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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차 / 2023년 작

소마 by 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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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도 없지.

아네타는 슬며시 눈을 뜨고 묶인 양 손목을 비벼 보다가 힘을 뺐다. 괜한 시도다. 짐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거친 밧줄에 쓸려 피부가 까지고 진물이 흘렀다. 앞칸에서 건너오는 조용한 중얼거림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발굽이 축축한 땅을 밟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렸다. 짓이긴 나뭇잎과 흙 냄새, 사향 냄새가 나는 게, 적어도 숲길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라는 것도.

두꺼운 천이 짐칸 위를 덮고 있어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조금의 빛도 투과되지 않는 걸 보니 태양이 환히 뜬 시간은 아니었다. 앞칸에서 스며오는 미약한 불빛 덕에 천이 주홍색이란 것쯤은 보였다. 마차 끄는 소리 외에, 고요 속에 집중하다 보면 희미한 귀뚜라미 소리와 부엉이 울음 같은 것이 들렸다. 짐칸 밖은 서늘할 것이 분명한데, 좁디 좁은 곳에 몸을 구기고 있자니 공기가 더웠다. 입에 문 재갈이 자꾸만 더 젖어서 불편했다. 슬슬 온몸이 뻐근했다.

쿵.

마차가 멈췄다.

느닷없는 정거 탓에 등이 차가운 나무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말이 긴장한 듯 땅을 긁으며 거친 숨을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어수선하게 나직한 속삭임이 오갔다. 점차 빨라지며 질겁하는 소리가 더해졌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아네타는 가만히 무릎을 감싸안은 채로 바깥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저 자들, 공포에 질렸다. 아네타가 확신했다.

‘나를 납치해서 짐칸에 실어 둔 채로.’

납치범들에게 수송 당하고 있다. 깨달은 지는 오래였다. 두려움에 질식할 법도 한데, 이성이 잘 벼린 듯 명료했다. 이 답답한 나무 벽 너머 후련한 호흡을 향한 갈망만 제외한다면. 와글거리던 놈들의 소란이 일순 멎었다.

“거기 누구냐?”

우위라도 점하려는 듯, 한 놈이 반 짖듯이 물었다.

예고도 없이, 고함,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 틀림 없는 전투의 소리. 마차가 곧 뒤집힐 듯 흔들렸다. 잠시 후에는 정적. 다시 조용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이 휙, 요란한 동작에 펄럭이며 벗겨져 나가고, 밤 공기와 어둠이 쏟아졌다. 피부에 와닿는 사늘함에 아네타는 고개를 바짝 들었다. 폐로 곧장 들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정신을 깨웠다. 관짝 뜯고 일어난 시체라도 된 기분이라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지만 우선은 경계다. 적색 군복을 입은 청년이 천 끝자락을 움켜쥔 채 짐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열아홉 된 어린 녀석으로 블라트니 가의 사병이었다. 공작 각하를 따라 칼질이나 하러 온 숲 속에서 이런 행운 아닌 행운을 맞이할 줄이야 몰랐을 뿐더러 난생 그런 미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잠시 눈이 멀었다.

청회색 눈동자는 언뜻 흐렸으나, 두어 번 깜빡이자 구름 개듯 맑아졌다. 또렷하게 응시하는 시선에 병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 번거롭다는 듯 짜증이 배어 건들거리던 몸이 급히 긴장했다. 어깨를 펴고 제국의 훌륭한 재원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격식 차려 봤건만 어설프게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제 의무를 문득 깨닫고는 목소리 높여 외쳤다.

“…… 여자입니다. 묶여 있습니다.”

“끌어내려.”

화려한 제복을 입은 남자가 백마에 앉아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신경하게 말했다. 예, 하고 잠시 망설이던 병사는 조심스럽게 아네타를 감싸 들었다. 불온 세력의 뒤를 쫓다 얻은 포로가 아니라 어느 귀한 가문의 숙녀라도 모시듯이.

병사의 팔이 떨렸다. 감히 눈으로 재차 훑지도 못하고, 입 꾹 다문 채 여자를 옮겼다. 그 전에 재갈부터 빼냈고. 보잘것없는 옷에 흙밭에 한 번 구른 꼴을 하고도 여자는 어딘가 고상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것이 이 산란 속에서도 구겨짐 없이 일자로 곧게 뻗어 얄따란 눈썹 탓인지, 야단스러운 만상 담을 일은 없다는 듯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 탓인지, 횃불에 번뜩이는 창백한 직선의 뺨 탓인지는 알 길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죽은 공작 부인께서 그렇게 아름다웠다는데. 과연 이 여자를 그 분께 비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분을 이 여자에게 비할 수 있을까. 구태여 그 분을 떠올린 까닭은, 전해 들은 묘사가 어쩐지 눈 앞의 여자와 겹쳐 보인 탓이다.

