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tandard cherish

non-standard cherisher 13

케이크 사 와야겠다.

아주 빨리.

침대에 누워 편히 잠든 맥스가 별안간 몸을 움찔거리더니 꽤 급박하게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코볼트도 아니고 저렇게 낑낑거리면서 짖는다는 건... 뭐가 어쨌든 좋지는 않다.

언제 깰지 모르니 옆마을 큰 시장이 아니라 산 아래 작은 마을에 가 봐야겠다. 거기에도 고구마 케이크 정도는 있을 것 같은데... 아마 파는 걸 본 거 같은데... 얼른 준비해서 다녀와야겠다.


그래 진정하자. 생크림 케이크라고 해도 잘 먹을거야 분명..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했으니까.. 일단은 맥스가 일어날 때 옆에 있어야 하니까. 얼른 돌아가자. 빨리빨리.


맥스는 눈을 뜨고 잉게르를 바라봤다. 익숙한 침대였고, 익숙한 사람이고, 익숙한 자신이었다.

아니다 조금 다르다. 지치고 피곤하다. 아무것도 안 했지만 피곤하다. 자면서도 꿈속에서 쉬지 않고 일 한 것 같다. 정신이 뻐근하다. 시끄럽고 냄새나고 고통스러운 일터에서 나와 조용하고 한적한 집으로 돌아온 기분.

다리에 저장된 기억들이 맥스의 의식과 하나가 되어서, 이제 사 분의 삼 정도 원래의 맥스가 돌아왔다.

-..... 시장... 다녀온 거야..? 급하게.. 어디 다녀온 꼴이네..

-... 아.. 안 좋은 꿈.. 꾸는 거 같아서... 맛있는 거 먹이면서 위로해 주려고요..

-안 좋은 꿈......

-.. 괜찮아요?

-...

맥스는 말없이 창 밖을 바라봤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오니, 내가 모든 삶들이 한순간의 꿈결로 느껴진다. 그게 정말 나한테 있었던 일들이 맞는 걸까..?

맥스는 잉게르를 한번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와보려 했다.

-어.. 어어, 맥스 잠시만..

-아, 다리가... 무거..운데...

-팔 한 짝만 붙일 때랑 많이 다를 거예요... 일단 다리는 훨씬 무겁기도 하고.. 두 개를 동시에 붙였으니까...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더 걸릴 거 에요...

-... 겨우.. 좀 걸을 수 있나 싶었는데...

-일어나볼래요? 잡아줄게요. 안 되겠다 싶으면 기대고... 그렇지 그렇게 살살...

맥스는 천근같은 다리를 겨우 침대 밖으로 내던지듯 앉는 데 성공했다. 잉게르가 잡아 주는 것에 몸을 맡기고 허벅지에 힘을 주고 일어서 본다.

-... 으... 아아...

신음소리 같은 탄식이 묘하게 서로의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는 있지만 무릎과 허벅지가 너무 아려왔다. 정강이와 발바닥은 제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리가 너무 저려서 감각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 잉게르에게 거의 안기듯이 기대었지만, 아직은 일어서는 것조차 어렵다. 결국 몸을 뒤로 빼서 침대로 넘어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많이 아파요?

-다리가...... 응... 아픈.. 건지... 감각이 없는 건지... 이상해...

-며칠 동안 천천히 감각이 돌아올 거예요..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한 것도 없는데.. 무리는 무슨..

-아녜요. 마력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당신 오늘내일 쉬라고 할 걸요?

-그놈의 마력 어쩌고...

-헤... 헤헤.. 맥스.. 기억이 돌아오면서 성격도 조금 원래대로 바뀌었네요..

-... 시... 싫은.. 거야..?

-조금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 싫은 건.. 아니지..?

-조금.. 귀엽나..?

-...

맥스는 얼굴이 밝아져서는 잉게르의 손을 잡으려고 다가갔지만, 잉게르가 한 발 빨리 멀어졌다.

