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물, 그 고루한 애착에 대하여
로판에서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세 가지 유행 코드를 꼽으라면 언제나 답은 명확하다.
시한부물 / 육아물 / 폭군집착남이다.
이 스테디셀러 유행이 왜 싫은지는 천천히 이야기 하고 있지만 골조는 늘 그렇듯 하나 뿐이다. 전개에 있어 예상을 벗어나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큰 맥락은 그렇고, 그럼 왜 육아물이 그리도 싫은지를 자세히 다뤄보기에 앞서 육아물을 두 종류로 크게 분리해서 보고 있음을 밝혀두려 한다. 성인인 주인공이 육아를 하는 경우와 아동인 주인공이 육아 당하는 경우다.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건 주인공을 주변인물이 육아하는 '육아성장물'이다.
자, 가상의 육아성장물을 생각해보자. 이 육아물의 주인공은 회귀/빙의/환생 등으로 어려진 주인공이고 속 알맹이는 어른인데 다시 처음부터 인생을 누리게 된 걸로 치자. 인생 2회차의 목표는 살해당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기로 두고 유년기의 주인공은 절찬 학대를 받고 있는 설정으로 둬보자. 피를 이은 친지들은 남만도 못해서 다른 가정으로 입양을 통해 편입된다는 설정을 줘보기로 하자.
여기까지 주어진 설정값으로 여느 로판 독자라면 머릿속에서 자신이 이제껏 읽어온 육아물 로판 중 몇 개가 떠오르는가? 비슷한 것만 한 다발 떠오르고 초반 전개가 어떨지 머릿속에 다 그려질 것이다. 그럼 이게 왜 읽기 피곤하게 하는지 좀 더 따져보자.
1. 편애서사
이걸 애정에 대한 서사라고 봐줘야할지조차 의문이지만 일단 특정 캐릭터 편애를 너무 심하게 하는 서사라 편애서사라 이름 붙여봤다. 그래, 기실 소설에서 캐릭터에게 기대하는 도피의 기능이 있다보니 캐릭터가 사랑 받는 거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 서사다운 서사가 성립하기 마련이다.
일전에도 이야기한 바대로 사랑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이유를 명확히 언어화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그냥 좋다'는 말로 퉁쳐지곤 하는데 그렇게 치면 평범한 가정에서 남매가 있을 때 애정이 남아에게로 쏠리는 것 또한 그냥 남자애가 더 좋아서라는 말로 퉁쳐지는 것과 뭐가 다른가. 사회로부터 은연중에 주입받은 가부장적 권력에서 기인한 무의식적인 호오가 없다 할 수 있겠냐는 비판이 붙는 것처럼 작가는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캐릭터의 서사로 풀어야 한다. 그 캐릭터의 포지션이 사랑 받아야 할 포지션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특정 캐릭터에게 마냥 상냥해서는 서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런 건 서사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저 자신의 존재가 이유 없이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채워주는 자위다.
이런 사랑 받는 포지션의 캐릭터로만 채우는 서사는 어떠한 긴장감도 주지 않는다. 위기는 몇 페이지 넘어가면 어영부영 해결되어있고 갈등은 생기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런 시작부터 끝까지 어쨌거나 행복해질 거라는 약속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구태여 끝까지 보게 하려면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드는 서사의 흡인력이 있어야한다. 그 흡인력이 편애가 될 수 있는지 한번쯤 자문해보길 바란다.
2. 아동의 대상화와 주인공의 유아퇴행
많은 로판에서 그리는 어린이들은 현대의 어린이에게 요구되는 걸 그대로 받아들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적당히 말만 해도 상황이 정리될 정도로 귀찮지 않으며, 새끼동물들이 그러하듯 사랑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으나, 미숙하여 속알맹이가 고대로 읽혀서 무해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 말이다.
