해 보이는 표정까지 지을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서야 잉게르가 그리도 바라던 평등한 관계가 된 것 같았지만 정작 이 뒤바뀐 상황이 부끄럽기 이를 데가 없는 잉게르였다. 그렇게나 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려 제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했다고 자부했던 지난 며칠이 무색하게도, 꿈이라 생각했던 어젯밤 이미 사랑한다고 마음을 터놨다. 거기에 맥스의 자유로운 거절이 있었나? 맥스는 모든 것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까? 그이는 정말 나를 사랑해서 날 받아준 걸까?
-...맥스 저... ...제가 했던 말...
-응! 나도 너랑 같어. 네가 맨날 나한테 기분 좋은 감정 보여주잖아.. 나도 그거 맨날 느꼈는데.. 기억이 없어서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는데... 네가 알려줬어! 나도 사랑해!
-... ...아.. ...
-에휴 이 바보...
-....아..안돼요...
속없이 잉게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안아주려던 맥스는 그 커다란 손에 저지당했다.
-....나...내가..당신한테... 사랑한다고 한 거나... 뭐... 그 후에 뭘... 뭘 하든... 어...어쨌든 간에.. 그러면 안 되는.. 거.. 란.. 말이에요...
-응?
-...다...당신..... 기억...전부..돌아오면.. 그때...정식으로... 물어보려고...해..했단 말이에요...
-...
맥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홧김에 저지른 고백을 후회하는 젊은 혈기가 귀엽다고 해야 할까, 진지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성실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래도 조금 돌아온 맥스의 나이 많은 자아는 어린 잉게르의 진심을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하려 해도 웃음이 새나오는 듯 했다.
-비...비웃지 말라고요..! 제가 얼마나 고민한 건데...!
-아...아니...하흡큭...!
그거였나. 그래서 그렇게도 내가 약하다느니, 도망을 못 칠 거라느니, 해코지니 어쩌니 한 거였나. 그렇구나. 날 정말 아끼긴 아꼈구나.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결과적으로 나한테 나쁜 건 없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는 안 보고 있구나. 흥.
-됐어 잉게르... 충분히 알겠으니까... 진정해.
-... ...제가 멍청해 보이죠...
-조금.. 나랑 비슷하게 느껴지긴 했어~
-...칫.
-그래도... 있잖아, 나.. 기억이 돌아와도.. 계속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거니까.. 그때까지 계속..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잉게르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결혼 약속을 받아낸 기분이었다. 사랑이고 존중이고 나발이고 이 사람의 기억을 얼른 되돌려놓고 싶었다. 세상에 권태 적이고 귀찮아하는 그 낡고 지친 코볼트를...
잉게르는 순간 소름돋는 두려운 생각이 스쳤다.
‘기억이 돌아온 맥스가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내가 그 맥스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어떡하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 너가 사온 새 옷.. 입어보고 싶은데...
-...네... ...네, 이... 입혀줄게요... 뭐.. 뭘로 입을래요...?
-저기.. 갈색 긴 팔...
-네.. 잠시만 이불 걷어봐요...
맥스는 잉게르가 시장에 가기 전 이불 위에 잔뜩 늘어놓은 재미있는 잡동사니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친구의 커다란 튜닉을 가운처럼 늘어뜨린 채 질질 기어갔다.
-..아래 보지 마..
-보래도 안 봐요
잉게르는 뒤돌아 앉아있는 맥스에게서 제 옷을 능숙하게 벗겨 내고 훨씬 작은(맥스에게 딱 맞는 크기인) 옷을 입혀줬다. 몸에 적당한 여유를 주며 딱 맞는 두툼한 옷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새 옷 고마워.
-별 거 아니에요...
-..그.. 네가 말했던.. 공용어 공부... ...조금..이라도.. 해봐도 될까..?
-그럴까..요...? 밥 먹기 전까지 잠깐...
-응.. 나 배우고 싶어..
-좋아요... 제 이름 쓰는 법 부터 알려줄 테니까, 제가 식사 다 만들어 올 때까지 연습하고 있어야 해요~?
-...응!
묘한 시간이었다. 기억도 자아도 흐릿한 상태에서 사랑한다고 굳게 믿는 상대의 이름을 자신의 세계에 하나하나 정성 들여 새겼다. 고운 글씨체로 써둔 ‘잉게르’ 라는 글자 옆, 다른걸 쓰고 싶을 때 써보라고 또다시 고운 글씨로 써놓고 간 ‘맥스’ 라는 자신의 이름. 잉게르의 이름 옆이 가장 잘 어울렸다.
