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대여 끝없이 내달릴지어다

산들바람의 애가哀歌

나는 사람이 일평생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기묘한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제 마법은 언어가 아닌 체계가 되었으며,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고, 장성과 군주가 영토를 다스리는 시대에 미지未知가 어디 있겠는가? 여전히 필부들은 영웅과 서사시에 대해 떠드나 무릇 세계는 정해진 이치로 돌아가는 법이거늘, 그네들이 믿는 전설이란 시대를 거쳐 부풀려진 이야기일 뿐이라 믿었다.


그렇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신화를 연구하고 있었다.


해일과 같이 물을 일으킬 줄 알았다던 기사도, 불타오르는 검으로 붉은 겨울을 재현했다던 검사도, 웅대한 천둥과 벼락을 내릴 줄 알았다던 모험가도, 마력이 담긴 반딧불로 하여금 장송했다던 용도, 천벌과 같이 하늘에서 거대한 낙뢰를 내리쳤다던 용도, 영웅도, 마계도, 아, 그리고 그 위대한 세계수…….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밝혀내야 할 진실이며, 부풀려진 허구였다.


한때 찬란했다 스러진 제국 그 이전에 존재한 시대. 잊히고, 곧이어 한번 더 잊힌 시대. 그러나 그들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는 별개로—작금 남아 있는 미지가 있다면 그들에 대한 것일 것이므로, 나는 신화의 시대에 학술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명실상부 과거형이다.


이는 내가 겪었던 기묘한 일 탓이다. 나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화의 존재를, 더 나아가 영웅과 용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학자의 본분을 발휘하여 나의 경험을 과장도 축소도 없이 기록하려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따스한 동풍이 부는 날이었다…….”








따스한 동풍이 부는 날이었다.


마른 건초의 냄새가 코끝을 위안했으나, 형편없는 마부의 실력은 가뜩이나 살찐 학자의 엉덩이를 가혹하게 괴롭혔다. 그러나 덜컹거리는 마차에 고통받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불쌍한 길동무 여럿 역시 표정에 무료함과 지긋지긋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워이, 워!”


문득 마부가 말을 거칠게 멈춰세웠다. 예고 없이 멈춰세워진 마차에 여러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필시 새 객을 찾았으리라. 이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은 이 방향으로 향하는 마차가 자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길가의 촌부를 상냥한 낯으로 꾀어 마차에 태우고, 이윽고 그의 엉덩이와 위장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만행 따위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 나는 고개를 돌려 마부의 새 희생양을 바라보았다.


“이 마차, 에버그린 영지 쪽으로 향하는 것이 맞습니까?”


“에버그린이요?”


망토의 모자로 얼굴을 가린 모험가였다. 키가 컸고, 목소리로 가늠하자면 젊은 청년에 가까웠으나 나는 문득 그에게서 숨길 수 없는 연륜이 묻어나온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젊은 현자라니,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나는 내가 거쳐왔던 미드윈터 영지의 수많은 자칭 현자들을 떠올리며 어리석은 짐작을 떨어냈다.


물론 그의 분위기를 제하고도 모험가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가 우리의 방향을 칭하는 방법 때문이었다.


“에버그린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소. 이 마차는 그린필드 영지로 향하오. 뭐, 이름은 비슷한데…….”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옛 지명일 겁니다. 에버그린 영지 쪽을 찾으신다면 맞게 오셨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제하고 그 이름을 아는 자를 만날 줄은 몰랐으므로, 기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부가 내 난입에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까딱였다.


“저기 저 샌님이 그렇다는군. 그래서 탈 거요?”


“하하…….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신세 좀 지겠습니다.”


모험가는 마차에 오르며 동전 하나를 마부에게 튕겨 건넸고, 마부는 흡족한 얼굴로 그의 탑승을 승인했다. 나는 그와 서둘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마차의 문 쪽으로 바투 몸을 붙여 앉았으나, 내가 원하는 대로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운이 좋지 않았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승객들이 새로운 이의 등장에 각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에버그린이라니, 그런 지명은 처음 들어보는데?”


“이봐, 어디에서 왔는감? 모험가지? 달리 찾는 것이라도 있수?”


“요즘 세상에 모험가라니! 나는 그런 녀석들은 죄 시정잡배인 줄 알았는데 말야.”


망토 아래로 드러난 모험가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나는 가만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목 빠지게 기다리던 말은 내심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그저 지나가던 모험갑니다. 친구가 그곳에 살았거든요.”


제기랄, 이번에도 글러먹었군. 보나마나 그저 그런 모험가겠지. 요행으로 괜찮은 무기 몇을 얻어 뻐기는 것이 일상인 모험가 말이다. 사실 불량배에 더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협잡꾼이나, 사기꾼일 수도 있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면, 수면은 멀미에서 도망치기에 썩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어떤 친구? 그 영지 일이라면 저기 샌님이 잘 알 텐데. 찾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우.”