-아 글쎄 안된다니까~

-친구끼리 손도 못 잡냐?

-당신 얼굴 보니까 손만 잡으려던게 아니더구먼

-... 그런 말을 해주면서.. 손도 못 잡게 하고..

-당신이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응?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런데 당신이 제 손을 잡으려는 건 완전히 당신 욕심만 그득한 음흉한 행동이거든요!

-아.. 아닌데...

-맞거든요?! 그렇게 귀여운 얼굴이나 해 가지곤... 속이 아주 음란하기가 짝이 없어요.

-그거 네 얘기야?

-아니 진짜...!

놀라운 말까지 서슴없이 뱉어내는 잉게르는 맥스가 제법 기분이 나쁘지 않음을 눈치챘다. 이 녀석 제법 나쁜 말도 들으면서 살아왔고, 그런 나쁜말도 많이 해 온 사람이다. 이 정도는 그냥 귀여운 추파 정도로 생각하는구나..

-... 아무튼 맥스.. 당신 좀.. 예전처럼 돌아왔으니까... 기억 없을 때의 스스로가 어땠는지 알겠죠?

-뭐... 음... 조금..?

-당신이 생각해도 진짜 연약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렇지.. 네가 왜 자꾸 지켜준다느니 어쩌니 하던 게 이제 좀 이해되네...

-물론 지금도.. 당신 기억이 온전한 건 아니지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당신 기억.... 지금 바로 나머지 팔도 붙이는 건 몸에 무리가 가서 안 될 거 같지만... 당신이 갖고 있던 가방에서 기억을 좀 추출했어요. 그걸로 좀.. 기억이 더 많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당신이 매고 있던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있었던 일들.. 기억해낼래요?

-뭘 묻고 자빠졌어. 당연하지..

-어휴 그래요...

잉게르는 단순 하디 단순한 맥스가 부러운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한 번 째려보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낡아 보이는 여행용 가방 하나와 작은 수정구슬 하나를 양손에 들고 돌아왔다.

-... 이게 당신 가방이고요...

-아, 내 거다 내 가방..

-그리고 이게.. 당신 기억이에요.

-오..... 어떻게 쓰는 거야?

-그냥.. 제가 당신한테 옮겨야 하는 거예요. 이건 딱히 비 마법사 용으로 나온 수정구가 아니라서..

-그렇구나...

그것도 그런 종류가 있는 거야? 하는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친 맥스는 잉게르에게 제 가방을 돌려받았다.

-... 아, 내 물건들 있네.. 이거 내 칼..... 이건 뭐지?

-내용물 저 안 건드렸어요. 그거 다 당신 물건이에요.

-... 이거... 진짜로 모르겠는데...

맥스는 가방에 들어있던 작은 나이프며 옷이며 몇 개씩 꺼내며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눈에 익지 않은 낯선 칼을 발견했다. 이건 정말로 처음 보는 건데...

-아마.. 아직 당신한테 안 돌아온 기억에서 쓴 물건 일 거 에요.

-... 그런.. 가..?... 진짜로 처음 보는 건데...

-맥스, 애초에.. 그 가방 챙기던 때가 기억은 나요?

-어?..... 어..?

-기억 없죠? 그 물건들 쓴 기억은 있지만 그 가방을 챙긴 기억은 없죠?

-어?...... 어... 저... 정말이네...... 이 가방.. 내 가방 맞긴 한데.... 내 물건들이 맞긴 한데.. 내가 챙긴 기억이..... 어..... 응.. 정말로.. 없어...

-기억 마법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당신이 뭘 기억하는지, 뭘 기억 못 하는지 조차 확실하지 않게 되는 거.. 당신이 그렇게 놀린... 지킨다느니 어쩐다느니 한다는 게.. 뭔지 좀 알겠어요? 이제야 제 입장이 이해가 돼요?

-조금...

