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old friend,
경애해 마지않는 나의 벗에게.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잘 살고 있어. 요사이는 날씨가 퍽 좋아서, 맨발로 풀숲을 거닐다 보면 햇살이 이파리에 스며드는 게 느껴질 지경이야. 구름은 잿빛을 띄는 날이 없고, 언제나 그렇듯이 바람은 상냥하지.
네게 보낼 편지를 쓰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얼마만이지? 백 년? 천 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아주 오랫동안 너는 떠돌고 나는 정착해 우리는 서로를 찾을 줄 알았으니까. 비교적 최근, 안녕을 빌며 헤어진 뒤에는 연락할 이유가 없었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할 수는 있잖아. 이렇게 펜을 들고 나니, 왜 진작 네게 편지를 쓰지 않았을지 후회가 된다.
그래,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이후로도, 우리가 함께 등을 맞댄 이후로도, 그리고 최후의 전쟁과, 이별과, 상실을 겪은 이후로도……. 우리는 참으로 오래 살았다. 평범한 인간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지. 그리고 나는 이 삶을 후회하지 않아.
네가 듣는다면 우울감에 빠져 빌빌대던 놈이 무슨 말이냐 하겠다마는, 나는 진심으로 이 삶을 후회하지 않았어. 보잘것없는 내게 미천한 재주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삶에 있어 어디에서든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나의 모든 하루는 즐거움으로 충만했지. 내가 거쳐온 이별과 상실은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지만, 그 조각이나마 붙들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 믿었어.
그리고 네가 내 착각을 깨 주었지.
결국 내 본질은 파편이 되어 흩어지고, 남은 것은 의무와 관성으로 간신히 걸어 나가는 누더기 뿐. 누군가를 부표 삼아 바라보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었으면서 무어가 당당해 그리 네게 목소리를 높였는지. 다시 돌이켜 보아도 참으로 부끄러운 날이었다. 지금 와서는 기꺼이 그것을 아집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나의 벗이여, 나는 그때 했던 말을 후회하지 않아. 비록 네 앞에 나를 보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했을지라도 내가 바라고 원했던 것만큼은 진심이었거든. 내가 네게 기대듯 너 또한 내게 기대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삶이고 친구라고, 혼자 살아가기 무섭다면 서로의 손을 잡고서라도 나아가는 그것이 우정이라고, 그런 것을 바라던 시절이었어. 그리고 불가능함을 앎에도 지금 또한 같은 것을 바란다.
물론 네가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아므로 그 바람은 마음 속에 묻어둔 지 오래야. 네 삶의 방식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야. 그저 조금 뒤늦은 깨달음이 따라왔을 뿐이지. 너와 나는 내리치는 번갯줄기와 휘감는 바람 만큼 다르기에, 어쩌면 너와 나의 우정이 얼마 전까지 유지되었던 것이 기적일지 몰라.
그러니 안심하길, 친구여. 내가 너를 얽매고 구속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터.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 순간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외려 그 반대를 생각해야겠지. 서로를 추억하고 되새기나 기꺼이 먼 이별로 향하는 그 길 말이야. 어쩌면 그만으로도 근사한 마침표일지도 몰라. 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바라게 되는 것은 내 욕심일까…….
나는 비가역성을 믿었단다. 어떤 일은, 어떤 사건은, 어떤 관계는 되돌릴 수 없다 믿었지. 한번 변화하는 그 즉시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삶을 인간으로서 끝내려 했어. 그것이 마냥 옳은 줄 알았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를 끝내지 않으려 했어. 그것이 내가 살 길인 줄 알았거든. 물론, 그것 또한 내 착각이었어.
그렇게 미련하게 군 이유를 못내 고백하자면, 네가 무척 부러웠어…….
필연적이었지. 내가 흩어지고, 무뎌지고, 옅어지는 내내 너는 너로서, 너 자신이자 모험가로서 당당하게 이 세상을 누볐으니까. 너의 강인함을, 그리고 유연함을 못나게도 질투하던 시절.
그래서 유독 너와 같은 위치에 서고 싶었는지 몰라. 주변의 동반자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와중, 너만은 굳건했지. 네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인정받으면 나 또한 그리 강인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그리 믿었나 보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 나는 바뀌었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제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더없이 인간적이기에 불굴했던 어린 시절은 더이상 없어. 하지만 나의 벗이여, 세월이 내게 안겨준 것도 있었으니—그것은 노력과 발버둥에 값을 매길 줄 아는 깨달음이라.