“아, 그게……,”


아까 내가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들었을 때 마부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난데없이 나를 포함하는 대화의 내용에 눈살을 찌푸리며 답하려던 무렵, 모험가가 대신 내뱉은 말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적기사라고 아십니까?”


무너진 라 제국에 맹세코, 친구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에 나올 답은 아니었다.


“적기사? 아, 그 신화에 나오는? 하하하! 젊은 청년이 참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구만.”


“뭐, 그런 녀석들은 몇 있었지. 자신이 적기사의 후손이라나? 그런데 저기 저, 도련님이 더 잘 알지 않수? 뭐더라, 적기사는—”


“적기사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니까요. 적법한 후손은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저 모험가도 분명 불쌍한 사기꾼의 피해자거나, 혹은 그 자신이 사기꾼일 텐데—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학자의 직감이었다. 그는 무언가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겨냥한 것이 분명한 마부의 질문에 기꺼이 답하면서도 그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무례한 시선이었으나, 그 집요함에 보상하듯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보다는 저 학자님께서 적기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군요. 혹 그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제가 찾고 있는 사람도 그와 관련된 사람이거든요. 분명 학자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등장할 겁니다.”


도대체 내가 어떤 말을 할 줄 알고 저렇게 확신하는 것이지? 나는 스스로의 직감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나, 어느새 내게로 꽂힌 기대 섞인 시선에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저 두건 아래로 능글맞은 미소만 띄운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정말 그가 찾는 사람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되지 않는 기대 속에, 나는 그렇게 적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청렴한 사람이었다. 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평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상징하는 또다른 미덕이 있다고 믿었다. 신화 연구에 10 년을 넘게 매달린 지금, 어린 학자가 섣불리나마 답을 내리자면 그것은 분명 자유와 다정이었다.


그는 드물게도 영주 일족 출신 용기사였는데, 기실 그 기원을 조금 더 따지자면 시골 촌락 출신의 소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로—학계에서는 그가 에버그린 영주의 적법한 후계자 중 하나였다는 설이 주류다.


물론 나는 아니었다. 학계의 정설에 정면으로 반박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그를 수식하는 이명 중 하나가 푸른들판의 목동이라는 점이요, 둘째는 그가 (적법한 후계자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영주 승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고, 셋째는 마계와의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선택한 삶이 한 기사 학교의 교장이었다는 점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는 이미 학계 내에서도 수없이 공방이 오간 내용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제하겠다. 나는 세번째 이유가 특히나 흥미로웠다.


보통 영주의 둘째로 태어난 자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는 최초의 용기사 중 하나였으므로 분명 다른 영주들의 둘째와는 달랐겠다마는, 전쟁이 끝난 이후 조용히 잠적하거나, 모험을 떠났다는 다른 용기사와 달리 구태여 에버그린 영지에 남아 학교를 차렸다는 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평생을 에버그린이라는 땅에 헌납하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이유를 짐작해 보겠다.


이건 어떨까?: 시골에서 갓 상경했던 소녀는 용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지난히 괴롭히던 길고 긴 전쟁이 끝나자, 그에게 처음 넓은 세상을 알려준 에버그린 일족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이 자란 영지에 학교를 세웠으며, 그로 인해 에버그린은 이사나 로르켈의 정복 전쟁 중에도 복속되지 않고 불완전하게나마 자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라면 그가 로르켈의 드넓은 중심 영지도 아닌, 외따로 떨어진 에버그린 영지에 학교를 차린 이유가 납득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즈음,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내가 학계의 정설을 운운할 즈음 각자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상하던 바였다. 나는 실패한 학자다. 그 누가 인정받지 못하는 학자의 말을 주의깊게 듣겠는가?


그러나 그 모험가! 그래, 그 모험가만큼은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 저 웃음은 나를 비웃는 냉소일까, 혹은 응원하고자 하는 미소일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저치 탓이었으나, 그는 내가 열심히 떠들던 중 그가 찾는 사람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덧붙였다.


“그, 예. 저도 압니다. 이미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저 흥미로워 웃었던 것뿐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가 있고요.”


“예?”


나는 멍청한 소리로 되물었다. 나름 길고 긴 연구와 조사에 기반하여 세운 학설이라지만, 어린 시골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준 사람은 내 삶에 몹시도 드물었다. 나를 이끌어주셨던 지도교수님도, 나의 동료 학자도 아닌 이 낡아빠진 마차에 탄 낯선 모험가의 인정이라니! 그러나 나는 모든 이야기의 이유—그가 찾는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마저 잊을 정도로 그 사실이 몹시도 기꺼웠다.