-좋아요. 그럼... 이 기억들 제가 혹시 몰라서 우선 읽어봤는데.. 일단 그건 미안해요. 멋대로 읽어서.

-어쩔 수 없지.. 나 치료하려고 그런 거잖아.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한테... 또... 사과할 게 있는데요...

-뭐 그렇게 사과할게 많아?

-... 당신... 저랑.. 가장 처음...... 제일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내가 갑자기 눈 뜬 거?

-아뇨 그거 말고.. 동굴에서요.

-동굴?...... 동굴이라...

-기억 안나죠?

-.. 응..

-여기에 그때 기억이 있어요.

-오...

-... 예전에 제가.. 제 기억 조금 보여준 적 있죠?

-응.. 동굴에서.. 어쩌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서...

- 지금은 당신도 기억이 좀 돌아와서.. 현실감각이 그나마 좀 있잖아요.... 지금이라면.. 제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좀 완전히 이해할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주는 거예요. 당신한테 정말로..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맥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잉게르는 수정구를 들고 다가가 지팡이로 원을 그리며 제 기억을 조금씩 보여줬다.

잉게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오래전 두 사람이 만나기 직전, 그는 동굴 벽에 천장의 일부를 떨어뜨리는 마법을 새겨놨고, 얼떨결에 맥스와 대화했다. 잉게르는 답지 않게 흥분하며 화를 냈고 첫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바윗조각 하나만 떨구려던 것이 천장 전체를 무너지게 했고, 맥스의 다리는 바위 틈새에 깔렸다.

두 번째 실수도 이 동굴이 문제였다.

기억을 잃은 맥스와 함께 동굴로 간 후, 지우지 않은 마법식은 시전자가 돌아오자 알아서 마법을 작동시켰고, 이번에는 그이의 사지가 떨어져 나갔다. 마치 잉게르가 저만의 인형을 갖고 싶어 했던 소원을 이루려는 듯이.

잉게르는 자신이 저지른 이 실수의 기억들 또한 그이에게 전했다. 나의 적나라한 밑바닥을 보더라도 당신 앞에서 거짓 없이 떳떳하고 싶다.

-...

잉게르는 마법을 끝내고 맥스를 흘끗 쳐다봤다.

-... 좀.. 어때요..?

-...

-...

맥스는 말없이 잉게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른팔에 이어 붙인 흔적을 바라보고 잘려나간 왼팔을 한 번 만져보고. 무겁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양다리도 쿡쿡 눌러보고는 생각을 정했다는 듯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쉬고.

-야

-.. 네.

-한 대만 때려보자.

-.. 네?

-가까이 와 봐. 딱 한 대만 때리고 용서해줄 테니까.


한쪽 뺨이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시퍼렇게 부어오른 240cm짜리 덩치 큰 코볼트가 저보다 키가 30cm는 작고 깡말라 보이는 코볼트에게 조심조심 비위를 맞춰주며 케이크를 먹여주는 모습은 제법 기묘했다.


맥스는 맛있게 케이크를 먹었고, 잉게르에게 실컷 투덜대며 짜증을 부렸다. '난 고구마가 들어있는게 좋은데.' '아 잉게르때문에 잘린 다리가 너무 아프다.' '아 맞다 잉게르 나 너한테 할말이 있었는데, 어라? 기억이 사라졌네. 잉게르 너 때문인가봐!' 처음 한두 번은 속이 시원한 듯싶다가도 금방 질렸다.

-..... 다.. 다음엔 정말로 고구마 케이크 사 올게요..

-됐어..

-...

-그냥... 편하게 있어.. 괜히 심술 좀 부려본 거니까..

-... 한참이나 어린 코볼트한테 꼬장 부리다 보니까 문득 현실을 자각했나요?

-이게..