비뚤고 서툴게 쓴 잉게르의 이름 옆에 하나하나 제 이름을 써본다. 두 발로 서서, 양손을 사용해서 잉게르의 곁에서 같이 서로의 식사를 준비하는 상상을 한다. 그림을 따라 그리듯 어설프게 따라 쓰던 획들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 이름이 된다. 이 검은 선들이 모여 그이를 부르는 소리를 규정한 문자가 된다. 어떻게 이름도 잉게르일까.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행복해지는 거 같아.
-맥스~
-응~
-아, 안 자고 있구나. 밥 다했어요~조금만 기다려요~ 데리러 갈게요~
잉게르에게 과도한 생각이란, 숨쉬기와 같았다. 쉬지 않고 불안하고 의심하며, 이 공포를 없애기 위해 더욱 끊임없이 자신의 공포 근원을 탐구한다. 마법사의 영혼이란 늘 그렇다.
지금 기적적으로 찾아온 맥스의 다정함은 언제 변화라는 파도에 휩쓸려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소중한 모래성을 지키고, 가둬두고, 단단하게 만들 온갖 궁리를 쉬지 않는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줄 다정함이 찾아온 줄도 모르고.
-잉게르, 매일 밥 해줘서 고마워.
-네~ 얼른 먹어요.
-나도 너한테 밥 해주고 싶다.
-...저도.. 빨리 당신이 해 주는 밥.. 얻어먹고 싶네요...
-..얻어먹는게 아니야..! 그냥 해 줄 거야.
-그게 그거죠. 뭐가 달라요?
-얻어먹는 건.. 예정 없이 운 좋게 얻는 거지만.. 나는 너한테 그냥 꼭 해 줄거야.
-에이, 그게 뭐야..
-...
이쯤 되면 그냥 알아서 이해해 달라고 얼굴로 말하는 맥스였지만, 잉게르는 제 불안을 줄여주려 노력하는 듯한 다정한 말을 그이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 빨리.. 다리라도 붙여서.. 혼자..걸을 수 있으면.. 방 안에만 있지 않고.. 부엌이라도 가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면... 음...어...내가.. 너한테... 뭐라도 더... 해 줄 수 있을거 아냐... ...너가.. 아무리.. 해주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나도...뭔가.. 해 주고 싶은.. 그런.. ... ..욕심..응... 그런 욕심...부리고..싶단말이야...
-... 그런 욕심...
-응...
-..기억 다 돌아오기 전까진 말하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다가, 다 돌아오면 그때 또 해줘야 해요.
-그때까지 얌전히 있으란 거야..?
-지금은.. 제가 당신을 지키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
-... ...왜..왜요...
-히..바보..
-... 놀리지 좀 마요... 누구보다 심란한 건 저니까...
-그래.. 걱정 마 잉게르. 사랑해~
-아니!.. ..그.. .. ..소..솔직히.. 그렇게 말 해 주는거 고마워요.. ...하, 하지만.. 안돼요. 안돼요...
-알았어..
-그러니까.. 응.. 말로..하지 말고.. 그냥.. 기억이 다 돌아와도... 그때 가서... 마음 변하지 말고... 배신감 느끼지 말고... 저 사랑해서 하고싶어하는 일들.. 다 해줘야해요. 알았죠?
-...헤....
‘너 나 좋아하면서 아닌척하는구나~’ 확신을 하고 당당한 생각을 하면 저런 멍청한 얼굴이 되는구나. 잉게르는 맥스의 얼굴을 꼬집어버리고 싶었지만, 손가락 대신 버터 바른 빵을 그 입에 콱 박아버렸다.
-... 당신을 보호하겠다는 게 그렇게 비웃긴가요..
-나 그렇게 안 약해...
-어떻게 확신해요..
-...조금 돌아온 기억에서 봤어...
-...
-...나 강해.. ... ... 몸 말하는 거 아니야.
-... 아직... 기억도 다 안 돌아왔으면서 뭘 강하대..
-강하다니까..
-...그래요 그래...
-..진짜라니까..
-네에~ 스튜나 다 먹어요.. 아직 한 냄비나 남았는데..
-흥.. 내 기억 다 돌아오기만 해봐..
-킥킥.. 그래요~ 아 잘 먹네~
잉게르는 맥스의 다리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낫고 있다는걸 알지 못했다. 그저 가벼운 농담을 나누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뭐지? 이사람.. 마법이 너무 잘 드네..?’
잉게르는 문득 놀랐다. 따뜻한 옷도 입고, 글자도 점점 예뻐지는 게 눈에 띄는 어느 밝은 아침. 앞으로 2~3일은 더 두고 봐야 다리를 붙여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맥스, 혹시 살면서 마법 같은 거.. 많이 받고 살았어요?
-응?
-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한 한달 정도.. 걸릴 것 같았는데..
맥스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잉게르가 저의 오른팔을 들고 접합부를 가리키며 웅얼거리듯 제 할 말만 하자 겨우 이해했다.