나열한데서 알 수 있듯 성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은 일종의 애완동물에 가까운 역할이다. 이러한 대상화로 인해 엄연히 보호받아야할 대상인 아동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론 주인공마저 아동에게 강요당하는 역할에 충실히 부응해 애정에 기반한 권력을 얻는다. 그게 절대 권력이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받는 건 권력이라고 말하길 대개의 작품은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마인드가 아동학대범죄자들의 마인드와 제법 유사하다는데서 오는 불쾌감은 어쩔 수가 없다. 아동학대를 하거나 아동학대를 방치하는 범죄자들이 하는 가장 흔한 변명이 '아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다. 마음에 안 드는 이유랄 건 대개 매우 보잘 것 없고 한심할 지경이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이가 학대당하는 건 이상하단 건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데, 아이가 자신의 희망사항이 그대로 구현된 이상적인 사랑의 증거처럼 다뤄지는 걸 보면 '정상가족'에의 집착이 아동학대를 유발한다는 해묵은 명제가 어설픈 낭만화로 인해 재확산된다고 판단할 근거가 된다.
또한 주인공의 지나친 유아화 또한 아동의 대상화에서 기인했다는 점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3세 이하의 나이로 설정했을 때 심각하다. 이걸 지적하긴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지적하면 좋을지 난감할 정도로 심각하다.
아이들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어른들의 생각보다 그 논리에 구애 받는다. 또 어린 아이라 하여 자신의 품위를 아예 안 지키는 건 아니다. 대개 아이들이 집중력이 짧은 건 성장 중인 육체에서 오는 한계다. 지금 여기서 굳이 인간의 정신은 생각보다 육체에 종속된다는 둥의 얘기는 않겠다. 그 쪽 방면으로 지나치게 파고들면 판타지가 가지는 특성을 무시하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다 자란 성인이 영아도 아니고 어린이의 몸에 들어간다고 해서 발달 시기에 맞지도 않는 혀 짧은 소리를 부러 내며 이쁜 게 작고 뽀작하니 귀여운 척 하는 게 대중에게 먹힌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걸까. 설마 도피의 일환으로 유아퇴행을 권장하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아니면 그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이해하고 싶지 않다.
3. 주인공이 어린이여야만 하는 이유의 부재
어린아이 캐릭터로 진행할 수 있는 서사의 폭은 굉장히 좁다. 기껏 해야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누군가를 죽음의 위기에 빠트리거나 무언가 대단한 모험이나 성취를 이뤄내기는 아무리 먼치킨 설정을 붙여도 설득력이나 독특한 매력을 가지기 어렵다. 아예 동화풍을 가미한다면 덜 거북스럽겠지만 현실은 마냥 그렇지도 않다.
그냥 어릴 때 사랑 받는 게 어린 주인공이 만들 수 있는 서사의 전부다.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사고력이 성인과 크게 차이나지 않으니 차라리 그 나이대로 설정한다면 서사를 진행하는데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데 어린 아이의 존재를 새끼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듯 귀여워하고 싶어하니 굳이 영유아인 상태로 서사를 진행시키고 그로 인해 갖은 잡음이 발생하는 거다.
차라리 아예 아동인권이 없는 시대라면 어떤 식이든 서사 진행이 가능할 텐데 보통 이런 세계관에선 정말 애매한 정도의 인권 인식이 있긴 있다. 이렇게까지 서사가 목적이 아닌 선택을 함으로써 무엇이 충족되는지는 작가도 독자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서사의 요소로 이 설정과 나이대는 불필요하다. 주인공이 어린이인 상태에서 꼭 서사를 진행하고 싶다면 격변하는 사회상이나 세계관 설정의 특이점을 미리 풀어서 밑밥이라도 깔아두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4. 어린 캐릭터의 불행을 포르노적인 시선으로 소비
이제껏 읽다가 수도 없이 내던진 육아물의 '어린이 파트의 도입부'는 아동학대 모음집이나 다름 없다. 기존 가족이 얼마나 주인공을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학대했는지, 그로 인해 주인공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이야기하나 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닌 타인의 불행을 관음적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경향이 심화하고 있다.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묘사하는 방법이 현실적이어선 안 된다. 폭력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고증을 살리거나 지나치게 자세한 묘사를 하거나 압도적 우위에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짓눌려지는 등의 무력감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는 아무리 허구의 인물이 피해자라 해도 그 자체로 폭력적 욕구를 채워주는 포르노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구역질 나는 얘기지만 이 또한 현실이다. 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만이 중요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아동에게 학대 당했다는 설정을 붙여야만 한다면 묘사를 피해가는 방법이야 얼마든 있다. 서술자의 시점을 비틀어 묘사에 대한 언급을 건너뛰거나 성장 후의 짧은 언급으로도 설정은 충분히 붙을 수 있고 주변 캐릭터의 대사를 거쳐 건조한 사실나열만으로도 어필할 수 있다. 굳이 학대 당하고 있는 아동 캐릭터의 입을 빌려 지나치게 폭력적인 학대 정황을 묘사함으로 충족되는 욕구는 그저 지배욕일 뿐이다.