-헤헤

잉게르는 맥스보다 어리긴 했지만 세대가 다를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맥스는 지킬 가정도 있었고, 돈벌이를 하며 세상 풍파에 상당히 지쳐있었고, 말도 행동도 사고방식도 상당히 낡아있었지만 어쨌든. 둘은 열 살 넘게 차이가 나진 않는 듯했다. 서로 그렇다고 파악했다.

-있죠.. 제가.. 그런 짓을 한 건 한 거고.. 당신.. 글공부는.. 계속할 거니까요..

-그래 뭐... 이런 거 배울 기회가 있는 게 어디야..

-.. 전에 배운 적 있던거 같았는데.. 아니에요?

-어.. 맞아. 잠깐 배운적 있는데.. 뭐 귀족들이 배우는 그런 게 아니라.. 상인들이나 용병들한테 최소한으로만 가르치는 거라.. 응... 숫자만 겨우 읽어

-그런 걸 배웠단 말이죠~..

잉게르는 교육 커리큘럼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려는 듯 보였다.

-그, 그렇지만 그래도.. 진짜 대충 배운 거니까.. 너무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고..

-에이, 당신 쓰는 거 보고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겠으니까 걱정 말아요..

-...

-그나저나, 책 읽고 싶다고 했었죠?

-아?.... 아, 아아... 어. 맞아.

-글을 읽는 게 좋아요?

-... 신기하잖아.. 냄새도 아니고, 눈을 마주치는 것도 아닌데.. 누가 하는 말을 듣는 것도 아닌데 눈으로 읽기만 해도 안다는 게...

-헤헤... 당신에게서 작가의 가능성이 보이네요.

-내가 작가는 무슨.. 오늘 하루 밥 벌어먹기도 힘들어 죽겠구만..

-제가 밥 주잖아요.

-...?

-즐겁지 않아요? 책 읽는 거.. 격투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싸움이나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느낀 경험이나.. 많은 사람들이 종이에 쓴 문자를 통해서라도 들려주고 싶어 죽겠는 이야기들... 읽으면 좋잖아요. 안 그래요?

-......

-기분 좋아지는 걸 숨기지 않는 편인가 봐요~

잉게르는 슬며시 살랑거리기 시작하는 맥스의 짧둥한 꼬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맥스는 흠칫거리며 손으로 엉덩이를 가렸고, 잉게르가 책장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꺼내는 것을 뚱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직도 꼬리가 신경 쓰였다.

-자 이게.. 당신이 읽을만한.. 쉬운 책들이에요.

-네가.. 쉬운 책도 읽는다니 신기하네.. 전에도 그랬지만.. 동화책.. 같은 것도 있고 말이야..

-마법은 형태를 바꿔가며 구전되거든요. 동화, 소설, 시, 노래.. 제가 알고 싶은 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닥치는 대로 모으는 편이에요.

-오... 학자구나..

-그럼요~ 마법사는 모든 학문에서 최절정에 다른 녀석들이라고요~

‘선생들이구만..’

차마 말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점에 선 녀석이 실수로 남의 팔다리를 자르느니 동굴을 부수느니 한다고?

맥스는 이 자아도취 선생 잉게르가 딱히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면 좋았다. 그가 고향에서 봐 온 코볼트들은 다들 저처럼 무식하고 한낱 하루 끼니를 때울 걱정으로 가득한 순 까막눈들 뿐이었다.

저의 태생을 업으로 평생 여겨 남들이 이끄는 대로, 속이는 대로 속아가며 살아왔다.

그런 일자무식 시골 들개의 앞에 똑똑한 귀족 개가 나타났다. 처음 대화를 나눈 순간 알 수 있었다. 따스하고 격조 있는 영혼. 많이 배우고 많이 읽은 티가 났다. 조금 거칠게 자란 척을 했지만..

마치 알에서 방금 깨어난 새가 처음 본 것을 따르듯이. 난생처음 본 ‘똑똑한 코볼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맥스는 그렇게 잉게르에게 모든 처음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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