-...내 팔..? 잘 낫고 있어?
-네..! 예상보다 더 괜찮아서... ...어라..? 다리.. 오늘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진짜?!
-네!.. ..잠시만요.. 하던 거 마무리하고 있어봐요.. 지하 가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응..!
잉게르는 침대 위 작은 탁자에서 맥스의 글자공부를 봐 주던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일어나 지하로 내려갔다.
맥스는 잉게르가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책상 위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공용어에 서툽니다. 느리게 말 해 주세요.’, ‘코볼트인은 없나요.’, ‘고구마 파이 열 개 주세요.’ 등등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 보고 소리를 내 읽어봤다.
퍼즐 판이 모두 쏟아져 텅 빈 배경 판때기 같았던 저의 세계에 퍼즐 조각이 몇 개 돌아왔다. 그리고 글자를 배우면서 퍼즐판 자체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내 세계가 바뀌고 있어. 예전의 지치고 피곤한 맥스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야.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일면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어.
‘잉게르 고마워’
지금 드는 기분도 무리 없이 종이에 문자로 써서 남길 수 있다. 내 기분이랑 감정을 이렇게 눈에 보이도록 표현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니. 사람들이 책을 쓰는 이유가 있었구나. 다들 이런 기분으로 책을 쓰는 거였구나.
-잉게르, 나 책 읽고 싶어..
-책이요? 동화책 말고 소설..같은거요?
-상관없어..
-으음... 적당한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천천히 찾아줘.. 어차피 이제 나도 걸을 수 있게 되잖아.
-아휴.. 곧장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왜~.. 나 마법이 잘 들어서.. 생각보다 일찍 나았다며.. 그러니까 일찍 걸을 수 있을 거 아냐...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거든요?!
잉게르는 맥스를 안고 지하실로 내려가던 중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무시하는 저런 둔탁한 발언이라니.. 무식하기가 맥스 쯤 되니 용서해 주는 줄 알아야지, 나 참.
-자,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요.. 당신 그렇게 쪼끄만해서 내가 한참 쪼그려 앉아야 하잖아..
-귀엽다고 껴안은 건 자기면서..
-그.. 그런 적 없어요..! 조용해! 닥쳐!
-응~ 나도 사랑해~
-그런 말 하지 말라고요!
-흥. 내려줘.
-....
잉게르는 이 저항 없는 사지절단-이젠 정확히는 삼지 절단이지만- 코볼트를 힘껏 혼내줄까 생각했지만, 이게 바로 자신이 가장 바라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얌전히 사뿐하게 의자에 그이를 앉혔다. 마법으로 완벽하게 보존해둔 갈색의 양 다리를 가져와 맥스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가장 귀한 물건을 공양하듯 조심스레 들어 올린다.
잉게르의 경고는 이전과 거의 같았다.
말을 하지 말 것. 움직이지 말 것. 이전보다 두 배는 집중한 듯 있는 힘껏 찡그린 그 얼굴은 맥스가 말을 걸려고 해도 걸기 어려울 만큼 무서웠다. 한참을 무서운 얼굴로 이것저것 읊조린 잉게르는 이번엔 마법 수정구를 가져와 공중에 띄우곤 줄을 매달아 맥스의 다리 연결부에 묶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마법 지팡이로 이리저리 건드리고 웅얼거리고 지팡이를 흔들기를 몇 시간.. 맥스는 거의 졸고 있었을 쯤 잉게르가 한숨을 내쉬며 마법이 끝났다고 알려줬다.
-휴우... 두 개를 동시에 붙이려니 장난 아니네요...
-... !! 수고 많았어 잉게르...
-흠~... 이건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걸요? 진짜 진짜 멋진 마법사라는 말 정도는 들어야 한다고요~
-응..! 잉게르, 전부터 느낀 건데 진짜진짜.. 멋진 마법사야! ...아니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마법사!
분명 이런 말을 듣는 걸 좋아했지? 그런 얼굴로 당당하게 늘어놓는 칭찬이었다. 난 거짓말 안 해.
-내일도 계속 그런 말 해주는거에요?
-내일? 왜? 지금도 해 줄 수 있는데.
-떨어진 몸에 있는 기억들은 하룻밤 정도 잠을 자야 흡수되고 하나가 되거든요..
-아.. ...아.... 그런 거 같아.. ..기억이 별로.. 새로 생각나는 게 없어...
-몸을 기억 저장소로 인식하는 마법들은 보통.. 꿈을 매개로 쓰거든요. 꿈을 꾸면서, 무의식이 몸을 지배할 때.. 잘린 기억들이 꿈을 꾸는 동안 의식으로 돌아와요. 그러니까... 오늘 밤 당신이 꾸는 꿈들은.. 꿈같은 일이 아니라, 실제로 있던 일 인 거죠!