이런 불필요한 묘사를 사용하는 건 가치관이 아직 잡히지 않은데다 실제 아동학대 피해를 봤어도 충분히 상처가 마르지 않았을 미성년 독자층에게 노출시켰을 때 심한 트라우마 트리거도 될 수 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을 보면 과연 가상의 컨텐츠가 모방의 위험이 없는지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다. 아니면 최소한 가치관이 잡히지 않은 아이들이 못 보도록 등급 조정이라도 하길 바란다.
5. 입양과 아동학대 트라우마 극복을 판타지화
아동학대 설정을 붙여놨으면서 입양 적응과정이나 성장과정에 있어 아동학대로 인한 후유증은 아주 가볍게 다뤄진다. 트라우마가 아주 간단하고 손 쉬운 방법, 즉 충분한 사랑을 가족구성원에게 받음으로 극복되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런 전개에서 뭘 읽어내길 의도한지조차 의문이다. 사랑 받으며 자라면 세상 모든 게 쉬워진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걸까.
애석하지만 학대 경험은 무조건적인 사랑만으로 마법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이러한 식의 아동학대 극복 서사는 외려 학대 받은 피해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물론 사랑을 충분히 받는 경험이 학대 받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아동학대를 당한 이유는 그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불만이 있는 걸 어쩔 수가 없으니 학대나 차별을 하기로 선택한 가족구성원의 잘못이고, 그럼에도 가족구성원에게서 사랑 받고 싶어함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며 어렸던 자신이 뭘 어찌 했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신과의 타협'이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인생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경험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발생했던 때와 유사한 일이 생기는 것만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패닉에 빠져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때문에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 대한 관리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케이스가 보호자가 양육권을 포기하거나 파양 당한 보육시설의 아이들이 보이는 이상증세다. 비교적 흔한 케이스로 충족되지 못한 애정이 식탐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제아무리 먹을 걸 충분히 주고 상냥한 말로 먹을 것은 충분히 있으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인지 시켜도 문제행동이 교정되는데 길게는 몇 년이 걸린다.
운 좋게 입양되어 새로운 가족들에게 사랑 받는다고 트라우마는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입양이 되거나 되지 않더라도 나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애착관계를 형성하는데 성공하거나 성장 후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과의 타협을 이뤄야지 해소된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게 그리 힘든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 독자가 웹소설에 바라는 게 도피긴 하다. 사람들이 도피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들인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없으며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권력자들 사이의 알력에 따라 이용 당하는 세상이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도피긴 하지만 작품성을 갖추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현실감각이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능가한다지만 최소한의 선으로 가지고 있어야하는 현실성이 부스러기만큼도 없는데다 냉정히 말해서 이 코드는 현실의 보호대상아동에게 유해하기까지 하다.
입양 얘기도 안 할 수가 없다. 2015년 기준으로 그 해 보호자의 부재나 학대로부터 보호가 필요한 18세 미만 아이(보호대상아동)의 수는 4503명이고 그 중 1057명이 입양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국내에 입양된 아이는 고작 683명이다. 즉, 보호자의 사망이나 보호자가 양육을 할 여건이 안 되거나 보호자가 학대해서 친권을 박탈당하는 등의 이유로 보호자가 부재하게 된 아이들 중 고작 23.4%만이 입양되고 그나마 국내에 입양되는 경우는 15.1% 정도란 얘기다.
이 숫자는 매년 점점 더 악화한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이 입양되는 아이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 2018년엔 378명만이 국내 입양 되었다. 2018년 보호대상아동의 수는 3918명이었다. 9.9%의 아이들만이 국내 입양됐다는 말이다.
