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여자는 문득 눈을 떴다.
서늘한 밤이었다. 그를 깨운 것은 창문 밖에서 몰아치는 빗방울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간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폭풍우였다.
밤이 긴 때의 서막이 으레 그랬듯 새벽의 기온은 낮았다. 코로 들이마신 냉기 서린 공기에 마른기침을 몇 번 터뜨린 여자가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매서운 바람과 부대끼며 덜컹거렸다.
마른 갈대가 술렁인다. 꼭 그만큼 여자의 꿈자리도 뒤숭숭했던 터. 좁은 문틈에 기어코 몸을 비집고 들어온 칼바람이 뺨을 스쳤고, 그는 이윽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폭풍이 친다. 거침없이 내려꽂히는 낙뢰와 쉼없이 내달리는 바람이여……. 감히 저것을 그와 그의 벗에 빗대던 때가 있다. 여자는 홀린 듯 서늘한 창에 손을 대고 폭풍을 바라보았다. 이미 놓쳐버린 연을 어떻게든 되찾으려는 아이처럼.
아,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모험가는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므로. 사고는 자연스레 그의 잠자리를 어지럽힌 것으로 흘러간다. 이별, 상실, 그리고 혹은……,
나는 오랜 시간 마녀로 불렸다.
대부분의 때에 그것은 나를 어찌 칭할지 모르는 무지한 자의 호기심 당긴 이름이었고, 간혹 경외와 맹신을 담은 호칭이었으며, 드물게는 멸칭이었다.
그보다 더 이전의 나는 적기사였지.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붉은창이자, 이제는 흐려진 유년에는 상록의 보석이었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원을 찾자면 푸른들판의 목동. 이 수많은 이름은 나를 옭아매었으며 나를 나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저 알레이었던 시간은 가장 짧은 찰나였다.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칭할 수 있다.
내가 더없이 사랑해 마지않던 이마저 나를 다른 이름으로 칭하는 와중 너는 나를 알레이, 하고 불렀고, 나는 너를 노아, 하고 불렀지. 그 긴 시간 동안 용케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잊지 않았으므로 너는 내게 더없는 벗이었다. 우리가 함께하던 두 지기를 나란히 떠나보낸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사실은 네가 내게 죽음을 이야기할 때 감히 두렵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이별이란 게 그렇잖아. 영원한 이별이란 게 그렇지. 설령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대도 내게는 모든 헤어짐이 그랬다. 두렵고,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 아주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상실마저 그러했다.
그러므로 너를 내 삶에서 보내줘야 한다는 사실은 그 평범한 이별보다 더 고통스러울지언정 덜할 수 없었다. 들어 봐, 길고도 긴 삶 내내 우리는 수없이 부딪히고 헤어짐을 반복했지만 그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이 아니었어. 나는 내가 네게 적었던 편지를 기억한다. 그곳에 적은 비가역성에 대한 역설……. 단언컨대 죽음이야말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들지 않은 것은, 첫째로 네게도 무언가가 되고자 했던 나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진 탓이고, 둘째로 이전과는 달리 너의 바람이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험은 숨만 붙어 있다면 언제고 어디고 향할 수 있지만 자유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지. 네가 나를 존중해준 만큼 나도 너를 존중해줄 차례였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외로울 줄은 몰랐다. 이토록 사무칠 줄은 몰랐다. 내가 가진 수많은 이름과 네가 가진 수많은 이름만큼 우리의 시간이 쌓이고 쌓였던 탓일까. 그도 아니라면 이 길고도 길었던 삶의 마지막 몇 년, 내가 그토록 바랐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던 탓일까. 충분히 준비되고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가슴이 내도록 시린 이유를 알 수 없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이 마음의 이유를 알 길 없다…….
내리치는 낙뢰에 뒤늦은 천둥이 울린다. 바람은 응답하듯 긴 곡성을 흘렸다.
아니, 정말 알지 못하는가?
사실 알고 있었어. 내가 너에게 갖는 감정은 감히 친애로 명명된다. 그것은 동료애와 전우애와 가족애와 우정이 모두 뒤섞여서, 엉망진창으로 잔뜩 엉킨 마음이었다. 빈말로라도 너와 나의 관계가 그저 아름다웠다거나 순탄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겠지만, 너와 싸우고 부딪히고 절망하고 원망하며 미워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너는 내게 소중한 친구로 남았다.
몇 세기 전이었다면 다시 울고 네게 매달렸겠지. 빌고, 사정하고,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아. 이별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상실은 내게 맹렬한 폭풍처럼 밀려온다. 자라나는 나무의 가지를 꺾는 그 바람이 무자비하듯 비탄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는 안다. 진정 용기 있는 자란 두려워 않는 자가 아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듯이, 진정 강인한 자란 아파하지 않는 자가 아닌 아픔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이일 테다. 그래, 분명 헤어짐은 괴롭다. 그러나 나는 그에 따라오는 재회를 안다.
오늘은 가지만 새로운 내일이 다가온다. 나의 가장 순수했던 봄은 열아홉 그 시절에 끝을 내렸으나 너와의 화해 이후 다시금 새로운 봄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다면 재회가 있다. 여름에 가 닿고자 했던 용과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던 선장이 내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내도록 평행선이었고, 이제 너는 내게서 멀어질 테지. 그러나 사람의 삶이 어디 올곧은 직선이겠는가. 부딪히고, 꺾이고, 다시 일어나 나아가며 우리는 수없이 굽이진 생을 살아가지 않는가.
그러므로 너의 선 또한 다시금 내 것에 맞닿을 것이다. 설령 네가 말했던 방식으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이 세상에도 언젠가 끝이 다가오거든 비로소 네 곁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재회를 아므로, 이별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감히 바란다. 나의 소원은 단 한번도 너의 소원 위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네 진정한 소망이 이제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기쁘고도 슬플 뿐…….
그래, 기탄없이 내달리는 우뢰처럼 나는 감히 바란다. 네가 진정 자유로워졌기를, 그리고 언젠가의 우리가 다시금 웃으며 만날 수 있기를.
비록 우리는 몹시 다르고 엇갈린 친구였을지라도, 내가 너를 아꼈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므로…….
바람이 나무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나뭇잎이 몸을 맞부딪히며 길게 울었고, 여자는 커튼을 쥔 채 오래도록 폭풍을 바라보았다.
긴 겨울이 올 것이다. 이곳의 동장군은 제법 매서웠으므로 그는 내일 마련해야 할 장작의 양과 보수해야 할 낡은 지붕을 떠올렸다.
외로운가? 스스로 묻는다. 서늘한 한기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떤 여자는 다시금 창 밖을 바라본다. 외롭지. 외롭고말고.
하지만 괜찮아. 어떤 사람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잔존하거든.
그리고,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올 테니까.
나는 정말 괜찮아,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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