“말씀드렸다시피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물론 저도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요……. 계속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학자님의 의견이 궁금하군요.”


그의 목소리는 매끄러웠고 말은 거침없었다. 아, 나도 저 정도의 화술만 있었다면! 쓸데없이 혀에 기름칠을 한 듯 말재주가 좋은 사람은 경계하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으나, 어느새 나는 그에게 빠져들어 정신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적기사의 삶으로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적기사가 자신의 학교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사나 로르켈의 정복 전쟁, 뒤이어 제국의 내전이 발발했다. (이 글에서 제국이란 고대의 라 제국이 아닌, 신화 시대의 제국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학교가 침략받은 적은 없다. 월룬타스 기사학교는 일종의 성역이었다. 단순히 그가 지닌 무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상징이었다. 기사도와 정의의 상징. 그의 창은 오직 심판할 대상만을 가리키나, 그가 한번 창을 들었을 때 그의 적이 파멸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적기사는 자신의 용, 그리고 여타 다른 용기사와 함께 학교를 지켜냈다. 그러나 그가 키워낸 기사가 사람과 사람간의 전쟁에서 스러질 때마다 적기사는 절망했다. 지쳐갔고, 꺾여갔다.


음유시인은 붉은창의 바람이란 끊이지 않는 실바람이요, 꺾이지 않는 맞바람이라 논한다. 그러나 맹렬하게 몰아치는 폭풍마저 자기 자신을 이루는 바람줄기를 잃는다면 그 기세가 약해지기 마련. 아마 적기사가 마주했던 고난도 필시 그러한 것이리라. 그는 외압에 굴하지 않았다. 분명 그를 지치게 한 것은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던, 자신이 직접 키워낸 아이들을 빼앗아 가는 전쟁이었을 터.


결국 마레 세레니타티스의 바다는 말랐고 온세 요르툼의 산맥은 끊어졌다. 그렇다면 적기사의 고향이던 프라툼 아분단티아는 어땠는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새까맣게 불탔댔지. 고대가 스러지며 월룬타스 기사학교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적기사의 종적은 그곳에서 끊겼다. 혹자는 그가 용에게서 받은 축복으로 말미암아 여즉 살아 있다고도, 또다른 누군가는 세상에 실망한 그가 진작 삶을 포기하고는 그의 학교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학자님께서는 어느 쪽으로 생각하시는지?”


질문은 갑작스러웠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던 즈음, 모험가가 던진 난제에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분명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지켰던 시대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음, 저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험가님께서는 달리 생각하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애매모호한 답으로 질문을 마무리지었다. 학자답지 못했던 태도에 조금이나마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나 자신의 결론보다는 눈앞의 모험가가 내릴 추측이 더욱 궁금했다. 어느새 엉덩이의 통증을 잊을 정도로 나는 이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글쎄요, 저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금이라도 짐작가는 바가 있다면 편히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재촉하자 모험가는 조금 머뭇거린 뒤 입을 열었다. 문득 분 바람에 그의 망토 자락이 젖혀지고, 나는 그제야 그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가 감히 짐작해 보자면……, 적기사는—”


그렇게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숨죽여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꼭 이래야겠어?”


산들바람이 불었다. 부드러운 실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스친다. 각기 빛깔 다른 적발과 흑발은 춤추듯 바람에 어우러졌다가, 이윽고 사뿐히 각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괜찮아.”


그리고, 참으로 확고한 것이었다. 주근깨 얹힌 뺨이 동그랗게 올라가고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적기사는, 알레이 에버그린은 분명 웃고 있었다.


“마음을 정한 지는 제법 됐어.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그가 다시금 머뭇거린다. 말에 막힘이 있는 까닭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도, 두려움도 아닌 그저 눈앞의 상대를 향한 미안함이었다. 어쩌면 참으로 잔인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정말 고마웠어. 너는…, 최고의 친구야.”


이별의 종류란 참으로 다양하다마는, 사별이 유난히 고통스러운 이유를 꼽자면 그것일 것이다. 떠나간 자는 안식을 찾는다. 그러나 남는 자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저 그들을 기억하며, 영영 제 마음속에 품고,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자死者가 과거에 머무를 때 생자生子는 그들을 현재에 끌고 오는 고난을 오롯이 맡는 것이다…….


그러므로 붉은 머리칼의 용기사는 모험가를 단단히 껴안았다. 부채감과 안도감, 감사함이 모조리 담긴 포옹이다. 그리고는 읊조렸다.


“있잖아, 노아. 나를 항상 떠올릴 필요는 없어. 영원히 기억할 필요도 없지.”


“그것 참 퍽이나 안심되는 말이다.”


“하하! 그렇지? 그냥, 어느날 산들바람이 불거든……, 네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고 기억해주면 돼.”