아마 나는 영원히 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테야. 영원히 나약하고, 어리숙하고, 애 같겠지. 그러나 나는 도착하지 못할 것을 앎에도 있는 힘껏 내달릴 테고, 또한 그것을 보람차게 여길 테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네가 내게 발걸음을 되짚는 법을 알려주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이 달음박질을 시작해 보려 해.
그럼에도 우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 비가역성이란 실존하고, 어쩌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영 서로의 삶에 교차선 없이 평행을 달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 결심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합리적인 이유나 신중한 예측이 아닌 그저 철없는 다짐이지만 분명히 그리 자신해.
그러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달려 나갈 나를 걱정하는 대신 너 또한 온 마음을 다해 행복했으면 한다고.
그러다 가끔, 아주 가끔 내 생각이 난다면, 누군가에게 기대고자 한다면, 내게 찾아와 달라고.
처음 말을 편하게 했던 마레 세레니타티스에서의 어느 날처럼 다시 네게 손을 뻗고 싶어. 비록 세월이 지나고 내 손 안에는 상처투성이 우정만이 상자의 밑바닥 희망처럼 남았지만, 이별이 두려워 만남을 저어할 필요는 없잖아. 우리가 서로의 행복을 빌며 헤어진 적 있단 것은 반대로 우리가 기꺼이 새 만남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니 잊지 마, 노아.
나는 그 언덕 위에 있어.
알레이 이스트 에버그린
그러니까, 재수 없기로는 으뜸을 달릴 날이었다.
가뜩이나 인적이 드문 가도街道에 비가 잔뜩 내리면 무엇이 탄생하는 줄 아나? 여관 주인 토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26 년 겅력의 여관 주인이—그러니까 그 스스로가—답하기를,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것이라고. 바로 진창길 말이다.
진창길은 마차의 바퀴를 망가뜨리고, 말이 힘차게 박찰 지지대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가 제일 싫어하는 바로 그 진창길이 여관 주변으로 몇 마일 펼쳐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엿새면 충분했다. 엿새, 단 엿새만에 그의 여관은 새 손님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진창길 덕에 묶인 손님도 꽤 있다마는, 애당초 교통 자체가 꽉 막힌 게 문제였다. 토미는 여관에 남은 식량과 생필품을 가늠해 보다가 땅이 꺼질 기세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날씨부터 해결되어야 할 텐데. 여관 주인의 서글픈 눈이 창문 밖을 향한다. 비는 낙하가 두렵지 않다는 듯 무섭게 쏟아지고, 바람은 흉포한 기세로 몰아쳤다. 그야말로 폭풍이었다.
그리고, 콰르릉!
느닷없이 내리치는 낙뢰에 무거운 몸이 의자 위를 붕 떴다 안착한다. 이제는 하다하다 벼락까지 떨어지는군. 그가 깜짝 놀라 떨어뜨린 물건들을 정리하려던 차, 자그마한 진열장 한켠에 놓여 있던 낡아빠진 편지에 눈이 닿는다.
“어, 어어?”
분명 편지에 찍힌 인장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손님. 이 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간직하고 계시다가, 제가 일러주는 사람에게 전해주시면 돼요.”
“예에, 예. 그런데 그 조건이란 게 무엇이었죠?”
여자는 망토의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으나, 이미 잔뜩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는 이곳저곳 삐져나온 지 오래였다. ‘뭐, 저 정도로 눈에 띄는 머리색이면 숨길 만도 하지.’ 갓 여관을 물려받은 토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며 곧 이어질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팔과 같은 우뢰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자유로운 늑대처럼 풀숲을 내달리며, 편지에 찍힌 인장이 빛을 발할 때에.”
“검은 머리의 모험가가 이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거든, 그에게 전해주세요.”
참으로 터무니없는 조건이다. ‘대관절 예언자라도 되쇼?’ 젊었던 토미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꿀꺽 삼켰다. 첫째로 이 당부를 건네는 여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던 탓이며, 둘째로는 그가 건넨 돈이 여관을 개증축하기에 모자람 없었기 때문이다.
‘편지 하나 맡아주는 데에 이 돈이면 수지 맞고도 남지.’ 토미는 다시 생각했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 뒤 편지를 받아들었다. 뒤를 돌아 여관의 문을 나서며 여인이 다시금 당부했다.
“잊지 마세요. 폭풍이 부는 날, 검은 머리의 모험가예요.”
인장은 분명 빛나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인장은 전구도, 전선도 없음에도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이 거의 사장된 시대, 평범한 여관 주인이었던 토미는 입을 딱 벌린 채 헐레벌떡 편지를 진열장에서 꺼냈고,
다시 나팔과 같은 천둥이 울리면, 여관의 문이 열린다.
푹 젖은 망토의 모자를 뒤로 넘겨낸 검은 머리의 모험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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