-...어.. ...어...!
맥스는 얼추 이해했다.
잉게르는 맥스가 반 정도만 이해했을 것 이라 생각했다.
-뭐... 아직 대낮이라 자는 건 못할 같고... 글자 쓰는 거나 계속할래요?
-응..!
이제는 제법 팔다리가 길쭉해져서 인형이 아니라 사람처럼 보이는 맥스를 안아 올렸다. 이제야 사람 무게로 느껴진다.
-요즘 잘 먹고 사나 봐요~?
-헤헤.. 매일 먹여주고 재워주는 친구가 있어서~..
-어휴~ 좋은 친구 뒀네~
-맞아. 좋은 친구야~
실없는 농담 따먹기가 제법 맘에 든 두 사람은 2층 잉게르의 방에 도착해서도 멈추지 않았다.
-맞다~ 맥스, 당신 친구가 그러는데~ 오늘 저녁엔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봐 달라네요?
-나 아무거나 잘 먹는 거 알면서.. 음.. 아니 잠깐만.. ...야채..
-헤... 아무거나 라고 대답하면 친구가 볼 꼬집었을 거래요~
-응..그럴거 같았어..
잉게르는 맥스를 침대에 앉혀두고 글공부를 마저 시작했다. 대충 치워둔 작은 테이블을 가져와 이불 위로 얹고 열심히 공부한 그 흔적을 가만히 바라본다. 자 얼마나 잘 쓰게 됐나 볼까..
-...고구마 파이 열 개요..?
-너가 어제 사준 그거.. 맛있더라..
-아, 그런 것도 샀구나...
-기억 못 해? 어떡해~ 너가 기억 못 하면...
-아이, 그런 사소한 건 잊어도 아무 문제 없어요~
-사소한 거 아닌데..
잉게르는 혼자 토라진 맥스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머지 글자들을 죽 훑어봤다.
‘잉게르 고마워’
제 시선을 끄는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혼자 뚱한 얼굴로 먼 곳을 보고 있는 맥스와 그 문장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가슴 깊이 파고든 그 문장이 따뜻하게 뱃속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저도 고마워요.
-... ... ...뭐가..
-...잘 버텨준 거요.
-..뭐야 그게...
-헤헤... 자, 고구마파이 백 개 달라고 써 봐요~!
-백 개..?
-숫자 쓰는법도 익혀야죠~
-배, 백 개... 백 개...씩..이나.. 쓸 일이.. 있나..?
-있을지 없을지는 배워봐야 알죠~ 원래 배우는 만큼 보이는 거에요!
-아..알았어...
-자, 숫자는 이렇게 쓰는 거에요 잘 봐요~...
맥스와 잉게르가 사는 세계의 공용어 숫자는 공교롭게도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의 숫자체계인 인도-아라비아 숫자와 같았다. 10진법에 1, 2, 3, 4, 5, 6, 7, 8, 9, 0까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맥스는 숫자들을 하나하나 따라 써 가며 읽는 법을 읽히고, 여러 번 반복해서 써 보라는 잉게르의 교육방식을 따라... 종이 가득히.. 또박..또박한... 글자로.. 숫자들을... 써 내려가고... ...그리고....
-..맥스 자요?
-아, 아니..!
-...졸았고만~
잉게르는 책상 위의 잉크를 멀찍이 치워두고 맥스를 구경했다. 잠시 깨서 대답은 했지만 금방 눈이 감겼다. ‘곧 잠들겠군.’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맥스는 작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토록 왕성한 활동량의 투사도, 머리 쓰는 일은 똑같이 피곤한 걸까?
책상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엎드린 맥스가 안쓰러워 아주 느리게 몸을 뒤로 젖혀 편히 눕게 하였다. 어쩐지 눈을 한번 뜬 것 같았지만, 그냥 잠들기를 택한 것 같았다.
이제 잠들면 언제 일어나나.
-잘... 자....
-..잘자요 맥스.
-...자고.. ..일어나서... ..내가...변하면...어떡하지..
-괜찮을거에요.
-... 나.. ...계속... ...친구.. ..사랑해...
-네.
-...잘..게...
-...
이제 맥스가 일어나서 나에게 어떻게 말을 거는지에 따라 저녁밥이나 정할까? 일단은 야채샐러드를 준비하고...
화내면 고기요리..
전처럼 똑같이 웃어주면 생선요리..
미안해 하거나 어색해 하면.. 샌드위치.
...울지도 몰라. 다리에 꽤 많은 기억이 저장됐으니.. 엄마에 관한거나.. 자기가 저지른 잔인한 짓을 알게 되면... 맥스의 일부는 울지도 몰라. ...그렇다면... 고구마 케이크라도 사 와서 위로해 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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