그리고 다시 침묵. 그러나 길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의 모험가 또한 상대의 등에 손을 올리고는 할 말을 고르다가, 농담처럼 입을 열었다.


“당연한 말을 하는데, 나도 항상 너를 떠올릴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알고 있어.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야.”


“하지만 너는 분명 다시 없을 나의 친구니까.”


“평이 후한데?”


“사람 말 끝까지 들어. 그러니까……,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 폭풍이 칠 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바람 한 점이 나의 더위를 달랠 때……. 그때마다 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답은 없었다. 적기사는 모험가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였다. 그였다고 두렵지 아니한 것은 아닐 테요, 후회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 하물며 가장 소소한 선택에도 망설이는 것이 인간일진대 그라고 필멸자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모든 망설임을 몰아낼 정도로, 그의 벗의 선고는 과분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적기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니 너는 모든 마음을 바람에 날려보내고 후련히 떠나. 그래야 맞바람을 타고 나를 보러올 수 있지 않겠냐.”


“답지않게 상냥한 소리를 하기는.”


포옹은 풀린다.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녹색 눈이 적색 눈을 마주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의 끝을 맞으려면 여즉 긴 시간이 남았으므로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은 아닐 것이겠으나, 두 용기사의 만남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꺼이 인사를 건넸다.


“잊지 마, 노아.”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푸른들판의 목동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는 둘이 같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벗이었던 용과 함께 어느 숲에 평안히 잠들었다지요. 이 정도가 제가 주워들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역시! 그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화술이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가, 그가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마 내 주위에 앉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한순간 숨까지 멈춘 채 몰입해 있던 사람들이 다시 왁자지껄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잡담에는 맹세코 그 어떤 관심도 둘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수없는 질문은 오직 눈앞의 모험가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너무 섣부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두고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점잖은 찬사를 보냈다.


“아주……, 아주 훌륭한 서사시군요! 저 또한 수없는 고서와 현판을 뒤졌습니다마는, 이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뭐, 가끔은 책과 석판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몹시 경탄스럽습니다. 신화가 존재하던 시대의 음유시인들이 이랬을까요?”


“과찬입니다. 그나저나 학자님께서는 역시 낙원의 시대가 많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그야 라 제국에서도 고대로 여겼다던 시절 아닙니까. 아직 밝혀진 것도 많이 없고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 이후 한참 동안 모험가는 말이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어야 어리숙한 책상물림으로 보이지 않을지, 그리고 어떤 질문을 해야 그가 아는 서사시를 더 들을 수 있을지 부단히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허를 찔린 것은 이번에도 나였다.


“아, 바람이 불어오는군요. 곧 폭풍이 몰아칠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말대로 상냥한 산들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러나 폭풍이라니? 이 지역의 기후를 잘 아는 나로서는 다소 낯선 말이었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그린필드 영지는 온화한 기후가 특징인 곳으로 태풍이나 장마의 영향을 받은 적이 드물 정도였다. 나는 그의 느닷없는 말이 대화 주제를 돌리려는 무언의 권유라 해석하고, 가장 묻고 싶었으나 체면 때문에 가장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네?”


“아니, 보통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혹시 지어내셨다 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창작 설화 또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하하, 그럴 리가요.”


그가 웃었다. 다시금 바람이 불자, 나는 그의 두건 아래로 붉게 빛나는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감이 척추를 훑고 내려갔다. 그의 정체에 대한 어떤 직감.


“제 친구였거든요.”


그의 놀라운 말에 채 반응할 새도 없이, 모험가가 방금 전 흘렸던 말처럼 저 먼 곳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번쩍 내리꽂힌 낙뢰에 이어 제 몸을 울리는 천둥에 말이 깜짝 놀라 길게 울었고, 덕분에 마차는 크게 흔들렸다. 이곳저곳에서 신음과 불만 소리가 들렸다. 웬 번개냐는 토박이들의 놀람 섞인 외침은 덤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낯선 이야기를 들려준 낯선 모험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것이 내가 겪은 기묘한 일의 전말이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고 오직 진리만을 좇는 한 사람의 학자로서 그가 노아 알프레다, 최초의 용기사 중 하나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며 어린아이의 공상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진정 천둥과 낙뢰를 몰고 다니는 이가 아니었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가 그의 입으로 직접 내뱉은 이 사실은 후대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의 영광이 아닌 후대 지식인들의 번영을 위해 기꺼이 이 이야기를 기록한다.


적기사의 서사시는 그저 허황된 전설이 아니었으며,


신화와 낙원의 시대는 분명 존재하였고,


그러므로 우리의 뺨을 스치는 이 바람은 한때 어느 목동의 것이었노라.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 앨빈 헤레이스 그린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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