아네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횃불을 치켜 든 병사들이 사방에서 바삭거리며 나뭇조각을 밟고 돌아다녔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치들은 선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젊은 병사가 짐짝에서 튀어나온 포로를 모시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반경 삼 메르 안에 있는 자 중 움직이는 건 그녀를 옮기는 병사와, 백마에 탄 남자 뿐이다.

남자에겐 권위가 있다. 견장이며 훈장을 잔뜩 달고, 말에서 내릴 생각도 않은 채 칼끝으로 죽은 자의 옷을 뒤적였다. 낙엽을 적시는 피웅덩이와 서슬 퍼런 대검을 보고 바람에 섞여 훅 끼치던 것이 혈향이라는 걸 깨닫자, 아네타는 우습게도 이제야 머리가 어질했다.

빤한 시선을 느꼈는지 병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넌지시 속삭였다. 공작 각하십니다. 그걸로 부족하다 여겼는지 블라제크 가문의 그 분이시라고 친절히 덧붙여 준 탓에 제 아무리 세상 일에 어두운 촌뜨기라도, 남자가 눈 바로 뜨고 보는 것조차 외람될 분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야 로바츠코의 기둥이 아닌가.

“데려와.”

공작이 바닥을 가득 메운 송장을 피해 검으로 빈 곳을 툭툭 치며 말했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터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병사의 부축을 받아가며 겨우 다가갔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공작은 시신을 모욕하듯 칼로 쑤셔 헤집어 놓던 짓을 멈추고 부관에게 손짓하며 물었다.

“할 말 없나?”

“감사합니다, 각하.”

잠시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아네타는 우선 떠오른 말을 뱉었다. 공작은 여전히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시신의 품에서 꺼낸 것을 공작에게 건넨 부관이 건성으로 이쪽을 흘긋 보았다가, 유령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네타는 꺼림칙해 미간을 좁혔다. 부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내가 찾는 건 감사가 아니라 답이다. 납치인가?”

“예.”

공작은 주먹만한 놋쇠 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높여 잡아도 서른이 안 될 법한 남자로, 풍채가 당당하고 우아하다. 얼굴 주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황금빛 머리칼과 정갈한 제복이 어디 동화나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기사의 전형이다.

한편 부관은 아네타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입을 뻐끔거린다. 이제는 거의 파랗게 질려 간다.

“그들이 누군지, 왜 널 납치했는지 아나?”

“모릅니다.”

공작이 도로 가져가라는 듯 패 든 손을 부관 쪽으로 향했다가, 재깍 집어가지 않자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멍하니 서 있던 부관은 공작의 시선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며 패를 챙겼다. 질문에 대한 답은 기대도 않았다는 듯 동요 없던 공작이 농담조로 느릿하게 답했다.

“…… 하지만 우리에게 공통의 적이 있다는 건 확실하군.”

그제야 공작은 몸을 돌렸다.

권태와 성가심 깃든 그 낯이, 돌연 무너지다가, 일그러지다가, 호소하듯 입을 벌렸다가, 눈꺼풀이 떨렸다가, 찰나 동안 얼굴의 근육이 수백 번을 요동했다. 그 속에 꽉꽉 눌린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이 보여서, 아네타는 어쩐지 질려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즈덴카.”

공작의 한 마디가 침묵을 깨뜨렸다. 뚝 잘라 말하던 어투가 온데간데없고 목소리는 균열 간 얼음처럼 부서졌다. 즈덴카? 여자 이름이다. 그리고 모르는 이름이다.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아네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동안 좀 전부터 귀신 본 몰골을 하고 있던 부관은 그 이름을 듣더니 오히려 화색이 돈다. 마치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듯.

훌쩍, 공작이 곧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명마는 놀라지도 않는지 얌전하다.

“즈덴카.”

주문처럼 되뇌는 목소리와 함께 공작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주저하지도 않는다. 발자국 소리마다 거대한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드리워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공작이 앞에 있다. 그 우뚝한 키가, 이글거리는 눈이 한 뼘 거리 두고 있다. 한숨이 떨리며 길게 늘어졌다.

공작이 그림처럼 웃었다.

“즈덴카.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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