현실의 아동이 국내 입양되는 건수도 해가 갈수록 낮아지는데 입양하고 나서 보니 제 뜻대로 안 된다고 파양하는 인면수심의 종자들이 2015년엔 대충 20% 정도 있었는데 아이가 파양당한 전적이 있으면 문제아로 찍혀서 다신 입양 안 된다는 문제 때문에 제도가 개선돼서 지금은 집계 안 되긴 하지만 뭐 그렇다. 이 숫자들을 보고 나서도 그리 가볍게 소비해도 괜찮냐고 묻고 싶다.
입양 자체를 가볍게 받아들이는 건 좋다. 같은 집에 살고 한 솥밥 먹으면 가족이라는 관념이 퍼지는 건 매우 바람직하다. 사람들이 입양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록 실제 입양하는 사람의 수도 늘 테다. 하지만 핏줄이 이어져야 가족이라는 관념이 엄연히 존재하여 여자 아이들이 그나마 입양되고, 입양되는 아이들의 수가 매년 줄어들기만 하는 건 분명히 인지하고 나서 생각해보자.
입양된 아이가 자신의 피가 이어진 '정상가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정녕 바람직한가? 입양 당사자에게조차 혈육만이 가족이라 강요하는 꼴이 아닌가. 부디 이 지점만은 입양 소재를 쓰기 전에 한 번 심사숙고해보길 바란다.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작품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6. 정형화된 캐릭터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롤플레잉 구도
육아물의 대부분에서 사랑의 정의를 읽을 수가 없다. 사랑 받기를 그렇게 원하면서 사랑이 뭔지는 작품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키워드 유행과 함께 심화된다 체감하고 있는데 캐릭터의 타입을 분류해놓고 캐릭터들의 서사와 심리가 얘는 이런 타입이니까 이렇게만 생각하고 이렇게만 행동할 것이라는 얄팍한 롤플레이에 가까워서 어떻게 봐도 재미가 없다. 클리셰가 먹히려면 작가의 기량이 뛰어나야하는데 심리 묘사로 사람을 매몰시키려면 기량도 기량이지만 그 방향성이 옳은지 고려하지 않는 점도 참담하게 만든다.
주인공도 어리고 언젠가 주인공과 맺어질 남자 주인공도 어리지만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교우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베이스는 흔하고 장르 불문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베이스다. 하지만 똑같이 어린 주인공이 동정으로 던진 얄팍한 애정에 남주인공은 집착해서 나이 먹으니 더 심화한다는 전개는 유독 이상하게 느껴진다.
건강하지 못한 애착관계야말로 인격 형성의 장애물인데 똑같이 어린 주인공이 학대당한 채 자란 남자 주인공을 두고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 유독 거리감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폭군/집착의 싹이 보였다느니 하는 예시로 나오는 표현 중 생명이 소중한 줄 잘 모른다거나 폭력성을 드러낸다거나 말수가 지나치게 없다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등등은 학대당한 아동들이 후유증으로 평범하게 보이는 증상이기도 하다.
아동기에 학대를 당했어도 이후에 애착관계 형성이 잘 되면 성장하고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어렸을 때부터 싹이 누랬다느니 얘가 자라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느니 식의 표현을 볼 때마다 좋아하는 지점이 캐릭터의 불우함으로 미쳐버린 성정인지 아니면 불우함 그 자체인지 아리송해진다. 이미 성인으로 삶을 한 번 살았던 주인공조차 아동이 겪는 불합리나 폭력을 아동의 시점에서 판단하지 않고 적당히 잘 해주면 자라서 고마워할 거라는 착각에 젖어있는데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면서도 애정을 권력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걸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게 정녕 매력적일 수 있단 말인가?
감정을 나누기 이전에 타자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걸로 압도적인 심리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이 롤플레잉에서 이젠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게 본능인만큼 사랑 하고 싶어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자신과 상대의 감정의 농도가 차이가 나는 사랑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지는 살면서 모두가 한번쯤 겪어보는 일이지 않는가.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특정 소재를 선택하는 게 문제라는 게 아니다. 소재를 선택했으면 그 소재를 충분히 연구할 필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눈을 돌리는 건 좋지만 눈을 돌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 가학적이여야할 필요는 없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나지 않는다면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신의 사랑에는 대단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잘못된 방향으로 간단히 내버리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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